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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토끼 차상문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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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 책의 편집자입니다.
2010-01-26
<천재토끼 차상문>, 이 소설의 원제는 '슬픈 토끼'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슬픔이 슬프다고 말하는 순간 엄살이 되는 걸 여러 번 목격한 사람입니다. 덤덤해져야 했습니다. 제목을 새로이 짓고 보니 뭔가 숨고 숨길만한 요소가 생기는 듯했습니다. 선글라스를 쓴 기분이었습니다. 그 눈으로 다시금 소설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일제 말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한국사가 고스란히 들어앉아 있었습니다. 역사와 사회를 그대로 끌어안고 있는 소설, 참 간만이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역사가 참 웃기면서도 슬프지 않습니까. 지금 와 보면 코미디 같은 세상사에 왜 그렇게 벌벌 떨었을까, 넙죽 엎드린 채 살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의 가계가 불쌍하기도 했습니다. 그 덕분에 지금의 우리일 것입니다. 물론 후대의 우리들도 지금의 우리들을 그리 보겠지만 말입니다.
놀라운 것은 김남일 작가의 역량이었습니다. 책을 들어 읽기 시작하는데 정신 없었습니다. 저 같은 늙은 빵꾸똥꾸 변비환자에게는 그야말로 제격인 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나도, 재미가, 있었습니다! 세상에나, 간만에 웃어가며 읽은 책이었습니다. 세상에나, 간만에 웃고난 뒤 쓸쓸해지는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밑줄 그은 문장들이 넘쳐나는 책이었습니다. 인간인 제가 인간이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순간순간이 얼마나 잦았는지 모릅니다. 어떤 인간인들 토끼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까. 작가 역시 토끼 볼 면목이 없어 인간들에게 본때를 보이기 위한 마음으로 이 소설을 써나갔다는데... 아무래도 이 책, 인간들에게 일침 아닌 똥침을 놓기 위해 여기 우리 앞에 놓인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책이 나오자마다 아이티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비단 이번 지진뿐이겠습니까. 어떤 해결 방안을 제시하기 위함이었다면 이 책은 소설이 아닌 다른 낯선 장르 속에 꽂혀 있었겠지요. 다시 돌아와 <천재토끼 차상문>의 얘깁니다. 과거를 이렇게 겪었으니 이제 남은 미래를 어떻게 겪어야 할지 우리 인간들은 지금부터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거 어디부터 잡아채서 생각을 묶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물어보니 작가가 시큰둥하게 이럽니다. "제발, 무엇이든 하려고 좀 하지 마시라! 무엇을 하든 지구별은 그만큼 무너지게 마련이다." 어떤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를 문제로 아는 바로 그 정신을 문제 삼는 것이 소설문제 삼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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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 일인지 독한 양잿물 냄새가 진동하는 가운데, 새빨간 핏덩이와 함께 옥문 밖으로 제일 먼저 나온 것은 머리도 발도 아닌 귀였다. 게다가 그 귀가 산전수전 다 겪은 산파조차 처음 보는 아주 긴 귀였다. 억조창생 중에 토끼가 아니라면 그런 귀가 없을 텐데, 세상에, 진짜 토끼였다. 경악을 거듭하면서도 산파는 자신이 지닌 기술을 총동원하여 훌륭히 임무를 완수했다. 엄마 뱃속을 빠져나온 직후라 새파랗게 질려 있던 아기를 따뜻한 물로 씻겨주자 과연 갓 쪄낸 백설기처럼 새하얀 토끼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 p.18
주인공 토끼는 마구 앞으로만 내달렸다. 그래, 인간 영장류에게 본때를 보이는 거야. 유한한 화석 에너지를 터무니없이 낭비하는 인간들! 육식이든 초식이든 생명을 섭취해야만 존재가 유지되는 인간들! 숨 쉴 때마다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인간들! 자신과 이웃들의 소중한 역사와 기억을 허투루 묵살하는 인간들! 속도만으로도 모자라 가속도에 몸을 맡긴 인간들! 그러고도 꾸역꾸역 종의 번식을 시도하는 인간들! 그중에서도 특히 남자들! 아버지들!―토끼는 어디선가 톡 튀어나와 말한다. “걸을 때 제발, 쿵쿵거리지 좀 마요!” --- '작가의 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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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중후반, 경찰 대공 수사관인 한 사내(차준수)가 좌익 지식인 유진명을 수사하던 중 여동생 유진숙을 강간한다. 그 결과 시골 초등학교 선생이던 유진숙은 한 생명을 잉태한 뒤 훗날 천하에 없던 괴이한 생명체, 즉 토끼 영장류를 출산한다. 이후 곧바로 입을 닫아건 채 스스로 퇴행의 길을 택한 유진숙은 아이를 안고 어느 시골 마을에 정착한다. 차준수는 유진숙을 찾아내 자신의 첩으로 삼고 이후 둘째아들도 낳는다. 이번에는 ‘정상적’인 인간 영장류(차상무)다. 그 무렵 조직에서 밀려나고 외항선을 타기 시작한 차준수는 집에 들를 때마다 유진숙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국가 폭력, 나아가 가부장제의 폭력적 전형이라 불릴 수 있는 차준수를 아들 차상무는 고스란히 빼닮는다. 반면 형인 토끼 영장류 차상문은 어려서부터 IQ 200이 넘는 천재로 두각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겁이 많고 생각이 많다. 그는 비단 아버지의 폭력뿐만이 아니라 인간 영장류 일반이 주변 생물들(개, 닭)에게 가하는 일상적인 폭력을 트라우마처럼 지니게 된다.
차상문은 미국 버클리대로 유학을 떠난다. 그즈음 아버지 차준수는 기항지에서 북한 선원들을 만났다는 이유로 부하 선원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다 끝내 살해당한다. 차상문은 아버지의 죽음을 전혀 슬퍼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버지가 제 생의 비밀에 대해 어떤 해명도 하지 않고 떠났다는 사실에 분개할 뿐이다. 버클리에서 차상문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다. 토끼 영장류가 자기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구 곳곳에서 차상문과 같은 토끼 영장류가 태어났던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과거 제국주의의 침략을 경험한 나라 출신들이다. 진보적인 학풍의 버클리가 그들을 ‘미래지구의 종다양성을 위한 프로젝트’를 통해 받아들인 것이다. 차상문은 베트남전 반전운동을 펼치던 한 여자 토끼를 만난다. 그러나 첫 만남이 곧 마지막 만남이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북조선 출신이었던 것이다. 차상문은 어려서부터 주입식으로 교육 받은 국가/반공이데올로기의 덫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그후 차상문은 미국인 여자 주디를 만난다. 그녀는 비버리힐스에 사는 엄청난 부자에 히피이며, 동물해방론자이고 무엇보다 넘치는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여성이다. 그녀를 통해 차상문은 가난한데다 끊임없이 개벌이데올로기와 반공이데올로기로 국민들을 억압하는 조국의 실체를 뼈저리게 깨닫는다. 그리고 결심한다. 앞으로는 ‘육체적 교미’ 대신 ‘정신적인 교미’로 만족하겠노라. 차상문의 생애 첫 번째 전환점이 찾아온다. 그는 몬타나의 깊은 숲속에서 숨어 살던 한 은자로부터 편지를 받는다. 그는 버클리대 수학과 역사상 최연소 교수직을 팽개치고 몬타나로 향한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는 기나긴 여행의 출발이기도 했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은자는 훗날 산업혁명 전체와 맞서 홀로 ‘전쟁’을 시작한 유나바버(실존 인물 카진스키: 소설에서는 쿠나바머)였다. 차상문은 그와의 교류를 통해 인간 영장류가 끌고 온 문명의 역사에 대해 ‘근본적인 동시에 급진적인’ 인식을 굳히게 된다. 귀국 후 그는 국립 서울대학교 수학과 교수로 재직한다. 그러나 때는 바야흐로 80년대. 그는 일상적으로 전개되는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지식인인 자신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했을 뿐이다. 그는 제자가 국가 폭력의 희생자로 죽음을 맞게 되자 교수직을 사퇴한다. 그후 그는 신촌에서 채리, 김야무, 지니, 이렇듯 세 여자를 만나 ‘꿈꾸는 영장류’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때마침 전개되는 유월 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하나같이 가부장제와 비굴한 한국사의 희생자들인 그들이 벌이는 싸움의 방식은 아주 독특하다. 이를테면, 생물의 종다양성을 떠올려본다든지, 지구상에서 사라져가는 소수의 언어를 살리자는 식의. 그러던 어느 날 차상문에게 제2의 전환기가 찾아온다. 한 순댓국집에서 밥을 먹다가 텔레비전에서 다큐 프로그램을 어쩔 수 없이 보게 된 것. 베이징 카오야(오리 화덕구이)에 관한 프로그램으로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일렬로 행진해오던 오리들이 홀라당 털이 뽑히고 발라당 뒤집혀 갈고리에 두 발이 탁 묶인 채 거꾸로 확 뒤집혀 대롱대롱 매달린 자세로 아직 눈도 멀쩡히 뜬 채 자기들에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두 눈으로 빤히 보면서도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스란히 섭씨 천 도가 넘는 화염 속으로 직행하고 있었던 것! 시간이 흐른 뒤 정부 교육인적자원부를 비롯한 여러 곳에 폭발물 상자가 배달된다. 그러나 유나바머와 달리 상자를 열면 고작 물감이 터질 뿐이었다. 그것들은 당연히 차상문의 작품. 그는 걸을 때 제발 “쿵쿵거리지 말아 달라”고 요구했다. 말하자면 그것은 인간의 직립보행, 나아가 인류의 존재 이유와 존재 ?식 자체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요구가 인간 영장류에게 먹혀들 리 만무할까. 가령 아우 차상무는 어떤가. 그는 아내를 무지막지하게 패는 것으로도 모자라 불가리아 출신 어린 무용수에게 오피스텔을 얻어주고 그 대가로 성의 환락을 선사받는 식의 생활을 영위한다. 그는 불가리아로 쫓겨나고 끝내 자살을 감행하는 그 어린 무용수가 그의 씨앗(여자 토끼 영장류!)을 낳았다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가 믿는 것은 한국산 콘돔의 우수한 품질이다. 차상문은 절망의 벼랑 끝에서 정관수술을 받고 그 스스로 ‘장엄한 전쟁’이라 칭한 전쟁의 마지막 단계를 시도한다. 그는 인간 영장류의 곁에서 위태롭게나마 존재했던 토끼 영장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짐으로써 그들에게 무엇인가 상처 혹은 각성의 계기를 남길 수 있지 않을까 판단했던 것이다. 그런가? 그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했던 초등학교 뒷산 동굴을 절멸의 장소로 선택한다. 벽돌이 하나 둘 쌓아지고, 마침내 마지막 햇살마저 사라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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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과연 진화의 종착지일까?
그로부터 여기 한 토끼인간이 ‘토’를 달기 시작했다. 인류의 존재 이유에 대하여, 인류의 존재 방식에 대하여, 오롯이 제 인생 전부를 걸고! 십오 년에 걸쳐 완성된 김남일의 장편소설, 『천재토끼 차상문』! 소설가 김남일, 그가 실로 오랜만에 장편소설을 펴낸다.『천재토끼 차상문』, 2010년 최고의 기대작이라 감히 단언하는 이번 소설로 그가 참 오랜만에 손을 풀었다. 1987년『청년일기』, 1993년에서 1996년에 걸쳐 『국경』을 출간했으니 장편소설로는 햇수로 약 십오 년만이다. 1983년 데뷔 이후 그는 길 위에서 늘 바빴다. 삶이든 문학이든 그는 말보다는 몸을 앞서 부리는 작가였기 때문이다. 그의 문학 앞에 참으로 오랫동안 ‘실천’이라는 수식어가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이제 나는 이를 ‘몸씀’이라는 단어로 감히 대체해본다. 몸을 쓴다는 일, 이는 그의 소설이 그의 피와 살에 스며있다는 말일 터, 그렇게 우리 몸속에 새겨지고 그렇게 머릿속에 각인되어왔던 그의 소설이 2010년형으로 버전 업 되어 지금 여기 이렇게 놓였다. 『천재토끼 차상문』얘기다. 차상문, 그는 인간이나 토끼로 태어났다. 차상문, 그는 토끼이나 진정 ‘인간’이길 원했다. 차상문, 그는 과연 누구이며 그가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작가는 이번 소설을 통해 한국 소설사에 길이 남을 캐릭터 하나를 탄생시켰다. 이름은 차상문, 그는 천재이며 토끼다. “시어도어 존 카진스키, 일명 유나바머. 열일곱 살에 하버드에 입학한 수학의 천재. 3년 만에 졸업하고 버클리 대학에서 최연소 종신교수직을 획득했으나 스스로 교수직을 사임한 뒤 몬태나의 깊은 숲속으로 잠적. 운둔자의 길을 걷다가 홀로 산업 문명 전체를 상대로 한 ‘전쟁’을 전개한다.”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접한 이후 작가는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홀로 산업 문명 전체를 상대로 벌인 그의 ‘장엄한 전쟁’기는 해방 전후로부터 시작하여 IT 강국으로 거듭난 한국의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동기 한국의 현대사와 그 맥을 함께하고 있다. 소설이 역사를 끌어안고 갈 때의 그 선 굵은 스케일은 그러나 진중한 울림에만 그치지 않는다. 간결한 문장 덕분이다. 곳곳에 배치된 상징의 딱 들어맞음도 한몫했다. 그래서 이 두툼한 한 권의 책이 순식간에 읽힌다. 혹여 어떻게 토끼인간이…… 라며 허구성에 문제를 제기할 자 있다면 나는 그만의 독특한 유머를 무기로 내세우겠다. 적당히 무겁고 또한 적당히 가벼운데 모두와 함께 있을 때 는 웃다가 뒤로 와 혼자 울게 되는 식의 코드라고나 할까. 생은 엄중한 것이다. 누가 대신 살아줄 수 없다는 의미에서는 더욱. 우리는 아주 쉽게 말한다. 차별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는 세상을 만들자고. 그러나 말처럼 우리가 따르고 사는가, 이를 생각해보면 아니다,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실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작가의 이런 고민이 퍽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인간이…… 과연 진화의 종착지일까요?” 우리는 아주 쉽게 땅 위를 걷는다. 그런데 난데없이 토끼 한 마리가 불쑥 튀어나와 이렇게 말한다. “걸을 때 쿵쿵거리지 좀 말아주세요, 제발!” “왜요?” “땅이 놀라잖아요.” 자,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 삶의 방향을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 작가는 기꺼이 이렇게 답하고 있다. “없다. 제발, 무엇이든 하려고 좀 하지 마시라!” 무엇을 하든 지구별은 그만큼 무너지게 마련이다. 『천재토끼 차상문』의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나는 책 한 권을 새로이 받아든 심정이다. 그건 바로 ‘인간’이라는 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바로 ‘우리’라는 책, 나아가 우리 너머를 헤아려보라는 역지사지의 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