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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장 자신을 믿고 인정하라 2장 결점을 극복하라 3장 원하는 일을 선택하라 4장 명확한 목표를 정하라 5장 태도가 차이를 만든다 6장 주저 말고 실행하라 7장 가치관을 확립하라 8장 절대 포기하지 말라 9장 목표를 위해 전략을 세우라 10장 신의를 저버리지 말라 11장 리더십을 확보하라 12장 리더십을 발휘하라 13장 자기 관리에 철저하라 14장 열린 자세로 소통하라 15장 에너지를 재충전하라 16장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가져라 연보 | 주註 |
Helge Hes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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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적이건 본능적이건 자신에게 맞는 일을 선택하고 자신이 잘하지 못하는 영역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는 것이 성공한 사람들의 행동에서 나타나는 주요 특징이다. 물론 그들도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오류를 깨닫는 순간 신속하게 궤도를 수정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과 다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 성공한 많은 사람은 성공 비밀을 묻는 질문에 언제나 이렇게 대답하는지 모른다. “나는 오직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합니다.” 그건 처칠도 마찬가지였다. --- p.41, 「원하는 일을 선택하라」 중에서
처칠의 리더십은 대부분 행위로 나타났고, 리더로서 탁월한 성품은 행위자이면서 동시에 아이디어 제공자 역할을 했다. 처칠 역시 아이디어의 교환과 조정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그 한계도 분명히 인식했다. 그가 최우선으로 생각한 것은 결정과 신속한 실행이었다. 역경과 문제점은 특히 위기가 닥쳤을 때 회피하지 말고 즉각 해결해야 했다. 처칠의 확신은 이랬다. “망설임 없이 즉각 대처하면 위험을 반으로 줄일 수 있다. 결코 그 어떤 것에서도 도망치지 말라. 절대로!” --- p.87, 「주저 말고 실행하라」 중에서 개인주의적 성향과 정치적 야심에도 불구하고 처칠은 언제나 동일한 가치를 고수했다. 두 차례 당적을 바꾸기는 했지만, 대영제국과 군주제에 대한 신념, 그리고 모든 국가 형태 가운데 민주주의가 최선이라는 확신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1947년 하원 연설에서 그는 특유의 표현 방식으로 그 확신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민주주의는 모든 국가 형태 가운데 최악의 형태입니다. 다른 모든 국가 형태를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민주주의적 가치를 고수하고 언제나 이 가치를 지키겠다는 목표를 직시했기에 처칠은 때로 과격한 길을 선택했고 때로 이런저런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그 흔들리지 않은 가치 때문에 결국엔 올바른 행로를 지킬 수 있었다. --- p.100, 「가치관을 확립하라」 중에서 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 10월 29일 처칠은 자신의 모교 해로 스쿨에서 연설하면서 유명한 말을 남겼다.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절대, 절대, 절대로.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중요한 일이건 하찮은 일이건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세계대전만 생각하면서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라 분명 공적인 생활과 사생활을 포함한 우리의 모든 일상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했을 것이다. 아마 처칠만큼 자신이 한 이 말을 뼛속 깊이 느낀 인물은 드물 것이다. --- p.115, 「절대 포기하지 말라」 중에서 협력자들을 선발할 때 처칠이 기준으로 삼은 것은 무엇보다 주관이 뚜렷한 성격과 지도력이었다. 그는 함께 일할 사람들에게 자신의 품성이기도 한 솔직함과 직설적인 발언을 요구했고, 그들의 그런 면모를 좋아했다. “둘이 항상 똑같은 생각만 한다면 그중 하나는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다른 각료나 장군들에게 여러 차례 이렇게 말했다. “늘 남의 의견에나 맞추고 잡음을 싫어하며 관례에 따르는 것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고.” --- p.120, 「목표를 위해 전략을 세우라」 중에서 리더는 미래를 선취할 줄 알아야하고, 미래의 발전을 알아채려고 노력해야 하며, 당면 현안을 해결할 때 현재를 넘어 미래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이 역시 한 시대를 넘어 역사적인 범주 속에서 생각하려는 처칠의 성향과 맞았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개인의 생애에 국한되지 않고 계속 영향을 끼치길 원했다. 이런 생각은 시대에 획을 그은 많은 사람들의 공통분모이다. 그런데 변화와 최신 발전에 대한 처칠의 식을 줄 모르는 관심을 역사책에 실릴 자기 모습에 대한 걱정과 직결해서 설명하는 것은 너무 짧은 생각이다. 물론 그것이 그를 이끈 추동력의 일부인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는 원래 삶과 인간, 발전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 p.125,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가져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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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는 곧 기회다!” : 위기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리더십이 절실하다
“절대 굴하지 말라NEVER GIVE UP!”를 외치며 수많은 좌절과 패배를 극복한 20세기 가장 위대한 리더 중 하나이자 당대 최고의 연설가였던 처칠, 세상을 떠난 지 40년이 지난 그를 지금 다시 언급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2차 대전 당시 정확한 정세분석과 불굴의 투지로 전 유럽을 떨게 했던 히틀러의 광기를 꺾고 영국의 승리를 이끌어냈으며, 독일의 폭격이 퍼붓는 와중에도 승리에 대한 확신을 잃지 않고 영국민들의 결전을 독려해낸 처칠의 탁월한 리더십과 카리스마는, 경제위기와 더불어 끝을 짐작하기 힘든 불안한 시대에 변화를 예견하고 대처할 비전 제시가 절실한 오늘에도 여전히 큰 의미를 지닌다. 군인이자 정치가로 협상의 대가인 조지 마셜은 “진정 위대한 지휘관은 모든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 (……)어떠한 역경에서도 승리함으로써 자기 능력을 드러내는 이야말로 진정한 리더”라고 했다. 조지 마셜의 말처럼 진정한 리더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리더이며, 지금 다시 처칠을 이야기하는 이유다. 신간 『처칠 스타일로 승부하라』는 20세기 역사의 중심에서 활약한 윈스턴 처칠의 삶을 바탕으로 수많은 위기와 패배를 겪으면서도 강력한 리더십으로 절망 속에서 희망을 캐내고 위기를 기회로 바꾼 리더의 자기경영 전략이 무엇인지 살피고 있다. “처칠 스타일”로 승부하라: 불굴의 승부사 처칠에게 배우는 리더의 자기경영 원칙 위기관리: 비관주의자는 희망 속에서 절망을 보고, 낙관주의자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본다. 처칠은 기회를 얻으면 폭발적인 힘을 발휘해 저돌적으로 그 기회를 활용해 더 큰 기회를 잡았다. 또한 기회를 잃었을 때에도 목표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장기적인 전망과 더 나아질 가능성을 주시하며 때를 기다렸다. 단 그 기다림은 언제나 능동적인 기다림이었다. 철저하게 자신을 관리하며 저술활동 등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며 새로운 기회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20대에 하원의원이 되었고, 30대에 통상장관으로 입각한 이래 내무장관, 해군장관, 재무장관 등 내각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하지만, 해군장관이던 1차 대전 중에 20여 만 명의 사상자를 낸 다르다넬스 작전 참패로 정치적 생명까지 위협 받았으며 극심한 우울증을 겪기도 했다. “황야의 시절”, 즉 1929년부터 1939년까지는 좌절과 짧은 재기의 시기이자, 정체와 끈기의 시기였다. 선거에서도 세 번이나 고배를 들었다. 정계에서 밀려나 별장에서 벽을 쌓거나 집필에만 몰두하던 시절, 그는 하루에 벽돌을 200장 얹고 낱말을 2,000개나 구술했다고 한다. 1939년 예순다섯의 나이에 2차 대전 발발과 함께 마침내 해군장관직을 다시 맡을 때까지 오랜 세월 처칠이 보여준 끈기와 인내는 가히 초인적이었다. 성공은 무엇보다 기회를 활용할 줄 알 때 찾아온다. 물론 누구나 알지만, 실제로 패배를 당한 후 다음 기회를 찾기란 어려운 법이다. 1899년 7월에 처칠은 보수당 후보로 올덤 보궐선거에 나섰다가 고배를 마셨다. 깊은 수렁에 빠진 처칠에게 그해 10월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고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899년 10월 처칠은 종군기자로 보어 전쟁에 참전했는데, 영국 장갑열차가 보어인들의 매복에 걸려 탈선했고, 그는 부상병을 구하려다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 상황에서도, 어떤 위기나 패배에도 굴하지 않고 또다시 불가능한 계획을 세워 즉시 실행에 옮기는 ‘처칠 스타일’이 발휘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4주 동안의 포로생활에서 탈출에 성공했고, 사선을 넘나든 용감한 행동으로 처칠은 영국에서 일약 영웅으로 떠올랐다. 불리한 전세로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시기에 들려온 쾌거라 그의 행위는 한층 더 부각되었다. 보어 전쟁의 경험은 새로운 책의 소재로 안성맞춤이었고, 처칠은 그 기회를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1900년 보어 전쟁에 관한 책 『런던에서 프리토리아를 거쳐 레이디스미스로』와 『이언 해밀턴의 진격』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 기회를 활용해 더 큰 기회를 잡았다. 그토록 열망하던 의원석을 다시 차지한 것이다. 1900년 10월 10일, 처칠은 고배를 마신 적이 있는 올덤 선거구에 출마해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자기경영: 자신을 믿고 인정하라, 성공의 원동력은 당신 안에 있다. 마크 트웨인은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다”라고 했다. 이는 특히 처칠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자신에 대한 믿음과 낙관적인 자기 확신’은 처칠의 성공에 가장 큰 버팀목이 되었으며, 숱한 패배와 좌절을 겪고도 다시 일어서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처칠은 어린 시절부터 규정에 ?르기보다는 자기 확신에 따라 행동하는 성향 때문에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명문 해로 스쿨에 다닐 때에도 수학과 라틴어 수업에서는 구제불능의 낙제생이었고, 크리켓과 축구경기에 동참하는 일도 드물어 늘 아웃사이더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강점과 관심에 대한 자각과 뚜렷한 목표의식으로 결점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그는 영어와 역사에 뛰어난 자질이 있었고, 역사나 전기 등의 산문에 뛰어나 『랜돌프 처칠 경』, 『말버러, 그의 생애와 시대』(4권), 『제2차 세계대전』(6권) 등을 집필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으로 노벨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처칠은 자신에 대한 과한 믿음 때문에 주변부로 내몰릴 때도 많았다. 1930년대에 히틀러에 대한 영국의 유화정책을 비난해 자신의 당 내에서조차 고립되었고, 의회 내에서도 영향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1938년 뮌헨협정 체결과 함께 유화정책을 추진한 체임벌린 수상은 대대적인 환호를 받았지만, 반면 처칠의 입지는 그야말로 설 땅이 없을 정도로 좁아졌다. 하지만 처칠은 그 협정을 완벽한 패배라고 규정했고 그로 인해 전쟁이 한층 가까워질 것이라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는 독불장군이라는 혹독한 비판을 종종 듣긴 했지만, 이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볼 수도 있다. 자신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 덕분에 남의 비판에 마음을 열 수 있었고 변화의 기회와 가능성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또 자기편에 서서 모든 결점과 장점을 받아들인 것은 처칠에게 확고한 기준점을 제공하기도 했다. 자신이 남에게 어떻게 비칠지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처칠은 새로운 세계에 더 열려 있었고, 호기심을 더 많이 발휘했으며, 더 빨리 기회를 움켜잡을 수 있었다. 소통: 열린 자세로 소통하라. 처칠에게는 리더로서 대중들의 마음을 읽고 사로잡는 능력이 있어, 위기 속에서도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그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힘을 끌어낼 수 있었다. 1940년 5월 처칠은 전시戰時 영국 내각의 총리가 되었다. 총리에 임명된 직후 하원에 출석해 “내가 국민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피와 땀과 눈물뿐입니다. (……)우리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한마디로 대답하겠습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고 승리하는 것뿐이라고”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계속되는 패배와 성과 없는 협상으로 지쳐 있던 각료들과 전 영국민들에게 승리에 대한 꺾기지 않는 의지를 천명했고, 이는 모두의 마음을 움직였다. 뿐만 아니라 처칠이 루스벨트를 완전히 영국 편으로 끌어들인 과정을 살펴보면 무척 흥미롭다. 그것은 개인적인 유대 관계에 바탕을 둔 지극히 단순한 전략의 승리였다. 처칠은 사절 외교나 회담 외교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오히려 개인적인 신뢰를 토대로 관계를 다져가는 처칠의 능력은 전쟁에서 연합군의 순조로운 활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40년 여름, 처칠은 연합 세력을 구축하고 확장하는 과정에서 미국을 연합군으로 끌어들이는 데 커다란 난관에 봉착했다. 1940년 여름, 처칠은 연합 세력을 구축하고 확장하는 과정에서 미국을 연합군으로 끌어들이는 데 커다란 난관에 봉착했다. 처칠의 전임자 체임벌린 총리는 1938년 체코 위기 때 워싱턴에서 평화협정을 맺자는 루스벨트의 제안을 거절, 뮌헨협정을 선택해 그를 불쾌하게 했다. 또한 삼선三選을 노리던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유권자들에게 약속한 상태였다. 참전에 소극적이던 루스벨트의 신뢰를 얻고 개인적인 유대 관계를 쌓기 위해 처칠은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루스벨트에게 편지를 썼고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1,000통에 가까운 편지를 주고받았다. 또한 전쟁 와중에도 루스벨트를 만나기 위해 수차례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중요한 유대관계를 위해서라면 몸을 사리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루스벨트가 처칠에게 특별히 호감을 갖지 않았지만 처칠은 친분관계를 적극적으로 이어나가려 노력했고, 자신이 있는 한 영국이 절대 히틀러 독일과 타협하지 않으리라는 결의를 루스벨트에게 전했다. 결국 처칠은 루스벨트의 신뢰를 얻었고 1941년 12월 미국은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2차 대전에 뛰어들었다. 미래에 대한 비전: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가지고 현재를 넘어 미래를 바라보라. 1951년 처칠은 두 번째 총리직을 맡으면서 일흔일곱의 나이에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열린 시각을 놓치지 않았고, 미래에 대한 대비를 총리 재임 시기(1951년~1955년)의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삼았다. 처칠은 어떤 분야에서건 항상 미래에 관심을 보였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 관심이 폭발적으로 깊어진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기술혁신과 사회발전에 단순히 활발하게 참여만 한 것이 아니라 앞장서서 이끌어갔다. 그것도 인생의 매 시기에서 그랬고, 새로운 것을 모두 자신의 일에 직접 활용하고자 했다. 1차 대전 중 해군장관으로 복무할 때 전차구조에 대한 아이디어를 냈고, 2차 대전 중 총리직을 맡았을 때에도 과감한 기술혁신을 군의 과업으로 제시할 정도로 새로운 과학기술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다. 지칠 줄 모르는 지식욕, 그와 연결된 창의력, 어떤 일이든 호기심을 가지고 꼬치꼬치 묻는 태도, 이것이 그를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로 이끈 동력이었다. 그는 과학기술의 혁신을 이끌고 활용하기 위해선 꼭 기술자가 지도자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중요한 것은 ‘자세’였다. 원자폭탄은 세계를 바꾸었고, 처칠은 그것이 새로운 시대의 예고라는 것을 즉시 알아차렸다. “미래에 대한 걱정을 미래에 대한 사고와 미래에 대한 계획으로 바꾸어라.” 이 말은 그의 두 번째 총리 재임 시기에 구호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