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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의 글
1. 매화꽃 그늘서 맑은 술 한 잔 : 섬진강 매화길 2. 들판 위에 질박한 인생이 꽃피다 : 하동 평사리 ‘토지’길 3. 석탄 나르던 길, 이젠 들꽃만 자욱 : 화절령·만항재 운탄길 4. 쪽빛 바다, 머릿속까지 물든다 : 남해 금산 5. 쉬엄 쉬엄 걸어가면 문인의 글소리 들리고 : 거문도 6. 마음이 일렁이는 무지개빛 풍경 : 장흥·보성·강진 7. 바다가 품어낸 비밀의 화원 : 천리포수목원 8. 짠한 해변과 알싸한 숲길의 향연 : 부안 변산길 9. 람천 따라 걷고 싶은 여름 길 : 지리산 둘레길[인월~운봉~주천] 10. 순교자 발자취 따라 산나리꽃 눈부셔라 : 용인 안성 미리내성지 둘레산길 11. 어느 돌담 너머로나 수평선 : 제주 우도 올레길 12. 부처의 나라, 미륵의 땅 : 경주 13. 잠들지 않는 억새의 바다 : 정선 민둥산 14. 온갖 길이 만나는 ‘배꼽’ 길 : 소백산 자락길[죽령~소수서원] 15. 허튼 노릇 집어치고 태평하게 살아볼까 : 고창 질마재 100리 길 16. 새벽 물안개 잔잔히 흐르는 곳 : 섬진강 옥정호·김제 금산사 17. 아버지 넓은 등에 눈꽃왕관이 피었습니다 : 무등산 옛길 18. 솔솔 솔향기 품고 걸으리 : 강릉 대관령 솔향길 19. 못다 핀 꽃, 물 휘돌아 흐르네 : 진안 죽도 천반산 20. 한 걸음 두 걸음 바람의 길을 걷다 : 강화도 나들길 21. 천년의 어깨 너머로 울분을 삼킨다 : 철원 한탄강 궁예길 trekking inf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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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머금은 들판에 알싸한 바람이 분다
바람이 알싸하다. 얼굴이 시리다. 매화꽃대가 흔들린다. 물 주름살이 일렁인다. 강물은 알맞게 불었다. 섬진강 기슭엔 매화가 화르르 등불을 매달았다. 뼈만 남은 검은 가지에 ‘신음’을 토해냈다. 봄은 하동 평사리 들판에 머물고 있었다. 북쪽 지리산자락 너머는 아직 봄볕에 완강했다. 들판엔 아지랑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꼬물거렸다. 바람이 마른 덤불을 머리채 끌고 위로 솟구쳤다가, 핑그르르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곤 했다. 논두렁엔 아가 잇몸에 돋는 이처럼 하얀 냉이 꽃이 우우 피어났다. 농부들은 부지런히 트랙터로 논을 갈아엎었다. 아낙네들은 들판에 코를 박고 쑥, 냉이, 달래, 씀바귀를 캤다. 까마귀들이 부지런히 낟알을 줍고 있다. 여기저기 논두렁 마른 풀 타는 냄새가 구수했다. 가끔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강바람을 타고 올라왔다. ...... 들판 한가운데엔 소나무 두 그루가 마주보고 서 있다. 훤칠하고 단아하다. 사람들은 ‘부부소나무’라고 부른다. 용이와 월선이 소나무라고도 한다. 아예 사랑의 소나무라고 하는 이도 있다. 소나무 주위엔 수백그루의 매화가 무더기로 꽃을 피웠다. 향기가 들판에 가득하다. 논엔 찰랑찰랑 물이 찼다. 논바닥 흙은 물기로 질펀하다. 물꼬에 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이 세상에 가장 듣기 좋은 소리는 마른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 아기 목구멍에 젖 넘어가는 소리, 자식 책 읽는 소리….--- pp.26~27 하동 평사리 ‘토지’길 중에서 산과 들, 바다를 품은 길 전북 부안 변산은 바다와 들판 사이에 있다. 누에처럼 낮고 길게 엎드려 있다. 양쪽 옆구리가 모두 열고 닫힌다. 전동차 자동문 같다. 때론 왼쪽 문이 스르르 열리고, 때론 오른쪽 문이 덜커덩 열린다. 바깥쪽이 바다(외변산)이고, 안쪽이 들(내변산)이다. 한쪽에선 파도가 어미 젖을 빠는 강아지들처럼 구물구물 달려들고, 그 반대편에선 곡식들이 우우우 자란다. 해안 절벽 바위는 잘게 썬 무채다. 시루떡이 켜켜이 겹쳐 있다. 수만 권의 책들이 가지런히 정돈돼 있다. 바다는 떡을 먹으러, 혹은 책을 읽으러 우르르 몰려왔다가, 스르르 물러간다. 바닷물은 칙칙하다. 멸치젓 국물 같다. 쪽빛이나 푸른 물은 ‘아득한 기억의 저편’에 있다. 더 이상 하늘을 담지 못한다. 개펄은 쪼글쪼글하다. 늙은 어머니 젖가슴이다. 최광임 시인의‘폐경기 맞은 여인처럼’ 붉은 노을을 바라보고 있다. 게나 바지락들은 개펄 속에서 꼼지락거린다. 석기시대 사람들은 그곳의 조개들을 잡아먹고 살았다(대항리 패총). 소금밭을 일궜다. 거무튀튀한 밭에서 하얀 소금을 얻었다. 소금은 개펄이 육탈되어 남긴 사리다. 서편제 가락처럼 이어지는 개펄 서해 바다는 짠하다. 젓갈 냄새 가득하다. 그 해안길은 쪼글쪼글한 할머니의 뱃살이다. 늙은 아버지의 밭이랑 이맛살이다. 개펄은 주름지고 석탄 반죽처럼 질펀하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서편제 가락이다. 바다는 아득하다. 바람은 축축하다.서해 노을은 먹먹하다. 바다는 짐승처럼 운다. 붉은 노을을 치마폭에 싸안고 소리 죽여 흐느낀다. 바위에 지악스럽게 달라붙은 따개비들도 밤에는 손을 놓고 엉엉 운다.변산은 바다를 안는다. 자꾸만 머리를 부비며 달려드는 바다를 쓰다듬는다. 들판의 곡식들은 바다 소리를 듣고 자란다. 그 흐느낌을 들으며 익는다.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채석강의 책 읽는 소리를 듣고 깨우친다. 적벽강 수사자의 기개를 배운다.--- pp98~107 부안 변산길 중에서 사람들은 툭하면 길을 만든다. 산허리를 자르고, 강 위에 다리를 놓으며 길을 닦는다. 구부러진 길은 직선으로 곧게 펴고, 굽이굽이 산허리를 돌아가는 길은 터널을 뚫어 휙 지나간다. 도대체 빨리빨리 어디로들 가고 있는가. 그 어딘가에 ‘해 뜨는 집’이라도 있는 것일까. 시간은 거품이다. 느릿느릿 구불구불 가는 사람 이나, 번개처럼 앞서가는 사람이나, 그저 흘러갈 뿐이다. 쇠똥구리가 쇠똥을 굴리고 가다가 잠시 멈춘다. 지금 내가 거꾸로 서서 뒷발로 굴리고 가는 저것은 풀밭이다. 이슬에 젖은 새벽 풀밭 위로 흐린 새 몇 마리 떠갔던가. 그 풀밭 지나 종일 가면 저물녘 노을에 물든 이포나루에 닿을까. 거기 묶인 배 풀어 타고 밤새도록 흐르면 이 짐 벗은 채, 해 뜨는 바다에 닿을 수 있을까. 『이건청 ‘쇠똥구리의 생각’』 --- p.133 용인 안성 미리내성지 둘레산길 중에서 뱃사공의 한, 바람이 되어 분다 광성보 용두돈대 앞 염하는 물살이 세다. 꾸르릉! 꾸르릉! 강물이 소용돌이치며 흐른다. 사람들은 이곳을 손돌목이라고 부른다. 강폭도 다른 곳보다 100여 m는 좁다. 강 저쪽은 김포의 덕포?이다. 손돌은 고려 고종임금(재위 1213∼1259)을 배에 태우고 가던 뱃사공 이름이다. 고종은 이곳 급류를 지날 때 배가 심하게 요동치자, 손돌이 자신을 죽이려고 일부러 이곳으로 배를 끌고 간다고 생각했다. 배가 자꾸만 급류 쪽으로 달려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뱃길을 훤히 꿰뚫고 있던 손돌은 “보기에는 그렇지만 좀 더 나아가면 앞이 트일 것이니 크게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아뢰었다. 고종은 더욱 의심이 들어 손돌의 목을 당장 베라고 명령했다. 손돌은 죽어가면서까지 말했다.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반드시 뱃길이 트일 것이다.” 손돌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고종은 ‘아차!’ 했지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올 리 없었다. “고이 장사 지내주라.”며 멋쩍어할 뿐이었다. 손돌의 묘는 물 건너 김포 덕포진 북쪽 해안에 있다. 해마다 손돌이 죽은 음력 10월 20일이 되면 이곳 강화해협에는 큰 바람이 분다. 날씨도 매섭다. 이른바 ‘손돌바람’ ‘손돌이추위’다. --- p.254 강화도 나들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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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생활자를 위한 느린 걸음으로 만나는 꽃길, 숲길, 바닷길...
길 위에서 다시 ‘나’를 찾는, 인생이 가벼워지는 걷기 여행! 2009년 ≪길 위에서 놀다≫에 이어 두 번째 걷기 책! 도보 여행자를 위해, 전문 기자가 전하는 21가지 ‘사색의 길’을 소개한다. “밤에 논두렁길을 걸으면 하늘의 별들이 머리에 쏟아진다. 농사의 ‘농農’자가 왜 ‘별辰을 노래曲’하는 뜻을 담고 있는지 금방 깨닫는다. 가을 하늘에서 맨눈으로 볼 수 있는 별은 2,000여 개쯤 된다. 하지만 서울 밤하늘에선 잘해야 4, 5개 정도만 볼 수 있다. 서울 가로등은 17만 개나 된다. 보안등도 22만 개나 된다. 지상의 전깃불을 켜니 하늘의 별이 꺼진다. 마드리드는 인구 300만 명의 스페인 수도이다. 이 도시엔 조명 불빛 22만 개가 하늘로 18km, 사방 200km까지 뻗어나간다. 24시간 불 켜진 곳에서 운동도 하지 못하고 사료와 항생제만 먹고 자라는 양계장의 닭이 생각난다. 현대 도시인들도 그런 닭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은이의 글 중에서 일분일초라도 현실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작년에 이어 올해도 수많은 걷기 여행자들이 자신만의 트레킹 코스를 찾아 떠나고 있다.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유명해진 섬진강 매화길과 지리산 둘레길, 제주 올레길, 소백산 자락길 등은 휴가철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하지만 누가 보느냐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똑같은 장소와 시간에서도 길의 모습과 이야기는 달라진다. 길은 숨쉬기 위해 떠난다지 않는가. 수많은 여행책에서 숨 가쁘게 소개되는 정보를 뒤로 하고 천천히 저자의 호흡에 따라 떠나 보자. 숲길, 산길, 골목길, 논두렁길, 밭길, 고샅길, 마실길 모두 ‘나의 본적’이라 말하는 저자의 내면을 좇다 보면 우리도 아무런 목적 없이 걸어야 찾을 수 있는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보도 있고, 역사, 문학, 철학, 음식 등 온갖 것들이 함께 버무려져 있는, 그래서 시집인지 역사책인지 식물도감인지 헛갈리지만 읽고 나면 입안에 쩍쩍 달라붙고,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전주비빔밥 같은 책! - 이야기와 자연이 어울려 흐르는 길 그림 같은 길을 만나면 자신만의 혹은 함께 하는 여행자의 추억이 이어지게 된다. 늙은 농부의 모습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고, 꽃구경 나선 할머니의 꽁보리밥 시절 얘기에 귀가 쫑긋 선다. 저자는 길 위에서 만나는 수많은 이야기를 풍경과 소리와 향기로 풀어낸다. ‘섬진강 매화길‘에서 우리는 매화를 닮은 늙은 선비의 얼굴을 만난다. 매화를 끔찍이 생각했던 퇴계 이황은 눈 내리는 겨울밤엔, 화분 매화를 앞에 놓고 술잔을 기울였다. 그가 눈을 감을 때, 매화에 물을 줄 것을 당부했던 마음을 기려 지금도 안동 도산서원에는 늙은 매화가 해마다 꽃을 피운다. ‘하동 평사리 토지길’에서 들판의 바람소리, 흙냄새가 시처럼 흐른다. ‘이 세상에 가장 듣기 좋은 소리는 마른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 아기 목구멍에 젖 넘어가는 소리, 자식 책 읽는 소리….’ 토지길 1코스에서 문득 소설 ≪토지≫를 만난다. 고소산성에 올라가야 한눈에 보이는 평사리 들판, ‘구천이 소나무’는 소설 속에 펼쳐진 인생의 쓴맛과 단맛이 버무려져 눈앞의 자연과 나 자신이 서로 어울려 뛰놀게 만든다. - 길 위에 놓인 역사를 읽다 여행지의 관광 장소를 방문할 때 우리는 ‘여기가 그곳인가’ 하는 짧은 감탄과 함께 눈으로 몇 번 훑어본 후 잠시 쉬어 간다. 하지만 풍경에 가려져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는 역사 속 그 길은 저자의 말과 글로 다시 살아난다. ‘화절령·만항재 운탄길’은 강원 정선 영월의 백운산, 함백산 자락의 석탄 캐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길이다. 사람은 떠나고 자연만 남아 진폐증에 시달리던 시절을 견디고 노란 민들레가 웃고 있는 길. 폐광의 노랫소리는 평탄한 운탄길을 따라 느릿느릿 흐른다. 거문도 편에서는 100년 전 열강 세력의 침략으로 위기를 겪었던 사건, 부안 변산길 편에서는 변산 우반동에서 혁명을 꿈꾸고 ≪홍길동전≫을 집필한 허균과 ≪반계수록≫을 집필한 유형원을 소개한다. 지리산 둘레길에서는 옛 신라 땅이였던 운봉고원의 역사를 만난다. 이성계가 운봉고원의 목젖인 황산협곡에서 왜구와 맞서 ‘달빛을 끌어당겨’ 한밤까지 활을 쏘며 싸웠다는 ‘인월’이라는 지명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 감성을 자극하는 시와 질박한 글의 아름다움 소개되는 시와 글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무엇이 시인지 무엇이 글인지 몽롱해질 정도로 글 따라 읽는 맛이 색다르다. ‘변산은 바다를 안는다. 자꾸만 머리를 부비며 달려드는 바다를 쓰다듬는다. 들판의 곡식들은 바다 소리를 듣고 자란다. 그 흐느낌을 들으며 익는다.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채석강의 책 읽슴 소리를 듣고 깨우친다. 적벽강 수사자의 기개를 배운다.’ 서정주 시인을 비롯한 서른 명이 넘는 시인들의 주옥같은 시가 길을 따라 펼쳐진다. 그 장소와 풍경과 시점이 맞물리는 시와 글이, 본문의 처음과 중간 곳곳에서 길 떠나는 이들의 발목을 쉬게 하고 스스로 사색할 여유를 찾게 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