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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에게 모든 것은 한 가지 점을 확인하는 데서 시작한다. 곧 스피노자의 철학에는 예외적이고 불가피한 어떤 것이 존재한다. “스피노자는 근대 철학에 너무나 결정적인 지점을 구성하기 때문에, 스피노자주의냐 아니면 전혀 철학이 아니냐 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1부 1장 '실체의 관점'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실체와 그 절대적 통일성은 부동적인 통일성, 경직성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이 안에서 우리는 아직 자기의 부정적 통일성이라는 개념, 주체성이라는 개념을 발견할 수 없다.”--* 1부 1장 '실체의 관점' '대논리학 1권' 인용문 스피노자는 헤겔 체계의 전개 과정 전체에 걸쳐 이 체계에 유령처럼 따라다닌다. 스피노자가 증상을 이루고 있는 이 강박은 단 한 번에 떨쳐질 수 없으며, 아직 자신의 시초와 진정으로 결말을 보지 못한 헤겔의 이 담론 안에서 끊임없이 되돌아온다.-* 1부 2장 '시초의 철학' 마지막 두 문장 왜냐하면 헤겔이 스피노자에 대한 자신의 독해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있으며, 스피노자 체계의 진정한 의미에서 완전히 빗나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왜 또한 헤겔이 이처럼 명백한 것을 무시하면서까지 전력을 다해 스피노자의 철학이 확립하려고 하는 것과 정반대의 것을 그 철학 스스로 말하게 하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파악해야 한다.-* 3부 6장 '속성의 문제에서 헤겔의 오류' 마지막 부분 이렇게 되면 가장 명백하게 보이는 관점들이 전도된다. 곧 바로 스피노자가 헤겔의 변증법을 거부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스피노자가 모든 변증법을 거부했음을 의미하는가? 스피노자가 헤겔의 변증법에서 거부한 것은 정확히 말하면 비변증법적인 것, 곧 마르크스가 헤겔의 관념론이라 불렀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모든 변증법은 그 자체 관념론적이거나 반동적이라는 생각은 전혀 철학적으로 흥미가 없는 것으로 무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관념론적 변증법과 유물론적 변증법을 분리하는 경계는 어떤 것인가? 어떤 조건에서 변증법은 유물론적으로 될 수 있는가? 우리가 이 질문을 제기할 수 있게 스피노자가 도와주었으며, 이 질문에 하나의 내용을 부여했다는 점을 인정하기로 하자.-* 4부 9장 '목적론' 마지막에서 두번째 문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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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피노자는 <범신론자>라는 매우 애매모호한 명칭에 따라 불려졌고, 또 그렇게 인식되어 왔다. 그런데 이런 스피노자 상은 사실은 헤겔을 비롯한 독일 관념론 철학자들이 주조해 낸 상이다. 따라서 마슈레의 이 책은 국내에 널리 퍼져 있는 스피노자의 그릇된 모습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스피노자 철학이 이러한 모습을 만들어 낸 헤겔 철학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이론적 자원을 담고 있음을 입증해 준다는 점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새롭게 이해하고 활용하기 위한 중요한 자료가 된다.
90년대 이후 국내에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심이 많이 생겨났다. 이는 대부분 들뢰즈나 알튀세르, 또는 네그리나 발리바르 같은 사람들의 스피노자 연구 덕분이다. 그런데 이들 모두는 스피노자 철학이 이전까지 생각되어 오던 것과는 매우 다르고, 또 매우 새로운 측면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주고, 더 나아가 그의 철학을 현대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중요한 이론적 도구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들의 작업을 매개로 스피노자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된 국내의 독자들이 스피노자에 관한 연구에서 기대하고 있는 것은, 이전까지 알려져 오던 것과는 매우 다른, 스피노자 철학의 새로운 면모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마슈레의 이 책은 왜 스피노자의 철학이 독일 관념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범신론 철학이 아니며, 더 나아가 어떤 점에서 스피노자가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해명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는지 보여 준다는 점에서 국내의 논의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더 나아가 그동안 국내에 소개된 스피노자 연구서들 대부분은 많은 오역과 부적절한 개념 번역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스피노자 전공자가 번역한 이 책은 단어 하나하나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상세한 역주와 해제를 첨부함으로써, 스피노자 철학을 올바르게 수용하는 데도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 책은 헤겔에 대한 스피노자주의적 비판이자, 유물 변증법을 모색하려는 시도이며, 또한 1960년 이래 프랑스 스피노자 연구에 새로운 차원을 부여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 책은 출간된 이후 이러한 세 가지 측면 이 외에도, 스피노자의 인식론과 존재론에 대한 해설서로 널리 읽혀 왔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저자 마슈레의 의도와는 달리 스피노자 철학의 이러저러한 측면과 문제들에 대한 한 스피노자 연구가의 해석을 담은 책으로 간주되어 왔다. 1979년 처음 출간된 이래 이 책은 유럽 철학계, 특히 스피노자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의 의의는 크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1) 이 책은 19세기와 20세기 동안 스피노자 철학을 범신론 철학으로 이해시키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헤겔의 스피노자 해석을 하나하나 상세하게 검토하고 비판함으로써, 스피노자 철학의 진면목을 부각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2) 더 나아가 이 책은 알튀세르의, 스피노자,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여,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과 다른 새로운 유물변증법의 가능성을 스피노자 철학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마슈레의 시도는 1980년대 안토니오 네그리나 에티엔 발리바르 등의 스피노자 연구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스피노자 철학이 현대에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잘 보여 주고 있다. 3) 이 책은 또한 1960년대 말 이래 프랑스에서 시작된 스피노자 르네상스에 새로운 동력을 부여했다. 실제로 이 책이 출간된 이후 스피노자와 독일 관념론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새롭게 활기를 띠기 시작했으며, 스피노자의 인식론과 존재론에 대한 관심이 더욱 고조되었다. 그 결과 1990년대 이후 프랑스에서는 다수의 유능한 스피노자 연구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왜 헤겔 "또는" 스피노자인가?> 이 책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은 책의 제목이다. 마슈레는 이 책의 제목을 “헤겔과 스피노자”라고 하지 않았으며, “헤겔이냐 스피노자이냐”라고 하지도 않고, “헤겔 또는 스피노자”라고 붙였다. “헤겔과 스피노자”가 아닌 이유는 우선 헤겔이 왜곡시킨 스피노자의 상을 바로잡고, 더 나아가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유물변증법의 가능성을 스피노자 철학에서 발견하는 것이 이 책의 한 가지 목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헤겔이냐 스피노자이냐”라는 제목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마슈레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헤겔 철학은 모두 그릇되고 스피노자 철학은 전적으로 참된 것이라는, 매우 통속적이며 이분법적인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가 이 책에서 궁극적으로 보여 주려는 것은 “철학의 진리는 헤겔 안에 존재해야 하는 것처럼 스피노자 안에도 존재한다. 이는 곧 이 진리가 전자나 후자 안에 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 사이의 어딘가에,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넘어가는 길 안에 있음을 뜻한다”는 점이다. 곧 헤겔 철학과 스피노자 철학 안에서 동시에 작용하고, 이 두 철학을 함께 성립시키는 철학 자체의 움직임을 포착하려는 것이 마슈레의 목표인 것이다. 하지만 다시 마슈레에 따르면 이는 두 철학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두 철학 안에서 동시에 작용하는 철학의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두 철학을 팽팽하게 마주 세우고 대결시켜야 한다. 바로 이 경우에만 헤겔 철학 속에서 스피노자 철학의 난점을 읽는 게 가능하고, 또 스피노자 철학 속에서 헤겔 철학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을 포착하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헤겔과 스피노자”도 아니고 “헤겔 즉 스피노자”도 아니며, 더 나아가 “헤겔이냐 스피노자이냐”도 아니고, “헤겔 또는 스피노자”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