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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존재의 탐구
제1부 무의 문제 제1장 부정의 기원 제2장 자기기만 제2부 대자존재 제1장 대자의 직접적 구조 제2장 시간성 제3장 초월 제3부 대타존재 제1장 타자의 존재 제2장 신체 제3장 타자와의 구체적인 관계 제4부 가짐, 함 그리고 있음 제1장 있음과 함: 자유 제2장 함과 가짐 결론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고유명사) 찾아보기(서명) |
Jean Paul Sar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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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자유는 인간의 본질에 선행하며, 인간의 본질을 가능케 한다. 인간 존재의 본질은 인간의 자유 속에서 정지 상태에 있다. 따라서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것을 인간실재의 존재와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존재와 인간의 ‘자유로움’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따라서 인간 존재를 엄밀하게 해명한 뒤에라야 남김없이 다룰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하나의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자유를 무의 문제와 연결해서 다루어야 하고, 자유가 철저하게 무의 나타남을 조건짓는 한에서 자유를 다루어야 한다.
--- 「제1부 제1장 ‘부정의 기원’」 중에서 카페 종업원은 잉크병이 잉크병으로 있고, 컵이 컵으로 있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직접적으로 카페 종업원일 수는 없다. 그가 자신의 신분에 대해 반성적 판단이나 개념을 형성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이 “의미하는” 것을 잘 안다. 5시에 일어나야 하는 의무, 가게 문을 열기 전에 가게를 청소해야 하는 의무, 커피 주전자를 준비해 두어야 하는 등의 의무가 그것이다. 그는 자신의 신분에 내포된 권리도 인지하고 있다. 팁을 받을 권리, 노동조합에 가입할 권리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개념, 이 모든 판단은 초월적인 것을 가리킨다. 추상적인 가능성들, “권리의 주체”에게 주어지는 권리들과 의무들이 문제이다. 내가 그것으로 있어야 하지만 내가 그것으로 있지 않는 것은 바로 이 주체이다. 이것은 내가 그 주체로 있기를 원하거나 이 주체가 어떤 다른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 주체의 존재와 나의 존재 사이에 공통의 척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 주체는 다른 사람들과 나 자신에게도 하나의 “표상”이다. 이것은 내가 표상에서만 주체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해, 만일 내가 나를 그 주체로 표상한다면, 나는 결코 그 주체가 아니고, 대상이 주체로부터 분리하는 것처럼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의해 그 주체로부터 분리된다.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그 주체로부터 나를 고립시킨다. 나는 그 주체로 있을 수 없다. 나는 내가 그 주체로 있음을 연기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나는 내가 그 주체로 있음을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이런 주체에 무로 영향을 주게 된다. [그 결과] 내가 아무리 카페 종업원의 직분을 완수해도 소용이 없다. 나는 배우가 햄릿인 것과 마찬가지로 다만 중립적인 방식으로만 카페 종업원일 수 있을 뿐이다. --- 「제1부 제2장 ‘자기기만’」 중에서 무는 존재의 고유한 가능성이고, 그 존재의 유일한 가능성이다. 더욱이 이 근원적인 가능성은 이것을 실현하는 절대적 행위 속에서만 나타날 뿐이다. 무는 존재의 무이므로, 존재 자체에 의해서만 존재에 도래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무는 인간실재라는 특이한 하나의 존재에 의해 존재에 도래한다. 하지만 이 존재는, 그것이 그 자신의 고유한 무의 근원적 기투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닌 한에서, 자기를 인간실재로 구성한다. 인간실재는 자신의 존재 속에서, 그리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존재의 한복판에서의 무의 유일한 근거인 한에서만 존재이다. --- 「제2부 제1장 ‘대자의 직접적 구조’」 중에서 내가 “나는 미남이 아니다.”라고 말할 때, 나는 전적으로 구체적인 것으로 포착된 나에 대해 어떤 하나의 덕성을 부정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또 이로 인해 이 덕성은 무로 이행하지만 나의 존재의 긍정적인 총체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다(내가 “꽃병은 희지 않고 회색이다.”라거나, “잉크병은 책상 위에 있지 않고 벽난로 위에 있다.”라고 말할 때처럼 말이다). 나는 “미남이 아님”이 나를 나의 내면으로부터 특징짓는 일종의 부정적인 덕성이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부정성인 한에서 “미남이 아님”은 나 자신의 하나의 실재적인 성질이다. 그리고 이 부정적인 성질은 나의 비관적인 심정과 마찬가지로, 예컨대 나의 사교 생활의 실패를 설명해 줄 것이다. 우리는 내적 부정을 통해 두 존재 사이에서 한쪽의 존재[대자]에 의해 부정되는 다른 쪽의 존재[즉자]가, 자신의 부재 자체에 의해 자신의 본질 한가운데에서 다른 한쪽의 존재[대자]를 질적으로 규정하는 관계로 이해한다. 이때 부정은 하나의 본질적인 존재 연결이 된다. 왜냐하면 부정이 가해지는 존재 중 적어도 한쪽은 다른 한쪽을 지시하고 있고, 또 그 다른 한쪽을 하나의 부재로 자신의 중심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 「제2부 제3장 ‘초월’」 중에서 타자는 내가 아닌 자이며, 내가 그것으로 있지 않은 자이다. 이 있지-않은(ne-pas)은 타자와 나 자신 사이에 주어진 분리의 요소로서의 하나의 무를 가리킨다. 타자와 나 자신 사이에는 하나의 분리의 무가 있다. 이 무는 그 근원을 나 자신에서 이끌어 내는 것도 아니고, 타자에게서 이끌어 내는 것도 아니며, 타자와 나 자신 사이의 상호적 관계에서 이끌어 내는 것도 아니다. 이와 반대로 이 무는 관계의 원초적 부재로서, 근원적으로 타자와 나 자신 사이의 모든 관계의 근거이다. 그 이유는 사실 타자는 내가 하나의 신체를 지각하는 기회에 경험적으로 나에게 나타나는 자이며, 이 신체는 나의 신체에 외면적인 하나의 즉자이기 때문이다. 이 두 신체를 결합시키고 분리시키는 관계의 유형은 상호 간에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는 사물의 관계로, 그리고 주어져 있는 한에서의 단순한 외면성으로서의 공간적인 관계이다. --- 「제3부 제1장 ‘타자의 존재’」 중에서 나는 영구히 나의 본질 저편에, 나의 행위의 동인이나 동기 저편에 존재하도록 선고를 받았다. 즉 나는 자유롭도록 선고를 받은 것이다. 이것은 나의 자유에 대해 우리는 자유 그 자체 외의 다른 한계를 발견하지 못할 것임을 의미한다. 또는 이렇게 말하면, 우리에게는 자유롭기를 그만둘 자유가 없다. 대자가 자기의 고유한 무를 자신에게 숨기고, 또 즉자를 자기의 참된 존재 방식으로서 자신에게 합체하려고 하는 한에서, 대자는 또한 자기의 자유도 자신에게 숨기고자 시도한다. 결정론의 깊은 의미는 우리 내부에 단층 없는 하나의 즉자적인 존재 연속을 설정하는 것이다. 결정론적 견지에서 보면 심적 사실, 다시 말해 주어진 충만한 실재로 생각된 동인은, 계속성에 대한 해결책이 없어도 마찬가지로 심적 소여로서 생각된 결정과 행위와 연결된다. 즉자가 그 모든 “자료(data)”를 차지한다. 원인이 그 결과를 초래하듯이, 동인은 행위를 유발한다. 모든 것은 실재적이고, 모든 것은 충만해 있다. 이렇게 해서 자유의 거부는 자기를 즉자존재로 파악하려는 시도로서만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자유의 거부와 자기를 즉자존재로서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는 짝을 이룬다. 인간실재는 자기 자유의 승인을 끊임없이 거부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자기 존재에서 그 자유가 문제 되는 하나의 존재이다. --- 「제4부 제1장 ‘있음과 함: 자유’」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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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다는 것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은 것이다.” 시대의 지식인 사르트르, 존재의 탐구를 통해 현실에 참여할 발판을 놓다 20세기는 폭력의 세기였다. 인간의 문화가 절정에 이른 19세기에 ‘현대’는 빛나 보였다. 그러나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연이어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인류는 사상 최악의 위기에 치닫는다. 세계를 재편하는 전쟁과 사상의 충돌 속에 에워싸여 사르트르는 살아갔다. 『존재와 무』에서 탐구 대상은 고립된 인간이다. ‘나 대 타자’의 관계 정립에 머무는 개인.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어떻게 그토록 잔인할 수가 있는가? 인간이 스스로 칭송했던 위대함과 존엄성은 사라져 버렸는가? 인간은 이성의 주체가 아니라 비인간성의 심연에서 허우적거리는 존재에 불과한 것인가? 『존재와 무』는 이런 질문을 파고드는 장대한 존재론이다. “인간으로부터는 존재만이 나올 뿐이다.” 이로부터 벗어나려면, 인간은 자신을 존재의 바깥에 놓아 존재의 구조를 약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존재를 무화(無化)하는 것이다. 이처럼 현상을 넘어서 본질로 나아가는 하이데거의 ‘현존재’를 사르트르는 ‘인간실재’로 바꿔 쓴다. “인간실재가 자신을 고립시키는 무를 분비하는 가능성”은 있다. “그것이 바로 자유(liberte)이다.” 즉자존재에 머물 수 없는 대자존재로서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 존재의 탐구는 단지 사변적이지만은 않다. 카페의 종업원이 아무리 종업원다움을 연기하려고 해도 끝끝내 종업원 자체일 수는 없다는 『존재와 무』의 유명한 예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을 설명한다. 자기기만이라는 사태에서부터 불안으로부터의 도피, 슬픔·질투·수치와 같은 감정, 사랑과 성욕과 마조히즘의 문제까지 이 책이 다루는 모든 주제는 우리가 견디고 초월하는 삶의 문제다. 사르트르 후기 사상의 대표작 『변증법적 이성 비판』 번역에 참여하고 ‘시선’과 ‘폭력’을 중심으로 사르트르를 연구해 온 한국사르트르연구회의 변광배는 5년 만에 내놓는 이번 번역본에서 철학적 이론과 문학적 서술의 정교한 번역을 위해 고심했다. 프랑스 갈리마르에서 나온 1994년 신판을 저본으로 삼아 처음으로 선보이는 완역 한국어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