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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차 례
블레즈 파스칼
쇠렌 키르케고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프리드리히 니체
카를 야스퍼스
마르틴 하이데거
가브리엘 마르셀
장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알베르 카뮈
책 소개
엮고 옮긴이 후기
출처

저자 소개11

마르틴 하이데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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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in Heidegger (1889~1976)

독일 남부 슈바르츠발트의 작은 마을 메스키르히에서 태어나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전공한 후, 마르부르크대학과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다가, 1976년 타계하였다. 하이데거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이성 일변도로 치닫던 서구의 전통철학을 뒤흔든 20세기 사상계의 거장이며, 현대철학 및 정신문화 전반에 걸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존재론적 차이에 대한 하이데거의 통찰은 데리다의 차연사상의 모태가 되어,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 구조주의에게 막강한 영향을 주고 있다. 더 나아가 그의 사상은 마르쿠제와 하버마스의 비판이론 및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에도 직접
독일 남부 슈바르츠발트의 작은 마을 메스키르히에서 태어나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전공한 후, 마르부르크대학과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다가, 1976년 타계하였다.
하이데거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이성 일변도로 치닫던 서구의 전통철학을 뒤흔든 20세기 사상계의 거장이며, 현대철학 및 정신문화 전반에 걸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존재론적 차이에 대한 하이데거의 통찰은 데리다의 차연사상의 모태가 되어,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 구조주의에게 막강한 영향을 주고 있다. 더 나아가 그의 사상은 마르쿠제와 하버마스의 비판이론 및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에도 직접적으로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의 사상은 문학, 예술론, 언어학, 인간학, 생태학 등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기에, 그의 사상을 일별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20세기 정신문화에 대해 논할 수 없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이다.

주요 저서로는 『존재와 시간』, 『철학에의 기여』, 『숲길』, 『이정표』, 『강연과 논문』, 『동일성과 차이』, 『언어로의 도상에서』, 『니체』, 『초연한 내맡김』, 『사유의 경험으로부터』, 『사유의 사태로』 등이 있으며, 1973년부터 그의 강의록이 전집으로 간행되어 현재까지 약 100권이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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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즈 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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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ise Pascal

1623년 프랑스 오베르뉴 지방 클레르몽페랑에서 태어났다. 짧은 생을 살았으나 수학과 과학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천재 과학자이며, 인본주의의 거센 물결 속에서 격변의 시대를 산 지식인이었다.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와 신앙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거쳐 1654년 11월 23일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회심한다. 이후 파스칼은 기독교 신앙을 구시대의 유물로 여기고 미신적이고 반(反)이성적이며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종교라고 여기는 동시대 교양인들에게 이성의 밝은 빛 속에서 신앙을 다시 소개할 필요성을 느껴 『팡세』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메시지의 핵심은 간단하
1623년 프랑스 오베르뉴 지방 클레르몽페랑에서 태어났다. 짧은 생을 살았으나 수학과 과학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천재 과학자이며, 인본주의의 거센 물결 속에서 격변의 시대를 산 지식인이었다.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와 신앙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거쳐 1654년 11월 23일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회심한다. 이후 파스칼은 기독교 신앙을 구시대의 유물로 여기고 미신적이고 반(反)이성적이며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종교라고 여기는 동시대 교양인들에게 이성의 밝은 빛 속에서 신앙을 다시 소개할 필요성을 느껴 『팡세』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메시지의 핵심은 간단하다. 하나님 없는 인간이 매우 비참하며 하나님과 함께할 때 비로소 모든 불행과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찍부터 병고에 시달리며 살았던 파스칼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력을 다하여 이 작품을 작성했지만, 완성하지 못하고 1662년 39세의 이른 나이로 소천(召天)한다.

길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수학, 물리학, 신앙적인 변증과 문학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열두 살에 혼자 힘으로 유클리드 기하학 12번 명제를 증명해 냈으며, 몇 년 뒤 파스칼정리를 담은 수학 논문 『원추곡선론』을 발표했다. 컴퓨터의 기초가 된 계산기를 발명하고, 근대 확률 이론의 기초를 세운 천재 수학자다. 또한 오늘날 자동차나 비행기 기술에 꼭 필요한 이론인 ‘파스칼의 원리’를 발견한 물리학자요, 후대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 철학자였으며, 합승 마차 체계라는 오늘날의 대중교통 개념을 창시한 사람이기도 하다.

『팡세』를 제외한 주요 작품으로 『원추곡선론』 『유체 평형과 대기 압력론』 『기하학 정신 논고』 『예수 그리스도 생애 약전』 『은총론』 『드 사시와의 대화』 『죄인의 회심에 관하여』 『병의 선용을 위한 기도』 『프로뱅시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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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렌 오뷔에 키르케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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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ren Aabye Kierkegaard

쇠렌 키르케고르는 1813년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부유한 가정의 아버지 미카엘 페더르센 키르케고르와 어머니 아네 쇠렌다테르 룬 키르케고르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엄격한 기독교적 분위기 속에서 부친으로부터 철학적 상상의 즐거움을 배우며 동부 시민 학교에 다녔다. 키르케고르는 그곳에서 라틴어와 역사에 뛰어난 실력을 보인다. 그 후 성장하여 1830년 아버지 미카엘과 형 페테르의 권유에 따라 코펜하겐 대학교에 입학하고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신학부에 들어간다. 대학교에 들어간 이후 키르케고르는 방탕한 생활을 하며 ‘기독교는 광기’라고 말하고 기독교와 멀어진다. 그러다
쇠렌 키르케고르는 1813년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부유한 가정의 아버지 미카엘 페더르센 키르케고르와 어머니 아네 쇠렌다테르 룬 키르케고르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엄격한 기독교적 분위기 속에서 부친으로부터 철학적 상상의 즐거움을 배우며 동부 시민 학교에 다녔다. 키르케고르는 그곳에서 라틴어와 역사에 뛰어난 실력을 보인다. 그 후 성장하여 1830년 아버지 미카엘과 형 페테르의 권유에 따라 코펜하겐 대학교에 입학하고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신학부에 들어간다. 대학교에 들어간 이후 키르케고르는 방탕한 생활을 하며 ‘기독교는 광기’라고 말하고 기독교와 멀어진다. 그러다 대학 생활 도중 그의 관심은 신학에서 문학으로, 문학에서 다시 철학으로 옮겨갔다. 그는 지적 생활을 동경해 문학 · 음악 · 오페라 등을 가까이하고 산책을 즐기며 사상을 키웠다. 27세 되던 1840년 코펜하겐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레기네 올센을 만나 청혼한다. 다음 해 1841년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결혼에 환멸을 느끼고 이유를 밝히지 않고 일방적으로 레기네에게 했던 청혼을 파기한다. 그 후로 키르케고르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녀와의 결별 이후 키르케고르는 여러 가명을 사용해 『이것이냐 저것이냐』 『공포와 전율』 『불안의 개념』 등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거의 모든 작품을 가명(假名)으로 발표하고 발표한 작품이 자기가 원저자라고 밝혀진 후에도 계속 가명을 사용했다. 그가 모든 작품에 ‘단독자(單獨者)’를 이상적 인간형으로 삼는다. 그는 객관적인 진리 따위는 아무런 가치가 없고 ‘자기’라는 개체로서의 작은 인간, 둘도 없는 오직 하나의 인간, 이것이 그에게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라는 단독자의 가장 절실한 혼(魂)의 문제를 파헤치고 기독교인들의 허위와 죄악을 비판하고 기독교의 정화를 위해 힘썼다. 그러다 가명으로 책을 출판했던 것이 탄로나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사람들에게 큰 비난을 받는다. 그 후 자신이 가명으로 글을 쓸 수밖에 없던 이유를 신문에 기고하고 덴마크 기독교 사회를 비난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저작 활동을 하고 평생 직업을 갖지 않았다. 그러다 1855년 10월 2일 42세 때 거리에서 쓰러져 프레데릭 병원에 입원하고 11월 11일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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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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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DФёдор Михайлович Достоевский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소설가이다. 반 독자들에게는 언젠가는 읽어야 할 작가, 평론가들에게는 가장 문제적인 작가, 문인들에게는 영감을 주는 작가 제1순위로 꼽히는, 그 영향력에 있어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전무후무한 작가이다. 풀 네임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는 1821년 10월 30일(신력으로는 11월 11일) 군의관이었던 미하일 안드레예비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모스크바 빈민 병원에서 일했으며, 잔인할 정도로 엄격한 성격의 소지주였다. 종교적이고 온화한 성격의 어머니와는 달리, 잔혹한 아버지의 이미지는 도스토옙스키에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소설가이다. 반 독자들에게는 언젠가는 읽어야 할 작가, 평론가들에게는 가장 문제적인 작가, 문인들에게는 영감을 주는 작가 제1순위로 꼽히는, 그 영향력에 있어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전무후무한 작가이다. 풀 네임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는 1821년 10월 30일(신력으로는 11월 11일) 군의관이었던 미하일 안드레예비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모스크바 빈민 병원에서 일했으며, 잔인할 정도로 엄격한 성격의 소지주였다. 종교적이고 온화한 성격의 어머니와는 달리, 잔혹한 아버지의 이미지는 도스토옙스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쳐, 그의 작품 속 아버지들은 처음부터 부재하거나, 무능하거나, 잔학하여 자신의 자식들을 길거리로 내몰아 몸을 팔게 하거나, 자식들에게 살해당하거나, 아니면 그 자신이 자녀에 대한 육체적, 정신적, 심지어 성적인 폭군으로 등장하거나 한다.

도스토옙스키가 태어나고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은 그의 아버지가 의사로 일하던 모스크바 빈민 병원이었는데, 그 병원의 많은 환자들은 모두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으며, 어린 도스토옙스키는 이들과 대화하기를 즐겼다. 그때의 경험과 배움은 평생의 문학적 자산이 되었다. 가난의 심리학의 대가가 될 씨앗이 여기서부터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작가 스스로도 평생을 가난의 굴레에서 허덕였다. 그는 돈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결코 “현실적”이지 못했던 사람이고, 자신이 감당할 능력이 있건 없건 간에 떠넘겨지는 짐을 사양할 줄 몰랐다. 페테르부르크 공병학교를 졸업했지만 문학의 길을 택한 뒤, 첫 작품 『가난한 사람들』(1846)로 당시 러시아 문단의 총아가 되었다. 당시 비평계의 거물이던 벨린스키에게 ‘새로운 고골’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어서 『분신』, 『주부』, 『백야』, 『네트치카 네즈바노바』 등을 집필하면서 혁명가들과 교루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1846년)에는 작가의 가난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과 가난이 인간 심리와 삶에 끼치는 영향들, 그리고 가난하고 핍박받는 자들에 대한 강한 동정심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소설은 당대 최고의 문학 비평가 베를린스키로부터 “러시아 최초의 사회 소설”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런 젊은 날의 도스토옙스키에게 형제애 속에서 모두가 풍요롭게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르치는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의 모임인 페트라솁스키 서클은 목마른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반가운 만남이었다. 하지만 차르 니콜라이 1세의 반동 정치하에서는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뿐만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유토피아 등에 대해 토론하는 것, 금지 서적을 읽는 것들만으로도 총살감이었다. 1849년부터 공상적 사회주의의 경향을 띤 페트라셰프스키 모임에 출입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고골에게 보내는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된 도스토옙스키는 사형은 간신히 면했으나 시베리아로 끌려갔고, 4년간의 감옥 생활과 또 4년간의 유형이 끝난 후, 도스토옙스키의 인간관 및 세계관은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 있었다.

1840년대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지향했던 도스토옙스키는 1860년대 완전히 극우 보수주의자(슬라브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유형을 마치고 돌아온 작가는 1861년 러시아의 문화적 정치적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그의 형 미하일과 함께 잡지 [시대(Время)]를 창간했고, 1863년 [시대]지가 정치적 이유로 발행정지 조치를 받게 되어 폐간된다. 이듬해 형 미하일과 함께 두 번째 잡지, 더욱더 극우적이고 슬라브주의적인 잡지 [세기(Эпоха)]를 발간하여, 그 첫 호에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발표한다. 1861년 『학대받은 사람들』을 발표하면서 문단으로 복귀했다. 1866년, 후에 그의 부인이 된 속기사 안나를 고용하여 『노름꾼』과 『죄와 벌』을 속기하게 하여 발표하고, 1868년 그리스도를 닮은 “긍정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그리고자 한 『백치』를, 1872년 『악령』을, 죽기 한 해 전인 1880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모두 [러시아 통보]에 발표했다. 『죄와 벌』은 가난하고 약한 자의 고통과 굴욕을 리얼하게 묘사한 걸작이며, 만년의 미완성 대작인 『카라마조프의 형제』(1880) 또한 당시 러시아 사회의 실상을 여실히 그리면서 종교와 인간의 본질을 헤집는다. 그는 세계 문학 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체호프, 헤밍웨이 같은 작가들부터 니체와 후대의 실존주의 사상가들에 이르기까지 후세에 광범위한 영향을 주었다. 이렇게 해서 세계문학사 중 가장 위대한 작가 도스토옙스키는 1881년 1월 28일, 폐동맥 파열로 사망했으며 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르 네프스카야 대수도원 묘지에 안치되었다.

러시아 철학자 니콜라이 베르댜예프가 말한 것처럼, 도스토옙스키라는 작가를 낳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지구상에 러시아인의 존재 이유는 충분하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제대로 접한 독자라면 베르댜예프의 이 말에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문학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그의 작품을 통해 니체에서 현대의 실존주의로까지 그의 사상적 계보가 이어지고 있다. 선과 악, 성(聖)과 속(俗), 과학과 형이상학의 양극단 사이에서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사상가로서 도스또예프스끼는 당대에 첨예하게 대립했던 사회적, 철학적 문제들을 진지하게 제기하고 숙고한다. 이러한 그의 자세는 21세기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도 변치 않는 삶의 영원한 가치를 전해 준다.

‘넋의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정치적·사회적으로 복잡화된 인간의 내면 심리를 그려내며 근대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농노제적 구질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들어서는 과도기 러시아의 시대적 모순을 자신의 작품 세계에 투영하면서 20세기의 사상과 문학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으로 『지하생활자의 수기』,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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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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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edrich Nietzsche, Friedrich Wilhelm Nietzsche,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19세기 독일의 철학자이자 음악가, 문학가이다. 1844년 독일 작센주 뢰켄의 목사 집안에서 출생했고 어릴 적부터 음악과 언어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집안 영향으로 신학을 공부하다가 포이어바흐와 스피노자의 무신론적 사상에 감화되어 신학을 포기했다. 이후 본대학교와 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언어학과 문예학을 전공했는데 박사 논문을 제출하기 전에 이미 명문대인 스위스 바젤대학교에 초빙될 만큼 뛰어난 학생이었다. 1869년부터 스위스 바젤대학교에서 고전문헌학 교수로 일하던 그는 1879년 건강이 악화되면서 교수직을 그만두었다. 편두통과 위통에 시달리는 데다가 우울증까지 앓았지만
19세기 독일의 철학자이자 음악가, 문학가이다. 1844년 독일 작센주 뢰켄의 목사 집안에서 출생했고 어릴 적부터 음악과 언어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집안 영향으로 신학을 공부하다가 포이어바흐와 스피노자의 무신론적 사상에 감화되어 신학을 포기했다. 이후 본대학교와 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언어학과 문예학을 전공했는데 박사 논문을 제출하기 전에 이미 명문대인 스위스 바젤대학교에 초빙될 만큼 뛰어난 학생이었다.

1869년부터 스위스 바젤대학교에서 고전문헌학 교수로 일하던 그는 1879년 건강이 악화되면서 교수직을 그만두었다. 편두통과 위통에 시달리는 데다가 우울증까지 앓았지만 10년간 호텔을 전전하며 저술 활동에 매진했다. 겨울에는 따뜻한 이탈리아에서 여름에는 독일이나 스위스에서 지내며 종교, 도덕 및 당대의 문화, 철학 그리고 과학에 대한 비평을 썼다. 그러던 중 1889년 초부터 정신이상 증세에 시달리다가 1900년 바이마르에서 생을 마감했다.

니체는 인간에게 참회, 속죄 등을 요구하는 기독교적 윤리를 거부했다. 본인을 ‘망치를 든 철학자’라고 부르며 규범과 사상을 깨려고 했다. “신은 죽었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라고 한 그는 인간을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주체와 세계의 지배자인 초인(超人)에 이를 존재로 보았다. 초인은 전통적인 규범과 신앙을 뛰어넘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인간을 의미한다. 니체의 이런 철학은 바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집대성됐고 철학은 철학 분야를 넘어 실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에까지 영향을 크게 미쳤다.

『비극의 탄생』(1872)에서 생의 환희와 염세, 긍정과 부정 등을 예술적 형이상학으로 고찰했으며, 『반시대적 고찰』(1873~1876)에서는 유럽 문화에 대한 회의를 표명하고, 위대한 창조자인 천재를 문화의 이상으로 하였다. 이 사상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878~1880)에서 더 한층 명백해져, 새로운 이상에의 가치전환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여명』(1881) 『즐거운 지혜』(1882)에 이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1885)를 펴냈는데 ‘신은 죽었다’라고 함으로써 신의 사망에서 지상의 의의를 말하고, 영원회귀에 의하여 긍정적인 생의 최고 형식을 보임은 물론 초인의 이상을 설파했다. 이 외에 『선악의 피안』(1886) 『도덕의 계보학』(1887)에 이어 『권력에의 의지』를 장기간 준비했으나 정신이상이 일어나 미완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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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야스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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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l Jaspers

‘실존철학’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하고 ‘실존철학’을 제목으로 하는 책을 최초로 쓴 독일의 철학자다. 실존철학은 물론 심리학, 정신의학, 정치철학, 세계철학사 등에 대한 열정적인 연구를 기반으로 여러 저작을 남겼다. 그가 28세에 쓴 『정신병리학총론』은 아직까지도 정신병리학의 교과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의학을 먼저 전공하고 심리학, 철학으로 연구 영역을 확장해온 독특한 이력은 그가 철학을 하기 위해 일부러 선택한 과정이었다. 야스퍼스 스스로 의학과 자연과학을 섭렵한 자신에게서는 철학이 살아 숨 쉴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이력 덕분에 과학자들에게는 철학자로 여겨지고 철
‘실존철학’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하고 ‘실존철학’을 제목으로 하는 책을 최초로 쓴 독일의 철학자다. 실존철학은 물론 심리학, 정신의학, 정치철학, 세계철학사 등에 대한 열정적인 연구를 기반으로 여러 저작을 남겼다. 그가 28세에 쓴 『정신병리학총론』은 아직까지도 정신병리학의 교과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의학을 먼저 전공하고 심리학, 철학으로 연구 영역을 확장해온 독특한 이력은 그가 철학을 하기 위해 일부러 선택한 과정이었다. 야스퍼스 스스로 의학과 자연과학을 섭렵한 자신에게서는 철학이 살아 숨 쉴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이력 덕분에 과학자들에게는 철학자로 여겨지고 철학자들에게는 과학자로 여겨지는 곤란함을 겪었다. 야스퍼스가 보기에 철학자들은 실재를 너무 도외시했고 과학자들은 사유를 충분히 하지 않았다.

야스퍼스의 평생의 화두는 독단에 빠지지 않는 참다운 철학이었다. 나치 시절에 부인 거트루드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강제로 휴직을 해야 했을 때 한 마지막 강의에서 “우리의 강의는 중단되지만 철학함의 자세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라고 말해 그치지 않는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야스퍼스의 태도는 나치 통치가 종식된 후 독일에서 대중적 인기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위스 바젤로 이주하게 된 이유에서도 엿볼 수 있다. 대중들이 자신을 좋아하면서도 자신의 사상에 동참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실망한 야스퍼스에게 대중의 인기는 “우정 어린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참답지 못한 것이어서 유해한” 것이었다. 나치 시절을 지나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죄책이며 인간은 누구나 어떻게 통치되는지에 대해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바젤에서 야스퍼스는 헛된 명성에서 벗어나 인기와는 무관한 자기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았다.

태어날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고 평생토록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살았던 그는 그 덕분에 오히려 삶이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았다고 한다. 어디에서나 소박함을 유지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유언장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고는 생전에 매입해 두었던 조국 독일을 바라볼 수 있는 묘역에 묻혔다. 평생 스스로 ‘다르게는 될 수 없는 자기 자신의 존재’라 묘사했던 그 자기 자신으로 살았다.

주요 저서로 『정신병리학총론』(1913), 『세계관의 심리학』(1919), 『현대의 정신적 상황』(1931), 『철학 I, II, III』(1932), 『이성과 실존』(1935), 『실존철학』(1938), 『죄책론』(1946), 『진리에 관하여』(1947), 『철학적 신앙』(1948), 『역사의 기원과 목표』(1949), 『원자탄과 인류의 미래』(1958), 『계시에 직면한 철학적 신앙』(1962)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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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마르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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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극작가, 비평가이다. 보통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로 분류되지만, 마르셀은 정작 자신의 철학을 실존주의로 규정하기를 거부했다. 그 점에서 마르셀은 자신과 동년배인 하이데거와 닮았다. 하이데거 역시 자신의 철학을 실존주의로 규정하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마르셀과 하이데거는 모두 사르트르의 무신론적 실존주의와 비판적 거리를 두면서 실존주의를 거부했다. 마르셀은 합리적 사유의 한계를 실존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지적하면서도, 동시에 대화적 사유를 통해 초월적 진리를 향해 나아갈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마르셀은 신소크라테스학파라는
마르셀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극작가, 비평가이다. 보통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로 분류되지만, 마르셀은 정작 자신의 철학을 실존주의로 규정하기를 거부했다. 그 점에서 마르셀은 자신과 동년배인 하이데거와 닮았다. 하이데거 역시 자신의 철학을 실존주의로 규정하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마르셀과 하이데거는 모두 사르트르의 무신론적 실존주의와 비판적 거리를 두면서 실존주의를 거부했다. 마르셀은 합리적 사유의 한계를 실존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지적하면서도, 동시에 대화적 사유를 통해 초월적 진리를 향해 나아갈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마르셀은 신소크라테스학파라는 말로 불렀다. 그 점에서 마르셀의 실존철학은 하이데거와 구분된다. 하이데거는 철학이란 본래 무신론적이어야 한다고 보았는데, 이는 신의 존재를 부정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한 선입견을 전제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장 폴 사르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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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Paul Sartre

1905∼1980. 파리 출생으로 두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외조부 슬하에서 자랐다. 메를로 퐁티, 무니에, 아롱 등과 함께 파리의 명문 에콜 노르말 슈페리어에 다녔으며, 특히 젊어서 극적인 생애를 마친 폴 니장과의 교우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평생의 연인 시몬 드 보부아르와도 그 시절에 만났다. 전형적인 수재 코스를 밟아 졸업하고, 병역을 마친 그는 항구 도시 루아브르에서 고등학교 철학 교사로 일하다가 1933년 베를린으로 1년 간 유학, 후설과 하이데거를 연구하였다. 사르트르는 1938년에『구토』를 출간하여 세상의 주목을 끌며 신진 작가로서의 기반을 확보하였고
1905∼1980. 파리 출생으로 두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외조부 슬하에서 자랐다. 메를로 퐁티, 무니에, 아롱 등과 함께 파리의 명문 에콜 노르말 슈페리어에 다녔으며, 특히 젊어서 극적인 생애를 마친 폴 니장과의 교우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평생의 연인 시몬 드 보부아르와도 그 시절에 만났다. 전형적인 수재 코스를 밟아 졸업하고, 병역을 마친 그는 항구 도시 루아브르에서 고등학교 철학 교사로 일하다가 1933년 베를린으로 1년 간 유학, 후설과 하이데거를 연구하였다.

사르트르는 1938년에『구토』를 출간하여 세상의 주목을 끌며 신진 작가로서의 기반을 확보하였고, 수많은 독창적인 문예평론을 발표하였다.『존재와 무』『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변증법적 이성비판』등을 발표하고『레탕모데른』지를 발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2차 대전 전후 시대의 사조를 대표하는 위대한 사상가로 평가받았다.

그는 많은 희곡을 발표하여 호평받기도 했는데, 『파리떼』『출구 없음』『더럽혀진 손』『악마와 신』『알토나의 유페자들』 등은 그 사상의 근원적인 문제성을 내포하는 동시에 그때마다 작가의 사상을 현상화한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964년, 『말』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수상을 거부한 일화로 유명하다. 1980년 4월 15일 작고할때까지 끊임없이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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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드 보부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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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one de Beauvoir

1908년 1월 9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1913년 엄격한 가톨릭 학교인 데지르 학원에 입학해 수학하고, 1926년 소르본 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3년 후에는 철학 교수 자격시험에 2등으로 합격하고, 1등으로 합격한 장폴 사르트르를 처음으로 만나 그와의 계약 연애를 시작했다. 이 만남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일이 되었다. 두 사람은 평생을 연인이자 사상을 공유하는 지적 동반자로 살아갔다. 이후 1931년 마르세유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 루앙과 파리를 거쳐 1943년까지 학생들을 가르쳤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 절친한 친구의 죽음을 소
1908년 1월 9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1913년 엄격한 가톨릭 학교인 데지르 학원에 입학해 수학하고, 1926년 소르본 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3년 후에는 철학 교수 자격시험에 2등으로 합격하고, 1등으로 합격한 장폴 사르트르를 처음으로 만나 그와의 계약 연애를 시작했다. 이 만남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일이 되었다. 두 사람은 평생을 연인이자 사상을 공유하는 지적 동반자로 살아갔다. 이후 1931년 마르세유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 루앙과 파리를 거쳐 1943년까지 학생들을 가르쳤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 절친한 친구의 죽음을 소재로 한 소설 『정신적인 것의 우위(Primaute du Spirituel)』를 완성하지만 1979년이 될 때까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다. 1943년 『초대받은 여자(L’Invitee)』로 본격적인 작가 생활을 시작해, 1945년 사르트르가 잡지 [현대(Les Temps Moderns)]를 창간하자 그 일에 협력하며 실존주의 문학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독일에 대한 레지스탕스의 저항을 그린 『타인의 피(Le Sang des Autres)』(1945), 죽음과 개인의 문제를 취급한 『인간은 모두 죽는다(Tous les Hommes sont Mortels)』(1946)를 연달아 발표하고, 1954년에 출간한 『레 망다랭(Les Mandarins)』으로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공쿠르 상을 수상한다.

이 밖에도 소설 『아주 편안한 죽음(Une Mort Tres Douce)』(1964), 『아름다운 영상(Les Belles Images)』(1966), 『위기의 여자(La Femme Rompue)』(1967) 등을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이어 간다. 또한 평론 · 기행문 등을 꾸준히 발표하여 프랑스에서 가장 뛰어난 문학가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 철학적 글쓰기의 대표작인 1949년에 발표한 『제2의 성』은 역사적 · 철학적 · 사회적 · 생리적 분석을 통해 여성문제를 고찰한 작품으로, 전 세계 페미니즘 운동의 참고 도서가 되었고, 이후 『특권(Privileges)』(1955), 『노년(La Vieillesse)』(1970) 등 다수의 철학적이고 논쟁적인 에세이를 집필했다.

사르트르 사후 그의 말년을 기록한 『작별 의식(La Ceremonie des Adieux)』(1981)과 생전 그에게서 받은 수많은 편지를 엮은 책 『비버에게 보내는 편지(Lettres au Castor)』(1983)를 출간했다. 1986년 4월 14일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사르트르와 함께 [현대(Les Temps Moderns)]지의 편집자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한편, 알제리 독립이나 낙태 합법화 등 셀 수 없이 많은 다양한 시위에 참여하며 행동하는 지성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주요 저서로 『얌전한 처녀의 회상』, 『나이의 힘』, 『사물의 힘』, 『결국』 등 자서전과 소설 『초대받은 여자』, 『제2의 성』, 『레 망다랭』, 『대장정 : 중국에 관한 에세이』, 『인간은 모두 죽는다』, 『실존주의와 국가의 지혜』, 『거물들』, 『노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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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까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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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ert Camus

그 모든 것에 항거하며 인간의 부조리와 자유로운 인생을 깊이 고민한 작가이자 철학자. 1913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몽드비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알사스 출신의 농업 노동자였던 아버지가 1차 세계대전 중 전사하고, 청각 장애인 어머니와 할머니와 함께 가난 속에서 자란 카뮈는 유년 시절의 기억과 가난, 알제리의 빛나는 자연과 알제 서민가의 일상은 카뮈 작품의 뿌리에 내밀하게 엉기어 있다. 구역의 공립 학교에서 L. 제르맹이라는 훌륭한 스승을 만났다. “나는 자유를 빈곤 속에서 배웠다.”라고 하기도 했는데, 알제리에서 보낸 유년기는 그가 작가적 양분을 공급받
그 모든 것에 항거하며 인간의 부조리와 자유로운 인생을 깊이 고민한 작가이자 철학자. 1913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몽드비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알사스 출신의 농업 노동자였던 아버지가 1차 세계대전 중 전사하고, 청각 장애인 어머니와 할머니와 함께 가난 속에서 자란 카뮈는 유년 시절의 기억과 가난, 알제리의 빛나는 자연과 알제 서민가의 일상은 카뮈 작품의 뿌리에 내밀하게 엉기어 있다. 구역의 공립 학교에서 L. 제르맹이라는 훌륭한 스승을 만났다. “나는 자유를 빈곤 속에서 배웠다.”라고 하기도 했는데, 알제리에서 보낸 유년기는 그가 작가적 양분을 공급받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의 도움으로 장학금을 받고 1923년 프랑스 중등학교 리세에 입학했고, 이후 알제리 대학에 입학했으나 1930년 폐결핵으로 자퇴를 했다. 결핵 발병으로 누구보다 좋아했던 축구를 포기했다.

바칼로레아 준비반에서 철학 교수이자 에세이스트인 장 그르니에를 만나 큰 영향을 받고, 이후 평생 그와 교류를 이어갔다. 어렵게 대학에 진학해 고학으로 다니던 알제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해 철학을 전공하는 동시에 정치 활동과 연극 활동에 집중했다. 1932년 장 그르니에가 주도한 조그만 월간 문예지 [쉬드Sud]를 통해 처음으로 첫 에세이 『새로운 베를렌Un Nouveau Verlaine』을 발표했다. 대학시절에는 연극에 흥미를 가져 직접 배우로서 출연한 적도 있었다. 결핵으로 교수가 될 것을 단념하고 졸업한 뒤에는 진보적 신문에서 신문기자로 일했다. 한때 공산당에 가입했던 그는 비판적인 르포와 논설로 정치적인 추방을 당하기도 했고, 프랑스 사상계와 문학계를 대표했던 말로, 지드, 사르트르, 샤르 등과 교류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몰입했다.

1937년 첫 산문집 『안과 겉』을 발표하고, 이듬해부터 [알제 레퓌블리켕]의 기자로 활동하다가 1940년에 파리로 활동 무대를 옮겨 [파리수아르]의 기자가 된다. 독일에 점령당한 파리에서 검열을 피해 지방으로 옮긴 [파리수아르]를 따라 이동하는 동안에도 집필 활동에 매진한다. 초기의 작품 『표리(表裏)』(1937), 『결혼』(1938)은 아름다운 산문으로, 그의 시인적 자질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1942년 7월, 자신의 첫 소설이자 대표작이 되는 문제작 『이방인(異邦人) L' tranger』을 발표하면서 주목받는 작가로 떠올랐다.

이즈음 레지스탕스에 가담하여 프랑스 해방 운동에 참여한 카뮈는 철학 에세이 『시시포스 신화』(1943), 희곡 작품 「오해」(1944) 등 다양한 작품 세계를 선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저항운동에 참가하여 레지스탕스 조직의 기관지였다가 후에 일간지가 된 [콩바]의 편집장으로서, 모든 정치 활동은 확고한 도덕적 기반을 가져야 한다는 신념에 바탕을 둔 좌파적 입장을 견지했다. 또 집단적 폭력의 공포와 악성, 부조리함을 알레고리를 통해 형상화한 소설 『페스트』로 문학계의 대반향을 일으켰고 1951년에는 마르크시즘과 니힐리즘에 반대하며 제3의 부정정신을 옹호하는 평론 『반항적 인간』을 발표하여 지성계에 큰 논쟁을 촉발한 사르트르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다가 10년 가까운 우정에 금이 가기도 했다. 하지만, 1956년 『전락』을 발표하면서 사르트르에게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이방인』, 『시지프의 신화』를 발표하며 문학가를 넘어 사상가로도 인정받기 시작했고, 실존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가 엄마, 무명인, 그리고 나의 ‘죽음’을 연달아 맞닥뜨리며 삶의 부조리를 고뇌하는 모습은 이후 오랫동안 수많은 독자를 실존주의의 세계로 이끈다. 「오해」와 「칼리굴라」라는 희곡을 쓰며 희곡 작가로도 활동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고, 1957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며 대문호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알제리 독립을 둘러싼 논쟁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 가지만, 카뮈는 생전 인터뷰에서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보다 더 부조리한 죽음은 상상할 수 없다.”라고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1960년 1월 4일 자동차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이때 사고 차량에 있던 가방에서 초고 형태로 발견된 『최초의 인간』은 1994년에야 빛을 보게 된다.

이 외에도 『여름』, 『유배지와 왕국』, 『행복한 죽음』, 『정의의 사람들ㆍ계엄령』, 『결혼, 여름』, 『태양의 후예』, 『젊은 시절의 글』, 『스웨덴 연설ㆍ문학 비평』, 『최초의 인간』, 『여행일기』, 『단두대에 대한 성찰ㆍ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전락·추방과 왕국』, 『안과 겉』 등의 작품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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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와 슐라이어마허를 함께 전공한 철학자. 현 한국현대유럽철학회 회장 및 한국하이데거학회 회장. 철학과 예술, 문학은 근원적으로 하나라는 관점을 지니고 있다. 현재 가천대학교에서 예술철학, 문화철학, 종교철학 등을 가르치고 있으며, 희망철학연구소에서 여러 철학자와 함께 인문학 살리기, 민주주의교육 등과 관련한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다. 저서로 『시간과 윤리』, 『철학을 삼킨 예술』, 『우리는 모두 예술가다』, 『기쁨과 긍정의 종교』, 『공감의 존재론』, 『문학과 살/몸 존재론』, 『그림으로 보는 니체』, 『그림으로 보는 하이데거』 등이 있으며, 희망철학연구소의 철학자들과
하이데거와 슐라이어마허를 함께 전공한 철학자. 현 한국현대유럽철학회 회장 및 한국하이데거학회 회장. 철학과 예술, 문학은 근원적으로 하나라는 관점을 지니고 있다. 현재 가천대학교에서 예술철학, 문화철학, 종교철학 등을 가르치고 있으며, 희망철학연구소에서 여러 철학자와 함께 인문학 살리기, 민주주의교육 등과 관련한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다.

저서로 『시간과 윤리』, 『철학을 삼킨 예술』, 『우리는 모두 예술가다』, 『기쁨과 긍정의 종교』, 『공감의 존재론』, 『문학과 살/몸 존재론』, 『그림으로 보는 니체』, 『그림으로 보는 하이데거』 등이 있으며, 희망철학연구소의 철학자들과 함께 일반 시민을 위한 여러 철학교양도서를 공저했다.

인문학이란 삶을 보다 강하고 아름답게 만들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니체, 베르그송, 하이데거, 슐라이어마허, 사르트르, 푸코, 들뢰즈 등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해 왔다. 이 철학자들의 공통점은 삶을 이론과 체계의 관점에서 고찰하는 전통 철학적 경향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다. 괴테의 유명한 경구에 따르면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영원한 것은 오직 저 푸른 생명의 나무뿐이다.” 삶과 존재란 본래 이론과 체계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임을 잘 드러내는 경구이다. 독일 보쿰대학교에서 철학, 역사학, 독문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교에서 철학석사 및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석사논문에서는 니체와 바흐친의 철학을, 박사논문에서는 하이데거와 슐라이어마허의 철학을 함께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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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5년 04월 18일
쪽수, 무게, 크기
244쪽 | 114*188*23mm
ISBN13
9788955868425

책 속으로

우리의 본성은 운동 안에 있다. 그 완전한 휴식은 죽음이다.
--- p.9

수치스럽고 흠결 있는 것은 그 안에 죽음을 간직하고 있고, 조만간 자기 자신에게 벌을 가하게 될 것이다.
--- p.45

자기 자신을 고통스러워하는 자에게는 어떤 구원도 없다.
--- p.53

죽음은 표상될 수 없는 것이고, 본래 생각될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표상하고 생각하는 것은 다만 부정일 뿐이고, 부수현상일 뿐이며, 결코 실증적이지 않다.
--- p.89

현존재적으로 죽음은 오직 실존적인 죽음을 향한 존재 안에만 있다.
--- p.97

죽음은 고유한 현존재에게 단순히 무차별적으로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이 존재자가 개별적인 것으로서 존재하도록 요구한다.
--- p.127

죽음은 내가 나 자신에 대해 그것으로 존재하는 관점에 대한 타인의 관점의 승리이다.
--- p.173

삶의 운동은 모두 죽음을 향한 미끄러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실을 직시할 마음을 먹으면, 죽음을 향한 모든 운동이 삶이라는 것 또한 발견하게 된다.
--- p.197

실제로는, 죽음의 경험이란 없다. 정확히 말해, 체험되고 의식된 것밖에는 아무것도 경험되지 않는다.

--- p.209

출판사 리뷰

“누구나 자기 고유의 죽을 운명을 떠안은 채 산다.
그러니 누구나 자기 고유의 삶을
실현하려는 충동과 의욕의 존재로 살아야 한다.
오직 이러한 충동과 의욕을 통해서만
삶이 의미로 충만할 수 있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 제가끔 다른 형태로 죽음을 맞이할 따름이다. 그것이 각자의 것이긴 해도, 예기치 않게 느닷없이 닥쳐 오건 마음먹은 때에 딱 대어 도착하건 우리로 하여금 그 자체로 불안과 공포를 일으키는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죽음이 두려운 데에는 미지에 대한 막연함 그 이상으로, 내가 나라고 느껴 온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공허함에서 오는 두려움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죽음이 꼭 부정적인 감정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때로 죽음은 내가 현재를, 나 자신을 자각하게 거드는 듯싶다. 죽음을 느끼려 들수록, 그러니까 이제 더는 나를 느낄 수 없다는 아득함을 떠올릴수록 바로 지금, 나라는 존재에 대해 더 잘 실감하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죽음에 대한 감각이야 시기를 막론하고 저마다 다르겠지만, 죽음은 시대별로 그 의미가 다르게 받아들여져 왔다. 플라톤에게서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의 감옥에서 벗어나 이데아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계기였고, 삶은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중세 기독교 세계에서 죽음은 인간이 원죄로 인해 마주해야 할 필연적 운명이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종말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었다. 이렇듯 내세를 설정해 영원이라는 개념으로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물리치고자 했는데, 이때 죽음은 단지 생명의 끝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었다. 다만 이러한 시각은 우리가 실질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했다.

죽음을 묻고 존재로 답하다
죽음에 대한 실존주의적 성찰


20세기에 본격적으로 전개된 실존주의 사상가들은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받아들였다. 죽음을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사실 그 자체로 보았으며, 죽음을 외부의 섭리나 영원성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 그 자체의 의미를 되묻게 하는 하나의 계기로 여겼다. 죽음을 외부에서 주어진 의미의 틀 안에 가두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존재의 가능 근거’로 삼았던 것이다. 물론 개개의 사상가들 사이에서도 죽음에 대한 입장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하이데거를 비롯한 실존주의자들은 우리가 죽음을 응시함으로써 자기 본연의 고유성과 존재의 가능성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실존주의는 죽음을, 기존의 초월적·종교적 틀에서 벗어나 삶의 내면에서 새로이 사유하며, 인간 존재에 가까운 태도를 보여 주었다. 이러한 관점은 20세기 철학에서 실존주의가 중심 사조로 자리 잡아 가던 흐름 속에서 뚜렷하게 부각되었지만, 비단 이것이 20세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이전 시대보다 더욱 절실해진 요즘, 특히 인공지능을 비롯한 디지털 기술이 인간의 사고와 행동마저 알고리즘화하려는 오늘날에도 실존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효율성과 생산성의 기준으로만 인간이 평가되는 사회에서, 실존주의는 도구와 구분되는 인간만의 ‘고유한 삶’을 다시 묻도록 이끈다. 인간이 단순히 정보의 집합이나 기능적 존재가 아니라, 고유한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라는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태도와 방향을 다시 성찰하게 한다. 결국 죽음을 고찰하는 일은, 삶의 본래성을 되찾고자 하는 질문으로 이어지게 되며 이는 곧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물음이다.

파스칼에서 카뮈까지,
죽음을 사유한 실존주의자들의 문장들
그들을 통해 본 죽음과 삶의 의미


엮고 옮긴이 한상연 교수에 따르면 좁은 의미의 실존주의는 20세기의 철학과 문학에 국한되지만, 니체와 하이데거, 사르트르의 사상을 중심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사상을 살펴보면, 실존주의 사상의 역사는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책을 구성하기 위해 한상연 교수는 실존주의의 역사에서 죽음에 관해 가장 구체적이고 깊이 있는 성찰을 보인 사상가들을 선정하고, 이들 사상가의 저술 가운데 역시 죽음에 관한 가장 구체적이고 깊이 있는 생각을 담은 저술을 선별했다. 그다음으로 각 사상가 특유의 관점이 잘 드러나는 문장들, 특히 사상가들 사이의 철학적 연관성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문장들을 선택했다. 이는 실존주의 사상에 대해 잘 모르는 독자들이라고 하더라도 해당 사상가의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고려한 엮은이의 배려인 셈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 책이 각 사상가들의 통찰을 출발점으로 삼아 독자가 각 실존주의 사상을 입문하게 해 주는 입문서로서도 손색없는 까닭이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열 명의 실존주의 사상가들의 성찰은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마주해야 할지 스스로 생각해 볼 계기를 마련해 주고,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다시 우리가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물음을 불러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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