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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욕망의 자기변형 ―마조히즘을 통한 성의 참모습의 재발견과 새로운 생명의 철학, 그리고 탄트리즘 007
제1장 마조히즘이란 무엇인가? ―마조히즘의 증상론 079 ‘엄마의 세 가지 이미지’라는 환상이 들려주는 이야기 1. 자허마조흐와 마조히즘: 자허마조흐의 소설들이 갖는 중요성 081 2. 자허마조흐의 세 여인 090 3. 자허마조흐의 환상과 바흐오펜의 시대 구분론의 일치 ―이 일치의 의미는 무엇인가? 096 4. 엄마의 세 가지 이미지와 두 번째 엄마의 수수께끼 103 5. 두 번째 유형의 여인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계약: 마조히즘적 관계를 성립시키는 본질적인 요건 106 6. 마조히즘의 ‘상징적 질서’: 엄마의 ‘상징적 기능’ 109 7. 마조히즘: 환상을 좇는 이상주의 119 8. 죄의식이라는 마조히스트 특유의 증상의 이유 123 9. 마조히즘의 가장 핵심적인 증상 126 10. 마조히즘의 자연주의 129 11. 마조히즘의 증상론에서 병인론으로 134 제2장 마조히즘은 왜 발생하는가? ―마조히즘의 병인론 137 1. 마조히즘의 병인론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해 143 2. 마조히즘의 병인론에 대한 들뢰즈의 이해 172 제3장 무의식에 대한 새로운 이해 191 제4장 생명과 무의식: 베르그송의 ‘생명의 약동’ 이론 237 1. 프로이트 대 베르그송 239 2. 지속과 무의식 247 3. 생동하는 무의식: 본능의 신비 264 4. 변성 의식상태의 의미 293 5. 베르그송의 생명철학을 통해서 본 마조히즘의 의미 303 제5장 탄트리즘: 성과 영성의 근본적인 일치 313 1. 내재성의 존재론과 종교의 초월주의의 화해 315 2. 탄트리즘의 우주론 339 참고문헌 3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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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한번 과감히, 상식과 과학과 절대다수의 사상들의 이름으로 자명하다고 생각되어 왔던 것이 그어 놓은 경계선을 넘어 보자. 그렇게 되면 과연 어떤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인가? 그 새로운 세계가 실은 ‘세계의 참모습’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줄 수 있는 어떤 방법이란 정녕 찾을 수 없을 것인가? --- p.21
마조히즘이라는 아주 작고 사사로운 현상, 그것도 지극히 비정상적인 개인이 겪는 한낱 사소한 주관적인 병리적 사태에 불과할 것 같은 이 현상 속에, 실은 저 거대한 우주 전체의 참된 본성이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드는 물음이 숨겨져 있을 수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이 책을 통해 마조히즘에 관해 이야기하려 하게 된 이유이다. --- p.75 그런데 정말로 흥미로운 것이면서도 매우 중요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은 이제는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 밝혀진 바흐오펜의 이론이 자허마조흐의 ‘세 가지 여인의 이미지’라는 환상과 서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 p.101 마조히스트가 환상을 추구하는 것은 그가 현실이 어떤지를 모르거나 환상을 현실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마조히스트는 현실을, 즉 인간은 누구나 아버지와 엄마 양편의 결합에 의해서만 태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가 잘 알고 있는 이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을 뿐이다. 그는 “이 현실의 세계가 완벽하다는 것을 믿기 거부하며, 차라리 날개를 달고서 이 세계로부터 벗어나 꿈의 세계 속으로 달아나려 한다”. --- p.121 저 초월적인 것은 우리의 경험 속에 주어지는 것들을 근거 짓는 ‘근거’이면서도 또한 자신이 근거 짓는 것들에 의해 은폐되고 있는 ‘근거 이상의 것’이며, 나아가 그것이 이러한 은폐를 뚫고 자신의 초월성을 드러낼 때, 자신이 근거 짓고 있는 이 경험적인 것들의 타당성과 이것들이 우리에게 평소에 행사하고 있는 그 효력과 지배력을 일거에 붕괴시킬 수 있는 ‘근거 와해’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 p.160 마조히스트가 엄마에 대한 근친상간적 욕망을 품는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근친상간의 실현을 통해 엄마에게만 의존하는 단성생식의 방법으로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려 한다는 것, 이 새로운 인간은 여자와 구분되는 남자가 아니라 그러한 자연적 구분을 넘어서는 제3의 새로운 인간이라는 것, 이러한 것들이 PSM이 마조히즘의 발생원인으로서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말해 주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의 기저에 실은 자기 자신을 초감각적인 상태의 새로운 모습으로 변형시키려 하는 ‘성적 욕망의 근원적인 자기변형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 p.190 선험적이며 초개인적인 원형, 무의식의 내용은 개체를 과거의 망령에 붙들어 매어 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현재의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도록 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새로운 미래를 열어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 p.218 생명의 자기 전개 과정이 지나쳐 온 과거의 모든 과정은 우리 인간의 현재 존재 속에 모두 그대로 보존되어 들어와 있게 된다. 즉 생명의 자기 분화를 통해 갈라져 나온 여러 갈래의 길들 중의 어느 하나의 길이 길게 전개되어 나간 위에서만 존재하고 있는 우리 인간의 존재 속에, 생명이 이러한 분화 이전부터 겪어 온 모든 과정이, 즉 우리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이루어져 온 생명의 모든 자기 전개 과정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고스란히 보존되어 들어와 있게 되는 것이다. --- p.262 우리 인간에게는 그냥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넘어서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가 상실해 가고 있는 우리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되찾는 길이기 때문이다. --- p.292 성을 회피하려 하는 것, 본능을 회피하려 하는 것, 그것은 생 자체를 회피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생 자체인 한, 우리 자신이 생의 한 표현인 한, 이러한 회피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생을 부정하려 하는 것이며, 생 너머에 있는 초월적인 것을 위해 생이 가진 가능성 일체를 부정하려 하는 것이다. --- p.323~324 나의 존재는 그때에 비로소, ‘시바’나 ‘삭티’ 중의 어느 하나로 나를 일차적으로 규정하고 있던 성적 양극성을 넘어 이러한 성적 양극성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시바-삭티’의 완전성에 이른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나는 그때, 남자와 여자 사이의 자연적인 구분을 넘어선, 남자이면서 동시에 여자인 제3의 존재로 거듭나게 되고, 그러므로 더 이상 이성을 감각적으로 탐할 필요가 없게 되는 양성구유적인 존재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 p.3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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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고행을 하는 스님이나 자신을 채찍질하는 기독교인들 등 고통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여러 종교인들을 보면서, 그들이 겪는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 헤아려보고 그 고통의 크기에 감탄하며 그들의 도력, 혹은 인내를 칭송한다. 그러나 같은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성적인 부분에 와서는 사람들의 멸시와 경멸을 얻기 십상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러한 고통의 감내에 대해서 성(性)적인 것과 성(聖)적인 것을 나누고 구분하는 것일까? 만약 그 고통을 감내하는 원인과 그 감내로 인한 결과가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인식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은 그렇게 고통을 감내하는 자에 대한 책이다. 보다 직접적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성적 쾌락을 누리기 위하여, 그 선행하는 단계로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조히스트와 그들의 고통 감내라는 현상, 즉 마조히즘에 대한 책이다. 저자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그들에 대한 멸시와 경멸을 넘어서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성(性)적인 것에 대한 멸시와 경멸과는 다르게 그것이 우리를 성(聖)스러운 초월의 길로 인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밝힌다. 개인에서 생명, 생명에서 우주로 나아가는 이 책은 우리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해답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보다 정확히 말해 우리에 대한 책이다. 현재 학문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과학적 사고방식, 즉 모든 것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 유물론적 사고방식으로 볼 때는 이 책의 내용이 해괴하고 이상한, 더 나아가 신비주의적이기까지 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은 잠시 뒤로 미루고 과연 과학이 우리 존재에 대한 고민을 종식해 줄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자. 과학은 분명 우리의 존재에 대한 답을 내려줄 수 있어도 우리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답을 내려줄 수는 없다. 우리의 존재론적 물음에 대한 답은 과학이 아니라,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과학적 사실과 마찬가지로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학의 논리를 벗어나 우리의 존재에 대하여 한번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루쉰은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꿈에서 깨어났을 때 갈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현대과학이 제시하고 있는 우주란 바로 이같이 우리를 미몽에서 깨어나 갈 수 있는 길이 없는 세상으로 내던지는 우주가 아닌가. 현재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길을 잃어버렸다. 인공지능의 발전과 유물론적 우주는 다시금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현대과학은 그 질문에 맞서 인간이란 그저 세포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유기체에 불과하다고 답한다. 이것은 우리가 직면한 절망에 대한 해결책도, 우리가 찾는 답도 아니다. 이제 잠시 미뤄놓았던 ‘신비주의적’이라는 비난에 대해 대답할 때가 왔다. 그런데 이 책은 신비주의적이란 비난에 대한 응전이며, 우리의 존재적 진실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기에 새로이 답을 만들어 내어 답하는 것보다는 책 속에서 그 구절을 찾아 답함이 응당 마땅해 보인다. “맞다. 바로 그러하다. 실로 우리는 지금 과학의 혁혁한 발전에 의해 거의 폐사{斃死} 지경으로 내몰리고 있는 신비주의의 세계이해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 하지만 우리가 이 혼란과 위험의 끝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믿고 따라온 저것들 속에서 살아가는 한 발견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즉 우리의 삶과 세계의 존재를 위한 새로운 희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