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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란 무엇인가
불교의 현대적 이해
이중표
종이거울 2012.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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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top100 9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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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무운

책소개

목차

제1장 삼귀의
1. 삼귀의(三歸依)는 왜 하는가?
2. 불보(佛寶)란 어떤 것인가?
3. 법보(法寶)란 어떤 것인가?
4. 승보(僧寶)란 어떤 것인가?
5. 염불(念佛)은 왜 하는가?

제2장 부처님 당시의 인도사회
1. 부처님 당시의 인도사회는 어떠했는가?
2. 부처님 당시의 종교와 사상은 어떠했는가?
3. 불교와 자이나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제3장 정견正見
1. 부처님은 왜 침묵했는가? 무기(無記)
2. 사견(邪見)을 없애는 방법은 무엇인가?
3. 사견(邪見)에서 정견(正見)으로
4. 부처님은 도덕을 실천한 윤리교사인가?

제4장 중도와 연기
1. 고행과 쾌락의 중간이 중도인가? 고락중도(苦樂中道)
2.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모두 버려라 단상중도(斷常中道)
3. 영혼과 육체는 동일한가, 다른가? 일이중도(一異中道)
4. 있느냐, 없느냐 무유중도(有無中道)

제5장 사성제와 십이연기
1. 사성제(四聖諦)란 무엇인가?
2. 고성제의 실존철학적 의미 고성제(苦聖諦)
3. 실존의 원인 집성제(集聖諦)
4..불교수행의 목표 멸성제(滅聖諦)
5. 열반에 이르는 길 도성제(道聖諦)

제6장 열반과 해탈
1. 열반이란 어떤 것인가?
2. 무아(無我)란 어떤 것인가?
3. 열반을 성취하면 죽은 후에 다시 태어나지 않게 되는가?
4. 해탈이란 어떤 것인가?
5. 구차제정(九次第定)과 해탈

제7장 육바라밀
1. 무소득(無所得)의 삶 보살의 길
2. 한 생명으로사는 삶 보시바라밀
3. 화합과 공존의 삶 지계바라밀
4. 자비원력(慈悲原力)의 삶 인욕바라밀
5. 중생교화의 삶 정진바라밀
6. 세간(世間)을 벗어나는 삶 선정바라밀
7. 끝없는 진리의 실현 반야바라밀

제8장 사홍서원
1. 원력(原力)으로 살아가는 무아(無我)의 삶
2. 무엇이 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욕탐(欲貪)과 원(願)

저자 소개 1

전남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불교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정년 후 동 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로 위촉됐다. 호남불교문화연구소 소장, 범한철학회 회장, 불교학연구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불교 신행 단체인 ‘붓다나라’를 설립하여 포교와 교육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정선 디가 니까야』, 『정선 맛지마 니까야』, 『정선 쌍윳따 니까야』, 『정선 앙굿따라 니까야』, 『붓다의 철학』,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 『니까야로 읽는 반야심경』, 『담마빠따』, 『숫따니빠따』, 『불교란 무엇인가』, 『붓다가 깨달은 연기
전남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불교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정년 후 동 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로 위촉됐다. 호남불교문화연구소 소장, 범한철학회 회장, 불교학연구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불교 신행 단체인 ‘붓다나라’를 설립하여 포교와 교육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정선 디가 니까야』, 『정선 맛지마 니까야』, 『정선 쌍윳따 니까야』, 『정선 앙굿따라 니까야』, 『붓다의 철학』,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 『니까야로 읽는 반야심경』, 『담마빠따』, 『숫따니빠따』, 『불교란 무엇인가』,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 『근본불교』 외 여러 책이 있으며, 역서로 『붓다의 연기법과 인공지능』, 『불교와 양자역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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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12년 02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382쪽 | 672g | 153*224*30mm
ISBN13
9788990562401

출판사 리뷰

불교의 현대적 이해
불교란 무엇인가


이 책은 ‘불교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사람들에 게 전남대 이중표 교수가 보내는 답변이다.불교는 이해하기 어렵다. 따라서 ‘불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책은 이러한 어려운 질문에 대하여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결코 깊이 없는 내용은 아니다. 이 책은 한마디로 ‘불교란 알고 보면 쉬운 것이다.’라는 느낌을 준다.

불교는 왜 어려운가? 이중표 교수는 “우리가 사견(邪見)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고 대답한다. 우리가 사견을 가지고 세상을 잘못보고 있기 때문에, 정견으로 세상의 참모습을 이야기한 부처님의 말씀이 어렵게 들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중표 교수는 불교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견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이러한 사견을 버리고 정견(正見)을 가져야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이 책은 붓다의 가르침인 중도와 연기를 이해하기 전에 정견(正見)에 대하여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우리가 정견을 갖게 되면 불교는 쉽게 이해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불교는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즉 2500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르친 근본불교를 의미한다. 이중표 교수는 근본불교가 아비달마불교에 의해 크게 왜곡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왜곡은 정견을 상실한 가운데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이를 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아비달마불교의 사견(邪見)을 시정하고 정견(正見)을 드러내기 위해 출현한 것이 중관사상이라고 보고, 중관사상의 관점에서 근본불교를 이해한다. 이 책은 이러한 이해에 바탕을 두고 현대적인 의미로 근본불교를 해석한 것이다.

이 책은 불교를 전공하는 학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불교를 바르게 이해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불교를 단순히 지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실천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삼귀의에서 시작하여 사홍서원에서 끝난다.

이중표 교수는 삼귀의와 사홍서원을 불교의 시작과 끝으로 인식하고 있다. 왜 삼귀의와 사홍서원이 불교의 시작과 끝인가· 이중표 교수는 삼귀의를 불교를 다른 종교와 구분 짓는 불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이해한다. 귀의(歸依)는 신앙(信仰), 즉 믿음과 다르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이중표 교수는 믿음과 귀의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믿음의 대상은 그것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고, 볼 수 없으며, 그렇게 되는 지 확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믿고, 신을 믿으면 죽어서 가게 되는 천당이 참으로 존재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모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을 필요가 없이 확실하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신의 존재도 이와 같다면, 신을 믿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 없듯이, 천당의 존재를 볼 수 있다면, 천당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알 수 없고 볼 수 없을 때 믿어야 하는 것이며, 알게 되고 보게 되면, 믿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대상은 공허합니다. 믿고 있을 때는 그 존재를 알 수 없고, 알게 되면 믿을 필요가 없는 것이므로, 믿음에서 시작하여 믿음에서 끝나는 종교적 신념은 실로 공허한 것입니다.

그러나 귀의의 대상인 삼보(三寶)는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의 삼보(三寶)는 피난처입니다. 피난처는 위급한 상황에서 몸을 안전하게 피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비가 올 때 비를 피하기 위해서는 비를 가려줄 무엇인가가 실제로 있어야 합니다. 보이지 않고 실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 비를 막아줄 것이라고 믿는다고 해서 비를 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의지하는 것은 부처님의 육신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와 부처님의 삶입니다. 부처님의 몸이 부처님이 아니라, 생사의 우물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깨달아 그 방법을 실천하여 생사를 벗어난 삶을 살아가신 분이 부처님인 것입니다. 모습이 어떠하든, 어느 나라 사람이든, 남자든, 여자든, 진리를 깨달아 실천하면 부처님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그런 분이 실재했던 것입니다. 진리를 깨달아 실천한 분이 계셨다는 사실은 지금도 변함없는 사실이고 영원히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분은 신의 아들이나 우리와 다른 어떤 존재가 아니라, 바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피난처로 의지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인간이고, 우리도 인간입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통해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열반을 증득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부처님처럼 깨달아 열반을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로병사의 괴로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중생들에게는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벗어난 분이 있다는 사실이 바로 의지할 피난처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는 우리가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귀를 기울이면, 이해할 수 있고, 볼 수 있는 진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항상 사람들에게 “귀 있는 자는 와서 듣고, 눈 있는 자는 와서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누구나 확인하고 볼 수 있는 진실을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는 믿을 필요가 없이 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의지할 피난처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승가(僧伽)는 개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함께 실천하며 살아가는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승가는 부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결성되어 지금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이러한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부처님의 제자는 승가라는 공동체를 피난처로 삼아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중표 교수는 삼보를 우리가 항상 마음에 품고 있는 자신의 바람직한 모습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고 평화로운 자신의 모습을 희망하는데, 불보(佛寶)는 생사로부터 해탈한 자유로운 모습을 의미하고, 법보(法寶)는 분별이 사라진 평등한 진리를 의미하며, 승보(僧寶)는 평등한 진리를 실천하는 평화로운 공동체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삼보에 귀의하는 것은 자신의 소망을 마음에 품는 것이며, 자유와 평등이 실현된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다짐이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이러한 다짐이 불교의 출발점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중표 교수는 불교를 허망한 세간(世間)에서 자신의 참모습을 잃고 살아가는 중생들이 자신의 참모습에 돌아가, 생사의 고해에서 해탈하여, 한없는 원력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종교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불교의 의미가 삼귀의와 사홍서원 속에 집약되어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이다.

이중표 교수는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삶의 태도가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 어떤 사람들은 ‘무엇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며 살고,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산다는 것이다. 이중표 교수는 전자를 욕망 속에서 살아가는 어리석은 중생의 삶이고, 후자를 원력으로 살아가는 깨달은 붓다의 삶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중표 교수는 이 두 삶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중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존재’가 되고 싶고, 원하는 ‘존재’를 갖고 싶어 합니다. “나는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무엇을 갖고 싶다.” 이렇게 항상 ‘무엇’을 추구합니다. ‘무엇’은 ‘존재’를 의미합니다. “의사가 되고 싶다.”는 것은 “의사라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것을 의미하고, “자동차를 갖고 싶다.”는 것은 “자동차라는 존재를 갖고 싶다.”는 것입니다.

존재를 추구하는 삶 속에서는 항상 타인이 적이나 경쟁의 상대로 인식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원하는 존재를 다른 사람들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의사가 되려는 다른 사람들과 경쟁을 해야 하고, 좋은 물건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적대감을 가지고 경쟁하다가 자신의 욕구가 타인에 의해 좌절되면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해치거나 제거하여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어리석은 생각에 빠집니다. 욕탐을 축으로 존재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중생들의 삶 속에는 이렇게 항상 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탐·진·치 삼독심(三毒心)이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모든 존재는 무상하고 무아라는 진리에 무지한 상태에서, 마음은 욕탐에 결박되고, 욕탐의 충족을 위해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과 투쟁하는 가운데 분노에 빠져들고, 분노심에서 더욱 어리석은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욕탐에 결박된 중생의 삶의 세계입니다. “삼계(三界)는 불타고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은 탐·진·치 삼독(三毒)의 불길이 끊임없이 타고 있는 중생계의 모습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원(願)은 욕탐에서 해탈한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모든 존재는 연기하기 때문에 무상하며, 무상하기 때문에 존재를 추구하는 삶은 괴로움이라는 것을 깨닫고, 무상하고 괴로운 존재는 진정한 나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자각한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참된 삶의 의지입니다. 따라서 원을 축으로 미래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삶 속에서는, 자기를 변함없이 유지하려는 헛된 욕망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참모습은 법계(法界)와 함께 연기하고 있는 법신(法身)입니다. 법신은 시간적 존재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 이렇게 법계와 함께 연기하고 있는 삶, 이것이 법신입니다. 따라서 법신은 과거의 존재도 아니고 미래의 존재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현재의 존재도 아닙니다.[금강경]에서 “과거심(過去心)도 불가득(不可得)이요, 미래심(未來心)도 불가득(不可得)이며, 현재심(現在心)도 불가득(不可得)이다.” 라고 하신 말씀은 법신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과거·미래·현재라는 시간은 중생들이 허망한 존재를 조작함으로써 생긴 허구적인 관념일 뿐입니다.

원(願)은 법신(法身)을 자각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법신을 자각한 사람은 헛된 욕망을 떠나, 진리에 대한 무상의 깨달음을 성취하여, 일체중생을 제도하리라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이런 생각을 일으켰다고 해서, 미래에 자기가 부처님이라는 존재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부처님이라는 존재가 되려는 생각을 한다면, 이것 역시 욕탐입니다. 그래서 회양 선사는 마조 선사에게 기왓장을 갈아 보였고, 의상 대사는[법성게]에서 “처음 발심하는 때에 곧 정각을 이룬다(初發心時便正覺).”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탐욕이 사라져 원력(願力)이 충만하면, 그것이 곧 정각(正覺)이라는 것입니다.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 가없는 중생을 제도하겠습니다.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 다함없는 번뇌를 끊겠습니다.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 한량없는 법문을 배우겠습니다.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 위없는 불도를 이루겠습니다.

가없는 중생을 구제하고, 다함이 없는 번뇌를 끊고, 무량한 법문을 배우고, 무상의 불도를 성취하는 삶은 현재에 안주하는 삶이 아닙니다. 법신은 법계와 함께 연기하는 삶입니다. 법계의 모든 중생은 남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연기하고 있는, 다시 말해서 함께 살고 있는 자신의 법신입니다. 법신이 문제 삼는 번뇌는 자기 개인의 번뇌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제반 사회적 문제가 법신이 끊어 없애야 할 번뇌입니다. 법문(法門)은 이러한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며, 불도(佛道)는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성취해야 할 깨달음입니다.

이와 같이 법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원의 성취를 위해서, 법신은 항상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추구합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법신이 묻는 물음입니다. 중생의 욕탐(欲貪)은 미래의 존재가능성(存在可能性)을 추구하는 의지라면, 법신의 원(願)은 미래의 행위가능성(行爲可能性)을 추구하는 의지인 것입니다.

법신을 자각하여 행위가능성을 추구하는 원(願)은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켜 갑니다.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보면,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병고에서 구제하리라는 원을 세웁니다. 그에게 의사는 돈 잘 버는 직업이 아니라, 질병을 치료하는 법신(法身)입니다. 따라서 의사가 되겠다는 원(願)은 “지금은 병을 치료할 수 없지만 앞으로는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법신이 되겠다.”는 자기존재의 진정한 변화를 추구합니다. 행위가능성의 추구를 통해 진정한 자기존재의 미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돈벌이가 목적이 아니라 병든 사람의 치유가 목적입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어떻게 하면 병을 치료할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삶입니다. 사홍서원은 우리에게 가장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사홍서원을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이중표 교수는 불교를 이러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철학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이 책은 삼귀의와 사홍서원 사이에 불교의 교리체계인 중도와 연기, 수행체계인 사성제와 구차제정, 그리고 대승불교의 육바라밀을 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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