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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공제 청년패스
피아트와 파시즘
기업은 국가를 어떻게 활용했는가 양장
장문석
지식의풍경 2009.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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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머리말
서론

1장 전후의 극복
전후 노동 운동의 봉쇄
전후 성장을 위한 투자 전략: 피아트와 안살도
“가장 미국적인 양식의 공장”

2장 파시즘과의 공존
파시즘의 대두와 토리노의 상황
파시즘의 집권과 아녤리의 ‘여당 성향’
“거대한 근대적 산업 유기체”
전략과 이념
구조와 문화

3장 체제와의 유착
체제의 정책과 피아트의 적응
체제의 간섭과 피아트의 자유
노동
언론
포드의 침공과 국내시장의 방어

4장 대공황의 극복
대공황의 도래와 아녤리의 해법
국내시장의 독점과 해외시장으로의 진출
피아트의 온정주의
피아트를 위한 특혜와 군수
산업재건기구
제국
제국의 기업들: 피아트와 몬테카티니

5장 체제와의 분리
대전 전야 피아트와 체제의 결렬?
전시 피아트와 체제의 점진적 분리
에필로그: “피아트의 반파시즘”

결론
주석
참고 문헌
찾아보기
(화보 별도)

저자 소개 1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 현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민족주의 길들이기』, 『피아트와 파시즘』, 『파시즘』, 『민족주의』, 『근대정신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국부의 조건』(2인 공저), 『자본주의 길들이기』 등이 있고, 역서로 『만들어진 전통』(2인 공역), 『제국의 지배』, 『래디컬 스페이스』, 『스페인 은의 세계사』, 『현대 유럽의 역사』, 『파시즘의 서곡, 단눈치오』,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법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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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09년 05월 29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363쪽 | 710g | 152*223*30mm
ISBN13
9788989047360

책 속으로

이탈리아에서 공부할 당시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토리노 국립 문서고에서 무솔리니의 친필 메모와 전보 원문을 발견했을 때, 루이지 에이나우디 재단 문서고에서 기름종이에 타이핑된 도청 기록 등을 찾아냈을 때 느낀 흥분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 필자로서는 이 책의 근간이 된 논문의 내용을 보증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논문이 필자가 흘린 땀의 결실이라는 점만큼은 감히 말할 수 있다. 비록 땀의 질이라는 게 있다면 더 할 말은 없지만, 최소한 땀의 양에 대해서는 자신 있는 셈이다. --- p.9

이렇게 보면, 전후 피아트 경영의 전략적 특징을 자동차 생산에 선택적으로 집중한 것 이외에도 군수에 배타적으로 의존하는 생산 체제에서 탈피한 것, 더 정확히 말하자면 피아트가 군수품 생산을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시장에만 집중함으로써 야기될 수 있는 위험 부담을 분산시키면서 군수와 민수, 국내시장과 해외시장 사이에서 생산과 판매의 유연성을 확보하려 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아마도, 카스트로노보의 표현을 빌자면, “여러 개의 테이블에 돈을 거는” 아녤리 특유의 성향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볼 때, 이런 전략은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전후의 유동적인 상황에서 매우 효과적이었다. --- p.52

무솔리니의 린고토 방문에 앞서 새로운 정부 수반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에 대해 아녤리는 중역진에게 다음과 같이 훈시했다. “내일 우리는 정부 수반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를 접대할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기립 박수를 치는 것, 침묵하는 것, 저지 행동을 하는 것. 세 번째는 결단코 안 될 일입니다. 앞의 두 방법들 중 하나를 선택합시다.” 다음 날 무솔리니가 왔을 때 몇 사람은 기립 박수로 맞이했고, 나머지 다수는 침묵했다. 이 일화는 아녤리의 공식적인 ‘여당 성향’을 넘어 피아트가 파시즘에 대해 취한 미묘하고 착잡한 태도를 잘 보여 준다. --- p.71

결론적으로 피아트가 보여 준 이상과 같은 국제성과 지역성, 근대성과 전통의 복합적인 요소들은 아녤리의 전제적 지배력에 의해 통합되어 매우 효율적으로 작동한 것처럼 보인다. 피아트는 흡사 한 명의 사령관이 지휘하는 첨단의 장비로 무장한 잘 훈련된 군대처럼 보인다. 물론 피아트가 보여 준 이와 같은 특징들은 그 자체가 강점일 수는 없다.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아녤리와 같은 특출한 지휘자의 조율 아래에서만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한 조건에서 그런 특징들은 얼마든지 기업 활동에 치명적인 약점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 p.100

1932년 10월 24일 오전 9시 린고토 공장의 확성기들이 두체의 도착을 알렸다. 때마침 공장의 상공을 지나가던 비행기의 굉음에도 불구하고 군중의 환호성이 사방을 울렸다. 곧 두체를 태운 자동차가 공장에 도착했고, 무솔리니가 미소를 띠며 차에서 내렸다. 아녤리 회장을 위시한 피아트 중역진이 두체를 맞이했다. 이미 린고토에는 25,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운집해 있었다. 파시즘의 전투 구호와 가요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두체와 아녤리가 연단에 올랐다. 연단 뒤에는 ‘FIAT’라는 글자가 거대하게 장식되어 있었고 그 중앙에 파시즘의 상징인 도끼가 우뚝 서 있었다. 아녤리가 간단한 환영사를 마치고 “두체 만세”를 선창했다. 이윽고 두체가 연설을 시작했다. “나는 주저 없이 여러분의 도시에 관계된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무관심하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내 마음속 깊이, 그리고 모든 이탈리아인들의 마음속 깊이 잊을 수 없이 간직된 도시, 토리노가 자신의 지위와 자신의 위신과 자신의 위대하고 근면하며 충실한 도시의 품격을 간직하기를 바랍니다.”--- p.141

결국 이상과 같이 복잡한 경제적ㆍ사회적ㆍ정치적 맥락들과 결부된 온정주의적 노력을 통해 피아트 경영진은 회사를 폐쇄적인 거대한 가족공동체로 만들려고 했다. 아녤리가 항상 피아트를 “거대한 노동 가족”으로 지칭했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이를테면 전문학교에 입학하려면 가족 중에 반드시 피아트 직원이 있어야 한다는 규정이 그런 의도를 잘 보여 준다. …… 따라서 가족주의는 피아트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피아트에서 이른바 “좋은 아버지의 이념”에 기초한 가족의 이미지와 가치는 각별한 의미를 갖기도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피아트에서 아녤리 가문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토리노 기업으로서 피아트가 갖는 시ㆍ공간적 연속성을 표현하며, (특히 1945년 이후) 취약한 이탈리아 복지국가를 부분적으로 대체하면서 회사에 대한 직원들의 의존성과 결속력을 강화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 p.173

대전 전야 파시스트 체제와 피아트 노동자들 사이의 관계를 잘 보여 주는 사건은 1939년 5월 15일 두체쟀 피아트 미라피오리의 개장식 기념 방문이었다. ‘둑스DUX’라는 문자가 거대하게 세워지고 아녤리가 파시스트 제복을 갖춰 입은 가운데 세심하게 준비된 이 방문은, 그러나 체제에 대한 피아트 노동자들의 실망과 반감만을 보여 주었다. 약 5만 명의 피아트 노동자들은 두체가 지나갈 때 손에 쥔 피아트 사보를 흔들면서 환영했다. 그러나 기록 필름을 잘 보면 열정적으로 환영한 이들은 앞줄에 서 있는 노동자들뿐이고, 그 뒷줄의 움직임은 거의 감지되지 않는다. 그런 냉담함은 아마도 저임금, 생필품 부족, 물가 앙등, 임박한 전쟁의 위협, 심지어 비 내리는 개장식 당일의 오랜 기다림 등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 대중의 반응에 실망한 무솔리니가 숙소에 돌아와 토리노를 두고 “망할 놈의 도시”라고 하여 분통을 터뜨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 p.228

문제는 권력이 끝나더라도 회사는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라가치는 당시 피아트 경영진의 정신 상태를 이렇게 회고했다. “발레타는 항상 우리가 훌륭한 독일인일 수도 있고 훌륭한 미국인일 수도 있으며 훌륭한 파시스트일 수도 있으나, 결단코 피아트를 지켜 내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정책이라고 말했다.” 이로부터 1943년과 1945년 사이에 독일군, 파시스트, 빨치산, 연합군 사이에서 발레타가 보여 준 “카멜레온의 전술”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 변신의 목표란 두말할 것도 없이 국가의 위기에 직면하여 피아트의 자율성과 영향력을 입증하면서 회사의 연속성을 지키는 것이었다.

--- p.241

출판사 리뷰

파시즘ㆍ대공황ㆍ세계대전 시기 이탈리아 대기업 피아트의 전략을 읽는다

역사학자가 다시 쓰는 이탈리아 대기업 ‘피아트’ 정치사

서양사학자이자 『민족주의 길들이기』의 저자 장문석이 쓴 이탈리아 자동차 대기업 ‘피아트’의 정치사이자 기업사이다. 저자는 이탈리아의 자동차 기업인 피아트를 소재로 삼아 파시즘 집권기에 기업과 국가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살피면서 경제 발전의 동학을 보다 균형 있게 분석해 간다. 피아트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기업 가운데 하나였으며 파시즘은 국가의 역할을 증폭시키던 정치 체제였기에 피아트와 파시즘은 기업과 국가의 관계를 극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대기업 피아트’와 ‘파시즘 국가’를 통해 저자는, 기업과 국가가 핵심적인 제도로 자리 잡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 세계가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를 위해 역사 속에 담겨져 있는 풍부한 사례를 분석하며 둘 사이의 관계에 파고든다.
피아트는 국가에 종속되지도 피해가지도 않았다. 국가로부터 원조를 이끌어 내면서도 국가에 종속되지 않고 자율성을 지켜 갔던 피아트는, 파시즘ㆍ대공황ㆍ세계대전의 잇따른 위기 속에서도 더욱 성장해 갔다. 성장의 기저에는 국가의 지원을 적극적으로 이끌어 내고 노동자와 협상하며 길들이고 다른 대기업들과 경쟁했던 ‘기업가적 역량’이 깔려 있다. 저자는 이러한 ‘기업가적 역량’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드러내면서 피아트의 전략을 역사적으로 상세히 설명한다. 그리고 파시즘 국가의 전략, 다른 대기업들의 전략과도 비교ㆍ분석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기업과 국가의 관계에 대해 보다 깊이 있는 이해로 이끌고 있다.

이탈리아 대기업 피아트, 글로컬리즘으로 위기 속에서 위기를 이용하다

파시즘, 대공황, 세계 대전이라는 위기는 물론 노동자의 투쟁이나 다른 기업과의 경쟁 등 일상에서 마주해야 했던 복합적인 어려움 앞에서 이탈리아 대기업 피아트가 택한 전략을 저자는 글로컬리즘(glocalism)으로 요약한다. 피아트 회장 아녤리는 피아트를 피에몬테 지역 기업으로 발전시키면서 동시에 미국주의(포드주의)를 표방하는 글로벌 기업을 목표함으로써, 파시스트 중앙 정부와 비판적 거리를 유지했고, 정부와의 협상 테이블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했으며, 지역 기업으로서의 위상을 이용해 지역의 노동자 및 지역 파시스트들을 누르며 자신의 존재를 과시했다. 이는 정치권력에 의지하며 군수산업을 통해 급속히 성장했다 결국 망해 간 안살도와는 선명한 대별을 이루는 지점이다. 그렇기에 피에몬테 지역 기업이면서 세계적 기업을 지향했던 피아트는 ‘피에몬테주의’와 ‘미국주의’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50명의 노동자와 자본금 80만 리라라는 작은 공장에서 시작해 토리노의 지방 기업으로 발돋움하고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기업으로 성장한 자동차 회사 피아트야말로 대기업 연구에서 단연 훌륭한 표본이다. 이탈리아 기업사상 가장 혁신적이고 성공적인 대기업으로 평가받고 오늘날 글로벌 경제 위기 국면에서도 자못 공격적인 인수 합병을 추구하는 피아트의 기업사를 살펴보는 일은 대기업의 역할과 의미를 해명할 수 있게 한다. 특히 피아트 기업사는 창립자 조반니 아녤리의 존재로 인해 이탈리아 자본주의 발전사에서 기업가적 역량의 중요성을 측정하는 데 알맞은 사례이다. 아녤리는 “‘이탈리아=피아트=아녤리’라는 등식을 성립시킨 20세기 이탈리아의 가장 위대한 기업가로 평가되기에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국가에도 불구하고 가능했느냐, 아니면 국가로 말미암아 가능했느냐”라는 기존의 질문법 대신 그 관계가 어떠했고 기업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국가와 거리를 유지하면서 활용했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경제권력과 정치권력 간의 관계를 보다 정확히 관찰하기 위해 ‘붉은 2년’이라는 노동자 투쟁, 파시즘, 대공황, 제2차 세계 대전, 대파업의 물결, 파시즘의 붕괴 등 극히 현란한 사건들로 점철된 시기의 피아트를 연구한다. 나아가 거대한 위기에 직면해 도산했던 다른 기업들과 달리 피아트가 위기 속에서 더욱 커져 갔던 이유를 밝혀낸다.
이는 동시에 파시즘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에도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자본가들은 극단적 행동주의 혹은 보수적 이념이자 체제로 이해되고 있는 파시즘과 불편한 관계를 맺기도 했지만 동시에 파시즘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다. 따라서 파시즘이 보여 준 모호함과 이중성을 이해하고 파시즘 성격을 둘러싼 논쟁에 생산적 명제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자동차 대기업 피아트의 역사,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재해석하게 하는 이유

피아트의 사례는 우리의 경험을 해석하는 데도 풍부한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산업화를 추진했던 독재적 정치권력과 긴밀한 관계를 가져왔던 한국의 대기업들은 확실히 피아트 및 이탈리아 대기업들과 닮아 있다. 그리고 가문이나 독보적인 기업가 중심의 경제권력, 글로벌 기업으로의 목표, 군수산업과의 연관성, 소량생산 체제에서 대량생산 체제로의 전환 과정, 심지어 노동자들의 대투쟁과 기업과의 관계까지 비교할 수 있다. 따라서 파시즘 시대에 피아트가 국가를 어떻게 활용하며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했는가를 살펴보는 일은 글로벌 경영을 외치는 한국 기업의 현재의 모습까지 돌아보게 한다. 국가적 차원에서나 지역적 차원에서나 모두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이 국민생산에서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는 대기업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글로벌 금융 위기로 세계적 기업들이 위기에 처하고 각 국가가 처방을 하기에 바쁜 오늘날, 이탈리아 대기업 피아트의 역사는 현대 자본주의 세계를 구성하는 기업과 국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깊게 한다.
이탈리아 경제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가능성과 피아트 연구의 의미

그동안 이탈리아의 경제적 후진성에 대한 전형적인 패러다임은 정치ㆍ사회ㆍ문화적 후진성과 연결되어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지체된 산업화’, ‘봉건적 잔재’, ‘온정주의’ 등 후진국 이탈리아에 대한 비판은 마르크스주의 계열뿐만 아니라 거셴크론 등의 연구자들에게도 동일한 결론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수정주의 연구는 “기업의 창의적이고 역동적인 기업가적 역량”을 강조하며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기업 활동의 사례는 ‘제3의 이탈리아’로 불리는 대량생산 체제의 대기업들로 표현되었고, 소기업 기반의 기존의 이탈리아 경제 체제와 대비시켰다. 수정주의는 비가치가 “산업 왕조”라고 말한 소수의 대기업들이 사실상 이탈리아 자본주의의 운명을 좌우해 왔음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저자는 “경제 발전의 동학을 균형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기업의 역사와 함께 그에 얽혀 있는 국가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연구하는 일이 절실”함을 주목하면서 수정주의 해석과 전통적 해석의 균형을 제안한다. 그렇기 때문에 50명의 노동자와 자본금 80만 리라라는 작은 공장에서 시작해 토리노의 지방 기업으로 발돋움하고 “오늘날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기업으로 성장한 자동차 회사 피아트야말로 단연 훌륭한 표본”이 된다. 이탈리아 기업사상 가장 혁신적이고 성공적인 대기업으로 평가받는 피아트는, 중앙은행 총재가 “우리 모두의 재산”으로 칭송받았고 좌익 정당으로부터도 “이탈리아 경제의 본질적 일부”라고 일컬어지기에 피아트의 기업사를 살펴보는 일은 대기업의 역할과 의미를 해명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할 것이다. 특히 피아트 기업사는 창립자 조반니 아녤리의 존재로 인해 이탈리아 자본주의 발전사에서 기업가적 역량의 중요성을 측정하는 데 알맞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피아트 기업사에서는 피아트의 성공 요인을 국가의 원조가 아니라 자율적인 기업가적 역량에서 구하지만, 이런 연구는 국가의 역할을 무시하고 기업과 국가의 함수 관계에 대해 지나치게 단순한 관점을 지니고 있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그래서 “국가에도 불구하고 가능했느냐, 아니면 국가로 말미암아 가능했느냐”라는 질문법 대신 그 관계가 어떠했고 기업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국가와 거리를 유지하면서 활용했느냐에 초점을 맞출 필요성을 제기한다. 붉은 2년이라는 노동자 투쟁, 파시즘, 대공황, 제2차 세계 대전, 대파업의 분출, 파시즘의 붕괴 등 극히 현란한 사건들로 점철된 시기의 피아트 연구는, 경제권력과 정치권력 간의 관계를 비교적 순수하게 관찰할 수 있다. 이는 파시즘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에도 풍부한 시사점을 줄 수 있다. 자본가들은 극단적 행동주의나 보수적 이념이자 체제로 이해되고 있는 파시즘과 불편한 관계를 맺기도 했지만 동시에 파시즘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다. 따라서 파시즘이 보여 준 모호함과 이중성을 이해하고 파시즘 성격을 둘러싼 논쟁에 생산적 명제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전후의 극복과 성장 : 노동 운동과 경쟁 기업들에 대한 전략

1920년 이탈리아 노동운동에서 ‘시곗바늘 파업’으로 알려진 4월 총파업이 피아트 노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1시간 빨라진 시곗바늘을 되돌려놓은 노동자가 해고당하면서 시작된 파업에 금속기계산업협회 의장으로 있던 아녤리는 전격적인 공장 폐쇄로 응수했다. 시곗바늘은 구실에 불과했다. 피아트 경영자문회의의 표적은 좌익 노동 운동이 장악한 공장평의회였고 이를 오래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금속노동자연맹과 이탈리아 사회당 토리노 지부는 공장평의회를 방어하기 위해 총파업을 벌였다. 모든 도시 업무가 일제히 마비되었고 산업은 기능 정치 상태에 빠졌다. 그것은 ‘붉은 2년’으로 알려진 4천 건에 달하는 파업의 대물결이었다. 사실 피아트의 노동 조건은 다른 회사들에 비해 월등히 나았다. 이는 아녤리의 전향적인 노무 정책에 힘입은 것이었다. 노동자들의 염원이었던 8시간 노동제 역시 피아트에서는 아무런 대립 없이 이루어졌다. 직장폐쇄는 피아트 경영진이 좌익 노동 운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따라서 토리노에서의 파업은 “계급과 계급, 권력과 권력이 정면으로 충돌한 전장이었다.” 이 과정에서 좌익 집단과 개량주의적 지도부 사이가 갈라졌고 노동과 자본의 세력 균형이 파괴되었다. 아녤리는 8시간 노동제 같은 이미 양보한 것들을 인정하면서 규율과 노동이라는 원칙을 세우려 했었다.
아녤리는 노사 분규를 이용해 정부에 압력을 가하기도 했으며, 돌연 피아트를 협동조합으로 바꾸겠다고 선언하는가 하면, 사표를 제출하기도 했다. 노동자들은 피아트를 살 수 없었고 사임안은 주주총룈에서 부결되면서 아녤리의 절대적 경영권은 재확인될 뿐이었다. 아녤리는 전보다 더 강력한 권위를 갖고서 복귀했다. 아녤리는 피아트를 위해 가능한 모든 것(노사 분규든 피아트 경영권이든)을 이용하는 능력을 선보였다. 이로써 아녤리는 노동자, 정부, 주주, 경쟁 기업가들 모두에게 자신의 권위와 정당성을 과시했던 것이다. 피아트의 노동자들은 이탈리아 노동 운동의 전위라고 불릴 만큼 강인한 투쟁을 전개했지만, 그람시가 인상적으로 묘사했듯, 피아트는 “아녤리라는 한 명의 전제 군주를 가진 작은 절대주의 국가”임을 입증된 것이다. 이후 피아트는 노동자들을 향한 체계적인 설욕전이 펼쳐진다. 대파업의 물결은 종결되었다. 그때 아녤리의 다음과 같은 선포했다. “노동자 대중은 평온을 되찾았고 선의를 회복했다. 공산주의자들이 배제된 내부위원회들의 상황 역시 좋다.”
전후 피아트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노사 분규였지만, 기업들 사이의 갈등도 문제였다. 피아트 경영진은 자본과 노동 사이의 대립 전선과 함께 자본과 자본 사이에 놓인 치열한 갈등, 즉 다른 대기업 특히 페로네 형제의 안살도와의 갈등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이탈리아 기업들은 국가의 품안에서 막대한 군수 발주에 힘입어 비약적 성장을 했고 피아트 역시 10배 규모로 성장했다. 그러나 종전과 더불어 혜택이 사라지자 성장을 유지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기업들 사이의 합병과 인수의 열풍이 불었고 기업들은 나름의 전략을 짜느라 고심했다. 이 경쟁에서 피아트는 강력한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지만 안살도 같은 대기업은 붕괴하고 말았다. 엇갈린 운명의 배경에는 기업들의 투자 전략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자동차라는 선택적 집중, 국내시장과 해외시장 사이에서 생산과 판매의 유연성 확보 등으로 요약되는 피아트의 전략은 전후의 유동적인 상황에서 효과적이었다.
린고토의 탄생은 피아트의 전후 투자 전략이 성공적이었음을 말해 준다. 피아트가 토리노에서 개장한 새로운 주력 자동차 공장인 린고토는 포드주의를 이탈리아식으로 정교하게 ‘번역’함으로써 건설되었다. 린고토의 건설은 단지 기술적 새로움뿐만 아니라 파업과 조업 중단으로 번져가던 ‘붉은 2년’의 상황에서 테일러주의로 노동을 통제하려는 의미 또한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린고토에 대한 당대인의 묘사는 문학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이는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점철된 ‘붉은 2년’의 토리노 이미지들과는 전혀 달랐다. “마치 모든 것이 눈부신 빛을 발산하는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밝게 빛났다. 린고토는 피아트의 새로운 도시였다.”

파시즘에 대한 피아트의 전략

1921년부터 정치 세력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파시스트를 자유주의 진영은 반사회주의 연합에 끌어들였다. 파시스트는 사회주의 진영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며 빠르게 성장해 갔다. 그러나 재계는 파시즘 정권 장악 후에도 파시즘의 폭력적 행동주의에 대해서는 불안해했다. 아녤리와 토리노 의원인 파시스트 데 베키는 공공연히 충돌했다. 아녤리는 파시즘에 적대적이지는 않더라도 상당히 비우호적인 태도를 취했다. 또한 피아트의 노동자들은 파시즘에 적대적이었다. 노동자들과 파시스트 행동대 사이에서 벌어진 유혈 충돌인 ‘토리노 사태’에 대한 기업가 아녤리의 부정적 태도는 향후 토리노 파시즘의 향방에 큰 변수가 되는 영향을 끼쳤다. 또한 지방 파시스트의 과도한 권력을 경계하던 무솔리니에게도 일정정도 영향을 미쳤다.
아녤리는 지방 정치 차원에서 파시즘과 불편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일단 정부를 구성한 파시즘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무솔리니 역시 재계가 가지고 있던 의구심을 해소하기 위해 세간의 예상을 뒤엎으며 경제적 자유주의 정책을 천명하고 아녤리를 첫 번째 상원의원으로 임명했다. 그러므로 “무솔리니의 피아트 방문은 정부와 기업 간에 우호적이고 협조적인 새로운 관계가 수립되었음을 알리는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다.”
“무솔리니와 대기업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가 시작되었지만 토리노와 로마, 피아트와 파시즘, 아녤리와 무솔리니 사이에는 여전히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고베티는 “무솔리니를 완영한 인파 뒤에 있는 6천 명의 침묵하는 피아트 노동자들”에 대해 말했다. 아녤리의 공식적인 ‘여당 성향’ 이면에는 피아트가 파시즘에 취한 미묘하고 착잡한 태도가 내재해 있었다. 아녤리의 이러한 미온적 태도로 피아트의 반파시즘이 도출되기도 한다. 특히 파시스트 노동조합을 외면하고 공산주의 내부위원회와 협상한 것은 아녤리의 전략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이다.
여전히 재계는 사회주의뿐 아니라 파시즘에 대한 경계심과 불안감이 있었다. 파시스트와 기업 사이의 일련의 긴장 관계와 상호 경제 정책 간 충돌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기업?들에게 무솔리니를 파시즘과 구별했다. 국가와 정치를 구별했던 것이다. 피아트의 경우, 공식적으로는 비정치적 태도를 고수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그리고 필요할 경우에는 언제나 파시즘을 후원했다. 피아트 경영진은 파시즘이 피아트의 사업 목표들에 도움을 주는 한에 있어서는 파시스트가 되었다. 무솔리니 역시 언제나 아녤리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즉, 아녤리는 “파시즘이건 공산주의건 모든 것을 기꺼이 활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피아트의 포드주의 전략과 기업 문화

아녤리는 미국의 포드 사를 방문한 이후 포드주의를 피아트에 도입한다. “자동차는 더 이상 부유층의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으로서 광범위하게 대중 곁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생각을 전제하”는 포드주의는 피아트에 생산의 표준화, 테일러화된 노동, 조립 라인 등을 필요케 했다. 이를 위해 피아트는 표준화된 대량생산 체제와 시장 창출을 이루어 낸다. 피아트 2인자 발레타는 이에 대한 계획을 다음처럼 말했다. “아녤리 상원의원의 주요 목표는 자동차를 노동자 세계에 침투시키는 것, 가장 경제적인 차를 만드는 것, 그리하여 노동자들이 공장에 도착하는 데 시간을 절약할 수 있도록 장기 할부로 구매할 수 있는 차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피아트는 이탈리아의 협소한 시장 조건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포드주의를 실천에 옮긴다. 피아트는 “적어도 이탈리아에서 전인미답의 길로 한 걸음 내딛었다.”
포드주의 전망과 더불어 피아트는 이 시기에 내부 구조를 체계적으로 재편해 나간다. 전문 경영인과 엔지니어들을 일사불란한 조직적 체계에 따라 배치했다. 그리고 아녤리 자신이 이사회와 경영자문회의 모두를 지도하면서 피아트 경영권을 한 명의 경영자-소유주에 집중시켰다.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베도 체제 도입, 공장감독관 및 회사통신원 설치 등으로 노동자의 자율성을 제거하고 통제했다. 아녤리를 정점으로 하는 피아트의 중앙집권적이고 폐쇄적인 조직 구조는 하향식 명령과 복종의 ‘군사적’ 체제였으며 “하나의 군대처럼 보였다.” “린고토 공장 안에서는 누구도 담배를 필 수 없고 작업 중 말할 수 없으며 심지어 주머니에 손을 넣을 수도 없”을 정도로 엄격한 규율이 관통하고 있었다. 피아트의 ‘군사적’ 명령과 복종의 체계는 일종의 기업 문화였다. 즉 바이라티의 유명한 비유처럼 피아트는 강력하게 위계화된 “피라미드”였다. 이러한 피아트의 기업 문화는 피에몬테 인들의 덕성에 바탕을 둔 피에몬테주의 혹은 사보이아 군주정의 역사적 전통에 바탕을 둔 사보이아주의라는 문화적 맥락으로 파악된다. 이런 피에몬테주의 기업 문화는 ‘또 다른 이탈리아’를 창출함으로써 국가와의 관계에서도 특정한 효과를 만들게 했다. 이는 진보적 산업과 결합되어, 국가와의 협상에서 “피아트에 좋은 것이 이탈리아에 좋은 것”이라는 설득력을 발휘했다.
피아트의 국제성과 지역성, 근대성과 전통의 복합적 요소들은 아녤리의 전제적 지배력에 의해 통합되어 매우 효율적으로 작동했다. 그러나 이는 아녤리와 같은 특출한 지휘자의 조율 아래서만 효과가 있었던 것이지 그렇지 못하다면 치명적인 약점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었다.

포드의 이탈리아 진출에 대한 전략

파시즘의 경제 정책도 하나의 부담이었지만 피아트에게 진정한 위기는, 피아트가 그토록 닮고자 했던 미국 최대의 자동차 회사 포드가 이탈리아 시장을 침공하려는 것에서 찾아왔다. 피아트는 국내시장을 독점하려는 야욕이 있었기에 피아트의 1년 치 생산량을 1주에 생산하는 포드의 진입은 큰 위협이었다. “피아트는 무솔리니에게 직접 로비를 하는데 여념이 없었고, 무솔리니는 그런 압박이 너무 강하여 온통 ‘포드 사건’에 정신을 빼앗”길 정도였다.
무솔리니는 피아트의 요구들을 즉각 수용했으며, 관세 장벽을 둘러치고, 원재료에 대한 수입 관세를 면제하고, 판매가에 대한 국제적 담합을 시도했다. 외국 기업들의 진입 문제에 대한 각종 논란에도 불구하고 무솔리니는 자국 자동차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골몰했다. 결국 육상 운송 수단을 “민족 방위를 위한 기간산업들”에 포함시키는 1929년의 법령이 공표되었다. 그로 인해 외제차는 100~130%의 관세를 물어야 했다.
포드와의 싸움에서 피아트는 명실공히 국가에 의해 “보호받는 독점”이 되어 어려운 시절에 국내시장을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는 피아트와 체제가 유착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25년 이래로 무솔리니 정부가 새로운 경제 정책들을 실행하고 지방 파시스트들이 피아트의 노동과 언론에 간섭하면서 파시즘과 피아트의 관계는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피아트는 “파시즘과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포드의 침공으로 야기된 최대의 위협을 국가의 보호주의 아래에서 모면”한 것이다. 아녤리가 무솔리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에 대한 마음이 담겨져 있다. “이미 발포된 신중한 입법에서 증명되었듯이, 민족 노동의 으뜸가는 옹호자인 각하께 최대한의 경의의 표현으로써 저와 피아트가 느끼는 각별한 감사의 마음을 전해 드립니다.”

대공황에 대한 전략

대공황이라는 경제 위기 국면에서 생산주의는 민족주의와 결합했다. “1930년대 파시스트 이탈리아에서 민족주의는 생산주의로 변형되었다.” 즉, 파시스트들은 대공황의 위기에 대한 해법을 ‘생산성’에서 찾기 시작했다. 생산주의는 ‘민족적 생산주의’로 정립되었다. 이는 아녤리의 이해와도 같았다. 피아트와 파시즘의 현실적 유착 관계는 이데올로기 차원으로까지 확장되었던 것이다. 이는 무솔리니 정부가 자동차 산업에 제공한 여러 특혜들에서 잘 나타난다. 그리고 파시즘은 스스로를 대공황에 대한 해법이자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내세웠다.
파시스트 노동조합은 경제 위기의 원인을 산업 지도자들에 돌리며 피아트에 적대적이었지만, 아녤리는 위기의 해법으로 ‘케인스주의 설교’를 제시하며 다양한 노력을 전개해 갔다. 구매력을 높이기 위해 노동 시간을 줄이고 임금을 증가시키는 정책을 제시했으며, 민족 연대라는 명분에 의지하며 협력적 노사 관계를 구축하려 했다. 모순처럼 보이는 ‘케인스주의’와 ‘민족 연대’는 아녤리에게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피아트는 이를 위해 두 가지 방향, 즉 ‘국내시장의 독점’과 ‘해외시장으로의 진출’로 나아갔다. 한편으로는 ‘보호받는 독점’으로서의 지위를 강화하고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보호받는 독점’의 한계의 돌파하고 수출을 활성화하는 일이었다. 국내시장 차원에서의 일차적 행동은 내부의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피아트의 인수 및 합병의 역사는 현란했다.” 그리고 새로운 자동차 시장을 창출하기 위해 파격적으로 저렴한 가격의 새로운 경차 ‘발릴라’를 출시했다. 또한 국내시장이라는 파이 크기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해외시장을 적극적으로 노렸다. 여기서 피아트가 무솔리니 정부를 활용했던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탈리아 정부는 피아트의 수출 활동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함께 피아트는 대공황을 타개하기 위한 적극적인 방도로서 ‘온정주의’ 전략을 실천했다. 피아트의 복지 제도는 소련의 눈에서도 너무도 ‘소비에트적’으로 극히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여가 조직인 도폴라보로, 피아트 직원공제회, 피아트 노동자내부공제조합, 공장의무실, 피아트 전문학교, 피아트 도서관, 피아트 촌락, 아녤리 요양소, 보육시설인 발릴라 타워 등의 제도는 “근로자의 즉각적인 필요에 조응하는 수준의 부조 체제”와 “엄격한 규율에 종속된 근로자를 심리적으로 달래 줄 의도로 구축된 여가 조직”을 목표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사펠리는 회사를 “국가 속에 국가로 만들려는” 수준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는 “새로운 노동자의 형성” 및 “민생고가 가중된 시절에 노동자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고안된 노동 통제임을 확인할 수 있다. “피아트 경영진은 회사를 폐쇄적인 거대한 가족 공동체로 만들려고 했다.”
마지막으로 피아트는 정부의 군수와 특혜를 독점적으로 받아낸다. 1933년 이탈리아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세워진 국영 지주 회사인 산업재건기구를 통해 수많은 산업 부문의 기업들을 인수하고 합병했으며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자본주의에 대한 대대적인 국가 개입의 시도로서 시작된 산업재건기구는 사실상의 “거대한 사용자 동맹체”로 변환되었고, 피아트 등의 대기업들은 이탈리아의 아프리카 침공에 따른 엄청난 군수 특혜를 누리며 제국의 기업이 되었다. 비로소 피아트는 대공황으로부터 완전히 탈출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전략

제국의 전쟁이 피아트에 예외적인 이윤을 보장해 주었을지라도 “유럽에 드리워진 전쟁의 암운은 피아트 경영에 불확실성의 요인들을 증대시켰다.” 독일과의 경쟁으로 유럽 시장이 잠식당한 피아트는 영국 등과의 협약으로 새로운 시장을 구축할 기회였으나 파시즘-나치즘 동맹에 대한 미국의 제재로 그 기회가 차단되었다. 게다가 이탈리아-독일 동맹은 피아트에게 독일에 대한 경제적 종속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아녤리는 이탈리아의 참전을 원치 않았고 이를 위해 무솔리니에 로비를 했다. 무솔리니가 요청을 들어줄 거라 믿었기에 실제 피아트는 전쟁 준비를 위한 군수용 차량보다 민간용 차량을 생산하는 데 중심적인 노력을 펼쳤다. 임박한 전쟁에도 불구하고 피아트는 ‘영업의 자유’를 누리며 수출 활동에도 열정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대전은 피아트의 자동차 대중화 계획이 체제에 의해 거부되었음을 알려주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아녤리는 전시 사업에 구속을 받은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부와의 긴밀한 협력 아래에서 사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전시 생산은 자동차 대중화와 수출 노선을 견지했던 피아트로서 선뜻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니었지만, 아녤리는 주어진 조건을 기꺼이 인정하는 현실주의자였다. “불가피한 것과의 협력”이라는 발레타의 기념비적인 표현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파시즘의 참전과 패전으로 이어지는 역사는 피아트에 엄청난 시련을 안겨주었다. 무솔리니가 실각하면서 피아트와 체제의 관계는 급속히 파국으로 치달았고 피아트는 생존을 위해 새로운 해법을 찾아야 했다. 따라서 1943년 이후의 피아트 역사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시작된다. 바로 “피아트의 반파시즘”이다.

기업과 국가와의 관계에 대한 재조명

제1차 세계 대전 직후부터 1943년 파업에 이르는 4반세기 동안 피아트는 이탈리아 자동차의 생산과 판매를 독점하면서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거기에는 아녤리나 발레타와 같은 출중한 기업가들이 있었다. 그들의 역량 덕분에 이탈리아는 근대 산업의 총아인 자동차를 제작할 수 있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국가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다.
그런데 아녤리와 같은 근대적 기업가를 배출한 나라에서 후진성의 담론(“겨우 텔레비전이나 장만한 오두막”)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역설은 기업가의 이름만으로는 발전의 문제를 온전히 해명할 수 없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런 점에서, 기업과 사회를 매개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 경제의 주요 행위자이기도 한 국가의 존재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피아트와 국가의 관계를 논할 때 확인해 두어야 할 것은 관계의 ‘역사성’만큼이나 중요한 관계의 ‘다원성’이다. 다시 말해 밀월의 시기에도 위기의 요소가 존재했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가령 파시즘의 집권 이후 정부와의 ‘좋은 관계’에도 불구하고 피아트는 지방 파시스트들 및 파시스트 노동조합들과 ‘어려운 관계’에 빠져들었고, 30년대 말 자동차 대중화 구상을 거부했을 때도 체제는 피아트의 사업에 상당한 자유의 여지를 허용했다.
피아트와 국가의 관계에 내포된 그런 ‘역사성’과 ‘다원성’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일반적인 관계를 볼 때 피아트의 발전에서 국가의 역할은 실로 거대했다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좌익 노동 운동의 봉쇄, 사회적 인프라의 건설, 보호 장벽의 구축, 산업재건기구의 특혜들, 수출 지원 정책, 제국의 군수 발주 등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런 경험적 사실들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기업 발전에서 국가가 갖는 중요성은 극도로 협소한 시장을 가진 이탈리아 기업이 처한 특유의 상황을 고려하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탈리아의 경제 발전에서 “억제할 수 없는 국가의 역할”을 인정하는 것은 지극히 논리적으로 보인다.
확실히 피아트는 회사의 독립성을 지키면서 국가를 효율적으로 활용한 기업이었다. 물론 파시스트 국가가 경제의 서툰 지휘자였던 만큼 국가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로부터 지원을 이끌어 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실제 피아트가 파시스트 국가로부터 무수한 혜택들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관계는 항상 편치만은 않았다. 피아트의 경영에 압력을 가하려는 파시즘의 단속적인 시도들은 좌절했고, 피아트는 원하는 모든 것을 파시즘으로부터 얻어 내지 못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피아트는 파시즘의 정치적 의지로부터 자신의 능동성을 성공적으로 유지하면서 국가가 제공하는 다양한 서비스와 특권을 성장의 발판으로 삼았다. 이렇게 보면, 피아트의 진정한 성공 요인은 자율성의 방어 자체라기보다 자율성의 희생 없이 국가의 지원을 이끌어 내는 특정한 능력에 있었다. 피아트에는 국가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받으면서도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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