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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과 옌
감사의 말 / 작품 해설 / 옮긴이의 말 / 작가와의 인터뷰 |
Fan W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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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자 감회에 젖어들었다. 먀오옌과 처음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날 밤. 소소한 것까지 하나하나 마치 비디오 영상처럼 아주 생생하게 떠올랐다. 낮게 걸린 달, 희끄무레한 시멘트 바닥, 먀오옌의 반짝이던 눈빛, 펄럭이던 블라우스, 먀오옌이 담뱃불을 붙이고 연기를 내뿜던 스타일까지. 그 모든 것이 내 머릿속에 아로새겨져 있어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다. 한참을 추억에 잠겨 있다가 일어나 옷장 속 하얀 상자를 가져왔다. 그리고 검은색 드레스를 꺼내 들고 욕실로 가서 입어 보았다. 여전히 꼭 맞았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욕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응시했다. 거울 속 내 두 눈에서 먀오옌이 보이더니, 이윽고 열일곱 살짜리 내가 보였다. --- p.18
“당신을 봐요! 당신을 좀 보라고요! 고작 해야 2학년밖에는 안 됐을걸요. 그런데 생각에만 빠져 있고, 오만한 데다 독선적이잖아요. 전공은 국문학이겠죠.” “당신 자신이나 봐요! 냉소적이고 세속적인 데다 골초잖아요. 당신은 틀림없이 졸업반일걸요. 직업을 구하는 일은 어때요? 과히 재미있는 일은 아닐 텐데.” 그녀는 손뼉을 치며 깔깔거렸다. “어떻게 나에 대해 그렇게 많이 알죠? 우리가 전생에 인연이 있는 걸까요? 그나저나…… 내 이름은 먀오옌이에요. ‘고울 옌’이나 ‘제비 옌’이 아니라 ‘기러기 옌’을 써요. 나이는 스물넷. 아마 학교에서 제일 나이 많은 학부생일걸요. 학교에 늦게 들어갔죠. 당신은요?” “천밍이에요. ‘새벽 천’, ‘밝을 밍’을 써요. 나이는 열일곱이에요.” 나는 머뭇거리며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다시 웃었다. 그녀의 맑고 거리낌 없는 웃음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져 메아리쳤다. 내가 그녀처럼 기운차고 쾌활하게 웃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 pp.37~38 그녀의 입술은 마치 말을 하다가 잠이 든 것처럼 살짝 벌어져 있었다. 빤히 보다가 불현듯 그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어졌다. 그녀의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칼 몇 가닥을 손으로 넘기고는 손을 콧구멍 가까이 가져가 그녀의 따뜻한 숨결을 느꼈다. 그러고는 그녀의 입술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꼭 감긴 눈꺼풀이 살짝 떨리는 것을 봤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저 웅얼거리며 추운 것처럼 손을 허리에서 가슴으로 옮겼다. 간절하게 여자한테 키스하고 싶은 느낌이 든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은 아름다운 꽃이나 하늘에서 내 손 위로 떨어지는 새하얀 눈송이에 입을 맞추고 싶은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고 순수한 느낌이었다. --- p.184 “네가 뭔 상관인데?” “당연히 상관있어요. 언니가 돈 때문에 그 남자랑 자는 거라면 언니는…… 매춘부니까요!” 내가 무슨 말을 내뱉은 건지 너무 늦게 깨달았다. “감히 그런 말을!” 그녀는 내 쪽으로 다가와 노려보다가 한 손으로 내 목을 움켜잡고 다른 손으로 내 팔을 잡아채서 벽에다 난폭하게 밀어붙였다. ‘매춘부’라는 말을 해서 11년 전 그 끔찍한 사건을 생각나게 한 것을 사과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내 목을 움켜잡고 밀어제쳤을 때 내 호의에 대한 답례로 그녀가 나를 어떻게 취급했는지 생각하니 내 자신이 딱하게 여겨졌다. 그녀가 마침내 움켜쥐었던 손을 늦추자 나는 뒷걸음질 쳤다. 갑자기 늘 조용하고 평화롭기만 한 도서관에 앉아 있는 시간이 그리워졌다.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 있니? 사랑의 쓴맛을 맛본 적은? 사랑이 뭔지 알기나 해? 너는 아무것도 몰라! 너는 환상이라는 껍데기 속에 숨어 있는 달팽이야. 너는 책에서 읽은 것 외의 세상에 대해 뭘 알고 있지? 너는 감정적 유대를 맺어 본 적도 없을걸.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내게 말할 권리가 네겐 없어.”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고, 분노로 떨렸다. --- pp.208~209 어느 날 밤, 한밤중에 잠이 깨서 옆에 누워 있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남편의 코 고는 소리를 듣다가, 문득 내가 정말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걸까 하는 회의가 들었다. 내가 남편을 사랑하고 있는지, 모두가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행복하고 만족하고 있는지, 뭔가 내 인생에서 빠진 것이 있는지 자문해 보았다. 종잡을 수 없는 생각에 빠질 때면 나는 먀오옌을 생각했고, 그러면 그녀가 몹시 보고 싶어졌다. 그녀에게 내 삶에 대해, 활기 없는 내 결혼생활과 직장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녀가 해 주는 말이 듣고 싶어졌다. 그녀의 거리낌 없는 웃음소리와 그녀의 향수냄새, 땅바닥에 닿을 때마다 울리는 하이힐 구두굽 소리, 그녀가 불러 주는 애칭이 그리워졌다. 부모님, 여자친구들, 전 남자친구들, 심지어 남편을 포함해 그 누구에게서도 느끼지 못했던 열정과 친밀함이 그리워졌다. 그 순간 불현듯 드슴 생각이 있었다. 먀오옌이 없는 내 삶은 따분하구나! 4개월 뒤 남편과 나는 이혼했다. 이따금 내가 정말로 동경하는 것이 이제 어른으로서 더 이상 소유할 수 없는 헌신적인 열정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먀오옌의 말대로 “어른이 되는 건 때때로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 pp.362~3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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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모든 여성들이 공감할 성장통을 그린 감동소설
정교한 퀼트처럼 아름답고 소담스러운 이야기의 향연! 『밍과 옌(원제: February Flowers)』은 중국의 주목받는 여성작가 판위의 처녀작으로, 그녀가 모국을 떠나 미국에 새로이 뿌리내리는 와중에 3년에 걸쳐서 영문으로 완성한 장편소설이다. 2006년 9월 영국 피카도르아시아 출판사에서 초판이 나온 이래 15개국 이상에 판권이 수출되어 6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으며, 판위가 모어인 중국어로 옮긴 판본도 중국에서 출간되었다. 출간 당시 영국의 유력 언론 『옵저버』는 “소녀와 여인, 사랑과 욕망, 전통과 현대성의 심리적 양면을 섬세하게 묘사한 걸작”이라고 격찬한 바 있다. 『인디펜던트』 역시 “전통과 진보, 도그마와 자유 사이에서 분열된 사회의 이야기를 두 젊은 중국여성의 눈을 통해서 ‘매우 통렬하게’ 묘사한 작품”이라고 평가하는 한편, “성적性的 인식에 대한 은밀하면서도 감각적인 묘사는 노골적인 쾌락주의 내용 때문에 2000년에 중국에서 금서禁書가 돼버린 웨이후이 작 〈상하이 베이비Shanghai Baby〉와 같은 경우에 대한 방어기제로 여겨진다”고 분석한 바 있다. 『밍과 옌』은 ‘천밍’과 ‘먀오옌’이라는 두 젊은 중국여성의 자기발견, 그리고 과거와의 화해에 이르는 여정을 정교한 퀼트처럼 아름답고 소담스러운 이야기로 엮은 성장소설이다. 이 작품의 궁극적인 매력은 보편적 주제와 고전적 설정을 세련된 감각적 언어로 산뜻하게 형상화함으로써 독자를 몰입시키는 흡인력이 대단하다는 점이다. 누구나 한번쯤 겪을 자아분열의 비망록인 동시에 우정과 사랑, 동성애, 섹스, 상실, 구원, 그리고 삶 자체에 대한 명상인 이 작품은 독자들로 하여금 저마다의 성장통을 새로이 펼쳐보며 ‘젊은 날의 초상’을 추억하게 하는 뜻깊은 시간을 선사할 것이다. 상반된 성격의 두 여주인공을 통해 현대 중국의 양극성을 그려낸 수작 1990년대 중국 광저우의 어느 대학 캠퍼스. 봄날 호젓한 밤에 여학생기숙사 옥상에서 바이올린을 켜던 밍은 어둠속에 홀로 웅크리고 있던 옌과 우연히 마주친다. 그런 우연한 만남은 이번이 세 번째. 볼 때마다 도발적 언행으로 밍의 시선을 끌었던 옌. 순진하게 잔뜩 경계하는 열일곱 살 밍에게 스물네 살 옌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온다. 한족 지식인 부모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이상적으로 훈육되어 숙맥인 밍과, 소수민족 먀오족의 후예로 소외되고 빈곤하게 자라 중국 상류층에 편입하려는 욕망이 가득한 되바라진 옌. 여러모로 천지차이인 둘은 서로를 향해 은밀히 동경하고 집착하면서 금세 열렬한 소울메이트가 된다. 그것도 잠시. 옌이 캠퍼스를 떠나면서 10개월 남짓한 교제는 끝나고, 밍은 옌을 향한 걷잡을 수 없는 그리움을 삭이며 점점 변해가는데……. 이 소설은 그로부터 10여 년 뒤, 남편과의 무미건조한 결혼생활을 접고 홀로 광저우로 이사와 그 옛날 옌과의 활기차고 열정적인 애착을 하나하나 추억해가는 밍의 시선과 감정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여기서 밍의 성격은 문화대혁명 이후 1990년대 중국의 복잡다단한 이면을 상징한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개혁/개방정책을 실행할 당시 중국사회의 신구新舊가치관 혼돈, 민족/계층/세대/지역 간 갈등이 밍 내면의 억압과 열망, 긴장으로 형상화된다. 밍은 옌의 자유분방하고 섹스어필하는 여인의 이미지에 이끌리는 한편, 부모님이 기대하는 ‘착한 소녀’라는 개념에도 매달리면서 다소 갈등하는 대학생활을 해나간다. 그 와중에 캠퍼스에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비롯된 유행으로 낙인찍힌 패션, 연애 같은 풍속을 단속하는 사회주의 체제의 통제시스템이 도입된다. 한편, 옌은 중국 최남단의 경제특구인 광저우의 대학에 특별전형으로 입학해 대도시 ‘선전’에 정착하려 발버둥치지만 끝내 허사가 되고, 우발적인 임신과 낙태 끝에 삭막해진 내면을 추스르며 홀연히 사라진다. 한때 옌의 남자친구였던 두성을 만나러 선전을 드나들던 밍은 이웃 지역민들의 출입을 살벌하게 통제하는 선전출입국관리소의 행태를 통해 첨예한 차별이 도사린 새로운 사회상을 목도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여학생기숙사에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역 출신의 어느 소수민족 남학생이 자신을 따라 소수민족으로 살아가기 싫다는 여자친구를 설득하다 못해 살인까지 저지르는 사건이 발생한다. 밍은 이러한 혼란스런 일상생활과 사회생활 속에서 머지않은 미래를 불안해하며 자신이 언제까지나 소녀이길 바라지만, 열여덟 번째 생일을 맞아 결국은 자신이 더 이상 종속적인 어린아이로 머물러서는 안 되고 운명을 스스로 책임질 한 여인으로 성숙해야 함을 깨닫는다. 우아한 템포와 생동감 넘치는 문체로 독자를 사로잡는 판위의 산뜻한 내공 중국은 격동의 20세기를 거치면서 재능 있는 견실한 작가들을 배출했다. 그들의 강렬한 작품들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격변의 시대를 상세히 기록했는데, 그중에서 20세기 최고의 중국 기록문학으로 꼽히는 장융의 『대륙의 딸들Wild Swans』이 대표적이다. 1991년에 발표된 이 책은 ‘1993년 영국 올해의 책’으로 뽑히기도 했다. 모든 중국인들이 마오쩌둥의 혁명 이전기와 혁명기, 혁명 이후기에 삶을 지탱하려고 발버둥치는 세 여인의 삶 이야기를 읽으며 일대 감동의 도가니에 빠졌고, 이 책을 읽은 대처 전 영국수상이 크게 감탄하는가 하면 키신저 전 미국무장관은 중국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바꾸겠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대륙의 딸들』 이후 15여 년 흘러 전례 없는 경제성장과 사회변화를 이룬 중국의 현대사에서 새로운 작가들이 영감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한 작가군에 판위가 자리한다. 국내 독자들에게 『조이 럭 클럽』의 작가로 유명한 에이미 탠은 판위를 가리켜 “혼란의 중국 현대사에서 자아정체성에 대한 독창적 견해를 지닌 흥미진진한 작가”라고 평한 바 있다. 『밍과 옌』은 판위가 언어적/사회적으로 미국에 뿌리내리는 과정에서 맞닥뜨린 향수병과 정체성정립이 스며든 작품이다. 그녀는 ‘밍’과 ‘옌’이라는 동전의 앞뒷면 같은 자신의 분신 격 주인공을 설정함으로써 ‘성장’과 ‘변화’라는 것의 양면성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섬세하게 묘사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독자들이 작품에 내재된 첨예한 갈등적 요소들과 다소 묵직할 수 있는 주제의식에 개의치 않고 ‘밍의 추억’에 흠뻑 빠지게 하는 서사와 묘사 능력이 탁월하다. 요즘의 우리에겐 상투적이고도 남을 만한 보편적이고 고전적인 설정조차 판위의 아름답고 재치 있는 문체가 닿으면 산뜻해진다. 심지어 수음手淫 장면조차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