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한국어판 서문
서문 1. 준비된 황제 황제의 죽음 친황의 양육 젊은 홍력 군주가 될 운명 총애 받는 아들 2. 건륭, 보위에 오르다 새로운 황제 청조 지배영역의 개관 부친의 유산 첫 번째 단계 권위의 실험 황제의 일과표 변경에서 거둔 초반의 성과 통합정리자인가 혁신자인가? 건륭의 발자취를 찾아서 3. 가족, 의례, 왕조의 통치 효자 건륭과 그의 모후 황후의 죽음 머리칼을 더 자르다 외로운 홀아비 자식들 4. 만주족 성공의 딜레마 성공의 저주 금조의 선례 만주족의 창조 만주족 점령의 딜레마 말의 힘 역사의 날조 주술적인 예식의 정비 전사의 길 진정한 남자를 위한 수렵 근본을 지키기 5. 여행하는 군주 여행의 정치학 다시 고향으로 불교의 순례자 열렬한 유학자 남순 여행 6. 제국의 건설 전투의 제왕 극서부 지역의 정벌: 첫 번째 중가르 전투 두번째 중가르 전투 타림의 정복 제국의 경계 청조와 이슬람 승리를 비문에 새기다 승리를 지도로 만들다 승리를 그리다 7. 르네상스인 예술가의 초상화 시인 수집가 세상을 소유하다 학문의 후원자 검열자 사상적 견지 8. 청조 중국과 세계 외국과의 관계 및 조공체제 황제폐하의 특별한 신하들 멀리서 온 손님 그 무엇을 준다 해도! 매카트니 사절단 세계속의 중국 9. 건륭 연간 말기의 질서와 쇠락 건륭연간 후반기의 제국 건륭과 티베트 인구와 경제 백성의 안녕을 보장하다 권위의 한계 화신과 지속되는 부패의 문제점 무기력한 중앙 최우의 행동 결론 용어해설 건륭 연보 관련자료개관 후주 색인 옮긴이의 말 |
Mark C. Elliot
양휘웅의 다른 상품
|
유럽의 역사에서 18세기는 독특한 중요성을 가진 시대로 널리 인식되었다. ‘계몽주의 시대’ 또는 ‘혁명의 시대’로 다양하게 묘사된 ‘장구한 18세기의 성세盛世’는 1600년대 말부터 1800년대 초까지 지속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시기 동안 유럽의 사회적·정치적·경제적 구조는 두드러질 정도로 근대적인 형태를 나타냈다.
공교롭게도 18세기는 중국 역사에서도 매우 큰 의미를 가졌던 시대이다. 많은 측면에서 중국의 18세기는 유럽의 18세기와 비슷했다. 중국과 유럽의 18세기는 모두 성세였고 역사적으로도 중요했다. 18세기에는 중화제국이 500년 만에 가장 대규모로 팽창했고, 엄격한 방식으로 지식을 탐구하는 사조가 나타났으며, 문화가 꽃을 피우고, 대중적인 신앙 및 조직이 다양한 형태로 널리 퍼졌다. 마지막으로 중국인과 유럽인 사이의 접촉이 극적으로 증가하고, 중국과 서양 사이에서 최초의 근대적인 외교관계가 벌어진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pp.15~16 1772년에 황제가 승덕을 방문한 것은 운명적인 일이었다. 건륭은 목란木蘭으로의 여행 중에 거의 죽음을 맞을 뻔했는데, 이는 그의 일생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이 되었다. 목란은 정확히 몽골 스텝지대의 남쪽 가장자리이자, 승덕의 북쪽에 위치한 황제의 전용 수렵구역이었다. 목란 일대는 1683년에 청조와 동맹을 맺은 몽골족이 강희제에게 선물로 희사한 땅이었다. 수렵대회는 매년 초가을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만주족의 전통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었던 수렵대회는 강희에게 굉장히 중요했으며, 후일 건륭에게도 중요하게 되었다. 모든 젊은이는 이 국가적 관습을 받들어야 했으므로, 강희는 건륭을 자신의 수행원에 포함시켜 손자의 재주를 특별히 입증하려 했다. 그렇게 하면 조정의 모든 사람들은 열한 살에 불과한 건륭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말을 몰 능력이 있다는 점을 스스로 알 수 있었다. 건륭은 말 위에서 활을 쏘아 다섯 발을 모두 정확하게 명중시키는 장관을 연출했다. 황제는 무척 기뻐하며 황금색 마괘馬?를 하사했는데, 일반적으로 이러한 영예는 황제로부터 인정받는 훌륭한 신하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수렵구역 밖에서, 하마터면 비극이 덮칠 뻔했다. 강희는 자신의 산탄총散彈銃으로 곰을 쏘아 맞힌 다음, 건륭에게 화살로 그 곰을 해치우라고 명령했다. 강희는 이렇게 함으로써 소년 건륭을 금의환향錦衣還鄕하게 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건륭이 말에 올라타 부상당한 곰에 가까이 접근하자, 곰이 갑자기 일어서더니 그에게 달려들었다. 겁에 질린 황제는 재빨리 한 번 더 총을 쏘아 그 동물을 완전히 처치했다. 그런 다음 손자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걱정스레 돌아봤을 때, 손자는 여전히 말안장 위에 침착하게 앉아 고삐를 쥔 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있었다. 다급한 상황에서 보인 소년의 침착함은 강희가 연출할 수 있었던 그 무엇보다도 더 인상적이었다. 그날 오후 막사로 돌아온 황제는 흥분했지만, 건륭이 다가올 때까지 곰이 기다리지 않았던 것에 안도하며 자신을 수행하던 한 비빈妃嬪에게 “이 아이는 참으로 귀중한 운명을 타고났구려!”라고 말했다.--- pp.37~39 건륭이 소년이었을 때에는 모친과의 접촉이 매우 제한적이었을 개연성이 아주 높으며, 그녀가 건륭을 가르친 내용에 관해서도 알려진 이야기는 전혀 없다. 그러나 이것이 모친에 대한 그의 애정을 감소시킨 것 같지는 않으며, 또한 그가 모친에게 모든 가능한 존경의 징표를 수여하고 영예로운 직함을 아낌없이 하사하는 것도 막지 못했다. 그가 황위에 오른 순간부터 1777년에 84세를 일기로 모후가 사망한 42년간, 그는 모후를 성실히 봉양했다. 거의 매일 아침 일찍 그는 모후에게 문안인사를 드렸고, 멋진 선물을 올렸으며, 지칠 줄 모르는 배려와 헌신으로 모후의 입맛과 기호에 맞는 음식을 진상했다. 불교에 대한 모후의 독실한 신앙심을 알고 있는 그는 모후를 위해 특별한 사찰을 세운 후 사찰 안에 탱화와 불교 관련 물품을 채워 넣었다. 여기에는 불교의 모든 신을 망라하는, 787좌座의 환상적인 불상도 포함되었다. 모후가 사망하자, 그는 불교적 관습에 따라 모후가 수년간 모아온, 빠진 머리카락을 보관하기 위해 티베트 양식의 성해함聖骸函을 만들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스투파 형태의 물체는 전부 금과 은으로 제작되었다. 237파운드(107.5킬로그램)의 무게가 나가지만 높이는 20인치(53센티미터)에 불과한 이 물건은 오늘날 궁중의 수장품 중에서도 가장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운 물품 중 하나로 꼽힌다. --- pp.94~95 |
|
국내 최초의 건륭제 평전
2000년에 달하는 중화제국의 역사에서 가장 존재감을 드러낸 황제 두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진시황秦始皇과 건륭제라 할 수 있다. 전자는 '황제皇帝'라는 단어 자체를 처음 만들고 황제제도를 정착시킨 사람이었고, 후자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하면서 전 세계가 주목하는 가장 화려한 성대를 이룩해냈기 때문이다(명목상으로는 건륭제의 재위 기간이 그의 조부인 강희제보다는 적지만, 퇴임 후 '태상황'으로서 3년간 더 정국에 영향력을 발휘한 것까지 포함하면, 그의 재위 기간은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전체 역사보다도 약간 더 길다).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겪으면서 분열된 중화제국이 그 후 2000년 동안 화려한 중화문명을 꽃피울 수 있도록 통일된 중화제국의 초석을 만든 공로가 진시황에게 있다면, 건륭제에게는 현대중국의 기초를 다진 공로가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처럼 중국과 서구에서 당대와 후대의 많은 평가와 주목을 받고 있으며, 정치·사상·문화면에서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준 건륭제 개인과 그의 시대에 대해서 정작 한국에서는 그간 그다지 주목할 만한 소개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 주원인은 건륭제의 일생을 다룬, 국내에 소개하기에 적절한 책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건륭제는 60여 년간 황제의 자리에 있었고, 그가 그 사이에 쏟아낸 언설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매일 조서와 칙서를 내렸고, 수많은 시와 문장을 지었다. 그가 작성한 1차 자료만 열독하기에도 엄청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내의 중국사학자 중에서 선뜻 건륭제의 평전을 저술하려는 시도가 없었고, 그렇다고 해외의 저술을 소개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런 시점에서 방대한 중국의 성과를 두루 취합하고, 중앙아시아와 만주족의 역사에 대한 자신의 최신 연구 성과를 고루 반영하여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읽기 쉽게 정리한 저자 마크 C. 엘리엇 교수의 책이 출간되었고, 이는 국내 최초로 소개되는 평전이다. 르네상스인이자 이미지 기획자였던 건륭제가 꿈꾼 근현대 중국 시스템의 통합 건륭제는 당당한 세상의 통치자로 인식되기를 원했고, 만주족의 '칸'만이 아니라, 한족을 비롯한 여러 다양한 민족을 모두 아우르는 황제로 자처했다. 그는 만주어, 중국어, 몽골어 등의 언어에 유창했고, 중국, 티베트, 몽골, 만주의 문화에 정통했으며, 샤머니즘(만주족의 전통종교), 불교(티베트와 몽골 및 후대의 만주족이 신봉한 종교), 유교, 이슬람교에 똑같이 관심을 가지고 이들 종교를 존중했다. 홍콩의 한 작가는 이를 두고 "현대 중국의 지도자들도 이룩하지 못한 위업"이라고 상찬한다. 전통적인 중국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이른바 '문사철文史哲'의 영역에서도 그의 공로는 탁월했다. 건륭 자신도 4만여 수에 달하는 시를 지을 만큼 시작詩作을 좋아했으며, 오늘날에도 그 방대한 분량으로 다른 모든 총서를 압도하는 [사고전서]가 그의 명으로 편찬되었다. 또한 근대의 과학적 연구방법론인 고증학의 기풍이 크게 유행했다. 거리마다 서점이 넘쳐났고, 많은 연극과 공연이 열렸다. 경제적으로도 활황이었다. 세계의 은이 중국으로 유입되었고, 시장이 원활하게 유지되었다. 제한적이었지만 국제무역도 활발하게 이뤄졌고, 서양의 선교사를 통한 문화의 교류도 꾸준했다. 대외적으로도 건륭제는 많은 유럽 국가들의 구애를 받았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도 어떻게 해서든 건륭제와 외교관계를 맺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國務院에서 외국의 사절을 접대하는 장소인 '자광각紫光閣'이 건륭제가 지은 건물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런 여러 가지 면에서 근(현)대 중국의 창시자는 모택동毛澤東이 아니라, 사실상 건륭제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건륭제 조선은 매년 파견하는 사신 일행을 통해 비교적 청조의 정세에 대해 소상히 파악했다. 이 점은 마크 C. 엘리엇 교수가 이 책에서 청조를 방문하고 온 조선 사신의 증언(화신의 농단이라든가, 건륭제가 막내딸 화효공주和孝公主를 호화롭게 시집보낸 일)을 인용하고 있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건륭제가 조선에 끼친 영향력은 정치적인 측면보다는, 조선 후기의 사상계, 문화계에서 더욱 두드러졌다고 하겠다. 18세기에 활약했던 수많은 북학파北學派의 일원들은 대부분 건륭연간 북경을 방문한 후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다. 박제가朴齊家를 필두로,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 이덕무李德懋 등 이른바 '경화사족京華士族' 출신이었던 이들 북학파 학자들은 직접 청국淸國을 방문하여 건륭제를 알현하거나 건륭연간의 북경 거리와 열하熱河 등을 직접 체험했고, 이후 조선으로 돌아와 조선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직시했다. 이들은 저술과 학문 활동으로 통해 조선의 정체된 면을 비판하고, 상업과 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박지원의 명저 [열하일기熱河日記]는 그가 건륭제의 70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청국을 방문하고 와서 쓴 기록이었다. 그가 [열하일기]를 통해 조선의 현실을 비판하고 건륭연간에 이뤄진 청국의 우수한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요즈음 한국의 학계와 독서계에서 주목하고 있는 정조대正祖代의 활발했던 학술문화 자체도 건륭연간의 부산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조대의 학인과 규장각 각신閣臣들이 참조했던 수많은 자료 역시 건륭연간에 출간되어 조선으로 들어온 책들이었다. 학문 예술 문화를 사랑한 '르네상스인'이자 사냥 전쟁 여행을 즐긴 '십전노인十全老人' 건륭제가 꿈꾼 위대한 중국 이 책은 한 위대한 황제의 군사적 위업과 학문적·예술적·문화적 업적, 말년에 나타난 그의 시대적 상황의 대응실패와 그로 인한 혼란 등 그의 공적인 삶에 대한 묘사를 씨줄로, 그리고 한 평범한 인간인 그의 일상, 그의 취미와 식습관, 그의 희로애락에 대한 심리묘사 등 그의 사적인 삶을 날줄로 엮어, 세심하고 치밀하면서도 간결하고 경쾌한 문체로 묘사한 전기문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중국 왕조인 '청'의 황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몽골인과 만주족에게는 그들의 '칸'이었고, 불교신자에게는 차크라바르틴이었으며, 문무를 겸비한 전사이자 학자였다. 또한 그는 시인이자 예술가였고, 예술품의 수집가이자 학문과 예술의 후원자, 그리고 동양인들의 관념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손꼽을 수 있는 성왕이자 '효자'였다. 아울러 그는 자신의 이미지에 굉장히 집착한 노회한 정치인이자, 여행을 사랑한 투어리스트였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현대 중국의 기초를 다진 황제 건륭제의 삶과 그의 시대를 읽는다 국내에서 처음 소개되는 건륭제의 평전 만주족은 민족적 소수자로서 중국을 통지했지만, 정치적 감각과 군사적 힘을 통해 세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제국의 하나를 구축했다. 이와 같은 제국의 사업은 건륭제의 통치 아래에서 그 정점에 도달했다. 그는 1736년부터 1795년까지 60년간 중국을 통치했고, 이는 중국 역사상 어떤 군주보다도 오래 권력을 유지한 것이었다. 거의 40년 만에 처음 출간되는 이 중요한 전기문에서 저명한 역사가 마크 C. 엘리엇은 세계 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하고 영향력 있는 건륭제에 대해 간략하고 생동감 있게 소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