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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안에 있는, 호수 … 7
숲의 젤라틴 … 56 수요일 밤의 사바랭 … 103 갈피를 못 잡는 홍채 … 152 석류의 표지 … 200 가만히 손을 보다 … 242 신전에 바치는 물 … 286 옮긴이의 말 … 332 |
Misumi Kubo,くぼ みすみ,窪 美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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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만남 때는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 본문 중에서 주름이 잡힌 엷은 남빛 셔츠를 입은 등, 유독 목덜미 쪽에서만 꼬불거리는 머리카락, 왼쪽 귀 바로 뒤에 보이는 갈색 점. 내 눈동자가 깜빡거릴 때마다 그때까지 미처 몰랐던 미야자와 몸의 구석구석을 탐색하며 재빨리 그 정보를 머릿속에 차곡차곡 저장해갔다. --- p.8 살아 있는 동안에 푹푹 쌓인 잡동사니와도 같은 기억을 품고 있다가 비눗방울이 터지듯이 그 기억들이 하나둘 사라져버릴 때, 과연 난 누구의 이름을 부를까? --- p.47 그러다 문득 생각을 해본다. 부드럽고 촉촉하고 흐물흐물한 것으로 가득 찬 것은 여자가 아니라 오히려 남자가 아닐까 하고. --- p.102 요즘 그는 내 아파트에서 요리도 하고, 방이 어질러져 있으면 자기 맘대로 청소까지 한다. 내 영역으로 척척 침입해 들어오고 있는 중이다. 이런 남자를 지금껏 만나본 적이 없었다. --- p.105-106 갑자기 선배가 내 손을 잡았다. 우리 둘이 걸을 때면 언제나 이렇게 손을 잡으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왠지 그의 손길이 애인의 손을 잡고 있다기보다는 어린아이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손을 꽉 잡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 p.126 나는 아무와도 마음을 깊이 통하고 싶지 않다. 타인에게 나 자신을 이해받고 싶지도 않다. 누군가에 대해서 쉽사리 잘 아는 척하고 싶지도 않다. 그렇다, 나는 누군가와 마음을 서로 통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다. (…)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는 것이다. --- p.235 우리는 진실을 말로 하지 않은 채 본심을 고백하는 척하면서 앞에 있는 상대와 헤어지려 하고 있다. 어른은 어디까지 바보란 말인가. --- p.278-279 “풀도 베지 말고, 잡초도 그대로 놔두자. 어디선가 날아온 씨앗이 뭐든 간에 그냥 그 땅에 피어나게 내버려두자. 너무 풀이 많이 자라서 방해가 된다고 해도, 자연 그대로 내버려두자고.” --- p.328 나뿐만이 아니라 누구나 의지할 데 없다는 생각이 드는 밤이 있을 것이다. 슌타로 씨도, 지금 내 앞에 있는 가이토도.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의지할 데 없는 밤이 또 오지 않던가. 그래도……. --- p.3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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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도, 사랑도 영원토록 우거지는 초록이 아니다.
하지만 영원하지 않기에 나는 그것이 사랑스럽다.” 큰 쇼핑몰 하나와 거울같이 드넓은 호수, 어디에서나 거대한 후지산이 보이는 시골 마을에서 소노다 히나는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혼자라는 외로움에 헤어진 연인 가이토를 완전히 밀어내지 못하고 관계를 이어온 그녀는, 모교의 입학 안내 팸플릿을 제작하기 위해 찾아온 미야자와와 얽히면서 이제까지 느껴본 적 없는 감정에 휩싸인다. 작은 광고회사 사장이자 디자이너인 미야자와는 아내와 별거 중인 채 삶의 모든 의욕을 상실한 상태였으나 히나와의 만남을 계기로 살아갈 의미를 되찾는다. 히나의 집 마당에 자라난 풀을 베고, 그녀와 함께하는 나날이 그에게 숨결을 불어넣어준다. “처음엔 당신이 혼자 있는 게 왠지 너무 외로워 보였어. ……쓸데없는 참견이지만, 힘이 돼주고 싶었거든. 그러는 동안 내 회사는 도저히 손쓸 방도가 없게 되었고. 솔직히 말하면 당신 집에 가기 전에 수해에 가서 목을 맬까도 여러 번 생각했었어. ……그러다 당신 집에서 풀을 베고, 당신 얼굴을 보면서. ……힘을 얻은 건 바로 나였어.” 50쪽 점점 멀어져가는 히나의 모습에 괴로워하던 가이토는 신입 요양보호사인 하타나카와 만나며 히나를 잊으려고 노력한다. 하타나카의 아들 유키에게 밥을 차려주고, 연필을 깎아주는 나날은 사랑이 할퀴고 간 상처에 서서히 살이 차오르게 만든다. 결혼의 실패로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버린 하타나카도 ‘말랑말랑하고 불확실한’ 것을 믿는 가이토의 지고지순한 모습에 조금씩 마음을 열어간다. 찰칵찰칵하고 열쇠를 돌리는 소리가 난다. 나는 지금의 내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허둥지둥 골판지상자 뒤로 숨었다. 무엇이 들었는지 묵직한 흰 비닐봉지를 두 손에 든 선배가 방으로 들어온다. (…) “아무 데도 가지 마.” “그건 내가 할 대사야.” 그렇게 말하며 선배는 웃었다. 내가 조금 더 이 마을에 있어도 괜찮은 걸까? 아, 귀찮기만 한 이 남자는 대체 나를 어디로 데려가주려는 걸까? 150-151쪽 그러나 폭죽처럼 타오르던 감정도 반복되는 일상으로 마모되고 만다. 서로를 구원했던 네 사람은 일상이 주는 익숙함에 점차 ‘열광 같은 감정’을 잃어간다. 사랑을 갈구하다가도 익숙함에 무감각해지는 과정을 저자는 차분한 호흡과 설득력 있는 문장으로 풀어낸다. 하지만 사랑의 끝에 씁쓸함만 남는 것은 아니다. 사람도, 사랑도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매 순간이 사랑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함의 실체를 알면서도 매번 사랑을 한다.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손의 형태 그 인생의 결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소설은 네 사람의 연애를 조망하는 동시에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사유한다. 소설을 관통하는 기표인 ‘손’이 이를 보여준다. 손은 연인의 손이었다가 죽은 자의 손이 되기도 하고, 따스함이었다가 차가움으로 전환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된다. 생명이 스러져가는 노인의 손과 아이의 통통한 손, 뜨거운 온기를 전달하는 손과 건조하게 말라비틀어진 손은 대척점에 서 있으면서도 우리 존재를 어떤 신체보다도 여실히 드러내주는 장치로 작용한다. 손은 우리의 더께와 무게를 담아낸 삶의 축소판인 셈이다. 힘이 빠져 축 늘어진 손바닥을 손전등으로 비춘다. 아버지와 비슷한 세 개의 굵은 선이 있다. 하지만 각각의 선이 휜 상태나 굵기, 주름의 깊이는 역시 사람마다 미묘한 차이가 난다. 이 노인들의 손금을 읽으면, 삶의 끝을 이런 방에서 홀로 보내게 될 운명이라는 것까지도 알 수 있게 될까? 245-246쪽 가이토 손바닥의 무게와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 손이 언젠가 차갑게 굳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손을 뒤집어서 가이토의 네 손가락을 감았다. 건조한 손가락의 감촉은 말라비틀어진 잡초와 닮았지만, 가이토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는 손가락 끝에도 다다라 그 열기를 내 손가락에 전하고 있었다. 330-331쪽 우리는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주길 바라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기도 한다. 타인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망과 타인을 연민하는 마음은 맞잡은 손을 통해 건네진다.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을 겪는 아픈 시간들 속에서 우리는 곁에 있어줄 한 사람을 찾기 위해,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하기 위해 힘겨운 날갯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한국 독자들을 위한 메시지로 ‘산다는 것의 애달픔을 마음껏 음미해주세요’라는 말을 남겼다. 몇 번이고 곱씹어보게 만드는 이 메시지는 사랑이란, 그리고 삶이란 애달픈 것임을 저릿하게 깨닫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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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미표 소설이다. 아니면, ‘평범한 이들의 관계에 대한 비범한 해부도’라고 바꾸어 말해도 좋겠다. 대담하고 강렬한 도입부를 지나면, 독자는 사랑 혹은 욕망이라는 그물에 걸려든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사랑을 향해 자신을 던진 여자, 사랑을 지키려는 남자, 타인을 사랑할 수 없는 여자, 자기조차 사랑할 수 없는 남자. 이들 네 남녀를 통해 독자는 특별한 일이 어떤 식으로 일상화되는지, ‘일상’은 관계에 어떤 타격을 가하는지, 상처는 존재와 삶을 얼마나 초라하고 스산하게 만드는지, 파탄의 잿더미 위에서 인간이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숨죽이고 지켜보게 된다. 냉정한 시선과 감각적인 문장,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이해시키는 탁월한 심리묘사와 미스미 특유의 흡인력에 이끌려 책장은 빠르게 넘어간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난 후 찾아드는 쓸쓸한 통증 때문에 오래오래 가슴이 아린다.
- 정유정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