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는 글
아비뇽의 처녀들 〈현대 철학〉 시간과 삶의 활력 마비된 심장 / 시간의 본질 / 자유의 유령 / 두 가지 기억 / 엘랑 비탈 / 컬트 철학자 거대한 실망 세 번의 모욕 / 영혼의 고고학 / 좌절된 꿈 / 실언, 성, 농담 / 스승과 제자 / 살인의 자장가 / 〈자아〉의 귀환 / 소파 위의 종교와 문화 사태 자체로! 본질적인 것으로의 귀환 / 수학의 심리학 / 심리학과 논리학 사이 / 우편함의 본질 / 구체적 자아 / 가치의 현상학 / 생활 세계의 우선권 상징화하는 동물 서랍에서 나온 작품 / 마치 ~인 것처럼의 철학 / 실체 대신 기능 / 상징 동물 / 진보와 신화 / 자기 자신에게 눈먼 이성 / 사유의 심리 논리학 실존의 수수께끼 철학의 두 전선 사이에서 / 베르그송의 신발을 신고 / 아리스토텔레스의 재조명 / 실존을 밝히다 / 존재와 시간 / 인간이라는 문제 / 전향 / 자신의 왕국으로 이끄는 지도자: 기술과 예술 / 뉘우치지 않은 자와 네 겹의 사유 구조 사실의 토대 내 안의 신뢰할 수 있는 동물 / 우리의 생물학적 이성 / 세계의 상대성 / 유리창의 빗방울/ 세계를 정리하다 / 존재와 신 인간과 권력 폭력의 신화 / 잔여물과 파생물 / 영혼 상실과 대중문화 / 마르크스로 마르크스를 넘다 / 실천 철학 / 포드주의 시대 예술과 구원 지어낸 현실 / 정확성과 영혼 / 새로운 세계를 위한 새로운 예술 / 아직 오지 않은 존재 / 사소한 것들의 권리 / 정지 상태의 변증법 / 아우라의 상실 언어와의 투쟁 유용한 논리 기술 / 자연주의 오류 / 의식으로부터 사유의 추방 / 사고의 논리 / 각성 의 시대 유리병 속의 파리 〈통일 과학〉의 꿈 / 비트겐슈타인의 그림자 / 진리의 본질 / 질문과 답변 / 인식의 고고학 / 구불구불한 골목길 / 〈빌어먹을, 인간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게 뭐람!〉 주 참고 문헌 인명별 찾아보기 주제별 찾아보기 |
Richard David Precht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의 다른 상품
박종대의 다른 상품
|
〈흑인 가면들은…… 모든 것에, 특히 미지의 위협적인 악령들에 맞서고 있었다.〉 가면은 〈무기였다. …… 보호하는 무기이자 자유로운 독립을 돕는 도구였다.〉 반골 기질의 이 화가를 건드린 것이 바로 이 지점이었다. 그 역시 〈모든 것에 저항했고〉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독립적인 삶을 원했다. 그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아비뇽의 처녀들」은 바로 그날 떠오른 게 분명하지만, 『거기 전시된 가면들』의 형상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그게 나의 첫 엑소시즘 그림이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 젊은 스페인 화가의 이름은 파블로 피카소(1881~1973)였다. --- pp.23-24 프로이트가 잘츠부르크에서 구상한 제18강 강의안에는 저자가 자부심에 차서 자신의 중요성을 기술하는 유명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인류는 시간이 지나면서 과학으로부터 자신의 순진한 자기애에 상처를 입히는 크나큰 모욕을 두 번 감수해야 했습니다. 첫번째 모욕은 우리의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광대한 세계 체계의 미미한 일부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과학자들도 그전에 유사한 주장을 펼친 바 있지만, 우리에게 이 모욕은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의 이름과 연결됩니다. 두 번째 모욕은 생물학 연구를 통해 인간의 창조적 특권이 박탈되고, 인간은 동물계에서 유래한 존재로서 그 동물적 본성은 결코 제거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였습니다. 이 재평가는 찰스 다윈과 월리스를 비롯한 그 이전 선구자들의 영향 아래 우리 시대에도 동시대인들의 격렬한 저항을 무릅쓰고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가장 뼈아픈 세 번째 모욕은 심리학 연구를 통해 위대함에 대한 인간의 광적 집착이 받게 될 상처입니다. 이 연구는 자아가 자기 집에서조차 주인이 아니고,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내면세계에서 온 빈약한 정보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아 스스로에게 증명하고자 합니다.〉 말인즉슨 코페르니쿠스, 다윈, 그리고 프로이트, 이 세 명의 과학자가 각자의 위대한 발견으로 인류를 〈모욕〉했다는 것이다. --- pp.79-80 그 폭탄은 슈트라스부르크와 할레의 서랍 속에 서른세 해 동안 잘 숨겨져 있었다. 1911년, 이 폭탄이 마침내 터졌을 때 그걸 만든 사람은 이미 예순셋의 노인이었고, 눈도 거의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은퇴한 철학자 한스 바이힝거로서는 이걸 출판한다고 해서 더는 잃을 게 많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그의 책 『마치 ~인 것처럼의 철학Die Philosophie des Als Ob』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부제는 〈관념적 실증주의에 기반한 인류의 이론적 실천적 종교적 허구성의 체계〉였다. 그런데 바이힝거는 20대 중반에 쓴 이 청춘의 저작에 여전히 거리를 두었다. 자신과 더 이상 일치하지 않는 이 낯선 텍스트의 발행인 정도로만 이해되길 바랄 뿐이었다. --- p.165 알베르트-루트비히 대학의 새 본관은 1911년 개관 당시 이미 박물관처럼 보였다. 붉은 사암으로 지은 외관, 구리 지붕, 돔 건물과 탑(이 탑에는 실제로 불온한 학생들을 가두는 〈감옥〉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역사주의의 생생한 상징이었다. 1915년부터는 호메로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조각상이 정문을 장식했고, 서쪽 면에는 요한복음의 한 구절이 금언처럼 크게 새겨져 있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도시의 지붕 너머로 시선을 돌리면 슈바르츠발트 숲이 보였고, 자잘한 언덕들 위로 샤우인슬란트 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초에 여기 프라이부르크에서 공부하던 3천여 명의 학생들은 낭만적인 자연과 중세의 목가적인 분위기, 대도시의 대학생 문화가 한데 어우러진 풍경을 만끽했다. 그러나 이런 목가적인 분위기는 겉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시립 공원에서는 날카로운 음이 흘러나왔고, 행진곡이 귀청을 울렸으며, 공항에서는 포병 훈련이 실시되었고, 대학 역시 떠들썩한 선동의 함성으로 이런 분위기에 동참했다. 이제는 학생들의 가슴을 활짝 열어젖혀 자유롭게 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총성이었다. 우아한 정신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이들조차 열정적인 연설로 학생들을 〈숙적〉 프랑스와의 전쟁터로 내몰았다. --- p.209 이 철학들에서 인간은 사회적 영장류라기보다 마치 가끔만 무리 짓는 고독한 표범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실제 인간은 타인 없이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신이나 운명이 아닌 무리에 의해 자신의 자리를 배정받는 뼛속 깊이 사회적인 존재다. 가령 후설과 하이데거의 철학에서처럼 철학의 사회적 역할이 그렇게 강조되고 있음에도 정작 그들의 철학 안에서 사회의 역할은 미미하다. --- pp.307-308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는 1938년 케임브리지의 학생들에게 이렇게 답한다. 〈유리병에 갇힌 파리에게 거기서 나가는 길을 보여 주는 것〉이다. 빛에 현혹되어 출구를 찾지 못하는, 덫에 걸린 파리처럼 사람들은 매혹적인 표상과 개념을 찾지만, 그것들은 빛이 파리에게 그랬듯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인간을 잘못된 길로 이끈다. 반면에 철학자는 유리병의 뚜껑을 열고 사도로 이끄는 광원을 제거함으로써 사람들이 올바른 출구를 찾도록 돕는다. 그게 철학자의 임무다. --- p.479 비트겐슈타인은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에 수많은 단상을 기록했지만, 이것들을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 묶지는 않았다. 여기서도 그냥 노트와 쪽지의 형태로 남기는 것에 만족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때처럼 제2차 세계 대전에도 자원했지만, 이번에는 영국 편이었다. 한 병원에서 조수로 일하면서 항공기 제작 경험을 살려 맥박과 혈압, 호흡수, 호흡량을 측정하는 실험실 장비와 기구를 개발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케임브리지에서 4년간 더 가르친 후 쉰여덟에 조기 은퇴했다. 그러고는 말년을 아일랜드와 옥스퍼드에서 보내다가 1951년 암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친구들에게 보내는 인사였다. 〈내가 멋진 삶을 살다 갔노라고 친구들에게 전해다오.〉 --- pp.487-488 |
|
〈철학하는 철학사〉 시리즈 제4권 출간!
독일 아마존 베스트셀러 철학 분야 1위! 이 책은 철학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한 철학사서도 아니다. 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철학하는 철학사〉다! 현대 철학의 아이콘,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의 흥미진진한 서양 철학사 2015년 독일에서 첫 권이 나온 이래, 〈철학하는 철학사〉 시리즈는 서양 철학 전체를 새로 쓰는 작업을 수행했다. 한국에서도 2018년 『세상을 알라』와 『너 자신을 알라』가 잇달아 출간되며 〈철학사를 소설처럼 풀어낸다〉는 평을 얻었다. 이후 2024년 『너 자신이 되어라』로 6년 만에 돌아왔고, 이제 2년 만에 20세기 현대 철학을 다루는 『세상을 만들어라』에 이르렀다. 고대인은 세계의 질서를 발견하려 했고, 근대인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 했다. 그러나 20세기 철학자들은 전혀 다른 질문을 마주한다. 〈세계는 관찰되고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언어와 행위와 해석을 통해 만들어 가는 것이지 않은가.〉 저자는 이 책에서 20세기 철학이 왜 유독 〈구성〉과 〈해석〉, 〈언어〉와 〈실존〉이라는 개념에 매달렸는지를 역사적 격동과 철학자들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추적한다. 베르그송의 웃음, 프로이트의 무의식, 후설의 현상학, 하이데거의 존재, 그리고 언어라는 유리병에 갇힌 파리 저자는 20세기 철학사의 문을 철학자가 아닌 화가로 연다. 그 주인공은 1907년 아프리카 가면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아비뇽의 처녀들」을 완성한 피카소다. 전통적인 서양 미술이 고수해 온 원근법과 단일한 시점이 무너지고 여러 개의 시선이 한 화폭에 공존하게 된 입체주의라는 사건은, 뒤이어 등장할 베르그송의 〈시간〉과 후설의 〈다층적 의식〉, 프로이트의 〈무의식〉 등 철학 진영이 공유하게 될 인식, 즉 〈고정된 절대적 관점은 더 이상 없다〉는 공통 인식을 회화의 언어로 미리 증언한다. 이 도입부는, 이 책이 철학계를 넘어 한 시대 전체의 감각으로 철학을 다루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이어서 책이 공들여 다루는 장면은 지크문트 프로이트가 1916~1917년 겨울 빈에서 정신분석은 코페르니쿠스와 다윈에 이어 인류에게 가한 〈세 번째 모욕〉이라고 규정한 순간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 선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프로이트 이전에 이미 셸링과 카루스, 하르트만이 〈무의식〉을 이야기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프로이트가 정말 코페르니쿠스나 다윈에 견줄 개척자였는지를 되묻는 것이다. 다만 미묘한 차이는 있다. 그들에게 무의식이 신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힘이었던 데 반해,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어둡고 동물적인 것이었다. 저자는 이 차이를 통해 정신분석이라는 20세기의 신화가 조립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 다음에는 현상학의 대부 에드문트 후설이 등장한다. 〈사태 자체로!〉라는 구호 아래, 선입견을 버리고 인간 의식에 직접 주어지는 것으로부터 다시 세계를 인식하자는 제안이다. 당대 철학계의 슈퍼스타였던 베르그송과 후설의 묘한 라이벌 관계도 흥미롭다. 후설은 베르그송에 별 감흥을 얻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깊은 자아〉에 천착한다는 점에서는 그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경쟁자로 여겨진 두 철학자가 실은 같은 길잡이별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아이러니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에른스트 카시러의 〈상징 형식의 철학〉과 한스 바이힝거의 〈마치 ~인 것처럼의 철학〉이 뒤를 잇는다. 상징을 만들어 내는 동물로 인간을 재정의하는 카시러, 종교와 철학과 과학 모두가 유용한 허구 위에 서 있다고 주장하는 바이힝거가 나란히 등장하면서, 20세기 초의 철학이 〈진리〉라는 개념 자체를 다시 심문하기 시작했음을 보여 준다. 이어지는 장의 주인공은 마르틴 하이데거다. 제1차 세계 대전기의 프라이부르크에서 심장 질환으로 징집을 면한 청년 하이데거가 스콜라 철학의 실재론, 유명론 논쟁에 몰두하고 있다. 책의 초점은 〈이 청년이 어떻게 『존재와 시간』이라는 20세기의 가장 논쟁적인 저작에 도달했는가, 그리고 〈전향〉의 꼬리표가 붙은 그의 후기 사유가 그의 정치적 선택과 어떻게 얽혀 있는가〉에 있다. 철학과 정치적 책임이라는 문제가 가장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대목이다. 뒤따르는 장들은 마르크스주의가 파시즘이라는 재앙으로 굴절되는 과정을 추적하며, 그람시와 크로체를 거쳐 발터 베냐민을 주목한다. 기술적 복제 시대에 예술 작품의 〈아우라〉가 사라져 간다는 그의 진단은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 중 하나로 꼽을 만하다. 책의 문을 닫는 인물은 비트겐슈타인이다. 세계를 완벽한 논리와 명제로 서술하겠다던 『논리철학논고』의 젊은 철학적 야심은, 후기에 이르러 〈유리병에 갇힌 파리에게 나가는 길을 보여 주는 것〉이 철학의 일이라는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한다. 교사와 정원사, 병원 조수를 전전하며 철학의 언저리를 맴돈 이 기이한 이력을 두고, 저자는 〈그 방랑이야말로 그의 후기 철학이 언어 게임과 삶의 형식, 세계상이라는 개념에 이르게 된 조건이었다〉고 해설한다. 〈내가 멋진 삶을 살다 갔노라고 친구들에게 전해다오〉라는, 1951년에 비트겐슈타인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정언 명령의 확실성에서 출발한 근대 철학이, 20세기라는 극적인 드라마를 지나 자신의 말년에 이르러, 비로소 현대 철학으로 제련되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폭발한 시대, 철학자들의 삶은 어떻게 위대한 사유를 낳았는가! 철학계를 생각하면 세미나실에서 점잖게 토론하는 학자들의 모습이 떠오르지만, 이 책이 그리는 20세기 전반부는 마냥 평온하지 않다.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의 낙관, 1914년과 1939년의 두 차례 세계 대전, 그 사이에 짧게 존재했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 실험과 좌절, 나치즘과 파시즘의 부상 등 시간을 이 책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철학자가 온몸으로 통과했다. 베르그송은 나치에 복무한 프랑스 비시 정권이 유대인 등록을 강행하자 개종 계획을 접고 스스로 〈학자, 철학자, 유대인〉이라 써서 등록했으며, 강제 이송을 겨우 피하고 얼마 뒤 기관지염으로 눈을 감았다. 프로이트는 나치를 피해 런던으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으로서 나치당에 입당했다. 저자는 이 철학자들의 사유를 시대와 분리된 순수한 논증의 결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이 몸담았던 대학과 도시, 그들이 내린 정치적 선택을 총체적으로 서술하며, 20세기 철학이 왜 그토록 언어의 확실성과 존재의 근거를 캐물었는지 설득력 있게 그려 낸다. 〈철학하는 철학사〉 시리즈의 미덕은 철학자를 연대순으로 나열하고 학파와 사조로 분류하는 대신, 인물들 사이의 호의, 경쟁, 오해 등 관계성을 통해 각자의 사상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데 있다. 베르그송과 프로이트가 같은 해에 각자의 대표작을 준비하던 사정, 후설의 제자였던 하이데거가 스승과 결별하기까지의 과정, 빈학파의 논리 실증주의자들이 비트겐슈타인이라는 반쯤 신화적인 인물을 오독하고 다시 이해해 나간 궤적이 뒤엉켜 한 시대를 흔든다. 〈세상을 만들어라〉는 철학사를 인물 중심의 지적 드라마로 읽고 싶은 독자, 대학 교양 철학 강의에서 스치듯 배운 이름들이 실제로 누구였는지 궁금했던 독자 모두에게 〈위대한 지적 성취〉로 통하는 탁월한 입구가 되어 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