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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볍을 뛰어넘는 사람
옮긴이 해설/머릿속의 장벽-분단 국민의 의식세계에 관한 문학적 탐구 작가 연보 기획의 말 |
Peter schnei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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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에의 의지와 민족의 존속이 공식적으로 얼마나 자주 호소되는지, 그 빈도수에서 그에 부합하는 감정이 살아 있다고 추론하지 않는 게 올바를 것이다. […] 그들이 느끼는 분단의 고통이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이 아니라, 언젠가 느꼈던 강렬한 감정을 애통해하는 연인과 같다. 독일에서는 시간이 상처를 치유하는 게 아니라, 고통의 느낌을 없애버리는 것 같다. --- p.34
서독은 그녀에게 있어 모순과 어중간함과 텅 빈 약속들이 엉켜 있는 덩어리, 표면의 열로만 덥혀지고 그 아래는 영원히 얼어붙어 있는 다른 땅덩어리였다. 이곳에서 인간관계는 맺어졌다가는 금방 다시 끊기고, 이미 내일이면 잊어버릴 이름을 묻고, 분명 안 할 것이면서도 전화하겠다고 약속한다. 가짜 웃음, 인조 치아들. 그녀의 정치적 환멸은 우선은 그렇게까지 사회의 반공적인 경향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말뿐인 반공주의의 말투, 아무것도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 태도에 해당하는 거였다. […] 서독은 가짜며 거짓말투성이였고, 그래서 레나는 어린아이의 진실감을 가지고 원문을 요구했다. --- p.104 머릿속의 장벽을 허무는 데는 어느 철거 기업이 눈에 보이는 장벽을 허무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포머러와 나는 둘 다 아직도 바람에 있어서만큼은 각자의 국가로부터 거리를 취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입에서 국가가 말을 하지 않고는,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다. […] 소유를 나타내는 “너희들”과 “우리들” 혹은 “우리 편에서는”과 “너희 편에서는” 같은 말들은 매번 독-독 이산가족 상봉이 있을 때마다 듣게 되는 말인데, 그건 단순히 국적 표시를 줄인 말에 불과한 게 아니다. 그것은 개개의 정치적인 선택을 넘어선 곳에서도 관철되는 일종의 소속감을 나타낸다. 두 대화 상대자가 이 줄임말 속에 담겨 있는 교훈을 암송하고 나서야 비로소, 여전히 그들 각자에겐 장벽 뒤의 것인 삶에 관해 대화가 시작될 수 있다. --- p.127 나는 지난해 마흔이 되었다. 자기 이름 앞 자에 “독일의”라는 단어를 쓰는 두 국가는 이제 막 서른 살 생일을 축하했다. 말하자면 난 내 옆과 내 안에서 자란 그 국가보다 딱 열 살을 더 먹었다. 나이만 봐서라도 난 그 국가를 내 조국이라고 부를 수 없다. 게다가 이 국가가 나의 조국일 땅의 반쪽만을 대표하고 있다는 점이 거기 덧붙여진다. 만일 내게 조국이란 게 있다면, 그건 국가가 아니다. 내가 시민으로 살고 있는 그 국가는 나의 조국이 아니다. 만일 국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내가, 나는 독일인이요, 하고 주저 없이 대답한다면, 난 분명 한 국가가 아닌, 어떤 국가적 정체성도 갖지 않은 한 민족에 대한 나의 소속감을 선택하는 것이다. --- pp.134-135 “난 이미 오래전부터 기타를 치지 않는다. 말하자면, 여기 나를 둘러싸고 있는 물건들 중에서 난 좀더 지속적인 것에 속한다. 오직 저 밖의 도시만이, 거기 있는 방화벽과 뒷마당 벽과 장벽들과 함께―그 벽들은 넘어갈 사람이 더 이상 없을 때에도 여전히 거기 서 있을 것이다." --- p.1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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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라! 마음이 원한다면
엉뚱 황당 기발한 베를린 사람들의 열렬한 벽 넘기! 당대의 세계관과 시대정신을 탁월하게 표현해온 페터 슈나이더의 대표작 “집 안이 너무 조용하고, 밖은 너무 흐리고, 안개는 너무 짙고, 그리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나면, 이런 생각을 하죠. 아, 다시 한 번 장벽을 뛰어넘어보자.” ―본문 중에서 ‘장벽을 뛰어넘는 사람들’―이 표현은 실제로 분단시절 동서 베를린 간에 세워진 장벽을 뛰어넘는 사람들을 말했다. 이 소설은 자전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베를린에서의 삶을 형상화한 에세이적 문학작품이면서, 독일분단이라는 현상에 관해 씌어진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1982년에 『장벽을 뛰어넘는 사람Der Mauerspringer』(대산세계문학총서 97권)을 발표함으로써 슈나이더는 독일 분단 문학에 새로운 한 획을 그었으며, 이 작품으로 그는 독일문학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작가로 특별한 위상을 지니게 된다. 무엇보다도 냉전의 이데올로기로 굳어진 분단이, 보편적인 역사-정치의 문제를 넘어 각 체제 안에 사는 사람들의 의식 및 지각작용 그리고 정체성까지도 어떻게 지배하는지 명료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각별하다. 게다가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저 특유의 우수에 찬 작품의 분위기와 축약된 시적 언어는 이 작품을 주옥같은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기에 충분했다. 이 작은 책자 안에는 장벽을 뛰어넘는 사람들의 다양한 일화가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이 작품 자체가 분단의 장벽을 뛰어넘고자 한 하나의 시도였다. 올해 고희를 맞은 페터 슈나이더Peter Schneider는 68세대의 대표자답게 매번 당대의 과제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형상화시킴으로써 “68운동의 양심이자 심급” 혹은 “개혁과 변혁의 68정신을 가장 탄력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라 불린다. 독일 통일 20주년을 맞아 문학과지성사에서는 독일 현대문학의 중심에 서 있는 페터 슈나이더의 대표작을 엄선하여 소개한다. 분단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새롭고 절실한 문학적 감동을 줄 것이라 확신한다. 그들은 왜 장벽을 뛰어넘는가? 분단시절 당시, 실제로 수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장벽을 뛰어넘으려고 시도했다. 98명의 동독 시민들이 도주 중에 총을 맞고 사살당하기도 했다. 장벽을 넘는 방향이 매번 동에서 서로만 간 것은 아니었으며, 서에서 동으로 장벽을 뛰어넘는 시도들도 있었다. 다만 동독에서는 장벽이 국경으로 간주되어 군사 시설과 엄중한 감시로 철저하게 무장되어 있었던 반면, 서독은 한 번도 장벽을 국경으로 인정한 적이 없었다. 장벽을 기껏해야 점령지역의 경계 표시로 여기거나 불법적으로 세워진 장애물로 치부했다. 즉, 동독에서는 국경 침범으로 처벌의 대상이 되는 ‘장벽 뛰어넘기’가 서독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서독의 입장에서는 벽을 감시할 이유도 없었으므로 장벽이 서 있는 기간 동안 적어도 400여 건이 넘는 월경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이 장벽을 뛰어넘는 이유들 역시 다양했다. 정식으로 국경을 통과하여 동독으로 가는 길이 열려 있었건만 굳이 장벽을 넘은 것은, 이들이 공식적으로 여행 허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거나 혹은 심리적인 문제 때문에 혹은 술에 취해 객기에서 일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장벽 넘기를 내기의 대상으로 삼거나, 혹은 여자 친구에게 특별한 인상을 주기 위해, 더러는 자신의 용기를 시험하기 위해 사람들은 장벽을 넘기도 했다. 장벽에 대한 항의 표시로 벽을 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극히 드물었다. 작품 속에도 등장하며 실제 인물이기도 했던 아놀드 카베는 15번 장벽을 뛰어넘었는데, 그는 “삶이 권태로울” 때마다 장벽을 뛰어넘었다고 한다. 『장벽을 뛰어넘는 사람』은 이러한 실제의 에피소드들을 수용했다. 진짜 문제는 ‘머릿속 장벽’이라구! ―분단된 나라 국민의 의식에 관한 문학적 탐구 자전적인 요소가 강하게 느껴지는 이 작품의 주인공은 ‘나’라고 하는 화자이다. 독일이 분단된 지 30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지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나’는 냉전 체제에 갇혀 분단과 민족통일이라는 주제에 점차 무뎌져가는 자신을 비롯한 뭇 사람들의 생각에 문제의식을 느낀다. 매년 기념행사 따위에서나 분단 현실에 “놀란 얼굴을 지어 보이는” 정부 및 정치가는 물론이고, 국경에서 멀면 멀수록 자신을 온전한 전체로 여기는 서독 사람들에게서 분단 극복에 대한 의지가 점차 사라져가고 있음을 감지한다. “참을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느낌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느낌이 부재한 것에 대한 불신” 때문에 ‘나’는 “독일문제”와 직접 대면하기로 결심하고 “분단에 관한 이야기”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이런 연유로 작품은 ‘이야기 속 이야기’라는 서사적 구조를 지닌 ?자 소설의 성격을 띠고 있다. 작품의 뼈대를 이루는 틀 구조는 ‘나’의 베를린 생활, 동독여행, 서독으로 이주한 동독 출신의 동료 작가 로베르트 및 동독 출신의 여자 친구 레나와의 관계, 동베를린에 거주하는 작가 포머러와의 관계, 동서독 이산가족상봉 체험 등의 일화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선 서로 다른 두 체제가 얼마나 깊이 주민들의 의식 및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끼치는지, 민족의 정신적 분단 상태의 원인이 다름 아닌 “머릿속의 장벽”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체제의 장벽이 어떻게 여전히 관계와 소통을 가로막고 있는지 심층심리학적으로 분석된다. 또한 ‘국가’라는 체제 안에서 내면화된 “머릿속 장벽”을 명료하게 가시화하고, 이로써 분단을 지속시키는 원인에 대해 깊이 있게 파고든다. 이러한 틀 구조에 안에 내부 구조로써 장벽을 넘는 사람들에 관한 일화들이 천일야화식으로 형성돼 있다. 틀 구조가 일인칭 화자 ‘나’의 지각작용과 생각, 만남들을 다양한 일화형식으로 서술한다면, 내부 구조는 삼인칭 인물들의 다양한 월경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아프리카에서 올 연인을 기다리며 동베를린의 전화를 사용하다가 결국 동베를린으로 이주한 샬터의 이야기, 실업자 카베의 열다섯 번에 걸친 장벽 넘기 이야기, 영화를 보러 가려고 열두 번이나 서쪽으로 장벽을 넘은 세 명의 극장쟁이들 이야기, 동독에 복수를 하려다가 이중간첩이 되고 동서를 분주히 오가다가 결국엔 어느 쪽의 명령으로 행동하는지조차 모르게 되는 발터 볼레의 이야기, 홀로 대동독전을 치르다가 죽음을 맞는 미하엘 가르텐슐레거의 이야기 등등이 장벽과 분단이라는 공통분모로 연결된다. 하지만 이 월경자들의 근본적인 동기는 정치적인 데 있지 않고 오히려 심리적인 욕구에 있다. 즉, “어쩌면 장벽을 넘고자 하는 욕구는 원칙적으로 K2를 오르고자 하는 열망과 다르지 않을 것이며, 그런 욕구는 단순히 장벽이 거기 있다는 데서 연유하고, 그래서 장벽이 서 있는 한 그렇게 계속”(p.64)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이중의 구조를 통해, 작품은 동일한 문제를 다중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분단과 독일문제라는 작품의 근본 주제에 접근해 들어간다. ‘국가와 민족의 본질’에 관한 통렬한 문학적 성찰! ‘독일문제’를 정치체제와 영토문제를 넘어서는 분단민족의 정서와 의식, 그리고 정체성의 문제로 고찰한 점에서 이 소설은 분단민족의 의식세계에 대한 탐구이자 국가와 민족의 본질에 대한 통렬한 문학적 성찰이라 평가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머릿속의 장벽을 허무는 일은 어느 철거작업이 눈에 보이는 장벽을 허무는 데 드는 시간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릴 것이다”라고 예견함으로써 독일 재통일 이후 시작된 구(舊)동서독 국민 간의 극심한 갈등과 정체성을 둘러싼 분쟁의 핵심을 정확하게 포착해냈다. 한편 이 작품은 통일 이전 분단 도시였던 베를린의 역사적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하며 도시와 인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같이 출간되는 『에두아르트의 귀향』(대산세계문학총서 98)과 함께 1990년 이후 새로운 장르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도시문학의 뛰어난 예로도 꼽히고 있다. 이 작품 『장벽을 뛰어넘는 사람』은 분단 극복의 문제가 체제의 통합이 아닌 사람들 간의 소통과 통합의 문제라는 자기성찰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세계 최후의 분단국가인 한국의 현실과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한반도 문제를 안고 있는 우리에게, 이 작은 책자가 주는 의미는 더없이 소중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