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검색을 사용해 보세요
검색창 이전화면 이전화면
최근 검색어
인기 검색어

소득공제 청년패스
시 쓰는 엄마 시 읽는 아빠
시로 배우는 삶의 지혜
가격
15,000
10 13,500
YES포인트?
750원 (5%)
5만원 이상 구매 시 2천원 추가 적립
결제혜택
카드/간편결제 혜택을 확인하세요

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국내배송만 가능
  •  문화비소득공제 가능

이 상품의 태그

책소개

목차

[첫 번째 이야기]
엄마는 생명의 집이다
- 우주의 법이 살고 있는 몸이시다

1. 엄마는 인류를 이어가는 생명의 집
2. 생명의 집은 여자보다 더 근원적이다
3. 우주적 존재로 거듭나는 사건으로의 생리
4. 생명의 집은 이 세상의 시작과 끝
5. 출렁거림, 생명으로 열리는 몸의 기호
6. 생명을 낳고 이어가는 세상의 문을 생각하라
7. 또 하나의 주인을 기르는 여자

[ 두 번째 이야기]
그녀들의 아름다운 품성

1. 본능적으로 생명을 느낀다
2. 여자는 대화하는 존재다
3. 생명을 최고의 가치로 가진 존재다
4. 반생명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평화주의자
5. 자기를 나누고 타자를 돌보고 섬기는 자
6. 그녀들은 최고의 관계론자이다
7. 생명의 집이 바라는 바의 사회로!
8. 살릴 수 없을 때 그녀는 병든다
9. 살림의 정치학, 자기의 비움과 나눔

[세 번째 이야기]
품어 살리는 자를 경배(敬拜)하며

1. 어머니, 그 자연의 마음을 생각한다
2. 나눔, 자기죽음을 통해 거듭나는 삶
3. 여자에서 엄마로 태어나다
4. 어머니, 그 어리석음의 신비
5. 먹이는 어머니, 그 의미는 증여(贈與)다
6. 그녀는 먹여 살리는 자다
7. 품는 것이 내가 사는 길이기도 하다
8. 생명의 집으로 이어지는 성스러운 인간적 가치를 배우자
9. 살 수 있도록 되어주는 자를 경배하며

[네 번째 이야기]
살림의 어머니의 바람

1. 일상, 그 지혜의 보고를 나쁘게 말하지 말라
2. 일상에서 생명의 아이가 자란다
3. 엄마와 아이는 ‘의하여’ 관계이다
4. 살림의 어머니는 아버지와 파트너십을 원한다
5. 살림의 어머니는 삶에 대한 사랑으로만 꽂혀있다
6. 아이는 커가고 살림의 힘은 빠져나간다, 이 자연함!
7. 완경(完經), 살림의 어머니에서 지혜의 여신으로!

[다섯 번째 이야기]
마음씀의 길, 不一而不二사상의 부활

1. 그녀는 늘 전체를 본다
2. 不責, 큰마음으로
3. ‘불의 알’ 사상의 탄생
4. 그녀들의 논리구조
5. 不一而不二사상의 부활
6. 경계를 허무는 부드러움
7. 단가적(單價的) 생각을 넘어서
8. 모두를 필요로 느끼는 아름다운 마음의 여자
9. 하나가 될 때 찬란한 우리다

[여섯 번째 이야기]
아름다운 관계

1. 어떤 것이 아름다운 관계입니까?
2. 서로 생을 염려하는 관심
3. ‘위하여’와 다른 ‘의하여’의 관계
4.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관계
5. 나를 비워 그것을 드려놓는 일이다
6. 비울 때 지극함의 관계가 살아난다
7. 소유가 아니라 섬기는 나눔이다
8. 되어주는 고통 그리고 되어주는 기쁨
9. ‘우리’를 열망하는 마음에서 아름다운 관계는 열린다
10. 그대의 미소가 나의 미소가 되는 관계
11. 숨어 있는 관계로 마음을 열어라!
12. 아름다운 관계를 보려고 할 때 풍요로워진다

[일곱 번째 이야기]
아이에게 배우다

1. 아이는 끊임없이 생을 구한다
2. ‘아이 같은 마음’은 지혜로운 자다
3. 분별하는 마음을 넘어선 신성한 춤
4. 놀이가 된 아이들, 그 神性의 세상
5. 아이 같은 마음이 유치하다고요?
6. 세계 그 자체를 닮은 아이의 마음
7. 아이 같은 마음은 심미적이다
8. 아이 같은 마음은 가볍다
9. 아이의 자기 창조를 바라보며
10. 스스로 그러함의 힘으로 거듭나는 마음
11. 아이 같은 마음은 하늘의 마음
12. 영원한 놀이와 망각과 웃음

저자 소개 1

본명:오환섭

1986년 《민의》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국장과 이사를 역임했다. 이후 사이버노동대학 문화교육원 부원장을 하다가, 6년 동안 농부 흉내를 냈다. 시집으로는 『사랑은 메아리 같아서』, 『좋은 흙』 등이 있으며, 오랫동안 해온 문학교실과 시 쓰기 강좌 등을 엮어 <시 쓰기 길라잡이> 8권 등을 출간했다. 요즘은 시를 통해 생의 지혜를 탐구하는 작업으로 『시로 읽는 니체』, 『사회적 엄마의 사랑법』 등이 있다.

오철수의 다른 상품

관련 분류

품목정보

발행일
2009년 09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267쪽 | 규격외
ISBN13
9788996301639

출판사 리뷰

엄마는 생명의 집이다
아빠는 생명의 꿈을 건설한다
아이는 생명사상 그 자체이다
이 아름다운 관계의 비밀을 찾아서...


당신은 아이들에게 엄마를 어떻게 설명 할 것인가
당신은 스스로에게 엄마를 어떻게 이해 할 것인가

오철수 시인은 이번 책을 통해 어머니의 삶과 조금 거창하게 어머니의 사상을 보려고 한다. 굳이 어머니의 사상이라고 지칭하는 까닭은 한 일을 이십 년 가까이 혹은 넘게 행해 왔다면 그 자체로 사상이 몸에 밴 삶이라는 아주 단순한 생각에서다. 목수로 한평생을 사신 분들이 그 일로 생을 관통하는 법과 통하듯이 그녀들도 그렇다. 거기다가 그녀들은 ‘살림’을 실천한 분들이라는 점에서 살림의 사상이라고 부를만하다. 오랫동안 어머니 시 쓰기 공부를 가르쳐왔던 저자는 이번 책의 집필 동기를 “어머니로서 시를 쓰는 분들의 작품을 읽으며 매우 독특한 서정의 기반을 궁금하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부부싸움을 소재로 한 경우, 문제의 지점이 분명한데도 그녀들은 옳고 그름을 따지고 바로잡는 방식에서 벗어나 통째로 껴안는 방식의 서정이었습니다. 한 두 편이 그런 것이 아니라 여러 편에서 그런 양상을 보이기에 이런 독특함이 어디로부터 연원하는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고 말한다. 그래서 어떤 관념의 카테고리 안에서 시를 읽어간다기보다 시에서 생각을 파생시키고 지혜를 찾아 쌓아 가는 방식이다. 그래서 읽기에 편하다. 물론 시 읽기를 어려워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문의 시들이 하나같이 삶의 표면에서 삶과 최소의 차이로 의미를 표현하는, 이른바 생활시에 가깝다. 그러니 공통의 삶에서 나눠지는 ‘시 쓰는 엄마’와 ‘시 읽는 아빠’다. 그 둘이 만든 사이의 영토에서 살림의 법이 싱싱한 생명의 아이들이 자란다.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삶을 사랑하라’는 것 딱 하나만 온몸으로 나누는 것이다. 그 삶을 통해 축적된 삶의 지혜를 읽는 즐거움이 2009년 가을을 붉게 물들일 것이다.

주요 내용

1. 엄마는 인류를 이어가는 생명의 집이다 -조문경「생의 엄연함」
저는 남자입니다. 여자와 결혼하여 살며 아이도 낳았습니다. 하지만 뱃속에 아이를 담아 10달을 키우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여자에 대해서 그리고 ‘낳는다’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남자인 나와의 차이는 바로 이 사실에서부터라는 것입니다. 그녀는 ‘생명을 낳는다’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이 남자인 나와는 다를 수밖에 없는 근원이고, 그 다름으로 하여 늘 친밀함으로 불러야 하는 관계가 설정됩니다. 저는 여자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상식적으로 인류를 이어가기 위한 생명의 집이 여자라면 거기가 인류를 살리는 사상의 거처(居處)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 글은 이런 낭만적인 제 상식에서 시작합니다.
다음 시를 읽겠습니다.

생의 엄연함
- 조문경

눈발이 날리는 아버지 장례식 날이다
마당에서 분주하게 사람들 오가고
옆에선 자식들 서럽게 곡을 하고 있다
아버지 친구 분 내게와 위로의 말을 건넨다
입덧으로 며칠째 먹지 못하던 뱃속이다
마당 뒷켠 가마솥에 끓고 있는
소머리국밥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사람들을 빠져나와 집 뒤란에서
정신없이 먹고 나니
뱃속 아이의 발길질이 힘차다
눈발이 날리는 아버지 장례식 날이다

루크레티우스가 이런 말을 했답니다. “장례식의 비가 속에는 언제나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섞여 있는 것 아닌가.” 슬픈 노래 속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간간이 섞여 들리는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이 흘러가고 다시 오는 끊임없는 생성의 역사이고 가장 믿음직한 이 세계에서의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생성이 어디에서 이루어집니까?
위의 시는 ‘어머니 뱃속’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어떤 광경인지 볼까요?
무대는 아버지 장례식 날입니다. “마당에서 분주하게 사람들 오가고/ 옆에선 자식들 서럽게 곡을 하고” 있습니다. 화자 또한 가장 슬퍼해야 할 장본인입니다. 그런데 그런 인륜의 시간에 “입덧으로 며칠째 먹지 못하던” 임산부였던 그녀가 갑자기 “마당 뒷켠 가마솥에 끓고 있는/ 소머리국밥 냄새”에 끌립니다. 참 난감한 일이고 자신도 신기한 일입니다. 자기의 생각과 감정과 달리 어떤 보다 더 큰 힘이 작동하는 것이니 그럴 만도 합니다. 아마 뱃속의 아이가 우리 엄마 이러다간 큰일 나겠다 싶어 ‘나 저 국밥 먹고 싶어’라고 말했고, 하늘이 그렇게 하라고 엄마의 몸에게 명령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엄마로서는 거역할 수 없는 그 힘에 이끌려 “집 뒤란에서/ 정신없이” 국밥을 먹습니다. 배불리 “먹고 나니/ 뱃속 아이의 발길질이” 힘찹니다. 슬퍼야 할 시간에 뱃속을 채우면서 그녀도 묘한 느낌을 가졌을 것입니다. 도대볃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가?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일이야말로 이 세상사 무엇보다도 앞서는 “생의 엄연함”이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정말 그렇다는 듯 돌아가신 아버님도 하얀 눈을 날리며 축복하여 줍니다.
그래서 이 시를 읽으면, 여자는 사회가 만든 도덕보다 더 앞서는 생명의 생리가 작동하는 생명의 집이라는 생각이 확 꽂힙니다. 바로 그 생명의 집에 인류가 이어져 오는 생리(生理, 살리는 이치)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자의 몸은 생명의 집을 가진 덕성의 몸이라고 말해도 하나 틀리는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 삶의 지혜란 무엇보다도 그 생명의 집을 사상화 하는 것에서만 얻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3. 생명을 최고의 가치로 가진 존재다 -최영옥「내가 품은 세상」
생명의 집은 생명을 품고 생명을 낳고 생명을 기릅니다. 그러기에 생명의 집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본능적으로 생명을 아끼고, 생명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하며, 다양한 생명이 함께 살 수 있는 공간을 원합니다. 한마디로 생명 중심주의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본능은 그녀의 몸 속에 들어와 있는 ‘생명의 집’이라는 천경(天經)을 따르는 본래적인 능력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오직 생명에 대한 관심을 중심으로 자신의 삶을 구성하고 이 세상도 그렇게 디자인하려고 합니다. 물론 돈이 중심이 된 현대를 살면서 이런 관심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녀는 가능한 범위에서 만이라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김해자 시인은 이런 몸의 마음을 “영혼의 씨방”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잊을 수 없는 우주적 명령이자 본래적 능력이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이 점은 우리들의 어머니만 보아도 쉽게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저는 다음 시에서 그것을 봅니다.

내가 품은 세상
- 최영옥

바쁜 아침 시간을 보내고
내가 또 깜박잠에 빠져들었나 보다
옆 집 언니가 출근을 하려는지
현관문 여는 소리가 어수선하게 들려온다
나이 마흔이 다 되어서야
둘째 아이도 낳고 일도 가진 그 이는
늘 이 시간이면 돌 백이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기고 출근을 하기 위해
내 집 앞을 따각따각 지나쳐간다
지금 그이는 현관문을 활짝 열어 놓고
아이를 유모차에 앉히고 있는 중일 게다
그이는 늘 아이를 유모차에 앉히면서
아 궁, 하고 한 번 큰 소리로 어르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아이는 꺅 하고 웃는다 세상이
화들짝 깨어나는 순간이다 그럼 나는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
볼이 토실한 그이의 딸아이를 품에
안고 들어와 젖을 물린 채
달디단 잠 속으로 다시
빠져들고 싶어지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대문 밖의 가치들이 시시해져 버렸다
어르면 꺅 하고 목젖이 보이도록 웃는 아이의 웃음이
내가 품은 세상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시인은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 볼이 토실한 그이의 딸아이를 품에/ 안고 들어와 젖을 물린 채/ 달디단 잠 속으로 다시/ 빠져들고” 싶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별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별 이유도 없이 그런다는 점에서 그 이유는 인간의 눈에는 쉽게 보이지 않는 엄청난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정황으로 추측해보면, 시인은 아이보다는 다른 무엇의 가치를 더 앞세웠던 시절을 지나 이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안 상태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도 아니고 “어르면 꺅 하고 목젖이 보이도록 웃는 아이의 웃음이/ 내가 품은 세상의 전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어른다-꺅 하고 웃는다’ 사이에는 어떤 물질적 가치도 없습니다. 그 사이에는 문명으로 손상되지 않은 어떤 생명의 흐름만 존재합니다. ‘젖-아이의 입’ 사이도 그렇습니다. 저는 잘 모르지만 ‘생명의 방-생명’의 관계도 이럴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말로 쉽게 설명될 수도 없는 존재적 본성입니다. 시인이 그런 존재적 본성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따라서 시인이 아이를 “품에/ 안고 들어와 젖을 물린 채/ 달디단 잠 속으로 다시/ 빠져들고 싶어지는 것”은 ‘품는 것, 살리는 것, 기르는 것’의 생리적 몸이성으로 되돌아옴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여자에 대한 생각들이 어떻게 변하여도 변하지 않는 것은 생명의 집의 품어 살리는 본능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방을 가진 분들의 본능으로서 모든 사회적 가치에 토대이고 아우트라인(域)입니다. 아울러 그것이 천경(天經)을 따르는 것임으로 인류적 가치는 이 안에서만 거듭날 수 있습니다.

3. 여자에서 엄마로 태어나다 -이성이「엄마가 된다는 것」
생명의 집은 생명을 품고 생명을 낳고 생명을 기릅니다. 그래서 제2의 인생이라고 부를 만한 엄청난 변화가 따릅니다. 그이들 스스로 말합니다. 아가씨 때는 생각도 못했던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고 말퓀니다. 그런 변화가 하나같이 생명을 낳고 기르는 일을 중심으로 다 짜여집니다. 또 그런 변화가 의식적이라기보다는 본능적으로 진행됩니다.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녀의 몸 속에 들어와 있는 ‘생명의 집’이라는 천경(天經)이 작동하며 새로운 존재, 어머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다음 시를 읽으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엄마가 된다는 것
- 이성이

어느 날 글쎄
내가 아이들이 흘린 밥을 주워 먹고
먹다 남은 반찬이 아까워
밥을 한 그릇 더 먹는 거야
입고 싶은 옷을 사기 위해 팍팍 돈을 쓰던 내가
아예 옷가게를 피해가고
좋은 것 깨끗한 것만 찾고
더러운 것은 내 일이 아니었는데
그 반대가 되는 거야
아이가 사달라고 하면
줄서는 것도 지키지 않아
예전에 엄마가 그러면
엄마! 핀잔주며 잔소리를 했는데
내가 그렇게 되는 거야
아이가 까무러치게 울면
이해할 수 없어, 아무데서나 가슴을 꺼내
젖을 물리는 거야
뭔가 사라져가고
새로운 게 나를 차지하는 거야
이런 적도 있어, 초록잎이 아이에게 좋다는 말을 들었는데 아이가 아픈 거야. 그래서 공터에 가서 풀을 베다가 침대 밑에 깔아주기도 했어
엄마도 태어나는 거야

시를 읽으면 ‘그래, 엄마도 태어나는 거야’라는 마음이 저절로 들 것입니다. 그냥 엄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제 몸 안에서 엄마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생명을 낳으면서 엄마도 태어나는 것입니다. 창조와 더불어 자신도 창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과거나 유래(由來)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어릴 때 엄마가 그러는 것을 보면 “엄마! 핀잔주며 잔소리를 했는데” 이제는 천연덕스럽게 자신이 어머니의 행동을 반복합니다. 그래서 엄마는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유래를 알지 못하는 완전한 변태입니다. 그 변태는 오직 생명을 중심으로 짜여진 몸과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똥 기저귀를 빨다가도 스스로 깜짝 놀란다고 합니다. 생전 해보지 않던 짓을 소매 걷어 부치고 자기가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일상의 소소한 것을 대하는 것까지 모조리 바뀝니다. 그러니 이런 사실을 성 역할로만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런 변태를 이루는 어머니를 폄훼하는 얄팍한 생각입니다. 그녀는 성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생명 살림의 어머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3. 엄마와 아이는 ‘의하여’ 관계이다 -이장근「母子의 시간」/한영숙「우리 집이 죽었어요」/오철수「내 마음이 따뜻해지는 비밀」
생명의 법이 가득한 일상에서 생명의 아이를 기르는 살림의 엄마! 그녀는 아이의 태어남과 동시에 살림의 엄마로 태어난 존재입니다. 그래서 아이와 엄마의 관계는 매우 특이합니다. 왜냐하면 아이가 없으면 엄마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둘의 관계는 ‘위하여’의 관계라기보다는 ‘의하여’의 관계입니다. 둘이면서 하나고 하나이면서 둘인 관계입니다. 물론 많은 것을 엄마가 돌보고 해결해야 하지만, 그게 신기하게도 일방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일방적인 것 같으면서도 신기하게 일방적이지 않는 묘(妙)한 관계입니다. 주고받을 관계가 아닌 것 같은데도 주고받습니다. 때로는 아이가 엄마를 지배하는 듯도 합니다. 그래서 둘 사이의 관계는 한 몸의 두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이를 따라가면 엄마가 되고, 엄마를 따라가면 아이가 되는 그런 관계 말입니다.
다음 시를 읽어보며 그 이미지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母子의 시간
- 이장근

아내의 가슴이 울고 있다
입고 있는 면티 젖꼭지 닿은 부분이
흥건히 젖은 줄도 모르고
잠을 자고 있는 아내
때 맞춰
젖먹이 아들이 잠에서 깬다

저 母子 사이를 흐르는 시간에는
때가 살아 있구나
비워야 할 때와 채워야 할 때
가슴이 부르고 배가 부르는 때
세상의 그 어떤 시계와도
사이클이 맞지 않는
그들만의 간격으로 흐르는 시간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난 아내가
아들의 입에 젖을 물린다
쪽 쪽 쪽
태엽 감는 소리가 힘차다

“입고 있는 면티 젖꼭지 닿은 부분이/ 흥건히 젖은 줄도 모르고/ 잠을 자고 있는 아내/ 때 맞춰/ 젖먹이 아들이 잠에서” 깨어납니다. 누가 그러라고 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럽니다. 자연합니다. 엄마 젖이 차면 아이의 배는 비워져 채워야 하고, 아이의 배가 부르면 엄마의 젖은 비워져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저 母子 사이를 흐르는 시간에는/ 때가 살아 있구나/ 비워야 할 때와 채워야 할 때/ 가슴이 부르고 배가 부르는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 자연함은 ‘위하여’가 아니라 ‘의하여’의 관계입니다. ‘위하여’로 계산되지 않는 생태적 관계로서의 자연함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그 어떤 시계와도/ 사이클이 맞지 않는/ 그들만의 간격으로 흐르는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관계의 시간이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난 아내가/ 아들의 입에 젖을 물린다/ 쪽 쪽 쪽/ 태엽 감는 소리가 힘차다”의 세상을 만듭니다. 만약 그와 같은 관계로 인간 세계가 짜여진다면 가장 생태적인 세계가 될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관계야말로 생리(生理-살리는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생리가 둘 사이를 ‘서로를 부르는 관계’로 묶습니다. 둘은 각자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각자입니다. 그러니 ‘위하여’가 아니라 ‘의하여’입니다.
살림의 어머니들은 아이를 기르면서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인 관계를 자연스럽게 학습하고 실천하고 수련한 분들입니다.

5. 不一而不二사상의 부활 -김해자「연리지(連理枝)」
모든 것을 이항(二項-‘선/악’, ‘좌/우’, ‘옳음/그름’ 등)적으로 보고, 하나가 하나를 잡아먹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아니, 그것은 생명의 세계를 죽음의 세계로 만듭니다. 여성의 몸에 적힌 생명세계의 천경(天經)은 대립물이 생명의 끈으로 묶여 하나를 이루며 서로의 필요가 되는 둘일 때 온전한 유기적 생명체가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 우주가 구성된 원리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종종 ‘생명의 끈으로 묶여 하나’라는 사실을 잊습니다. 그러니 자기만 내세우게 되고요. 또 그것이 근대 이후의 삶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不一而不二라는 이미지를 마음 속에 떠올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영성을 되살리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서로가 필요의 존재임을 느끼고, 자신을 부드럽게 하여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닌, 나도 나이고 너도 너인 새로운 차원의 ‘우리’가 열립니다. 뱀과 거북이가 자기 자신이면서도 둘을 넘어서 ‘현무’라는 북쪽을 지키는 하나의 신의 차원을 갖게 되듯이, 그 안에서 비로소 뱀과 거북이가 되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不一而不二사상의 부활은 ‘나와 너’를 넘어 ‘우리’를 생각할 줄 아는 심성에 기초하고, 사실상 ‘나의 내어줌’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음 시를 보겠습니다.

連理枝
- 김해자

開心寺 오르는 길
마음의 허물 뒤집어쓴 채 洗心洞을 막 지나는데
백주대낮에 소나무 두 그루 얽혀 있다
한 놈이 한 놈의 허벅지에 다리를 척 걸친 채
한몸이 되어 있다 가만히 보니
결가부좌 튼 부처 같기도 한데 육감적인 아랫도리 위에서
어쨌거나 잔가지는 열락의 기지개 맘껏 켜고 있다
오른쪽 놈은 왼쪽으로 왼쪽 놈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전방향으로 팔을 뻗고 있다 허공 가득
푸른 탄성 내지르고 있다
다리가 하나뿐인 나무처럼 모자란 내 몸이
開心을 하는 길은 먼저 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을
내 안에 갇혀 어두운 내가 밝아지는 길은
하나인 내가 다른 하나의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인 木佛이
앞서 열어 보이고 있다

“다리가 하나뿐인 나무처럼 모자란 내 몸이/ 開心을 하는 길은 먼저 몸을 열어야 한다!”
아주 평범하지만, 이 말처럼 생명의 세계를 완벽하게 그리고 가장 단순하게 설명해주는 말도 없습니다.
직접 시인의 말을 들어보지요.
“11월 초였던가, 서산 개심사를 처음 간 게. 돌에 새겨진 '洗心洞' 표지판을 보면서 마음을 닦는다는 게 뭘까, 생각하며 오솔길을 막 지나는데, 희한한 소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한 놈은 한 놈인데, 한 놈이 아니다. 분명히 아랫도리가 둘이긴 한데 둘도 아니다. 두 놈은 각자 잘 올라가다 장딴지에서 얽혀 한 몸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놈들은 조용히 내리는 첫눈을 맞으며 마치 애무를 하듯 열락의 춤을 추는 시바신처럼 육감적이고 가부좌를 튼 비구승처럼 속(俗)을 뛰어넘은 것처럼 보였다. 순간 나라고 주장하는 아상(我相)의 허물, 끝없이 나와 너를 가르는 경계라는 게 이렇게 무너질 수도 있구나 생각했다. 결국 마음을 씻는다는 것도 끝없이 나와 내 것이라는 좁은 아상에 얽매어 번잡스런 정신을 씻어내는 게 아닐 것인가. 한 나무와 다른 나무가 서로 붙어 하나가 된 '連理枝'를 보며, 참으로 깊은 인연이란, 이렇게 나를 뛰어넘어 타자와 하나가 되는 것임을 깨달았다. 타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관념이 아니라 하나인 내가 다른 하나의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임을, 開心하지 않고서는 하나에 이를 수 없음을.”
시인도 말합니다. 不一而不二가 관념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연리지처럼 “하나인 내가 다른 하나의 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나와 내 것이라는 좁은 아상에 얽매어 번잡스러운 정신”을 씻어내는 것이 필요하고, 그때 비로소 ‘우리’라는 연리지의 차원이 생기고, “어쨌거나 잔가지는 열락의 기지개 맘껏 켜고 있다/ 오른쪽 놈은 왼쪽으로 왼쪽 놈은 오른쫂으로 방향을 틀어/ 전방향으로 팔을 뻗고 있다 허공 가득/ 푸른 탄성 내지르고 있다”의 상황이 열린다고. 따라서 不一而不二의 사상은 모두가 사는 생명의 차원을 다시 우리 마음에서 살려내는 것이라고.

11. 아이 같은 마음은 하늘의 마음 -황규관「하늘의 마음」
아이 같은 마음을 가지려는 까닭은 그때 비로소 가장 생동적이고 활동적이고 창조적인 스스로 그러함의 생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니체가 그렸던 자기극복의 3단계에서 “너는 해야 한다”(당위 sollen)는 낙타의 단계와 “나는 의욕한다”(의지 wollen)는 사자의 단계를 거쳐 비로소, 모든 죄책감과 의식의 짐으로부터 자유로운 순진무구한 상태인 “나는 존재한다”(존재 Sein)의 어린아이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 상태는 선악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기쁨과 고통, 자유와 필연 등 모든 적대적 대립을 뛰어넘어 원융적인 하나를 이루는 우주의 생리와 같습니다. 실제로 우주의 생리는 모든 반대를 동거시키고 돌아가게 하고, 그것이 역동성과 창조성이 되게 하고 그 자체가 삶입니다. 어른들처럼 절대를 고집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살리는 쪽으로 운항하게 하고 그러면서도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아이 같은 마음은 곧 하늘의 마음이 됩니다.
다음 시를 읽겠습니다.

하늘의 마음
- 황규관

흰 수캉아지 한 마리 얻어다
찬밥 말아 먹이고
가끔은 먹다 남은 생선 대가리 먹여 키우는데
아파트에서만 큰 아이들이
아주 좋아한다
엄마 아빠 집에 없어도
강아지하고 반나절은 잘 논다
그러나 강아지 혼자 토방 구석에 웅크려 있는 게
속이 짠했는지
여자 강아지 한 마리 더 사자 조른다
오늘밤에는 잠자리에 누워
강아지 한 마리 더 사올 때까지
다른 집에 데려가
그 집 강아지와 놀게 하자 한다
강아지 한 마리
그 녀석 잘 때 너무 심심할 것 같다는 게
이유란다
참, 그 마음이 하늘의 마음이다
내 삶이
닮고 싶은 마음이다 어린아이 마음이

아이 같은 마음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생각이 생을 살리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옮아가는 것입니다. 때맞춰 밥 주기 귀찮고 지저분하고 돈이 더 들고 하는 생각이 아니라 이미 친구가 되어 생기로운 생이 흐르게 하는 마음입니다. 그 커다란 하나의 원칙을 진정으로 지키기에 세세한 것은 그 안에서 원융적 하나로 됩니다. 세세한 것 하나를 절대화하여 생을 빈곤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마음처럼 커다란 하나를 지켜서 모두를 살리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교육에 의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본성의 마음, “스스로 돌아가는 바퀴”(니체)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내 삶이/ 닮고 싶은 마음이다 어린아이 마음이”라고 했을 때는 어린이가 되자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오래된 미래로서의 어린이 마음을 회복하자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삶의 세계는 냉혹합니다. 그 냉혹함이 삶을 목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삶이 목적이 됨으로서 가치는 이분법적으로 분별되고 그 중에 좋은 것(삶이라는 목적에 유익한 것)을 좇게 합니다. 그런 현실적 삶의 방편이 절대화됩니다. 이제는 그 절대화된 방편에 묶여버리게 됩니다. 삶이 갇히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특이한 삶일 뿐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는 바다를 이해할 수 없고, 여름 벌레는 겨울의 얼음을 말해도 알아듣지 못합니다(『장자』,「外篇」,「秋水」에 나오는 말). ‘아이 같은 마음’을 말하는 것은 이런 제한적 사고를 넘어서 생을 살리는 지혜로 거듭나길 바라는 것입니다.

리뷰/한줄평0

리뷰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한줄평

첫번째 한줄평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