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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南朝) 양억
남조(南朝) 전유연 남조(南朝) 유균 남조(南朝) 이종악 궁궐 뜰의 나무(禁中庭樹) 양억 궁궐 뜰의 나무(禁中庭樹) 전유연 휴가로 한가히 지내다 소경학사 전유연이 생각나서(休沐端居有懷希聖少卿學士) 양억 휴가로 한가히 지내다 소경학사 전유연이 생각나서(休沐端居有懷希聖少卿學士) 전유연 휴가로 한가히 지내다 소경학사 전유연이 생각나서(休沐端居有懷希聖少卿學士) 진월 휴가로 한가히 지내다 소경학사 전유연이 생각나서(休沐端居有懷希聖少卿學士) 이유 다시 수창에 차운해 짓고 화답함(再次首唱題和) 전유연 다시 수창에 차운해 짓고 화답함(再次首唱題和) 양억 무궁화(槿花) 유균 무궁화(槿花) 양억 무궁화(槿花) 유척 무궁화(槿花) 전유연 마음을 대신해(代意二首) 첫째 수(一) 양억 마음을 대신해(代意二首) 둘째 수(二) 양억 마음을 대신해(代意二首) 이종악 마음을 대신해(代意二首) 정위 마음을 대신해(代意二首) 조간 마음을 대신해(代意二首) 첫째 수(一) 유균 마음을 대신해(代意二首) 둘째 수(二) 유균 마음을 대신해(代意二首) 유척 한 무제(漢武) 양억 한 무제(漢武) 유균 한 무제(漢武) 전유연 한 무제(漢武) 조간 한 무제(漢武) 임수 한 무제(漢武) 유척 한 무제(漢武) 이종악 한림원의 첫 매미(館中新蟬) 유균 한림원의 첫 매미(館中新蟬) 양억 한림원의 첫 매미(館中新蟬) 전유연 한림원의 첫 매미(館中新蟬) 장영 한림원의 첫 매미(館中新蟬) 이종악 한림원의 첫 매미(館中新蟬) 유척 밤 연회(夜?) 전유제 밤 연회(夜?) 양억 밤 연회(夜?) 유균 밤 연회(夜?) 전유연 학(鶴) 유균 학(鶴) 양억 학(鶴) 장영 학(鶴) 임수 학(鶴) 전유연 공자(公子) 양억 공자(公子) 유균 공자(公子) 전유연 옛 장군(舊將) 양억 해설 서곤체(西崑體)의 시사적(詩史的) 위상(位相)에 대한 재고찰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
楊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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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玟貞, 이백시문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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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의 북소리가 궁문에 울리고 물시계 소리 희미해져 갈 때
새벽을 알리는 댓개비 소리 끊어지자 화려한 수레 날듯이 궁문을 나서네. 별 가득한 새벽 제방을 닭 울음소리 들으며 지나더니 봄비 내리는 사냥터에서 꿩 잡아 돌아온다. 금 연꽃 위의 비단 버선 걸음에 일렁이는 물결, 「옥수후정화」를 부르니 눈물이 옷깃을 적시네. 용이 서렸던 제왕의 기운도 300년으로 끝나 버렸으나 그래도 열린 사립문 앞의 맑은 강물은 얻었네. 五鼓端門漏滴稀 夜籤聲斷翠華飛 繁星曉?聞?度 細雨春場射雉歸 步試金蓮波?襪 歌?玉樹涕沾衣 龍盤王氣終三百 猶得澄瀾對敞扉 ---「남조(南朝) - 양억(楊億)」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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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곤체(西崑體)는 북송(北宋) 초(初) 시단(詩壇)을 대표하는 3대 시체(詩體) 가운데 하나로, 만당(晩唐)의 이상은(李商隱)을 종주(宗主)로 삼아 그의 시작(詩作) 특징을 본받으려 한 점이 특징이다.
북송 초라고 하면 태조 원년인 960년부터 제3대 황제 진종 말년인 1021년까지 약 60여 년간을 말한다. 이 시기에는 만당(晩唐)·오대(五代)의 장기간 혼란했던 국면이 어느 정도 정리되어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의 생활 환경 또한 비교적 안정을 찾게 되었다. 전대(前代)의 가혹했던 정세가 완화됨에 따라 농업이 급속도로 발달했고 안정된 농업의 경제적 기초 위에서 상공업이 번창하고 번화한 도시가 등장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전대에 비해 상당한 풍요를 구가하게 되었다. 이처럼 사회 전체가 안정되고 발전함에 따라 일반 백성은 점차 단조로운 것보다는 복잡하고 화려한 것을 추구하게 되었다. 가장 이른 시기인 태조(太祖)·태종조(太宗朝)에 유행한 백체 시(白體詩), 태종 연간 후기부터 진종 연간 사이에 유행한 만당체 시(晩唐體詩), 그리고 진종 경덕(景德) 연간에 시작되어 인종조(仁宗朝)까지 그 이름을 떨친 서곤체 시 등이 바로 이 시기 시단을 대표한다. 왕우칭(王禹?)을 중심으로 한 백체 시는 백거이(白居易)의 평이하고 꾸밈없는 창화(唱和) 시풍을 계승했는데, 이는 당시 관리들이 시를 주고받을 때 많이 사용한 시 형식이었다. 따라서 벼슬길에서 출세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창화와 맞물려 백체 시가 성행한 것이다. 그러나 백체 시가 지나치게 평이하고 천속(賤俗)한 경향을 보이자, 이에 일부 시인들이 반기를 들고 시작(詩作)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이 만당체 시인들이다. 만당체 시인들은 중당(中唐)의 가도(賈島)와 요합(姚合)을 종주로 삼아 시 창작에서 전고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정교한 구성에 주력하는 등 청고(淸苦)한 시풍을 본받을 것을 제창했다. 천속하고 평이한 쪽으로 편향되었던 당시(當時) 백체 시의 병폐를 극복하긴 했지만, 이들의 시풍은 만당 후기의 기울어 가는 시대에나 어울릴 만한 소극적이고 협소하다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한계점은 북송 초 한참 발전을 앞두고 있는 시대 풍조를 반영해 내지 못하면서 점차 쇠퇴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억(楊億)을 중심으로 해서 만당(晩唐)의 이상은(李商隱)의 시를 본받아 시를 창작한 서곤체 시의 등장은 당시(當時)의 시대 분위기와 사람들이 추구하던 심미 취향에 매우 적합했다. 이렇게 볼 때, 백체 시와 만당체 시는 당시의 연속이고, 그것에 새로운 시도를 더해 다른 풍격을 보인 서곤체 시는 새로운 송시 출발의 맹아로 볼 수 있겠다. 서곤체 시는 백체 시의 창화시풍은 계승하고 백체가 말류에 지나치게 평이하고 통속적으로 흐르는 경향에 대해서는 변화를 주었다. 즉 이상은의 작법(作法)을 본받아 풍부하고 아름다운 시어를 주로 사용했으며, 전고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시의 함축성을 높였다. 뿐만 아니라 학문적이고 문인화된 시풍을 형성했고, 이는 당시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는 것이었으므로 큰 환영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송시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내딛는 역할을 했다고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