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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이·야·기 / 꺾여서 시작한다는 말
버린 것들이 돌아와 가을 한낮 에미는 어디 가고 청개구리 면벽하다 붉은머리오목눈이 어미소 자는 줄 알고 어쩌나 막내야 혼자 남은 밤 복숭아를 두고 유월 떡잎 하나 개구리 우는 밤 부직포 쓴 경운기 꼭 고만한 돌멩이들이 꺾여서 시작한다는 말 두·번·째·이·야·기 / 깡통에 담긴 우주 깡통에 담긴 우주 매화꽃이 피었습니다 개미와 내가 명함을 내밀 때 몸살 그냥 휘파람새 용두강에는 용이 없고 엄마 감자 누고 온 똥 저물 녘 함박눈 잘못 인화된 봄 시 이선길 할아버지 자전거 마술 태풍 지나간 아침 멀미 로또복권과 학교 매점 파산한 시 냉이 세·번·째·이·야·기 / 학교를 떠메고 매화나무 바이러스 낡은 사진처럼 사포 이화농원 열쇠 목걸이 막차 학교를 떠메고 고요에 새기다 사람이 사람을 만날 때 쪽파 두 줌 영산초등학교 박 선생 늦가을 은행나무 콩타작 하는 날 봉긋한 무덤 동네 쌀집 깨알같은 산에 가서 에레이 초고속 겨울 배롱나무 빈 밭 감자의 눈을 빼다 강인숙 여사님 코딱지나물 네·번·째·이·야·기 / 갠 날 걱정된다 세울이와 성중이 세울이 똥 한 대만 맞아도오 김딱지 풍선껌 인사 갠 날 누가 먹었노 오리나무 한 그루 작품해설 - 오철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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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휘파람새
일요일 나무 심는 날 아침, 전봇대 맨 위 전깃줄에서 목청 좋게 노래하던 새. 내 발자국 낌새 알고 옆집 전봇대로 휘익 날아간다. 아침마다 찾아와 노래를 불러대는 저 손님은 누굴까? 이튿날 아침에도 살포시 문 열고 노래를 엿듣는데 어찌 알고는 도망간다. 대체 누굴까? 며칠 인터넷을 뒤진다. 한국의 새. 멀리서 봐 놓으니 생긴 건 분명치 않아. 새소리 텃새 소리 듣다듣다 비슷한 걸 찾아내었다. 휘-익, 휘파람새. 아내한테 자랑을 했더니, 미숙이가 휘파람새라 그러대요. 나무 심는 날 다녀간 후배다. 어떻게 알았대? 그냥 들어보니 휘파람을 불더래요. --- p.48 꺾여서 시작한다는 말 꺾어다 꽂아 놓기만 해도 산다는 동네 사람들 말을 믿고 울타리가 될 자리에다 사철나무를 꺾어다 심었다. 날마다 물 주고 틈새는 밟아주고 내 딴에 정성을 쏟았는데 잎이 시들시들하더니 꼭지서부터 줄기까지 마르고 끝내 잎은 노랗게 떨어졌다. 꺾꽂이 때를 놓쳤나 동네사람들 말을 너무 쉽게 믿었나. 할 수 없지 뭐, 포기하고 보름도 더 지나 한 달이 되어 가는데 다 죽어가던 줄기에서 철 늦은 새 잎이 코딱지만하게 눈을 내밀고 있다. 꽂아만 놓으면 산다는 게 모가지 꺾여서 죽음 목전까지 갔다가 생의 밑바닥부터 쳐올리는 것임을 나는 통 모르고 있었다. --- p.36 깡통에 담긴 우주 사내가 껴안은 깡통에 어스름만 꼬깃꼬깃 쌓이는 지하도 입구. 먼 길 나서는 보름달이 주머니 탈탈 털어 은전 한 닢 던져넣자 우주의 귀퉁이가 이내 환해진다. --- p.41 학교를 떠메고 아침부터 웬 학교가 흔들대는가 했는데 위층 음악실에서 처녀 선생님이 아이들과 노래를 불러제끼는 거였다. 그냥 노래만 부르지 학교를 떠메고 가는 거였다. --- p.72 갠 날 아빠, 이상해요 학교 가는데 신발도 가방도 가벼워요 집 앞에서 동무 만나 재잘대며 가는데요 앞에서 꽁지머리 셋이 촐랑대고 동생과 오빠가 꼭 쥔 손도 마구 흔들려요 문구점 지날 때 형님들 둘이 탄 자전거 삐옹 삐옹 지나가고요 교문 앞 은행나무 손 흔들어 반가워하고요 참새들도 탱자나무 울타리에서 박자 맞추어 뛰어요 아빠, 오늘은 무슨 날인데 다들 저렇게 촐랑대요. --- p.1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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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 하루 내게 배달된
고요를 만져 봅니다. 이것들도 분명 향기가 있어 이렇듯 나를 홀려 놓는 겝니다. 「고요에 새기다」중에서 시인들은 지나치기 쉬운 일상을 새롭게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하루하루를 시로 태어나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시를 어렵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응인의 시를 보면 그것이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소소한 일들을 노래로 표현할 수 있는 재주를 갖고 있어, 삶의 무게에 지치기 쉬운 우리에게 친구처럼 다가온다. 마치 천진한 어린 아이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 재미가 있고, 딱딱한 사무실에 앉아 있어도 숲속에 있는 것처럼 편안함을 안겨주는 시. 「고요에 새기다」에서 시인은 어릴 적 다니던 학교에 들러본다. 책상에도 앉아 보고, 키보드도 두드려 보면서 향수에 젖는다. 아이들이 뛰어 놀아야 할 빈 교실에서 어른이 되어버린 시인의 멋쩍음은 우리의 웃음을 자아내고, 일상을 벗어나 추억으로 여행을 떠난 시인과 함께, 독자는 가 본적도 없는 교실에 앉아 있는 느낌이 든다. 그곳에 앉아 편지를 쓰며 고요 속에 고마움을 새겨 넣는 시인에게, 마치 도심에서 느낄 수 없는 반짝이는 여유를 선물 받는 것 같다. 범람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갈피를 잃은 현대인들에게 휴식을 선물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을 것이다. 또 이응인 시인은 우리에게 단순히 휴식만을 주지 않고, 소소한 일상에서 깨달은 것들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우리에게 시가 필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자연과 아이의 마음을 건네는 이응인의 시, 그의 시와 같은 일상을 선물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