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1. 용어해설
2. 일러두기 3. 옮긴이의 말 4. 진보의 역설 5. 폭력과 권력 6. 폭력의 본성 7. 보론 |
Hannah Arendt
한나 아렌트의 다른 상품
|
폭력의 본질에 관한 정치철학적 성찰
--- 00/01/05 김선희(rosak@hanmail.net)
나치의 인종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1930년대의 독일. 그리고 베트남 전쟁을 전후하여 민권운동과 학생운동이 소용돌이쳤던 1960년대의 미국. 이처럼 급변하는 20세기 중반의 한 가운데에 독일에서 태어나 프랑스를 거쳐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유태인 학자 한나 아렌트가 존재한다.
그녀는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폭력은 항상 존재해왔고, 거대한 역할을 수행해왔음에도 불구하고 폭력 그 자체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그 동안 없었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이 책에서 독보적인 폭력론을 전개하고 있다. 사회과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것은 개념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똑같은 용어가 이곳 저곳에서 다른 의미를 지닌 채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학문하는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들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개념의 차이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면 어떤 학자의 저서나 혹은 그의 사상에 대한 오해가 발생하기 쉽상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일괄적으로, 단순 명쾌하게 개념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는데 있다. 이런 측면에서 한나 아렌트는 일반 대중들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조차도 흔히 무심코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는 개념들, 그 중에서도 '권력'과 '폭력'이 실은 매우 상이한 개념이라는 점, 더 나아가 이 둘은 상호 대립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그녀의 폭력론(論)을 피력하고 있다. 대의민주주의국가에서 권력이란 다수 인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폭력은 도구에 의존하기 때문에 도구 없이는 불가능하다. 폭력은 수단이기 때문에 그것이 추구하는 목적을 통하여 '정당화(正當化)'를 필요로 한다. 이에 반해 권력은 결코 정당화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오직 '정당성(正當性)'만을 필요로 할뿐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폭력을 권력과 구별지음으로써 그녀는 폭력에는 정당성이 없음을, 폭력은 권력을 파괴할 수 있을지 몰라도, 권력을 생산할 수는 없다는 점을 분명한 어조로 밝히고 있다. 더불어 폭력의 근원과 본성에 대해서도 살펴보고 있다. 우리는 흔히 '이성(理性)'을 앞세워 폭력에 대해 비난한다. 그런데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폭력이 비합리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강변하면서, 그 예로 인종주의를 들고 있다. 인간의 이성이 특정한 목적을 위한 '계략(計略)'으로 이용되는 경우, 이성을 사용하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로서의 인종주의는 항상 폭력을 내포하기 마련이며, 여기서 폭력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결과이며, 그 때문에 폭력은 결코 비합리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논리의 이면에는 폭력은 혁명이 아닌 '개혁(改革)'을 위한 무기라는 그녀의 주장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론은 1960년대의 학생운동과 신좌파(New Left)가 폭력에 대한 예찬으로 경도되어가던 시대적 상황에 대한 그녀의 인식을 바탕으로 나온 것이다. 권력이 상실된 곳에서, 다시 말해 인민의 동의가 부재(不在)한 곳에서 폭력을 통한 지배가 작동한다는 사실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예리한 지적, 그리고 인종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은 이 책의 장점이다. 한편, 1951년에 [전체주의의 기원]이라는 책을 통해 미국에서 학문적 두각을 나타낸 저자의 이력을 떠올린다면, 전체주의의 특징을 테러로 규정하고, 이것은 폭력을 통해 수립되는 전제정치 및 독재정치와도 차이가 있다고 역설하는 부분이 눈에 띄는 대목이 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 이 책은 사회과학과 철학 분야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다면 매우 난해하게 읽힐지도 모르는 종류의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매우 난해한 정치철학 책을 깔끔하게 번역해 놓은 역자의 노고에 감탄하게 된다. 추신 그런데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는 책을 완역(完譯)하면서, 그 제목을 마음대로 바꾸어 붙이는 것은 글쎄, 과연 필요한 일일까? 이 책의 원본은 1970년에 출판되었다. 때문에 20세기 전체를 총괄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의 세기]라는 제목으로 바꾸어 달고 시중에 나온 이유가 '뉴 밀레니엄'을 눈 앞에 둔 현 시점과 관련이 있다면? 조금은 딱딱하기는 하지만, [폭력에 관하여] 혹은 [폭력론] 정도의 제목을 달고 나오는 것과는 어떤 차이일까? 물론 제목에서 풍기는 뉘앙스 때문에 좀 더 많이 팔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한 제목이 이 책의 내용을 잘 반영한 것일까? 오히려 독자에게 혼돈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은 나만의 기우일까? 번역자에게 89페이지에서 솔제니친의 저서 [The First Circle]을 [제1권]으로 번역해 놓은 것은 좀 우스운 것 같다. 이것은 마치 영화 [The Inner Circle]을 [내부권]으로 번역해서 내놓는 것과 같은 꼴이 아닐까? |
|
내가 정치 영역에서 폭력이라는 쟁점을 제기하자고 제안하는 것은 바로 이상의 경험들의 맥락에 거스르는 일이다. 이것은 쉽지 않다. 소렐이 60년 전에 언급했던, "폭력의 문제들은 여전히 아주 모호하다"는 논평은 오늘날에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진실이다.
나는 폭력을 당연한 현상으로 다루는 데 대한 일반적인 거리낌을 언급했지만, 이제 그러한 진술을 논증해야만 한다. 권력 현상에 대한 논의로 주의를 돌릴 경우, 좌파에서 우파에 이르기가지 폭력은 권력의 가장 극악한 발현에 다름아니다라는 논지에 대한 정치 이론가들의 합의가 존재한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모든 정치는 권력을위한 투쟁이다. 그리고 권력의 궁극적인 본성은 폭력이다"라는 라이트 밀즈 C. Wright Mills의 말은, 이를테면, "정당한, 다시 말해서 정당하다고 주장되고 있는, 폭력 수단에 기초를 두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라는 막스 베버의 국가에 관한 정의의 메아리로 들린다. 이런한 합의는 아주 이상하다. 왜냐하면 정치 권력을 '폭력의 조직화'와 동등하게 다루는 것은 국가를 지배 계급의 손 안에 있는 억압 도구로 보는 맑스의 판단을 따를 경우에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치체(the body politic)나 정치체의 법과 제도가 단순히 강제적인 상부구조로서, 어떤 근원적인 강제력의 이차적인 발현이다라고 생각하지 않는 저자들에게 주의를 돌려보자. --- p.62 |
|
'권력은 결코 정당화(justification)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 정치 공동체의 현존 자체에 내재한다. 권력이 필요로 하는 것은 정당성(legitimacy)이다. 이 두 단어[정당화와 정당성]를 동의어로 다루는 일반적인 논법은 복종이 곧 지지라는 세간의 등식과 마찬가지로 오해를 일으키고 혼란시킨다. 권력은 언제든지 사람들이 모이고 제휴하여 행동할 때 생겨나지만, 그 정당성은 나중에 뒤따라올 어떤 행동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최초의 모임에서 유래한다. 정당성은, 도전받을 경우, 과거에 대한 호소에 기초하지만, 반면에 정당화는 미래에 위치하는 목적과 관련이 있다.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지만, 결코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폭력의 정당화는 그 의도했던 목적이 미래 속으로 더 멀어질수록 설득력을 상실한다. 아무도 정당방위에서의 폭력 행사를 문제삼지 않는데, 왜냐하면 위험이 분명할 뿐만 아니라 눈 앞에 있고, 그 수단을 정당화하는 목적이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 pp.84-85 |
|
*볼테르 Voltaire : '권력'이란 내가 선택한 그대로 타인이 행위하도록 만드는데 있다'(64쪽)
*막스 베버 : 권력은 어디든지 내가 타인의 '저항에 대항하여 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곳에 현존한다.(64쪽) *클라우스 제비츠: 전쟁이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적대자를 복종시키려는 폭력 행동'이다.(64쪽) *쥬브넬: '명령하는 것과 복종시키는 것, 이것이 없다면, 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그것이 있다면 다른 어떤 속성도 권력이 존재하기 위해서 요구되지 않는다[.....]없다면 권력이 존재할 수 없는 것, 그 본질은 명령이다.'(64쪽) *한나 아렌트: 모든 정치 제도는 권력의 발현이자 물질화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인민의 살아있는 권력이 떠받치기를 그만두자마자 화석화되고 부패한다.(70쪽) *촘스키 : '역사, 심리학, 사회학은 모두 현학의 대가mandarin를 희망을 갖고 기다릴 만한 아무런 특별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다' '아주 일반적으로, 지식과 기술에 기초하는 권력을 요구하는 자들이, 부나 귀족출신에 기초하는 권력을 요구하는 자들보다 권력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더 인자할 것이라고 가정할 만한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155쪽) *'다수결의 원리가 오직 민주주의에서만 기능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공상적인 환상이다. 즉 국왕, 그는 한 명의 고독한 개인에 불과하므로, 다른 어떤 통치 형태보다도 훨씬 더 사회의 일반적인 지지를 필요로하는 위치에 있다.'(70쪽) *권력의 극단적인 형태는 한 사람에 반하는 모든 사람이며, 폭력의 극단적인 형태는 모든 사람에 반하는 한 사람이다. 동시에 폭력은 도구없이 단연 불가능하다.(71쪽) --- p. |
|
*볼테르 Voltaire : '권력'이란 내가 선택한 그대로 타인이 행위하도록 만드는데 있다'(64쪽)
*막스 베버 : 권력은 어디든지 내가 타인의 '저항에 대항하여 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곳에 현존한다.(64쪽) *클라우스 제비츠: 전쟁이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적대자를 복종시키려는 폭력 행동'이다.(64쪽) *쥬브넬: '명령하는 것과 복종시키는 것, 이것이 없다면, 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그것이 있다면 다른 어떤 속성도 권력이 존재하기 위해서 요구되지 않는다[.....]없다면 권력이 존재할 수 없는 것, 그 본질은 명령이다.'(64쪽) *한나 아렌트: 모든 정치 제도는 권력의 발현이자 물질화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인민의 살아있는 권력이 떠받치기를 그만두자마자 화석화되고 부패한다.(70쪽) *촘스키 : '역사, 심리학, 사회학은 모두 현학의 대가mandarin를 희망을 갖고 기다릴 만한 아무런 특별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다' '아주 일반적으로, 지식과 기술에 기초하는 권력을 요구하는 자들이, 부나 귀족출신에 기초하는 권력을 요구하는 자들보다 권력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더 인자할 것이라고 가정할 만한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155쪽) *'다수결의 원리가 오직 민주주의에서만 기능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공상적인 환상이다. 즉 국왕, 그는 한 명의 고독한 개인에 불과하므로, 다른 어떤 통치 형태보다도 훨씬 더 사회의 일반적인 지지를 필요로하는 위치에 있다.'(70쪽) *권력의 극단적인 형태는 한 사람에 반하는 모든 사람이며, 폭력의 극단적인 형태는 모든 사람에 반하는 한 사람이다. 동시에 폭력은 도구없이 단연 불가능하다.(71쪽) --- p. |
|
이 책은 사상적으로는 근대 이후의 정치사상을 대부분 포괄하고 있으나, 실제 배경은 주로 1960~70년대의 정치적 사건들이다. 베트남 전쟁, 혹은 인권운동, 68년 학생운동 등. 전체 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러 대학(시카고, 버클리, 프린스턴 등)에서 2~3년간 강의한 것을 정리한 것으로 소제목은 없다.
아렌트는 20세기를 전쟁과 혁명의 세기, 그 공통분모인 폭력의 세기로 규정한다. 20세기는 이성의 힘으로 폭력 수단을 발전시켜왔지만, 이제 아무도 그것을 제어하거나 통제할 수없는 상황이 되었고,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 만든 파괴 수단에 의해 스스로 절멸할 위험에 직면해 있다. 그런데도, (전쟁이나 혁명에 대한 연구는 많이 있어 왔지만) 폭력 그 자체에 대한 성찰은 전무하다. 아렌트가 보기에, 폭력에 대한 옹호는 19~20세기가 갖고 있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의한 진보'라는 관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직선적이고 연속적인 진보, 어떤 수단을 통해서라도 목적을 달성하는 진보, 이러한 20세기의 관념은 언제든 목적을 내세워 폭력 수단을 정당화하는 폭력에 대한 변론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폭력에 대한 아렌트의 대안적 성찰은 크게 두 가지라고 볼 수 있다. 첫째, 폭력과 권력의 구별. 사람들은 폭력을 행사하면서 권력을 갖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지만, 폭력과 권력은 전혀 다르다. 권력이 함께 모인 사람들이 갖고 있는 능력으로서 상호간의 동의와 지지에 바탕한 것이라면, 폭력은 사람수에 상관없이 강제ㆍ복종을 지향할 뿐인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행동 능력의 강조 흔히 사람은 동물처럼 행위한다는 관념이 자연과학에 널리 퍼져 있고, 따라서 인간의 폭력을 불가피한 동물적 특성으로 정의하려는 경향이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의 행동 능력은 동물성과 무관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생성시킬 수 있는, 우리의 의지 및 능력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렌트는 20세기에 잃어버린 인간의 의지 및 능력을 회복해야만 한다고 권고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