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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직선제 개헌투쟁
1. 김대중의 귀국이 몰고 온 2·12 총선의 돌풍 2. 불타오르는 직선제 개헌투쟁 3. 전두환의 반격과 음모 4. 6월 항쟁, 그날이 오다 5. 6·29 항복선언 제2부 87년 대통령 선거 1. 분열이 남긴 역사의 상흔 2. 여당의 지역감정 공작 3. 선거 하루 전 발생한 칼기 공중폭발 대참사? 제3부 여소야대 1. 여소야대 정국과 1노 3김 시대의 개막 2. 5공 청산을 위한 청문회 3. 전두환의 백담사 유배 제4부 3당 합당 거부 홀로 남은 김대중 제5부 공안정국 역사의 시계는 거꾸로 가는가? 제6부 양김의 승부 92대선 1. 김영삼과 치른 최후의 대결 2. DJ.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다 제7부 케임브리지 1. 새로운 시작 2. 지식인 김대중 3. 민주주의와 통일을 연구하다 제8부 “서울 불바다” 전쟁의 위기에서 민족을 구하다 제9부 정치는 생물이다-정계복귀 다시 국민 품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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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신을 믿으며 시대의 한계를 넘다
87년 직선제 개헌 투쟁부터 92년 정계 복귀까지 《만화 김대중》 전 5권 중 4번째로 「시대의 한계를 넘어」 편이다. 87년 직선제 개헌 투쟁부터 92년 정계 복귀까지 정치인 김대중의 행보를 추적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일어난 주요 사건을 단순히 나열한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일어난 배경과 내막까지 자세하고 극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사진도 풍부하게 실려 이야기 흐름이 흥미롭고 긴박하다. ‘제2의 광주항쟁’ 막으려 대선 출마 포기 선언 김대중이 미국에서 돌아오자 전두환 정권은 곧바로 김대중을 가택연금한다. 그러나 김대중으로 상징되는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꺾진 못한다. 그것은 2ㆍ12 총선에서 여당(민한당)이 참패한 것으로 드러난다. 정권 위기를 느낀 전두환은 김대중, 김영삼을 중심으로 번져가는 직선제 개헌 요구를 무력과 갖은 음해 공작으로 막으려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박종철, 이한열 죽음으로 중산층을 대변하는 ‘넥타이 부대’까지 거리로 뛰쳐나올 정도로 온 국민의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전두환은 6ㆍ29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인다. 6ㆍ29선언은 다른 누구보다 김대중에게 뜻깊은 사건이었다. 김대중이 대권 출마를 포기한 대가로 ‘제2의 광주항쟁’이 일어나는 걸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천6ㆍ3사태, 건대투쟁 등 시민들 저항이 날로 거세지자 전두환은 이전 버릇대로 비상계엄령을 선포해 무력으로 국민들을 제압하려 했다. 그러나 87년 대통령선거에서 직선제는 빛을 발하지 못했다. 도리어 불출마 선언을 했던 김대중이 출마 의사를 밝히면서 평생 경쟁자이자 동지였던 김대중과 김영삼은 등을 돌린다. 김대중은 말을 바꾸는 가벼운 사람으로 자신을 취급하는 사람들에게 출마 이유를 설명한다. “작년의 불출마 선언은 전두환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하면 불출마한다고 한 것이지, 이번처럼 국민의 압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진보진영을 비롯해 6월항쟁에 함께했던 시민들이 후보 단일화를 부르짖었지만 김대중, 김영삼은 각자 출마해 결국 노태우라는 군사정권이 다시 들어서고 만다. 이것은 지금도 민주화운동사에 큰 오점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다행히 4ㆍ26총선에선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소야대 정국을 만드는 데 성공, ‘1노 3김 시대’를 연다. 평민당이 제1야당이 되자 김대중은 광주항쟁 진상을 밝히고 5공화국 비리도 청산하는 청문회를 제안한다. 광주항쟁 피해자로도 출석한 김대중은 “당시 계엄령을 전국에 확대시킨 조치를 취한 것은 군부통치를 위한 정권 탈취의 목적에서였으며, 광주민주화운동은 소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일환으로 날조된 것”임을 강조한다. 청문회 성과는 미흡했지만, 청문회로 인해 전두환 친인척을 비롯해 5공화국 비리를 들추어내고 전두환을 백담사로 유배할 수 있었다. 3당 합당은 “국민을 배신하는 정치 쿠데타” 그러나 ‘1노 3김 시대’는 김영삼, 김종필이 노태우와 손을 잡으면서 끝난다. 노태우가 김대중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가 김영삼에게 다시 손을 내밀어 3당 합당을 추진한 이유는 의원내각제로 헌법을 바꾸어 정권을 연장하려는 속셈 때문이었다. 김대중은 합당은 “국민을 배신하는 정치 쿠데타”라며 끝까지 거부했다. 홀로 남은 김대중은 내각제 포기를 비롯해 지방자치제 실시, 보안사 해체 등을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에 들어간다. 특히 그는 ‘미스터 지방자치’로 불릴 만큼 지방자치 실현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의 이런 끈질긴 노력 덕에 91년 3월과 6월에 30년 만에 처음으로 지방자치 선거가 실시된다. 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은 3당 합당 덕을 톡톡히 누린다. 노태우가 준 거액의 정치자금을 바탕으로 남한조선노동당 결성 사건 등 색깔논쟁과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여러 사건을 조작해 김대중을 압박해갔다. 김영삼은 심지어 질 경우를 대비해 한국 특수대원을 북한군 복장으로 위장시켜 휴전선 일대에서 총격 사건을 일으킬 계획까지 꾸몄다고 한다. 검ㆍ경찰, 교육계, 공공기관 등 노태우 정권이 암암리에 모두 김영삼을 지원하고 있는 사실을 드러낸 ‘부산초원복집 사건’이 터졌지만, 시민들은 지역감정을 극복하지 못하고 김영삼을 제14대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정계 은퇴 선언과 복귀 대선에서 패한 김대중은 정계 은퇴 선언을 하고는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에서 3학기 동안 공부한다. 이 시기에 민주주의와 통일 문제에 천착한다. 김대중은 동학사상을 한국 민주주의의 뿌리로 보았고, 독일을 방문해 독일 학자들에게서 통일에 관한 조언도 들으며 좀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통일을 고민하게 된다. 이때 구상한 것들을 실행하려고 귀국 ?후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한 것이다. 때마침 제8차 특사교환 실무접촉에서 북측 단장 박영수가 ‘서울 피바다’ 발언을 하면서 남북은 일촉즉발의 전쟁 상황에 놓인다. 김대중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만남을 제안하고 성사시켜 전쟁 직전에서 한반도를 구해낸다. 이것을 시작으로 정계 복귀를 조금씩 준비하다가 마침내 7월 13일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로 정계 복귀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92년 대선 패배 이후 2년 7개월 만의 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