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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제1장 밑바닥에서의 출발 리스케, 이토 가의 양자가 되다 | 이토의 인생에 전기가 된 ‘흑선내항’ | 행운: 요시다 쇼인 문하에 | “이토는 ‘주선가’가 될 것” 제2장 막말유신의 풍운 속에 요시다의 처형과 구루하라의 자살 | 영국 공사관 방화에 가담하다 | 자진해서 국학자를 암살하다 | 결혼 그리고 ‘준 무사’로 신분상승 제3장 영국 유학과 사고의 전환 ‘조슈 5’, 영국으로 밀항 | 런던행 배에서 죽을 고비를 맞다 | 영국을 경험하고 ‘양이’를 버려 | 죽음을 각오하고 중도 귀국 | 4국 함대 포격… 강화회담 통역으로 | 막부 타도 위한 ‘삿초동맹’ 시동 | 첫 아내와 이혼하고 우메코를 선택하다 제4장 도약의 기회, 메이지유신 일약 효고 현 지사에 오르다 | 폐번치현 주장으로 좌천되다 | 재정제도 시찰 차 미국 출장 | 이와쿠라 사절단 부사로 구미 시찰 | 이토, 사절단에 두 거물 동행을 제안하다 | 외교 문외한 이토의 치명적 실수 | 조슈파 리더 기도, 이토를 맹비난하다 | 사절단, 일본 근대화 필요성을 절감하다 제5장 주선가로서 능력 발휘 정한론을 둘러싼 정변 | 사이고, “조선에 사절 보내면 폭거가 일어날 것” | 정한론자 기도, 구미 순방에서 생각 바꿔 | ‘주선가’ 이토의 암약 | 오쿠보, 정한파와의 대결을 결심 | 이토의 기책: 천황에게 두 안을 상주 | 이와쿠라, 각의 결정 반대안을 상주 | 정한파 패배: 이토, 참의 겸 공부경에 | 오쿠보, 정권 주도권 장악 | 이노우에, 강화도조약 협상 부사로 제6장 행운, 유신 3걸의 잇단 죽음 사이고의 반란: 세이난전쟁 | 사이고는 자살, 기도는 병사 | 오쿠보 암살 이후 권력의 중심에 | 이토, 이노우에 문제로 진퇴양난 | 천황, 어쩔 수 없이 중신들에 굴복 제7장 평민에서 초대 총리대신으로 유럽에서 1년여 동안 헌법 연구 | 베를린에서 독일 헌법을 모델로 삼다 | 이토, 갑신정변 처리 전권대사에 | 내각 발족: 천황, 초대총리로 이토를 지명 | 헌법 제정을 주도하다 | ‘메이지 헌법’ 제정 공로로 최고 훈장을 받다 | 귀족원 의장에서 다시 총리로 제8장 한국과의 악연 총리로 청일전쟁 지휘 |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청일전쟁의 서곡 | 일본 승리, 다시 리훙장과 강화협상 | 일본, 삼국간섭에 굴복 | 이노우에, 주한 공사를 자청 | 이토, 이노우에 후임으로 무장 미우라 임명 | 미우라, ‘여우사냥’을 지휘하다 | 우범선, 왕비 사체 소각을 지시 | 석방된 미우라, 이토에 노골적으로 불만 토로 | 흔들리는 ‘이토 체제’ | 이토, 총리 사직하고 서울 처음 방문 제9장 고종과 대신들을 협박, 공갈 러시아 방문과 ‘만한교환론’ 협상 | 인천 앞바다에서 러일전쟁 시작 | 이토, 러일전쟁 중 한국 특파대사로 | 러일전쟁 승리로 한국에서의 우월권 확보 | 헌병 동원해 을사늑약 체결 제10장 초대 한국통감으로 통감 수락 조건으로 군 지휘권 요구 | 조슈 번 출신이라는 행운 | 메이지 천황의 두터운 신임 | 외교뿐만 아니라 한국 국정 전반에 간섭 |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 퇴위 강요 | 한국에 대한 이토의 인식: ‘야만’ ‘무능’ ‘나태’ 제11장 통감 이토, 한국의 친왕이 되다 사실상 인질로 간 영친왕의 일본 유학 | 일본 황태자 방한 추진 | 태자태사로 영친왕 교육 담당 | 영친왕의 “잘들 있소”에 상궁들 통곡 | 영친왕에 대한 메이지 천황의 관심 | 조선어를 배운 일본 황태자 | 노회한 이토, 상궁을 교묘히 이용 | 엄비, 데라우치 총독에게 언성 높여 항의 | 이토, 순종 순행 강요 | 한국병합안에 쉽게 동의한 이토 | 자진해 통감 사퇴 | 이토, 타고난 건강과 호색 제12장 죽음의 만주행 죽음을 예감하다 | ‘천하의 경륜’을 의식한 만주행 | 안중근, 이토의 만주 일정을 신문에서 확인 | “당했다. 누가 쏘았는가” | “코리아, 우라(한국 만세)” | 이토의 죄상 15개조 제13장 이토가 죽은 뒤 원로들, 이토의 죽음을 선망 | 고종, “이토는 한국의 자애로운 아버지” | 영친왕 ‘동궁 대우’는 흐지부지 | 안중근을 극형으로 몰고 간 일본 | 영친왕과 방자의 정략결혼 | 서울 한복판에 이토 기리는 절 세워져 | 안 의사의 친일파 아들, 박문사에서 ‘화해극’ | 안준생, 이토 아들에 “아버지 대신 깊이 사과” | 백범, 안준생 친일에 통분하며 극언도 에필로그 맺는말 연보 참고문헌 |
李鍾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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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이냐, 양이냐, 존왕이냐, 좌막이냐로 갈려 있던 막말의 일본은 암살, 방화, 테러 등이 횡행하는 풍운의 시대였다. 그 와중에 갓 약관을 넘은 이토도 암살을 서슴지 않는 테러리스트가 되어 있었다. ‘유신 3걸’이라 불리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기도 다카요시 등은 전쟁에 참가했어도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인 일은 없었다. 다른 일급 무사들도 테러에 나서 칼을 빼드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메이지 시대에 이토를 포함하여 7명이 총리직을 수행했으나 이토 이외에 직접 사람을 죽인 경험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 p.41
“이토 일행은 런던대학에 적을 올리고, 우선 영어를 공부하는 한편 영국인 학생들과 교류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산업혁명을 이룬,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영국의 발달상을 눈으로 직접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은 유길준이다. 1883년 유길준은 보빙 사절단 일원으로 보스턴대학에서 수학했다. 이것이 한국인 도미 유학의 효시다. 이토의 영국 유학이 1863년이니, 유길준의 유학보다 20년 빨랐다. 이토는 영국의 발달된 문명과 강대한 국력에 감복해, 양이가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절감했다. 곧 ‘외세를 배척한다’는 ‘양이(攘夷)’라는 사고를 버렸다.” --- pp.52~53 “이때 한국 황실은 놀라운 결정을 했다. 이토를 태자태사로 임명하면서, 그를 친왕(親王)으로 예우키로 한 것이다. 친왕은 황제의 아들, 즉 왕자를 의미하는데 이토를 한국 황족으로 모시겠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해 순종이 내린 소칙(1907년 11월 19일)은 다음과 같다. […] 짐은 세계의 대세와 나라의 영구한 계책을 깊이 생각하여 장차 문명한 교육을 황태자에게 실시하려고 하였는데 사(師)와 부(傅)의 책임을 맡길 사람을 얻기가 실로 어려웠다. 안팎으로 널리 찾았다가 이제 대훈위(大勳位) 통감 공작 이토 히로부미를 특별히 선발하여 태자태사로 삼아서 보도(輔導)할 책임을 맡긴다. 이토 통감은 덕과 공로가 높고, 학문은 고금을 통달하였으며,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실로 크게 떠받들고 지탱해준 공로가 있기에 짐이 언제나 존경하는 사람이다. 지금 비록 관직의 차이는 있지만 우대하는 것은 달리해야 하므로 특별히 친왕의 예로 대우하여, 모든 관리의 윗자리에 있게 하는 것이 타당하다. 아, 우리 이토 태사는, 공경하여 짐의 뜻을 저버리지 말라.” --- pp.272~273 “호색과 관련해서도 이토다운 에피소드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당시는 정부 유력자가 지방으로 출장을 가면 현 지사 등이 연회를 베풀고, 연회에 나온 게이샤 중 마음에 드는 여인을 데리고 자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관기가 수청 드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이때 이토가 고른 게이샤는 대부분 일류가 아니고 이류, 삼류 게이샤였다. 일류 게이샤들은 지방 유력자와 반드시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토가 자신의 쾌락 때문에 일류 게이샤들을 취할 경우 그 지역 유력자들의 원한을 사게 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가는 곳마다 정적을 만들게 되므로 이를 피하기 위해 이토는 이류, 삼류 게이샤들을 택했다는 것이다.” --- pp.304~305 “이토의 죽음을 고종과 순종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순종실록》에는 이토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순종은 총리대신 이완용을 정부 대표로 이토 태사를 위문하게 하고(10월 27일), 천황에게 조전을 보내는 한편,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를 내렸다(10월 28일). 그리고는 황태자에게 이토 태사의 죽음에 대해 석 달 상복을 입도록 했다(10월 29일)는 등의 내용이 간단히 언급돼 있다. 한국 황제가 자신의 나라를 뺏기 위해 혈안이 됐던 자에게 시호까지 내렸다니, 망자에 대한 예에 불과하다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과공(過恭)이다. 그런데 일본 측 자료에는 이토의 죽음에 대해 순종은 “국운이 다했다”고 탄식했고 “고종과 엄비는 통탄, 통곡했다”고 적혀 있다. 통감부 와카바야시 라이조 경시총감이 소네 통감에게 올린 10월 29일 보고서에 따르면, 고종은 이토를 ‘한국의 자부(慈父)’라고 치켜세우고, 그 ‘흉한’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울 뿐’이라고 개탄한 것으로 돼 있다. 가히 충격적이다. 발언이 사실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 pp.345~346 “이토 히로부미 사망 30주기가 가까워진 1939년 10월 15일 오전 11시. 박문사에 안중근의 차남인 안준생이 조선총독부 외사부장 마쓰자와 다쓰오와 함께 나타났다. 안준생은 이토의 영전에 향을 피우고, 주지가 준비한 아버지 안중근의 위패를 모시고 추선 법요를 거행했다. 안준생은 이토의 영혼을 위로한다며 만들어놓은 절에 와서, 자신의 아버지가 이토를 죽인 것이 잘못됐다며 사죄한 것이다. [중략] 17일에는 안중생과 이토 분키치가 같이 박문사를 방문한다. 이토 히로부미의 영전 앞에서 두 아들이 ‘화해’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안중생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깊이 사과드립니다”라고 하자 이토 분키치는 “나의 아버지도 당신의 아버지도 지금은 부처가 되어 하늘에 있기 때문에 사과의 말은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고 신문은 보도하고 있다.” --- pp.370~372 “일본의 어느 전기 작가는 이토에 대해 “일본의 근대가 이 사내에 의해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사내 없이 일본의 근대는 전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평한다.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인에게 그런 의미라면, 과연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인가. 이토 묘소를 거닐면서 생각해보았다. 한국인에게는 가장 유명한 일본인임과 동시에, 가장 악명 높은 일본인인 이토 히로부미. 그는 한국인들에게 원흉임과 동시에, 약육강식이란 국제사회의 냉엄한 원리를 가르쳐준 반면교사였다고 할 수 있다.” --- p.3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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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통감 재직 중 순종으로부터 ‘친왕(親王)’의 예우를 받았다!
1932년 서울 한복판에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찰 ‘박문사’가 세워졌다! 1939년 이토 히로부미 30주기에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은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에게 사죄했다! 우리는 과연 우리 근현대사의 진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뜬금없는 얘기로 시작해보자. 한 나라의 지폐 도안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시대의 한 단면을 드러낸다. 일본의 지폐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메이지 시대(1868~1912년) 인물들 일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만엔권에는 교육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 5천엔권에는 여성 소설가 히구치 이치요, 1천엔권에는 과학자 노구치 히데요의 초상이 그려져 있는데, 이들 모두 메이지 시대에 활약한 인물들이다. 구권(1984~2004년)도 그리 다르지 않다. 1만엔권은 후쿠자와 유키치로 지금과 같고, 5천엔권은 교육사상가 니토베 이나조, 1천엔권은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초상이 담겼다. 현재의 지폐를 도안하면서 여성과 과학의 높아진 위상을 반영했을 뿐, 도안 인물들의 주요 활동 시대는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지폐 초상에 관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 이유는 한국 지폐들이 조선시대 인물 일색이라는 해묵은 비판을 되풀이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지폐 도안 인물로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시대의 일면을 꿰뚫어볼 수 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기 위해서다. 조금 과장하자면, ‘지폐를 보면 그 나라가 보인다’. 그 점에서 보면, 일본 지폐에 등장하는 인물 구성은 일본인들이 메이지 시대를 얼마나 중요하고 결정적인 시대로 보는지 방증한다. 그렇다면 메이지유신의 원훈(元勳)이자 일본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인물로 평가받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왜 일본 지폐 도안에 없을까? 현재 지폐에 없을 뿐, 예전 지폐에는 그의 초상이 들어가 있었다. 그것도 1963년부터 1984년까지 무려 21년간,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1천엔권 지폐에 말이다. 이것은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일본 내 평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에서도 유명하다.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극적인 최후를 맞은 탓에 삼척동자도 이름을 알 정도다.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가장 유명한 일본인’이라고 해도 그리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평가는 일본에서의 평가와는 반대편 극단에 있다. ‘일제 식민지배의 원흉’이란 한마디로 모든 게 요약된다. 입장은 명쾌하고, 이견은 없다. 그런데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안중근 의사가 단죄한 일제 침략의 원흉’이라고 정리하고 말아도 괜찮은 것일까? 이토 히로부미 혹은 이등박문, 그 ‘불편한 진실’ 2010년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지 100년, 일제에 의해 한국이 강제합병된 지 100년을 맞이하는 해다. 올 초에는 순국 100주기를 맞이해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재조명하고 그의 삶과 정신을 기리는 출판물, 영상물, 공연물, 행사들이 잇따랐다. 하지만 안중근의 영웅적 면모를 되새기는 움직임이 붐을 이룬 것과 달리, 그가 온몸을 던져 숨통을 끊은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관심에 가깝다.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지 100년이 넘었지만, 우리는 그에 대해 ‘침략의 원흉’이란 낙인에서 한 뼘도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혹시 치욕의 역사를 잊고 싶어 하는 집단심리가 작용한 것은 아닐까? ‘100년 전 한국’을 제대로 알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에서 영웅의 의거와 삶을 기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영웅의 의거로도 돌리지 못한 역사의 물줄기, 그 한 축을 알아야 지난 100년의 한국과 일본을 알 수 있고, 나아가 미래를 예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교사(反面敎師), 지피지기(知彼知己)의 차원에서도 그렇다. 『이토 히로부미』(이종각 지음, 동아일보사 발행)는 한 세기 전 우리에게 악몽 같은 존재였던 문제적 인물 이토 히로부미(1841~1909)의 생애를 그린 평전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일본 역사상 가장 극적인 신분상승을 이룬 인물로 여겨진다.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 지방의 벽촌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신분단계를 차례로 밟아가 하급무사가 되었으며, 메이지유신 이후 관선 효고 현 지사, 내무경, 내각총리대신(네 차례), 추밀원 의장(세 차례), 귀족원 의장, 초대 한국통감, 입헌정우회(정당) 총재 등을 역임했다. 메이지 천황에게 공작의 작위를 받았고, 대한제국 순종에게 친왕(親王)의 예우를 받았으며, 구미(歐美) 각국에서는 아시아를 대표하는 정치 지도자로 대우받았으니, 만인지상(萬人之上)이란 말이 그보다 적절한 경우는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극적인 신분상승을 이룬 인물이자 극단적 평가를 남긴 인물을 그리기 위해 이 책은 이토 히로부미(와 주변 인물들)에 관한 방대한 사료들을 토대로 그의 68년 생애를 재구성한다. 양이(洋夷)를 위해 서슴없이 칼을 들던 하급무사의 모습에서부터, 죽음을 무릅쓴 영국으로의 밀항 유학과 중도 귀국, 서구의 발전상에 큰 충격을 받아 양이를 버리고 근대화에 매진하게 된 일, 메이지 헌법을 기초해 근대 일본의 기틀을 세운 공적, 그를 만인지상의 위치로 이끈 탁월한 현실감각과 국제적 안목 그리고 주선가(周旋家)로서의 모습, 안중근에 의한 극적인 최후를 동년배 원로들이 부러워한 까닭, 죽음 이후 그의 아들과 안중근의 아들의 화해극까지, 우리가 잘 몰랐던 새로운 사실과 면모들을 만날 수 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소식을 듣고, 순종은 국운이 다했다고 탄식했으며, 고종은 이토가 한국의 자부(慈父, 자애로운 아버지)와 같았다면서 이토를 죽은 그 ‘흉한’이 한국인이란 사실이 부끄럽다고 개탄했다는 충격적인 자료도 볼 수 있다. 이토가 죽은 뒤 서울 한복판(장충단공원 동쪽, 현재의 호텔신라 자리)에 그를 기리는 절 박문사(博文寺)가 건립되었으며, 이토 사후 30주기를 맞아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이 이토의 아들을 만나 사죄했다는 믿고 싶지 않은 사실도 자세히 서술되고 있다. 베테랑 기자 출신으로 일본 전문가인 저자는 기존에 출간된 이토 히로부미 관련 책들이 비난과 미화 어느 한 쪽에 치우친 한계점을 직시하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그의 생애를 그리고자 했다. 또한 풍부한 사료들을 토대로 많은 일화와 쉽게 보기 힘든 자료 및 도판들을 싣고 있다. 비난과 미화의 이분법을 넘어, 미래의 반면교사로 1800년대 중반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격동의 막말유신(幕末維新, 도쿠가와 막부 말기와 메이지유신) 시기를 지나온 이토 히로부미의 파란만장한 여정은 그 자체로 ‘근대 일본의 탄생’을 보여준다. 일본인들이 메이지 시대를 나라의 국운(國運)을 바꾼 시대로 평가하며, 이토는 메이지 시대의 원훈이자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추앙받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의 생애를 읽으면, 서구 열강의 위협과 개방 및 근대화란 공통된 시대적 요청에 발빠르게 대응해 국운을 상승 반전시킨 일본과 달리, 고답적인 쇄국의 길을 걸은 한국의 행보가 아프게 다가온다.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원흉의 얼굴과 함께 원훈의 얼굴도 균형 있게 다룬 이 책을 읽어야 한다면,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올해는 엄혹한 질곡의 100년을 보내고 새로운 100년이 시작되는 해다. 한 세기 전 쓰라린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치열해진 경제전쟁의 포화 속에 당당한 미래를 예비하기 위해 터닝포인트가 되는 중요한 때다. 이를 위해서 이 책은 작지만 의미 있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미래는 역사의 불편한 진실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며, 이토 히로부미를 객관적으로 짚어보는 것은 하나의 단초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토 히로부미, 원흉의 얼굴뿐 아니라 원훈의 얼굴도 기억하자.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