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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을 말하다 2
이덕일 역사평설
이덕일
역사의아침 2010.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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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top20 32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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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품의 시리즈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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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저자의 글

1부 삼종 혈맥의 시대를 연 임금들 - 효종, 현종, 숙종

1 효종


같은 현실을 보고도 소현과 봉림 두 형제의 꿈은 달랐다 - 국란을 겪은 임금
소현세자 일가에 쏠린 동정론, 효종의 역린 건드리다 - 강빈 신원 논란
러시아를 두 번 이기고 털어낸 ‘삼전도 콤플렉스’ - 서양과 접촉
말로는 북벌 외치며 무신 우대 발목 잡은 문신들 - 사대부의 저항
설욕보다 기득권, 사대부들 안민 내세워 양병론을 꺾다 - 스러진 북벌의 꿈

2 현종

임금도 사대부, 예학의 틀에 갇혀버린 효종 국상 - 1차 예송 논쟁
국상 예법을 둘러싼 사대부의 싸움, 왕권만 추락하다 - 예송 논쟁의 칼날
사대부의 조세 저항, 7년 걸린 대동법 호남 전역 확대 - 공납 개혁 갈등
가뭄·홍수·냉해·태풍·병충해, 오재가 한꺼번에 덮치다 - 경신 대기근
지도층의 희생과 대동법, 천재지변에서 나라를 구하다 - 대기근 극복
오만한 서인에 분노한 임금, 정권 바꾸려다 의문의 죽음 - 34세에 요절하다

3 숙종

민생 무너지는데, 임금과 사대부 눈엔 송시열만 보였다 - 14세 소년 국왕
윤휴 북벌론 꺾은 사대부의 이중성 - 청,내란의 호기
부국강병의 길, 특권이 막았다 - 민생 개혁의 좌절
왕권 위해 남인과 북벌론을 버리다 - 경신환국
권도의 말단 정치 공작, 당쟁의 피바람 키우다 - 서인의 분열
차기 후계 암투가 임금의 가정을 파탄 내다 - 미인계 정국
애욕에 눈먼 임금, 정치 보복을 허하다 - 기사환국
미인계로 흥한 남인, 미인계로 망하다 - 갑술환국
왕권 강화, 임금에겐 달고 백성에겐 쓴 열매 - 후계 경쟁

2부 독살설에 휩싸인 임금들 - 예종, 경종

4 예종


공신과 밀착한 세조, 왕권 위에 특권층을 남기다 - 쿠데타의 업보
권력의 균형 무너뜨린 남이의 죽음 - 신·구공신 권력투쟁
힘보다 뜻이 큰 군주의 운명 - 개혁 능력의 한계
급서 미리 안 듯, 일사천리로 구체제 복귀 - 거대한 음모

5 경종

세자 바꾸려 한 노론, 대리청정 덫을 놓다 - 숙종과 이이명 독대
힘없는 국왕 앞에 드리운 어머니 장희빈의 그림자 - 허수아비 임금
33세 임금을 굴복시킨 ‘한밤의 날치기’ - 연잉군 왕세제 옹립
노론의 대리청정 요구에 소론 중용으로 ‘반격의 칼’- 신축환국
경종 시해 시나리오, 목호룡 고변으로 발각 - 노론 4대신
왕에게 독을 먹이고도 수사망 빠져나간 궁인 - 세 가지 의혹

3부 성공한 임금들 - 세종, 정조

6 세종


권력은 나눌 수 없다, 아버지 태종의 혹독한 가르침 - 애민 군주의 출발
책에서 찾은 성군의 길, 지식 경영의 시대를 열다 - 미래 인재 양성
기득권층 반발에 종모법 복원, 노비제 확대로 시대 역행 - 여론 중시 정치
명 신뢰 얻으며 실리 외교, 북방 영토 확장 결실 - 사대교린
사신 보내 명 황제 설득, 윤관이 개척한 북쪽 땅 되찾아 - 육진 개척
통합의 리더십, 왕비 집안 무너뜨린 신하까지 껴안다 - 용인술
신분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문화, 르네상스와 국력 신장을 이루다 - 천인 등용
당대 최고 언어학자 세종, 말과 글의 혁명 이끌다 - 훈민정음 창제
언어 혁명 → 생활 혁명, 쉬운 법률 용어로 백성을 구하다 - 훈민정음 창제 정신
삼정승과 세자에게 권력 분산, 국정 효율 극대화 - 시스템 통치

7 정조

정치 보복의 악순환 끊고 새 시대 통합을 꾀하다 - 사도세자의 아들
노론이 보낸 자객, 왕의 침소 지붕 뚫고 암살 기도 - 3대 모역 사건
우의정에 남인 채제공 발탁, 권력 재편 승부수 - 남인의 부상
노론의 천주교 탄압 요구, 문체반정 앞세워 정면 돌파 - 북경에서 세례 받은 이승훈
서자 출신 지식인 등용으로 노론의 특권 카르텔에 맞서다 - 북학파의 도발
오라비 잃은 정순왕후, 정조에게 복수의 칼 겨눠 - 왕대비의 반격
음지의 사도세자 양지로, 정조의 조선 개조 시작되다 - 수원 용복면 현륭원
임금의 서민 프렌들리, 숨죽인 신도시 반대 여론 - 민심 확보책
민심이 원한 건 변화, 신도시발 농업·상업 혁명 시동 - 화성의 탄생
임금의 죽음 예고하듯 상복 입은 ‘하얀 벼’ 기현상 - 5월 그믐날 경연 교시
임금 묻은 다음 날, 노론은 역사를 되돌리기 시작했다 - 정조 독살 의혹

4부 나라를 열고 닫은 임금들 - 태조, 고종

8 태조


21세의 격구 천재 이성계, 고려 조정에 얼굴을 알리다 - 건국의 뿌리
전쟁 영웅에게 쏠린 민심, 개국의 원동력 되다 - 천명
귀족의 땅을 백성에게, 개국의 씨앗을 뿌리다 - 과전법 실시
베갯머리송사로 정한 후계자, 피바람을 예고하다 - 역성혁명
지는 해 이성계, “밝은 달 가득한데 나 홀로 서 있도다” - 불우한 말년

9 고종

무관의 제왕 흥선대원군, 권문세가와 전면전 - 대원위 분부 시대
경복궁 중건은 왕조 붕괴 앞당긴 허영뿐인 대역사 - 민생 파탄
쇄국론자 대원군, 쇄국론자 최익현의 공격에 무너지다 - 천주교 탄압
개방에 집착한 고종, 일본의 침략 야욕에 말려들다 - 불평등조약
공론화 없이 추진한 개화, 척사파 설득 못해 실패 - 임오군란
고종, 자기 날개 자르는 줄도 모르고 개화파 제거 - 갑신정변
늘 개혁의 반대편에 선 임금, 동학 막으려다 외세 침탈 자초 - 동학농민혁명
전제 왕권 집착한 고종, 나라를 열강의 먹이로 내놓다 - 외세 의존의 한계
자질 부족한 임금의 오락가락 정치 행보, 망국은 필연이었다 - 잃어버린 44년

조선 왕조 계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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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1

이덕일

 

李德一

숭실대학교 사학과와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8년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를 창립한 이래 우리 사회 양대 사대주의 역사관인 조선 후기 노론사관과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을 해체하는 한 길을 걸어왔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등의 저서를 통해 남한 강단사학의 노론사관을 비판했고,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우리 안의 식민사관》 등을 통해 남한 강단사학의 정설인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을 비판했다. 현재 《조선왕조실록 1~5》(10권까지 근간)을 집필 중에 있고,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해역), 《신주사기》 등 수많은 저서가 있다. 황국사관을 추종하는 역사학자들은 임나를 가
숭실대학교 사학과와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8년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를 창립한 이래 우리 사회 양대 사대주의 역사관인 조선 후기 노론사관과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을 해체하는 한 길을 걸어왔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등의 저서를 통해 남한 강단사학의 노론사관을 비판했고,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우리 안의 식민사관》 등을 통해 남한 강단사학의 정설인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을 비판했다. 현재 《조선왕조실록 1~5》(10권까지 근간)을 집필 중에 있고,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해역), 《신주사기》 등 수많은 저서가 있다. 황국사관을 추종하는 역사학자들은 임나를 가야로 보고, 그 임나를 야마토왜가 지배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였다고 주장하는데, 《조선사편수회 식민사관 비판 Ⅱ- 임나일본부는 일본열도에 있었다》는 임나일본부는 한반도 남부에 없었고 일본열도에 있었음을 밝혀내어 황국사관의 논리적 모순을 조목조목 밝혀 해체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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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10년 11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480쪽 | 793g | 152*225*30mm
ISBN13
9788993119237

책 속으로

진부한 이야기 같지만 모름지기 역사에는 교훈과 반성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 이를 자양분 삼아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시대와 환경의 한계는 장삼이사있고 국왕에게도 있다. 역사가 감동적인 것은 그런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담겨 있기 때문이며, 때론 그런 노력이 큰 성과를 거두기도 하기 때문이다. 노력 여하에 따라 시대의 한계를 일정 정도 극복하고 성공한 국왕, 성공한 리더가 된 군주가 있는 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렇게 역사는 타산지석이 된다. 개인에게나 시대에나. ---「저자의 글」중에서

세종은 신분보다 능력을 중시했다. 조선은 사대부가 정점에 서 있는 신분제 사회였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능력이 뛰어나면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다. 최장수 영의정인 황희도 그런 인물이었다. 『세종실록』 10년 6월조는 “황희는 판강릉부사황군서의 얼자”라고 전한다. 이어서 “황치신은 그 부친(황희)이 황군서의 정실 자식이 아닌 것을 알지 못했다”라고 기록했다. 황희 집안에서 모친이 천계라는 사실을 감췄다고 알려졌지만 황희의 모계는 세종을 비롯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세종은 서자 출신을 최장수 영의정으로 등용한 것이다.
세종 때에는 미천한 신분으로 고위 관직에 오른 인물이 적지 않은데 이는 태종의 정책을 계승한 것이기도 하다. 동래 관노 출신으로 종3품 대호군까지 오른 장영실이 널리 알려졌지만 그 외에도 많은 인물이 능력을 발휘해 고위 관직에 올랐다. 이런 인물은 대략 두 부류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무관 계통, 다른 하나는 기술자·과학자로 모두 실용을 중시한 시대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 p.266 중에서

정조는 화성 신도시를 모두의 축복 속에 완공하는 것이 사도세자의 원혼을 달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신도시를 건설하는 데 문제가 없을 수 없었다. 먼저 철거당하는 백성의 문제가 있었다. 정조는 “깃발을 꽂아놓은 곳을 보니 성 쌓을 범위를 대략 알겠으나 북쪽에 위치한 마을의 인가를 철거하자는 의논은 좋은 계책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서 “이 성을 쌓는 것은 억만 년의 유구한 대계를 위해서이니 인화가 가장 귀중하다. …… 이미 건축한 집을 어찌 성역 때문에 철거할 수 있겠는가”라며 철거에 반대했다. 백성의 강제 부역 대신 임금노동을 택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또한 여기에는 강제 부역이 점차 임금노동으로 전환되는 사회 변화를 내다보고 이를 선도하려는 뜻도 담겨 있었다.

그러나 부역 금지와 전면적인 임금노동제를 이상에 치우친 결정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채제공도 정조 18년 5월 “화성 성역은 국가의 대사”라며 “백성과 승군들을 며칠 동안 성역에 부역시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듯합니다”라고 백성과 승려의 부역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에 정조는 “본부의 성역에 기어코 한 명의 백성도 노역시키지 않으려 하는 것은 내 뜻한 바가 있어서이다”라며 반대했다. 정조는 화성 성역을 통해 백성이 먹고살 수 있는 일자리를 창출할 생각이었다. 그뿐 아니라 무더운 여름에 일꾼들이 쓰러질 것을 걱정해 어의들과 상의한 끝에 ‘더위를 씻는 알약’인 척서단 4,000정을 만들어 현장에 내려보냈다. 속이 타거나 더위를 먹은 증세에 한 정이나 반 정을 정화수에 타서 마시면 기력을 회복케 한다는 약이었다.

그럼에도 가뭄이 계속되자 정조는 7월 “일찍이 옛사람들이 오행부연한 말을 보면 ‘많은 백성을 수고롭게 부려서 성읍을 일으키면 양기성하기 때문에 가물이 든다’고 했다”며 공사를 일시 중지시켰다. 정조의 이런 구도자 국정 수행 자세에 반대론은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신도시 건설이라는 거대한 역사에 단 한 명의 백성의 원망도 없게 하면서, 가뭄까지 하늘의 조짐으로 스스로를 경계하는 국왕을 향해 반대론을 펼치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조에게 국정은 지극한 신앙의 실천과 다름이 없었다.

고종은 시대 변화를 거부했다. 정환덕은 『남가몽』에서 고종이 즉위한 후 처음 내린 명령이 자신에게 군밤을 주지 않은 계동 군밤 장수를 처형하라는 것이었다고 전한다. 만 11세 어린 시절부터 왜곡된 권력관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강국이 되기를 원했지만 행동은 거꾸로 했다. 강국이 되려면 일본의 메이지유신 같은 입헌정치체제를 수립해야 했다. 그러나 고종은 개화를 추진하다가 입헌정치체제가 전제왕권을 조금이라도 저해하면 하루아침에 돌변해 모두 무너뜨렸다. 갑신정변으로 급진 개화파를 죽이고, 아관파천으로 온건 개화파를 죽였다. 외국군을 끌어들여 동학 농민군을 죽였다.

독립협회를 창설할 때는 자금까지 지원했으나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자 간부들을 구속하고 보부상들을 시켜 테러를 가했다. 재위 35년(1898년) 12월 독립협회에 대해 열한 가지 이유를 들어 “군주의 과오를 드러내는 것은 사람이 감히 못하는 바",“포적(박영효)은 용서할 수 없고 죽여야 마땅하거늘 그런 자의 임용을 도모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갑오개혁(1894년) 때 박영효를 내무대신에 임명한 것은 고종 자신이었고, 재위 44년(1907년) 박영효가 일본에서 귀국하자 궁내부의 관원을 중로로 보내 영접하고 민영찬의 집을 130냥에 사서 준 사람도 고종이었다. 고종은 독립협회 해산 조칙에서 “처음에는 충군한다, 애국한다 해서 좋았으나 나중에는 패륜하고 나라를 어지럽히매 의구지심되게 생겼다”고 비판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정치 행태를 자인한 셈이었다.

---p.344 중에서

출판사 리뷰

▶ 21세기가 요구하는 군주학과 리더학

시대와 인물을 읽어내는 뛰어난 통찰력으로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저술에 힘쓰고 있는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이덕일의 『조선 왕을 말하다』가 1, 2권으로 완간됐다. 독자들의 뜨거운 호응과 함께 ‘2010 SERI CEO 추천도서’로 선정되기도 한 『조선 왕을 말하다』 1권(2010년 5월 출간)에 이어 이번에 출간된 2권에서도 저자는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조선 왕들에 대한 핵심 쟁점을 날카롭고 명쾌하게 바로잡았으며, 동시에 그 시대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을 살펴보고 그 군주가 그 지점으로 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조명했다.

특히 조선의 왕들을 ‘삼종 혈맥의 시대를 연 임금들-효종, 현종, 숙종’, ‘독살설에 휩싸인 임금들-예종, 경종’, ‘성공한 임금들-세종, 정조’, ‘나라를 열고 닫은 임금들-태조, 고종’ 등으로 주제를 나누어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역사는 읽는 이유는 그 안에서 교훈과 반성을 찾기 위해서다. 시대와 환경의 한계는 국왕에게도 있고 백성 개개인에게도 있다. 그러나 역사는 그런 한계를 극복하려 한 노력을 보여주며, 때로는 그런 노력이 큰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노력 여하에 따라 시대의 한계를 일정 정도 극복하고 성공한 국왕, 성공한 리더가 된 군주가 있는 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역사가 개인에게나 시대에나 타산지석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조선 왕을 말하다』를 통해 21세기가 요구하는 군주학과 리더학은 무엇인지 가늠해볼 수 있다.

▶ 역사의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

신하들이 군주를 내쫓고 만든 인조반정 체제가 소현세자를 죽이고 여러 국왕의 독살설을 낳았다. 『조선 왕을 말하다 2』의 1부는 소현세자의 자리를 차지한 효종·현종·숙종시대를 ‘삼종의 혈맥’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많은 비극의 뿌리가 인조반정과 소현세자의 독살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부는 조선 전기의 예종과 조선 후기의 경종을 통해 ‘독살설에 휩싸인 임금들’을 살펴보았다. 국왕 독살설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국왕만 사라지면 그 권력의 공백을 차지할 수 있는 거대 정치 세력이나 당파가 있을 때 가능하다는 권력 구조의 프레임을 들여다본 것이다. 3부 ‘성공한 임금들’은 조선 전기의 세종과 조선 후기의 정조를 통해 성공한 군주, 성공한 리더의 길에 대해 살펴보았다. 4부 ‘나라를 열고 닫은 임금들’에서는 개국 군주 태조와 망국 군주 고종을 살펴보았다. 특히 44년이나 재위하며 조선을 망국의 길로 이끈 고종 치세의 핵심 문제를 파악해 역사의 격변기에 요구되는 군주의 역할을 짚어보았다.

▶ 누가 왜, 그들의 승패를 뒤집었는가?

승자와 패자가 뒤바뀐 조선 왕들의 역사


‘영·정조시대’라는 용어가 있다. ‘태·세종시대’나 ‘효·현종시대’라는 말은 없는데, 각각 정치 지형이나 지향점도 다르고 결과도 다른 영조와 정조의 시호를 묶어 시대를 구분한 이 말은 사실상 존재할 수 없는 몰역사적 용어다. 영·정조시대라는 용어는 노론 후예 학자들이 당파적 시각에서 만들어낸 것으로, 정조의 독자성을 부인하고 영조의 부속 인물처럼 만들기 위한 의도에서 생겨났으며 노론에 맞선 정조 치세를 부인하거나 축소하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다. 이는 주류 사관을 반영한 국사 교과서에 영조의 탕평책은 극찬하면서 정조의 탕평책은 ‘결과적으로 세도정치의 빌미가 되었다’고 비난하는 내용을 통해 확연히 드러난다. 영조는 집권 초기에는 소론 온건파도 일부 등용하는 탕평책을 실시했지만 점차 소론을 배제하다 재위 31년(1755년) 나주 벽서 사건을 빌미로 소론 인사 500여 명을 사형시키며 탕평책을 무너뜨렸고,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후에는 모든 정파를 내쫓고 노론 일당독재 체제를 수립했다. 그러나 정조 때는 영조의 계비에 정순왕후 김씨가 노론을 배경 삼아 끊임없이 정조를 압박한 것을 제외하고는 외척이 정치에 발을 붙이지 못했다. 외척 세도정치의 폐해를 절감한 정조가 외척의 정사 참여를 원천적으로 배제했기 때문이다. 정조는 부친을 죽인 적당 노론도 탕평책을 실시해 끌어안으면서 함께 미래로 가자고 권유했고, 성리학 유일사상 체제와 신분제를 완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서구의 과학 기술을 실시간으로 받아들여 조선을 미래로 이끌려 했다. 최근 정조 신드롬이 불기도 했지만 정조의 이런 진면목이 드러난 것은 불과 10여 년 전에 불과하다. 그만큼 오랜 기간 동안 정조는 노론이 만든 역사 해석 속에 갇혀 있었다.

한편 근래 들어 고종은 ‘개명 군주’이자 ‘근대화를 앞장서 이끈 군주’라는 식으로 호평받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고종은 전제왕권을 꿈꾸며 많은 인재를 죽였는데, 급진 개화파 김옥균은 물론 온건 개화파 김홍집도 죽이고, 농민의 리더 전봉준도 죽였다. 독립협회도 강제로 해산시켰다. 근대국가 수립에 목숨 걸 인재와 세력을 모두 제거한 결과 주위에는 이완용 같은 출세주의자만 남게 되었다. 또한 고종은 실현 불가능한 전제 국가 수립에 집착하면서 모든 변화를 거부했다. 그 결과 흥선대원군에게 무조건 반대하는 정책으로 일관하면서 문호 개방 그 자체에 집착함으로써 일본의 침략 야욕에 말려들었다. 세상은 변했지만 고종은 변하지 않았고, 결국 조선은 열강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무려 44년이라는 재위기간 동안 잘못된 처신과 선택 때문에 나라를 식민지로 전락시켜 백성들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준 ‘망국 군주’ 고종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더욱 엄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 주요 내용

1부 삼종 혈맥의 시대를 연 임금들


① 효종-같은 현실을 보고도 소현과 봉림(효종) 두 형제의 꿈은 달랐다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처럼 때로는 전혀 의외의 인물에게 대권이 돌아가는 경우가 있다. 대운이 따라준 것이다. 그러나 대운은 여기까지다. 대운을 천명, 승화하는 것은 전적으로 본인의 몫이다. 인조가 소현세자 일가를 죽임으로써 생각지도 않게 대권을 잡은 효종은 굴러온 대운을 천명으로 전환할 방법을 숙고했다. 그것이 북벌이었다. 효종은 현종·숙종을 잇는 삼종혈맥의 시대를 열었다.

② 현종-국상 예법을 둘러싼 사대부의 싸움에 왕권만 추락하다
인조반정 이후 국왕은 천명에 의한 절대적 존재에서 사대부가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 존재로 전락했다. 서인은 소현세자를 제거하고 효종을 추대했지만 둘째 아들로 낮춰 보았다. 국왕을 사대부 계급의 상위에 있는 초월적 존재로 보려는 왕실의 시각과 제1사대부에 불과하다고 보는 서인의 시각에는 큰 괴리가 있었다. 국왕의 권력 강화냐, 사대부의 권력 균점이냐 하는 문제였다. 그런 양자의 시각은 현종 재위기에 두 차례에 걸친 예송 논쟁으로 나타났고, 서인들은 경신 대기근으로 고통을 겪는 백성들은 뒤로한 채 당파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 몰두했다.

③ 숙종-왕권 강화, 임금에겐 달고 백성에겐 쓴 열매가 되다
숙종은 두 당파를 경쟁시켜 왕권을 강화하는 길을 택했다. 한 당파를 이용해 다른 당파를 제거할수록 왕권은 강해졌다. 그러나 숙종은 왕권 강화 자체에 목적을 두었을 뿐 강화된 왕권으로 추구할 목표를 찾으려 애쓰지 않았다. 왕권은 강화되었지만 백성은 여전히 사대부의 착취에 시달렸다. 왕권 강화와 백성이 따로 노는 괴리 현상이 심해진 것이다. 숙종은 조선 후기 가장 강력한 권력을 거머쥔 군주였지만 그 권력을 백성과 나눌 줄 모른 실패한 군주이자 외로운 군주였다.

2부 독살설에 휩싸인 임금들

④ 예종-힘보다 뜻이 큰 군주, 개혁 능력의 한계에 다다르다
당위성만으로는 개혁에 성공할 수 없다. 명분뿐 아니라 개혁 대상의 저항을 넘어설 수 있는 현실적 힘을 갖추어야 성공할 수 있다. 예종은 공신 집단 해체라는 분명한 개혁 목표와 실천 의지가 있었지만 현실적 힘을 확보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특히 남이를 비롯한 신공신 집단을 제거한 것은 구공신에 맞설 세력을 스스로 꺾은 결정적 하자였다. 예종과 공신 집단 간의 갈등은 예종의 급서로 해소되고 구체제로 회귀했다.

⑤ 경종-정권에 눈이 먼 노론, 힘없는 국왕 경종 제거를 당론으로 삼아 실행하다
왕조 국가의 가장 중요한 헌정 질서는 왕권 계승의 예측성과 투명성이다. 갓 태어난 왕자가 원자가 되거나 세자로 책봉되면 차기 국왕으로 결정되었다는 뜻이다. 세자를 국본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경종은 세자 대리청정을 거쳐 국왕이 되었지만 집권 노론은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노론은 ‘경종 축출, 연잉군 옹립’이라는 당론을 정할 정도로 당력이 막강했다. 그러나 왕조 국가에서 국왕을 몰아내고 특정 인물을 추대하려는 구상은 심한 반발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정권에 눈이 먼 노론은 이를 강행하면서 숱한 비극을 낳았다.

3부 성공한 임금들

⑥ 세종-지식 경영의 시대를 열어 르네상스와 국력 신장을 이루다
세종은 지식 경영인이었다. 그는 방대한 독서를 통해 축적한 지식으로 국가를 경영했다. 공리공론보다는 역사처럼 현실에 응용할 수 있는 ‘산지식’을 선호한 것이다. 또한 세종 재위기에는 입지전적 인물이 많이 출현했는데, 능력만 있으면 천인이라도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만큼 역동적인 사회였고 이것이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⑦ 정조-민심이 원하는 변화 위해 신도시발 농업·상업 혁명에 시동을 걸다
국가정책을 목적의 선함이나 당위성만으로 추진해서는 성공하기 어렵다. 정책에 관계된 여러 세력의 이해를 조정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고 무엇보다 민심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정책 추진 능력과 도덕성을 겸비한 세력이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추진해야 가능한 일이다. 정조의 사도세자 묘소 이전 과정은 이런 정책 수행의 전범을 보여준다. 정조는 화성을 건설하면서 사도세자의 배후 도시라는 정치적 의미를 뛰어넘는 가치를 담았다. 조선의 농업 혁명과 상업 혁명을 선도하겠다는 미래 가치를 담아냈다.

4부 나라를 열고 닫은 임금들

⑧ 태조-전쟁 영웅에게 쏠린 민심, 개국의 원동력 되다
전통 시대에는 왕의 즉위나 새 나라 개창의 정당성을 ‘천명’에서 찾았다. 천명을 받았는지 여부를 나타내는 지표가 바로 민심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엎기도 한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은 공허한 수사가 아니다. 집권 세력이 기존 체제를 유지할 정당성과 능력을 상실했을 때 민심은 새 나라가 열리기를 희구하기 때문이다.

⑨ 고종-자질 부족한 임금의 오락가락 정치 행보, 망국은 필연이었다
역사의 격변기에 변화는 선택 사항이 아니다. 그러나 고종은 실현 불가능한 전제 국가 수립에 집착하면서 모든 변화를 거부했다. 군주 혼자 힘으로 나라의 운명을 완전히 바꿀 수는 없지만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는 있다. 그렇기에 군주는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그 흐름에 부응하거나 맞서 나라의 운명을 유리한 쪽으로 이끌려고 노력해야 한다. 군주는 나라에 대한 무한 책임을 지는 자리로 때로는 목숨까지도 거는 자기희생을 해야 한다. 그러나 고종은 이 모든 것을 거부했고 망국 군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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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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