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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의 진보
라이프니츠와 볼프의 시대 이후 독일에서 형이상학이 이룬 실질적인 진보는 무엇인가? [링크의 서문] [들어가는 말] 논문 1절. 최근에 우리들 사이에서의 선험철학의 역사 外 1절*. 순수 이성의 이론적-독단적 사용의 범위 外 2절. 라이프니츠-볼프의 시대 이후에 형이상학의 객관, 즉 형이상학의 최종목적과 관련하여 달성된 것 外 학술원 과제의 해결 I. 초감성적인 것과 관련하여 형이상학은 어떤 진보를 이룰 수 있는가? 外 II. 라이프니츠-볼프의 시대에, 도덕 신학에서의 이른바 이론적-독단적 진보 III. 라이프니츠-볼프의 시대에, 심리학에서의 이른바 형이상학의 이론적-독단적 진보 전체의 개관을 위한 후기 부록 형이상학의 진보를 위한 “낱장 문서들” 현상문제 직관 [=] 직접적 표상 철학에 대한 철학적 역사 서로 완전하게 의사소통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 학술원의 과제 발견 발견 모든 새로운 순수 이성 비판을 이전의 비판에 의해 불필요하게 만드는 발견 [들어가는 말] 1절. 대응하는 감각적 직관이 주어질 수 없는 개념들의 객관적 실재성, 에버하르트에 따른 1. 충분한 근거 개념의 객관적 실재성 증명, 에버하르트에 따른 2. 경험 대상들에서 단순자 개념의 객관적 실재성의 증명, 에버하르트에 따른 3. 감성적인 것에서 비감성적인 것으로 올라가는 방법, 에버하르트에 따른 2절. ‘어떻게 선천적 종합판단들이 가능한가?’라는 과제의 해결, 에버하르트에 따른 |
Immanuel K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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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의 진보
형이상학은...그 자체로 순수 이성 비판이 완성된 이후에야 건설될 수 있으며 건설되어야 하는 체계로서의 학문의 이념일 뿐인데, 이제 이 체계를 위한 건축 재료가 설계도와 함께 존재한다. 즉 이것은 순수 논리학과 마찬가지로 증가할 수도 증가할 필요도 없는 전체로서, 만일 여기서 자리를 찾는 데 결코 부족한 것이 없을 거미와 숲의 정령이 이곳에 둥지를 틀어 이성이 거주할 수 없게 만들지 않는다면, 계속 거주되며 수리가 되어 보존될 것이 틀림없다. 이 건물은 그다지 광대하지는 않지만, 명료함을 손상시키지 않는 정밀함에서 생겨나는 우아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영원불변하게 만들기 위해 다양한 기술자들의 결합된 노력들과 판단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따라서 형이상학의 진보들을 단지 열거할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이 거쳐 온 단계를 측정하라는 왕립 학술원의 과제는 최근의 비판의 시대에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 p.78 형이상학은 전체적으로 완벽하게 제시될 수 있는 유일한 학문이라는 점에서 모든 학문들 중에서 매우 특출한 것이어서, 더 이상 덧붙이거나 내용적으로 확장해야 할 어떤 것도 후손들에게 남아 있지 않으며, 게다가 이 학문의 이념으로부터 동시에 절대적 전체가 체계적으로 생겨나지 않는다면, 이 학문의 개념이 올바르게 파악되지 않았다고 생각될 수 있다. 그 이유는 형이상학의 가능성은 순수 이성 능력 전체의 비판을 전제하는데, 이 비판에서 이성 능력이 가능한 경험의 대상에 관계하여 선천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이나, 또는 (결과로 드러나게 될 것처럼) 똑같은 것이지만, 이 능력이 경험 전반의 가능성의 선천적 원리들에 관계하여, 따라서 감성적인 것에 대한 인식을 위해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완벽하게 설명될 수 있지만, 그러나 형이상학이 순전히 순수 이성의 본성에 의해 강제되어 초감성적인 것에 관하여 무엇을 구하는지 혹은 무엇을 또한 인식할 수 있는지는 바로 이 순수한 인식 능력의 성질과 통일에 의해서만 정확하게 제시될 수 있으며 제시되어야 한다는 점에 놓여 있다. --- p.90 발견 ≪비판≫의 진정한 의미를 그가 완전히 곡해했으며, 그 자리에 더 나은 체계를 위해 세울 수 있다고 큰소리쳤던 것이 무근거하다는 것에 관해 단지 몇 가지 증거들만이 여기서 제시될 수 있다. 왜냐하면 에버하르트의 매우 단호한 동지조차도 그의 반박들과 반대 주장들의 요인들이 서로서로 들어맞도록 연관성을 부여하는 작업에 지쳐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 p.176 우리는 이 장의 논의 전체로부터 에버하르트가 선천적 종합판단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이게 더 그럴듯한데, 독자가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의심하도록 이 개념을 고의로 헷갈리게 만들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확히 살펴보면 분석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기꺼이 종합적인 것처럼 슬그머니 넘어가게 만들고 싶어 했던 두 개의 유일한 형이상학적 실례들은 “필연적으로 참인 것들은 모두 영원하며(여기에 그는 마찬가지로 ‘불변하는’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필연적인 존재자는 불변한다”는 것이다. ≪비판≫이 그에게 진정으로 종합적인 많은 실례들을 제시해 주었음에 비해 이런 실례들이 매우 형편없는 것이라는 점은 매우 잘 설명될 수 있다. --- p.206 형이상학의 방대한 요구들을 정당화시켜 주는, 이른바 다시 재건된, 이전의 ≪순수 이성 비판≫에 대한 이런 해명만으로도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충분할 것이다. 이런 비판이 있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에버하르트에게는 이런 비판을 보고 이해하거나 비록 간접적으로라도 철학의 이런 요구들을 어느 정도 충족시키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은 충분히 명백하게 밝혀졌다. - 지금까지 자신들의 반박들에 의해 비판적 작업을 계속 진행시키려고 노력해 왔던 다른 용감한 사람들은 (어떤 형식적인 논쟁에도 결코 끼어들지 않으려는) 나의 결단의 유일한 이번의 예외를 그들의 논증들이나 그들의 철학적 명성이 나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하지는 않을 것이다. --- p.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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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이성 비판≫과 「형이상학의 진보」
「형이상학의 진보」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형이상학의 진보와 연관하여 ≪순수 이성 비판≫이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에 대한 칸트 자신의 입장이며, 다른 하나는 라이프니츠-볼프 철학으로 대변되는, 당대 학계를 지배하던 이성론 철학에 대한 칸트의 최종적인 평가이다. 칸트는 저작을 시작하면서 형이상학에서 형식적인 것과 재료적인 것을 구분한다. 전자는 형이상학에서의 이성의 수행 방식에서 형식적인 측면을 다루며, 후자는 재료적인 측면을 다룬다. 처음의 형식적인 부분에서 칸트는 ‘어떻게 선천적 종합판단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통해 순수 이성에 의한 선천적 인식의 가능성을 설명한다. 이것은 ≪순수 이성 비판≫의 「선험적 감성론」과 「선험적 분석론」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에 대한 개관이라 할 수 있다. 형이상학에서 형식적인 것에 관계하는 ≪순수 이성 비판≫은 형이상학의 정초를 목적으로 하는 형이상학의 예비학 또는 현관이라 할 수 있다. 형이상학의 예비학은 형이상학으로 나필의 예걸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진정한 형이상학에서의 실질적인 전진은 아니다. 칸트 형이상학의 토대, ≪순수 이성 비판≫을 넘어서 칸트는 본격적으로 학술원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초감성적인 것에 관련해서 형이상학은 어떤 진보를 이룰 수 있는가?’를 탐구한다. 여기서 감관의 대상들을 넘어서 있는 초감성적인 것과 관련해서는 이론적-독단적 이성 사용에 의한 인식의 확장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시금 강조한 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가지 초감성적 대상들에 대한 실천적-독단적 인식은 가능한 것이 아닌지 묻는다. 이에 대한 답은 자유로운 인정에 기초한 이성적 믿음에 의거하여 신, 자유, 영혼불멸에 대한 실천적─독단적 의도에서의 인식 가능성이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초감성적인 것에 대한 도덕적─실천적 인식이란 단지 세계 내의 모든 선의 원천이며 최종목적인 신이 현존하며, 신의 의지에 일치하는 최고선의 이념에 적합한 도덕적 행위가 세계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모든 인간에게 내세의 삶이 있다는 것에 대한 이성적 믿음일 뿐이다. 이것은 바로 칸트의 도덕 신앙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 도덕 신학을 칸트는 평범한 상식에 의해서도 파악가능한 것으로서 사변 철학으로서의 이론적 형이상학에 대해 우위를 가지는 것으로 정립한다. 이것이 바로 순수 이성의 본성에 의거한 초감성적인 것으로의 이행의 완성인 형이상학의 실천적─독단적 단계이다. ≪순수 이성 비판≫을 위한 「발견」 「발견」의 논의들은 에버하르트가 ≪철학 잡지≫에서 행한 반박의 순서에 따라 진행된다. 먼저 대응하는 감각적 직관이 주어질 수 없는 “이성의 이념”에 속하는 개념들인 충분한 근거 개념과 단순자 개념의 실재성을 증명하려는 에버하르트의 시도들을 비판하며, 다음에 종합판단과 분석판단의 구분에 대한 에버하르트의 반박에 대한 재반박 및 자신의 입장에 대한 옹호가 이어진다. 물론 칸트는 에버하르트의 논지들을 비판하면서 ≪순수 이성 비판≫의 논의틀을 넘어서는 새로운 관점을 끌어들이고 있지 않으며, ≪순수 이성 비판≫의 관점과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토대 위에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발견」은 ≪순수 이성 비판≫의 기본적인 주장들 - 예를 들자면 종합판단과 분석판단의 구분이나 순수 지성의 개념이나 순수 직관의 근원적 획득의 이론 등 - 에 대한 좀 더 명료하거나 확장된 설명을 제공해 주고 있다. 「발견」에서 이루어진 에버하르트의 논의에 대한 칸트의 비판은 주로 에버하르트가 ≪순수 이성 비판≫의 기본적인 주장들을 오해하거나 의도적으로 곡해하고 있으며, 잘못된 추론들과 고의적인 혼란을 만들어 냄으로써 ≪순수 이성 비판≫의 모든 주장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점에 놓여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