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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MUN-KU,李文求, 호:명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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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끝에 몇 마디 객담을 덧붙이려 드니 여러 느낌을 제쳐가며 앞질러 떠오르는 것이, 새삼스럽게도 나는 늘 남의 덕으로 살아왔다는 생각이었다. 전부터 내가 남들 앞에 떳떳이 내놓을 만한 자랑거리로 여긴 것도 '나는 인덕이 많은 자'라는 사실 한 가지뿐이었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내 평생은 남달리 다행스러운 셈이라고 일매지어 말할 수 있으리라. 나는 이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이 인덕은 이 책 속의 모든 글에서도 드러나고 있지만, 성년 이후 문단 데뷔를 비롯, 생활·창작·수상·출판 따위 어느 것 한 가지도 스승과 선배와 친구의 분별이나 우정에 의하여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특히 잡문집을 포함하여 6권에 이른 출판은 그 중에서도 두드러진 것이었으니, 7권째가 되는 이 『관촌수필(冠村隨筆)』도 그 예외가 아님은 두말할 나위 없다. 나는 지난 10여 년 동안 여러 가지 오죽잖은 글을 지었거니와, 내 가늠에도 그 중의 태반은 같잖고 되다 만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관촌수필』만은 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여 좀더 낫게 써보려고 나름으로는 무던히 애쓴 편이었다. 읽는 분에게 참고가 될까 하여 대강 잡기하면, 내가 이 나이 먹도록 벗어나지 못하는 것의 하나가 이미 유년 시절부터 몸에 밴 조부의 훈육이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늘어놓기 전에 먼저 나부터 소개함이 바른 순서 같아 말머리를 삼은 것이 「일락서산(日落西山)」이다. 이 책 속에는 실화를 그대로 필기한 「화무십일(花無十日)」 같은 것도 있고, 「여요주서(與謠註序)」 「월곡후야(月谷後夜)」처럼 지금도 그 자리에 살고 있는 동창생이나 친척의 이야기도 있으며, 후제 내 자식이나 조카들에게 읽히기 위해 소설이니 문학이니를 떠나 눈물을 지어가며 쓴 고인에 대한 추도문 「공산토월(空山吐月)」 같은 글도 있다. 금년(1977) 연초 「공산토월」의 정희 엄마를 찾아갔다가 벌써 중학교 졸업반이 된 고인의 유복녀를 보고 나는 또 울었다. 대개 조부 다음으로 내게 영향을 끼친 이는 한마당에서 자란 동네 아이들이었다. 30년이나 세월한 지금은 반 이상이 죽었거나 행방불명이 되었지만 그들이야말로 여러모로 나를 키운 사람들이니, 「행운유수(行雲流水)」의 옹점이, 「녹수청산(綠水靑山)」의 대복이, 「관산추정(關山芻丁)」의 복산이가 그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차례로 쓰자면 아직도 멀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그만 묻어두려고 한다. 묵은 이야기보다는 앞일이 더 복잡하겠기 때문이다. 소식 모르는 옛친구들의 행운을 빈다. --- 머리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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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를 쓰고 가지색 단령을 입은 수즙음에 움츠려든 석공의 얼굴이 조무래기들한테 에워싸인 채 떼밀려오듯 하고 있었다.콧잔등엔 맑은 땀방울이 돋아 있었고 목화를 신어 무척 뒤퉁스런 걸음을 걷고 있었다.석공의 두 어깨 너머로 훨씬 치켜 올려진 채 뒤따라오던 청사초롱도 나는 보았다.이어 청사초롱 뒤로가마 지붕이 보이자 나도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가마 곁에 달라붙으며 각시 구경을 하려 했지만, 가마 앞에 오던 폐백물 든 사람과 감주단지를 든 부인네 그리고 함진아비 영감이 소리를 질러가며 말리고, 가마를 멘 두 교군꾼의 걸음이 가마 발을 제껴볼 틈도 없을 만큼 잽싸서 뜻을 이뤘던가는 기억이 없다.
그들과 기질이 상통할 뿐 아니라 여러모로 닮은 서울 시인으로는, 나무 때어 눌린 무쇠솥 숭늉 같은 박재삼 씨가 있다.누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한잔헐까요?' 하고 물으면, 고은 씨나 이호철 씨 못잖은 미소를 보이며, '안 헐 수 있습니까?' 하고 입술부터 핥는 이 낮술의 대가는, 설령 박성룡 씨가 없는 자리더라도 반드시 한가락 뽑아야 배긴다. ---p.181-162하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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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부드러우나 추운 겨울에 얼면 굳어져 부러진다.
--- p.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