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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ricia Highsm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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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관찰력이 매우 뛰어나군요.” 톰이 재빨리 말했다. 불현듯 화가 치밀었다.
“맙소사, 어제 얘길 했어야 했는데. 어제 당신의 손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손에는 수염을 달 수 없었을 테니까요.” 톰이 말했다. “그냥 내버려 두세요, 네? 당신에게 큰 해를 끼치지도 않잖아요. 버나드의 그림이 훌륭하다는 건 당신도 부인할 수 없을 거예요.” “그 일에 관해 계속 함구한다면 벌 받을 거예요. 안 돼요! 내 입을 막으려고 당신이나 다른 사람이 엄청난 돈을 제안한다 해도 그럴 수 없어요!” 머치슨의 얼굴이 더 벌개졌고 턱이 덜덜 떨렸다. 와인 병을 힘껏 바닥에 내려놓았지만 깨지지는 않았다. 와인을 거절당하자 톰은 약간 모욕감이 들었다. 별일 아니지만 모욕감과 짜증이 점점 더 커졌다. 톰은 단번에 와인 병을 집어 들어 머치슨을 향해 내리치며 머리 측면을 가격했다. 이번엔 와인 병이 깨지고 와인이 튀었고, 병 아랫부분이 바닥에 떨어졌다. --- p.85 이제 톰은 바깥 계단 네다섯 칸 아래까지 긴 덩어리를 내렸다. 시신을 손수레에 꼭 맞게 실으려 애썼는데, 손수레 한쪽을 들어 올리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는 그렇게 했지만 손수레가 뒤집혀 시신이 반대편으로 기울어 다시 바닥에 떨어졌다. 그 꼴이 우스꽝스러울 지경이었다. 시신을 다시 지하실까지 끌고 갈 생각을 떠올리자 끔찍했다.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톰은 잠시 기운을 되찾으려 애쓰면서 바닥에 널브러진 시신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런 다음 살아서 포효하는 용처럼 혹은 죽임을 당하기 직전 자신이 죽여야 하는 어떤 초자연적인 생명체처럼 몸을 내던져 시신을 손수레에 들어 올렸다. --- p.104 아네트 부인은 커피를 준비해 위층으로 가져 올라가겠다고 했다. 톰은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입었다. 숲 속 무덤을 한 번 보고 싶었다. 버나드가 이상한 짓을 했을 수도 있었다. 무덤을 약간 파헤쳤을 수도 있고, 스스로를 매장했는지 누가 알겠는가! 커피를 마시고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해가 떠오르지 않아 아직 흐릿했고, 풀밭은 이슬에 젖어 있었다. 그는 무덤으로 곧바로 가고 싶지 않아 관목 숲을 어슬렁거렸다. 엘로이즈나 아네트 부인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가 집을 뒤돌아보지 않은 이유는 한 사람의 눈빛은 다른 누군가의 눈빛을 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p.1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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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작인『지하의 리플리』는 첫 번째 작품인 『재능있는 리플리』와는 15년의 간극을 두고 탄생했다. 디키 그린리프가 남겨준 유산으로 여유 있는 삶을 살아가던 리플리는 프랑스의 중산층 여성인 엘로이즈와 결혼하여 정상적인 생활에 안착한 듯 보이지만 1권에서 다루어졌던 리플리의 정체성 혼란 문제와 심연에 자리 잡은 악마성은 여전히 작품 전체에 도사리고 있다. 리플리는 우연히 더와트라는 화가로 분장하면서 또다시 사건에 휘말린다. 더와트라는 화가의 작품의 진위 문제가 대두되고, 이에 의심을 품은 미국 수집가 토머스 머치슨이 리플리의 집을 방문한다. 더와트의 위작을 그린 버나드 터프츠가 불쑥 개입하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는 결말로 치닫고, 리플리는 자살을 방조함으로써 또다시 살인 사건에 연루된다. 특히 타인의 그림을 위조하면서 타인도 자신도, 그 어느 누구도 될 수 없는 정체성의 막다른 지점에 이른 버나드 터프츠의 심리 묘사가 압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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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국내 최초로 완역되는 리플리 5부작
20세기 최고의 범죄소설 작가(“The Greatest Crime Writer”, 영국《타임스》)로 알려진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은 단연 리플리 시리즈일 것이다. 1955년부터 1991년까지 36년에 걸쳐 총 5부작으로 완성된 연작 소설을 통해 ‘현대 문학사에서 가장 카리스마 넘치는 사이코패스’인 주인공, 톰 리플리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워싱턴포스트》 서평 담당 기자로 활동하면서 문학 평론 부문에서 퓰리처상을 받은 마이클 더다는 리플리 5부작이 미국에서 새롭게 양장본으로 재출간되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 “하이스미스가 창조해낸 가장 유명한 캐릭터, 톰 리플리는 태평스럽고, 아내와 친구들에게 헌신적이고, 미식가이고, 부득이 킬러일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이 조용한 탐미주의자는 오직 필요할 때만 몽둥이로 내리치고, 목을 조르고, 익사시킨다. 때로는 친한 친구들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가끔 첫 살인의 추억이 그를 불편하게 하지만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죄책감은 느끼지 못한다. 그가 살인을 하는 이유는 자신과 친구들과 사업 파트너들과 집을 보호하기 위할 뿐이다. 아마 다른 보통 사람들이라도 다르진 않을 것이다.” 리플리는 사건에 대해 신중하면서도 동시에 치밀한 완벽주의자의 모습을 보이며, 범행을 저지르는 동안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죄의식을 느끼지 않음으로써 20세기 문학사상 독창적이고도 기이한 캐릭터가 탄생되었다. 우리에게 알랭 들롱 주연의 영화 「태양은 가득히」나, 맷 데이먼, 주드 로 주연의 「리플리」로 널리 알려지기도 한 원작 소설『재능있는 리플리』는 발표되자마자 화제를 일으켰다. 범죄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이전까지 없었던 전혀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해냈고, 인간 심리의 흐름을 따라가는 참신한 접근법으로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1955년 『재능있는 리플리』를 시작으로, 1991년 『심연의 리플리』까지 36년에 걸쳐 다섯 권으로 완성된 리플리 시리즈는 톰 리플리라는 인물의 심리를 밑바닥까지 들여다보며 현대문학사에서 영원히 기억될 캐릭터를 창조했다. 리플리 5부작은 단연 하이스미스의 대표작이자, 그 명성에 비해 국내에서 부분적으로 한두 권만 출간되다가 마침내 다섯 권 모두 소개되는 완역본이기도 하다. 5부작 완간을 기념하며 특별히 박스 세트를 함께 선보인다. 깔끔한 디자인으로 리플리 시리즈의 특색을 잘 살린 박스는 300세트만 한정 제작하여 소장 가치를 높였다. 5부작을 완간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그동안 기다려온 독자들에게는 큰 선물이 될 것이다. ■ 출간 의도 “진정으로 좋은 사람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누가 착한 사람이고 누가 악한 사람인지를 구분할 수가 없다” -오토 펜즐러(범죄소설 전문 편집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1995년 세상을 떠난 이후로 서서히 그녀의 작품이 세계 문학계에서 재평가 받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게 되었다. 비평가들의 찬사에 힘입어 하이스미스의 단편집이 묶여 나오고, W.W. 노튼 사는 그녀의 소설들을 개정판으로 출간했으며, 1999년 이후로 지금까지 세 편이나 리플리의 영화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재능있는 하이스미스』라든지 『아름다운 그림자』처럼 비범한 글쓰기의 비밀, 유럽에 정착해서 지내야 했던 신비로운 이력과, 평생 동성애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사생활의 역사까지 아우르는 전기가 계속 발표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1960년대 이후로 범죄소설의 인기가 하락하면서 1995년에 발표된 유작인 『소문자 g』가 고국인 미국에서 출간되지 못한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하이스미스는 공교롭게도 자국인 미국보다는 유럽에서, 생전보다는 세상을 떠난 이후에 더 높은 평가를 받은 작가이기도 하다. 유럽은 하이스미스를 도스토예프스키, 콘래드, 카프카, 지드, 카뮈 같은 훌륭한 심리 소설가의 반열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의 작품들은 범죄적 상황 속에 처한 인간의 불안과 죄의식에 기묘한 공감을 이끌어 내었다. 특히 인간 내면에 잠재된 불가해한 측면을 냉정한 문체로 정교하게 포착해낸 그녀에게는 ‘제2의 에드거 앨런 포’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을 정도였다. 장르문학 독자들에게 꾸준한 반응을 얻고 있는 셜록 홈즈 전집,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등과 더불어 최근 1~2년 사이에 대실 해밋 전집, 조르주 심농의 메그레 시리즈가 탄생했다. 그리고 이제 하이스미스의 최고 걸작인 리플리 5부작이 세상 밖으로 나올 차례가 되었다. “범죄자는 드라마틱하게 흥미롭다. 왜냐하면 그들은 적어도 잠깐이나마 능동적이고, 영혼이 자유롭고, 누구에게도 굴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에 대한 대중의 열망은 내게 상당히 따분하고 인위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삶이나 자연은 정의가 실현되느냐 마느냐에는 전혀 개의치 않기에.” 하이스미스의 세계관이 그녀가 이처럼 냉소적인 글을 남긴 시대보다 오히려 인과응보의 개념이 무너지고, 선악의 구별이 점점 모호해져 가는 지금 상황에 더욱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이 리플리 5부작의 출간 의지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리플리 증후군 “톰 리플리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하이스미스 자신이 바라는 세계만을 진짜라고 믿고, 자신이 발을 딛고 사는 현실을 오히려 허구라고 믿는 것을 ‘리플리 증후군’이라고 한다. 『재능있는 리플리』에서 사소한 거짓말로 인하여 재벌가의 아들을 만나고, 그의 삶을 동경하게 된 주인공 리플리는 점점 더 대담한 거짓말과 신분 위장으로 새로운 삶을 꿈꾼다. 리플리라는 가공의 인물이 정신병리학의 연구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20세기 후반부터다. 실제로 리플리와 유사한 말과 행동을 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영국의 유력 일간지 《인디펜던트》가 신정아 교수의 가짜 박사 학위 소동을 두고 영화명을 빗대어 ‘재능있는 신정아 씨(The Talented Ms. Shin)’라는 제목을 붙인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리플리 증후군은 개인의 사회적 성취욕은 크지만 사회적으로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통로가 봉쇄돼 있는 경우 자주 발생한다. 마음속으로 강렬하게 꿈꾸는 것을 현실에서 이룰 수 없으면 가공의 세계를 만들어 그곳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작품이 발표된 1955년 당시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더욱 설득력을 갖는 지점이 여기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