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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권
머리말 등장인물 제1장 지방관으로 1. 노론의 대공세 2. 성호 이익 추모 학술대회 3. 이존창을 체포하다 4. 당초 서학에 물든 자취는 아이의 장난과 같았다 5. 곡산 부사 6. 끝없는 사건들 제2장 구시대로 회귀하다 1. 귀경 2. 정조, 의문 속에 사망하다 3. 여유당을 지은 뜻 4. 대박해의 문 제3장 하늘에 속한 사람 정약종 1. 모든 양반이 배교할지라도 2. 정학으로 알았지 사학으로 알지 않았다 제4장 어둠의 시대 1. 전멸하는 남인들 2. 계속되는 비극들 3. 죽음의 땅 국청에서 4. 귀양지 장기에서 5. 황사영백서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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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전, 정약종, 정약전 삼형제와 정조
격동과 비극의 조선 후기를 만나다 - 정약전, “나는 섬사람들을 널리 만나 보았는데, 어보를 만들고 싶어서였다.” 정약용의 동복형제 중 가장 맏형이었던 정약전은 일찍이 천주교를 멀리 했지만, 천주교도라는 누명을 받아 흑산도로 유배당했다. 그 시간을 섬사람들과 어울리며 민생을 돌아보고, 바다를 탐구하는 연구의 시간으로 삼았다. 소나무 정책의 폐해를 다룬 『송정사의』, 바다의 생물을 관찰해 기록한 『자산어보』등에서 실학에 대한 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가 쓴 『자산어보』는 어민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비록 유배당한 몸으로 낯선 섬에 객으로 들어가 있었음에도 그는 끊을 수 없는 애민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 정약종, “그 누구도 이 진리의 소리를 거역할 수 없고 이것을 강제로 금할 수도 없습니다.” 정약용 형제 중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다 간 이는 둘째 정약전이다. 그와 한국 천주교의 역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약전은 정씨 가문의 형제 중 가장 늦게 천주교를 접했지만, 끝까지 배교하지 않다가 결국 순교했다. 그는 조선 최초의 교리서인 『주교요지』 등을 저술하며 초기 천주교가 전파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순교를 당하는 순간에도 당당하게 자신의 신념을 고백할 정도로 그의 믿음은 강인했다. 양반계급사회인 조선에서 평등을 주장한 약전의 사상은 100년이나 진보적이었다. 또한 죽음 앞에서 조금도 떨지 않았던 정약종의 믿음은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신념이 갖는 가치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 정약용,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을 분개하는 내용이 아니면 시가 아니다.” 300여 권의 책을 저술하고, 다산학이라 불리는 실학의 요체를 마련한 조선 후기 최고의 학자. 그의 삶은 완벽히 학문과 실천이 일치된 살아 있는 학자의 삶이었다. 개혁정치를 추구한 정조의 뜻과 맞물려 관료로서 그는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정조를 도와 화성행궁을 짓고, 목민관으로 백성들의 칭송을 받는 등 그의 업적은 완벽히 실천적이었다. 그러나 정조의 죽음을 끝으로 그의 인생도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18년의 귀양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학문체계를 완성했다. 일표이서라 불리는 정약용의 대표작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를 비롯해 수백 권의 저서를 남겼고, 후대의 사회변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가 남긴 업적은 조선시대의 변화를 촉진시킨 중요한 일들이었다. 정약용 이후 200년, 현대 사회는 어떠한가? 우리에게는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의 정신이 필요하다! 정약용 형제들에 대해 원작자인 이덕일은 “인생에서 실패하고 역사에서 승리한 사람들”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부조리한 시대상과 맞서 싸우다 결국 자신과 가족들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그들의 인생은 감히 누구도 쉽게 따라갈 수 없는 가시밭길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200년 전 그들의 삶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역시 부조리한 현실이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정약용 형제들처럼 자신을 불사르며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움직임이 있는가? 우리가 그들에게 배워야 할 것은 잘못된 일을 보고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다. 핍박에도 굴하지 않는 기개다. 어느 누구도 천하다고 말하지 않는 박애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그들의 정신을 되살리고 배울 수 있다면 이 책의 가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