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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TV를 켜놓고 잠드는 당신에게
1부. 왜 지금 자기 서사적 삶을 시작해야 하는가? 생텍쥐페리 _ 나는 외로워, 나는 외로워, 나는 외로워 장 폴 사르트르 _ 타자, 그들이 바로 지옥이다 알베르 카뮈 _ 우리는 ‘부조리’와 함께 살아간다 2부. 나를 더 잃어버리기 전에 알아야 할 것들 키에르케고르 _ 중요한 것은 나에게 진리인 진리를 찾는 것 프란츠 카프카 _ 소외와 자기 감금과 존재 망각 마르틴 하이데거 _ 나는 왜 그들이 지루하고 재미가 없는 걸까? 3부. 치열했고 부서졌고 사랑했고 찬란했던 제임스 조이스 _ 밤새워 싸우는 시간 칼 야스퍼스 _ 로빈슨 크루소는 실존이라 말할 수 없다! 소포클레스 _ 운명에 즐겁게 맞서는 법 프리드리히 니체 _ 나, 이 순간 살아 있다 4부. 희극과 비극, 그 무엇으로도 덧칠할 필요 없는 우리 삶을 위하여 시몬 드 보부아르 _ 거짓 알리바이 앞에서 마르틴 부버 _ 겉으론 개방적이지만 속은 고립되어 있는 당신에게 버지니아 울프 _ 그녀는 또 런던의 거리를 거닐게 될 것이다 사무엘 베케트 _ 장화를 찢어버리는 방법 에필로그. 자기 서사의 순간들이 우리를 기다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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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현재의 자신을 만든 경험이 있고, 관성과 생각의 습관이 있다. 자신이 만든 동굴 속에서 타자와 대상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자기중심적’이다. 게다가 자기중심성이 ‘이기적’이 되는 경우, 관계는 파열음을 낸다. 상호성이 배제되기 때문이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잘못 길들여짐으로써 자신을 파괴하기도 하고 타자를 파괴하기도 한다. 그래서 생텍쥐페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관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여우에게 말하게 한다.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서로에게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길들여지기 위해서는 자기 존재에 대한 책임을 먼저 짊어져야 한다. 자신의 실존에 책임을 지지 못하는 사람이 타자의 실존을 책임질 수 없다. 책임진다는 것은 이중적 의미의 책임이다. 즉 자기 관계적 책임과 타자 관계적 책임. 이것이 여우가 말하는 ‘영원한 책임’이다.
_ ‘생텍쥐페리 : 나는 외로워, 나는 외로워, 나는 외로워’ 중에서 애매함은 다스만의 전형적인 특성이다. 합리성을 가장한 양비론을 전개하는 언어의 마술사들, 약방의 감초처럼 튀어나오는 연대 책임론을 꺼내면서 도덕적 탁월성을 보여주려는 목소리가 애매함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양자택일을 하지 않으려는 태도, 판단의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태도 속에 애매함이 자리를 틀고 있다. _ ‘마르틴 하이데거 : 나는 왜 그들이 지루하고 재미가 없는 걸까?’ 중에서 실존과 일상은 그렇게 얽혀 있다. 어찌 보면 실존과 일상의 얽힘을 의식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고 실존의 모습인지 모른다. 선택과 결단, 절대자유와 절대고독을 주장하는 것보다 울프가 보여주는 클라리사의 삶이 우리에게 더 가까운 실존의 풍경이지 않겠는가. _ ‘버지니아 울프 : 그녀는 또 런던의 거리를 거닐게 될 것이다’ 중에서 네 번째는 지성이 아닌 정신으로 존재하라고 촉구한다. 부버는 지성을 목적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것, 자신의 관념을 만들고 자신의 성(城)을 구축하는 부정적 능력, 자기 감정의 놀이 속에서 사는 능력으로 파악한다. 이에 반해 정신은 지성을 넘어서 ‘너를 말하고 응답하는 능력’으로 상위의 개념이다. 우리가 내적 즐거움을 가지려면 지식이나 테크닉이 아니라 하나의 영혼이자 하나의 정신으로서 다른 영혼과 다른 정신을 만나야 하지 않을까. _ ‘마르틴 부버 : 겉으론 개방적이지만 속은 고립되어 있는 당신에게’ 중에서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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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자기 서사를 시작해야 하는가?
존재의 불안과 생의 허무로부터의 사색 일상이라는 삶의 시공간은 그 무엇도 저절로 일어나는 곳이 아니다. 그저 우리가 무엇을 ‘했고’, 무엇이란 ‘의미’를 부여하고 채우는 일이 일상이다. 의미 없는 것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의미와 관련 없는 ‘사건들의 조각 묶음’인 일상, 그 일상의 긴 묶음인 생에 형이상학적 색칠하기를 해야 하는 것이 이성의 운명이고 인간의 숙명이다. 세상에서 자기를 가장 미워했고 또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 실존주의자들에게 배우는 생의 기쁨을 위한 철학 지구라는 별에서 살아간 사람 중에 누구보다도 크게 자기 서사를 말해왔고 그렇게 살아가려 했던 사람들이 실존주의자들이다. 그들의 삶은 하나하나가 자기 서사이고 실존이었다. 자기 서사란 자기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의식적 활동이자 다양한 방식의 자기 존재의 표현이다.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기 싫을 때 하지 않는 자기 서사란 없다. 자기 서사는 내가 쓰는 나의 삶의 역사이고 그 역사는 멈추지 않는, 지금 여기라는 실존적 의식의 흔적들이다. 무감각과 달콤한 자기기만, 이상한 변증 놀이에 빠진 지금 여기 우리들의 실존의 풍경들 실존주의자들은 각각의 방식으로 ‘어떻게 하면 자기 서사의 삶을 살 수 있는가?’를 말해준다. 자기 서사는 우리 자신의 실존적 모습의 다양한 갈래를 확인하는 데서 시작된다. 무료함과 의미 없음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우리에게 사르트르와 카뮈가 말을 건다. 이와 정반대로 키에르케고르와 카프카는 절망과 같은 불안, 자기 감금과 존재의 망각에 빠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길을 안내한다. 너는 정말 행복하니? 너는 정말 잘 살고 있니? 불안함과 존재망각을 스스로 치료하려는 사람들도 많다. 이들의 대증요법은 일상인의 행복예찬, 타자에게 편안하게 의존하기, 색깔 없는 평균적인 삶의 방식이다. 우리는 이것을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이나 하이데거의 다스만에서, ‘우리는 행복해’라고 주문을 외워보는 베케트의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로빈슨 크루소는 실존이라 말할 수 없다! 니체와 생텍쥐페리가 공유하는 자기 서사의 메타포 자기 서사의 길은 힘과 에너지, 정열을 모으는 것이고 그 속에서 희열을 찾는 먼 길이다. 그 속에는 조이스의 스티븐처럼 종교와 이데올로기 등의 수많은 억압의 기제와 야스퍼스가 말하는 근원적 한계상황과 맞서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때론 오이디푸스처럼 운명처럼 느껴지는 나의 삶과 마주하며 싸워야 한다. 니체의 사자처럼 용과 싸우고 어린 왕자처럼 지구별의 어른들과 싸우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 흥미롭게도 니체와 생텍쥐페리는 자기 서사를 말하면서 고독과 생성의 공간으로서 사막과 진정한 자기 서사의 완성자로 어린아이라는 메타포를 공유한다. 희극과 비극, 그 무엇으로도 덧칠할 필요 없는 우리 삶을 위하여 장화를 찢어버리는 방법 보부아르의 모니크는 거짓 알리바이들을 폭로하며 영원한 타자를 벗어나 제1의 성이 되기 위해 자기 서사의 길을 걸어간다. 우리의 친절한 마르틴 부버는 만날 것을 권한다. 그가 초대한 만남에는 진지한 공감과 삶의 즐거움을 나누는 경쾌한 대화가 열려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도를 기다리며]를 통해서 책은 실존하고자 하는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운명, 희극과 비극, 그 무엇으로 덧칠할 필요도 이유도 없는, 우리들의 실존을 담백하게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