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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살/몸 존재론, 아직 창조되지 않은 양심을 향한 존재론적 시도 5
I. 살/몸의 문학 공간과 감각: S. 렘과 A.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를 예시로 삼아 전개된 공간의 존재론 1. 여는 글 24 2. 공간, 지각, 감각 27 3. 존재의 정량화 가능성의 현시로서의 공간과 감각 34 4. 공간 이해의 근거로서의 존재와 수의 상호 치환 44 5. 닫는 글을 대신하여: 비극적 유희로서의 존재와 공간 50 시간과 감각: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예시로 삼아 전개된 시간의 존재론 1. 여는 글 60 2. 감각의 한정과 초월 62 3. 시간과 현존재의 탈자성 68 4. 감각의 양극화와 현존재의 운동 76 5. 시간과 자유 88 6. 닫는 글을 대신하여: 시간의 참된 의미가 일깨우는 것은 참된 양심과 윤리이다 101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J. 키츠의 시 「고대 그리스 항아리에 붙이는 송시」를 예시로 삼아 전개된 아름다움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 1. 여는 글 108 2. 에크프라시스로서 시 짓기와 미적 판단 111 3. 미적 판단과 관심 118 4. 감각과 진리 127 5. 닫는 글을 대신하여: 열정과 아름다움 137 살/몸과 세계: 『거장과 마르가리타』 제1장-제3장에 나타난 선과 악, 그리고 절대선의 표지로서 드러나는 세계의 세계성에 관한 성찰 1. 여는 글: 선과 악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존재론적 해명이 지니는 절대적 우선성 146 2. 윤리적 상대주의에 대한 존재론적 기술 149 3. 이념적 자유의 이율배반과 선악의 근원적 초월성 156 4. 감각으로부터 연원하는 현상적 세계의 필증적 형식으로서의 물질과 정신 165 5. 근원적 선으로서의 고통의 해소 174 6. 닫는 글을 대신하여: 언제나 이미 우리 곁에 임재해 있는 진실의 음성 185 II. 살/몸의 철학 현상학과 순연한 차이의 철학: 질 들뢰즈에 대한 현상학적 성찰 1. 여는 글 198 2. 경험적 의식과 순수한 나 200 3. 차이의 산물로서의 자아 209 4. 내재성의 평면과 지각하는 몸으로서의 기관 없는 신체 212 5. 닫는 글을 대신하여: 차이로서의 힘과 형이상학, 그리고 감각이 일깨우는 초월로서의 존재 자체에의 물음 222 살/몸 존재로서의 존재사건과 기술권력: 파쇼적 신체 및 거룩한 신체에 관한 성찰 ― 미셸 푸코 사상의 존재론적 변용 1. 여는 글: 현존재의 근원적 현사실성으로서의 살/몸으로 존재함 236 2. 하이데거 기술론의 의의와 한계 238 3. 권력과 복종하는 신체에의 요구 245 4. 권력 및 담론과 파쇼적 신체의 제작 252 5. 닫는 글: 파쇼적 신체로부터 거룩한 신체로의 전향 265 살/몸과 해석: 슐라이어마허 해석학의 존재론적 근거에 관한 성찰 1. 여는 글: 존재론의 자기 지시성과 근원 사태 277 2. 존재이해의 근원으로서의 감각 281 3. 차이와 절대적 통일성의 근거로서의 감각 289 4. 살/몸을 통해 고지되는 현존함의 근원적 역사성 298 5. 닫는 글을 대신하여: 해석과 역사 304 순연한 탈자로서의 존재: 살/몸으로 현존함이 자아내는 절대적 내면성의 평면으로서의 존재의 의미에 관한 소고 1. 여는 글 314 2. 존재이해의 궁극적 근원으로서의 감각 316 3. 순수 창발성의 시발점으로서의 감각 323 4. 절대적 창발성의 표현으로서의 초월과 존재 328 5. 닫는 글을 대신하여: 존재론적 윤리학의 궁극적 정초 가능성으로서의 감각 339 시간과 공감: 시간과 공감의 존재론적 관계에 관한 소고 1. 여는 글 348 2. 존재론적 개념으로서의 공감과 함께-있음 350 3. 함께-있음과 시간 358 4. 현존재의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근거로서의 감각과 공감 366 5. 닫는 글을 대신하여: 현존재의 양심과 공감 3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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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하는 자에게 죽음은 감각되던 한 존재가 감각의 지평 너머로 사라짐을 뜻하고, 감각의 지평 너머로 사라진 모든 것은 감각하는 자로부터 오직 무한히 멀리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물질화된 것으로서, 따뜻한 살과 몸을 지닌 한 구체적 존재자로서, 육화된 기억으로서, 아내는 이미 내 곁에 있다. 아니 육화된 기억으로서의 아내와 나 자신의 존재를 가르는 사이-공간이나 거리 따윈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
--- p.52 하지만 체험되지 않은 고통을 예감하고 상상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이미 체험된 고통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 무엇에 의해 왜 고통을 겪었는지 따위는 기억될 필요가 없다. 그저 고통의 기억이면 충분하다. 디덜러스에게 고통의 기억은 이런저런 대상적 존재자에 대한 기억과 얽혀 있지만 독수리에게 눈을 파 먹히는 고통을 예감하고 또 상상하는 디덜러스에게 그러한 예감과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고통 자체만의 기억인 것이다. --- p.81 아름다움은 도리어 현존재의 존재의 근원적 구조로서의 실존과 초월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오직 그 자신이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이 더욱 살 만하고 아름다운 것이 되기를 열망하는 존재자만이 자연과 세계에서 그러한 열망의 가능성과 현실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그 상징으로서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126 대체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내일 당장 지구의 종말이 올 수도 있고, 모든 것은, 심지어 절대선에의 소망과 의지마저도, 영원한 망각 속으로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살/몸으로 현존하는 한 사람은 사람으로 남을 뿐이다. ‘내일 지구의 멸망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경구는 특별한 현자만을 위해 예비된 말이 아니다. 그것은 실은 살/몸으로 현존하는 모든 자들의 필증적 존재 방식, 절대적이고도 궁극적인 허무의 가능성에 직면해서도 절대선의 이념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현존함의 운명을 표현하는 말이다. --- p.189-190 지각을 전제로 하지 않는 이미지란 원래 형용모순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전개인적 사유의 이미지로서 내재성의 평면은 바로 지각에 의해 생성되는 것으로서 이해될 수밖에 없다. 물론 지각에 의한 이미지 생성을 몸의 작용을 매개 삼아 의식이 표상해 내는 그러한 의미의 이미지 생성으로 오인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몸의 근원적 존재 구조로서의 안에-있음을 드러내는 이미지인 것이지 몸 내부적 혹은 의식 내부적으로 안에-있음을 드러내는 이미지는 아닌 것이다. --- p.219 신체에 가해지는 형벌을 가능한 한 잔혹하고 호사스럽게 연출하려는 권력의 의지는 복종하는 신체를 생산하려는 의지와 동일한 것이며, 타자에게 고통을 가하는 자신의 행위를 감추려는 한 현존재의 의지는 자신의 신체가 복종하지 않는 신체임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의지와 다르지 않다. 복종하지 않는 신체는 피지배자의 입장에 처해 있는 자에게 속할 수도 있고 지배자의 입장에 처해 있는 자에게 속할 수도 있다. --- p.247 현존재의 근원적 존재 방식으로서의 해석이 지향하는 것은 바로 이 존재라고도 말해질 수 없는 그 어떤 것이다. 근원적 감각에 추후로 뒤따르는 존재론적 사념은 존재자의 존재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 자체를 향한 것일 수밖에 없으며, 그런 한 존재론적 관점에서 현존재의 근원적 존재 방식으로서의 해석이 지향하는 것은 존재 자체로서 ―존재론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슐라이어마허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구체적 현존재로서의 우리 자신은 어떤 말, 어떤 의미로도 환원될 수 없는 그 무엇을 향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일이다. --- p.308 우연은, 설령 그것이 한 사고 내지 사건의 원인으로서 인정될 수 있다 하더라도, 필연성에 단순히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될 개념이 아니라 실은 ‘필연성의 우연한 원인’으로서 이해될 개념이다. 물론 원인으로서의 우연 역시 특정한 사건의 진행 과정에 대해 현존재가 일어날 모든 일들을 예측하거나 미리 확정지을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우연적인 것의 객관적 실재성 증명으로 오인하기에 생겨나는 관념에 불과하다. --- p.331 현존재의 존재는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의 바탕에는 이미 현존재의 존재에 대한 존재자적 이해가 놓여 있다. 존재를 그 무엇으로서 개별화된 존재자의 존재로 파악하려는 경향이 그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현존재라는 용어 자체가 현존재의 존재를 이미 그 개별화된 존재로서의 무엇-임, 무엇-있음의 관점에서 제시하는 용어라고 볼 수 있다. 현존재의 현이라는 말이 이미 그 자체로 현존재가 여타 존재자와 외적으로 구분될 수 있는 한 존재자로서 개별화되어 있음을 지시한다는 뜻이다. --- p.3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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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백만 번이라도 체험의 현실과 만나 내 영혼의 대장간에서 아직 창조되지 않은 내 종족의 양심을 벼려 내리라.”
제임스 조이스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의 입을 통해 밝힌 이 고백 속에 『문학과 살/몸 존재론』의 근본 취지가 담겨 있다. 살/몸 존재론이라는 낯선 용어는 대체 무엇을 지칭하는가? 그것은 일체의 상식과 이론으로부터 벗어나 체험의 현실 그 자체와 만나고자 하는 일종의 존재론적 감행이다. 오직 살/몸 존재론적 감행만이 아직 창조되지 않은 인류의 양심을 벼려 낼 수 있다. 양심이란 사념과 이해의 한계를 넘어서는 존재의 근본 의미에 눈뜸을 뜻하기 때문이다. 20세기 최대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로고스보다 더욱 근원적인 것은 아이스테시스라고 밝힌다. 아이스테시스란 그 무엇을 순연히 감각적으로 받아들임을 뜻하는 말이다. 아마 분석적 사고에 익숙한 현대인이라면 이러한 의미의 아이스테시스가 어떠한 의미작용이나 대상의식도 전제하지 않는 순전히 감각적이기만 한 자극의 수용을 뜻하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스테시스란 체험의 매 순간 일회적인 것으로서 새롭게 일어나는 감각의 근원적 특성을 지칭하는 말일 뿐이다. 돌리마운트 해변에서 아름다운 한 소녀를 만났을 때 디덜러스는 이러한 존재론적 진실에 눈뜬다. 제임스 조이스는 디덜러스에게서 일어난 변화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녀의 이미지는 그의 영혼 안으로 영원히 들어와 버렸으며 어떤 말도 그 황홀경의 성스러운 침묵을 깨트리지 않았다.” 아름다움이 자신을 압도해올 때 우리는 불현듯 모든 것이,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낯설어져 가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 낯섦을 느끼는 자신은 누구인가? 그것은 타성에 젖은 자기이다. 익숙한 일상에 젖어 있는 자기만이 그 무엇을 낯설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갑작스레 찾아온 아름다움으로 인해 모든 익숙한 것들이 절대적인 무의미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막연하고도 절실한 불안에 사로잡히게 된 자기이기도 하다. 불안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이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름다움의 감각으로 인해 더 이상 과거에 머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살/몸 존재론은 하이데거의 철학적 한계에 대한 각성에서 출발한다. 만약 존재론적 진리의 문제에서 아이스테시스가 로고스보다 더 근원적이라면 존재론은 오직 감각의 근원적 처소로서의 살에 대한 엄밀한 성찰을 통해서만 온전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하이데거는 살의 존재론적 의미에 관해 거의 아무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는다. 살/몸 존재론은 하이데거가 침묵한 곳에서 그가 시작한 존재론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오직 살/몸 존재론을 통해서만 그 온전한 의미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 현존재의 근원적 존재 방식은 실존이다. 실존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살/몸 존재론의 관점에서 보면 실존이란 감각의 근원적 처소로서의 살에게서 일어나는 감각에 의해 현존재가 매 순간 이중의 낯섦을 겪게 됨을 뜻하는 말이다. 하나는 모든 존재(자)의 근원적 낯섦이다. 현존재는 만나는 모든 것들을 그 근원적 낯섦 가운데서 발견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은, 심지어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하게 여겨지는 것마저도, 실은 오직 낯선 것으로서만 발견된다. 감각이 매 순간 새로운 것으로서만 일어나기 때문이며, 또한 감각 없이 알려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자기로 존재함의 근원적 낯섦이다. 체험의 매 순간이 현존재에게는 새롭게 일어난 감각과의 조우이다. 이러한 조우 속에서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 역시 새롭게 일깨워진 것으로서 만나게 된다. 현존함이란 감각에 의해 낯설어진 자신과의 부단한 만남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몸이란 그러한 자신이 고립된 실체로서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의 곁에 있는 것으로서 거기 있는 것임을 알리는 존재론적 근거이다. 살/몸 존재론의 관점에서 보면 실존은 살/몸으로 현존함이 자아내는 현존재의 근원적 존재로서의 곁에-있음 외에 다른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실존이란 황홀경의 성스러운 침묵과도 같다. 아이스테시스, 즉 그 무엇을 순연히 감각적으로 받아들임의 체험이란 감각의 장 안에서 그 무엇과 언제나 이미 하나인 자로서 자신을 발견하며 일어나는 감정의 고양과 같기 때문이다. 디덜러스가 돌리마운트 해변에서 아름다운 소녀를 보며 경험한 것처럼 그 고양된 감정은 황홀할 뿐 아니라 성스럽다. 본질적으로 형언할 수 없는 것이며, 그럼에도 우리 존재의 가장 은밀한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 편집자의 말 사람들이 물었다. “우리는 과연 존재하는가?” 데카르트가 답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존재는 언제나 우리의 물음거리였다. 굳이 데카르트 같은 위대한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모두 우리 존재에 대해 질문을 한다. 종종 그것이 사춘기의 열병 혹은 모두가 거쳐 가는 성장통 따위로 폄하되곤 하더라도, 그것이 존재에 대한 궁극적인 물음을 던지는 인간 본성에서 기인한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실로 우리는 수 세기 동안 끊임없이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졌고, 그러한 질문들은 위대한 이들의 답변을 낳았다. 그러나 그 답변은 언제나 우리의 궁금증을 만족시켰던 적이 없기에 우리는 그 질문을 이어 나가야 한다. 여기 이 책은 한 철학자가 그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처절히 성찰하고 부단히 사유한 결과다. 그 답변은 하이데거로부터 시작하여, 우리의 살/몸을 통해 펼쳐진다. 사람들이 물었다. “우리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한상연이 답한다. “우리는 육화된 정신으로 존재한다.” 많은 철학자는 우리의 본질이 정신일 것인가 육체일 것인가에 관해 논쟁을 벌였다. 우리는 ‘테세우스의 배’의 문제를 잘 알고 있다. 만약 우리의 육체가 우리의 본질이라면, 점점 인공장기로 대체되는 우리는 언제까지 우리고 언제부터 우리가 아닐 것인가? 버려진 장기와 인공장기 중 어떤 것이 ‘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반대로 만약 우리의 정신이 본질이라면 서버에 업로드된 데이터로서의 정신과 죽어가는 육체 중 어떤 것이 ‘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들은 모두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질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우리가 육체도 정신도 아닌 육화된 정신으로서 존재하는 까닭이다. 그 둘을 분리하거나 둘 중 하나로 우리를 정체화할 수 없기에 우리는 논쟁에 시달리는 것이다. 즉, 우리의 본질은 육체이면서 동시에 정신인, 육화된 정신으로서의 현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감각함으로써 사유할 수 있고, 인지함으로써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며 오로지 감각함으로써만 우리는 육화된 정신으로서의 자신을 일깨우고 감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우리의 존재에 대한 물음에 대해 ‘우리는 육화된 정신으로서의 현존재’라는 답변을 준다. 끝없는 질문의 답을 찾고자 한다면, 이 책은 그 길을 알려 주는 하나의 퍼즐 조각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