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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 세종
태종 이방원 …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한 불행한 아들 원경왕후 민씨 … 공평하게 사랑하지 못한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 … 국모가 된 죄 왕자 이도 … 세종대왕의 어린 시절 두 사람의 형 … 양녕대군과 효령대군 양녕대군 vs 충녕대군 … 세자 책봉 정책 왕위 선위 … 경복궁의 주인이 바뀌던 날 세종과 태종 … 동시대를 다스린 두 사람의 왕 왕이 되지 못한 형들 …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의 이후 2. 전문가의 시대 황희 정승 … 명재상의 진실 맹사성 … 소를 타고 다니는 재상 허조 … 제3의 정승 안숭선 … 바람의 도승지 장영실 … 조선의 시간을 발명하다 이천 … 또 한 사람의 기술자 박연 … 조선의 음악을 만들다 오례의 정리 … 조선의 정체성을 만들다 훈민정음의 창제 … 조선 고유의 문자를 만들라 훈민정음 프로젝트 … 성삼문과 신숙주, 젊은 두 천재 단짝 집현전의 설치 … 지혜로운 자들을 한데 모으다 용인술 …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마침내 꽃이 되었다 3. 빛이 강할수록 어둠도 짙은 법 세종의 건강기록부 … 낫지 않는 눈병, 그리고 임질의 논란 사대주의의 병폐 … 열을 잘 한다 해도 하나를 잘 하지 못한다면 세종의 YES맨 … 도승지 조서강, 간신인가 충신인가 세종의 여인들 … 혜빈 양씨와 세종의 비빈들 멧돼지와 귀공자 …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집현전 … 세종의 아이들 4. 선량한 독재자의 그림자 세종 승하 … 선량한 독재자가 떠나간 후 8공자의 강성 … 메뚜기 왕자들의 번성과 비극 수양대군의 한 … 세종 이후의 인재들의 행방 부서진 세종의 유산 … 조선 시대 최대의 골육상쟁 세종은 조선이다 … 후세의 사람들, 세종의 시대를 논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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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황희가 저지른 잘못은 적지 않았다. 아직 죄를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을 쓸 만한 인재로 보고, 굳이 추천한 일 등으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 외에도 아들들이 궁궐의 금붙이를 훔쳐내고 기생에게 선물했던 일로 망신살이 뻗치기도 했다.
언제나 청렴하고 가난하고 너그럽게 살았다던 황희의 이미지가 와장창 부서져 가는 일화들이다. 황희의 잘못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어지지만, 어쨌든 황희는 상상했던 것만큼 완벽한 인물은 아니었다. 세종은 어째서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황희를 정승으로 삼아 중용했을까? 세종이 아무리 효자라고 해도, 태종이 황희를 쓰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해도, 자신에게 아무 소용없는 사람을 곁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황희 정승의 능력은 어떤 것이었을까? 고맙게도 이 일은 세종 자신이 대답을 내려주고 있다. 세종 13년 9월 8일, 세종은 도승지 안숭선과 함께 대화를 나누던 중, 황희와 그 외 재상들의 이야기가 화제로 떠올랐다. 도승지는 요즘의 청와대비서실장과 같은 관직이라 생각하면 되는데, 안숭선은 일 만들기 좋아한다는 점에서 어딘지 세종을 닮은 인물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는 4년 가까이 도승지로 지냈고, 때로 세종은 마음 깊은 곳의 이야기도 털어놓기도 했다. 이때 안숭선은 황희의 장점을 다음과 같이 평했고, 세종도 여기에 동의했다. “정사를 의논하는데 있어 깊이 계교하고 멀리 생각하는 데 황희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점은 문종 2년의 실록에 실린 황희의 졸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관후하고 침중하면서, 풍후한 자질과 총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일을 의논할 때 공명정대하며 원칙을 살리는 데 힘을 썼다는 평가가 실려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거시적인 시각을 가진 것이야말로 황희의 진정한 능력이었다는 소리이다. 세종 시대의 정치는 왕이나 누군가가 절대적인 권위를 발휘하지 않았다. 왕권이 약했다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왕과 신하들은 저마다의 의견을 제시했고, 오랜 논의를 거쳐 그중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골라 결정하는 시스템이었다. 세종이 극단적인 고집을 부리는 경우는 양녕대군의 일 정도였지, 나머지는 신하들의 의견을 널리 수용했다. 말하자면 토론식 정치였던 셈인데, 이는 자칫 엉뚱하게 흘러버릴 위험성이 있었다. 어떤 문제를 놓고 여러 사람들이 자기 좋을 대로 이야기하다 배가 산으로 간 경험은 누구나 겪어봤을 것이다. 이 때 필요한 것이 토론의 전체를 파악하고 곁가지를 쳐내어 배의 방향을 정하는 추인데, 황희의 재능이야말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 말도 옳고 저 말도 옳고, 부인의 말도 옳다고 말했다던 황희의 설화는 언제나 난립하는 의견들을 조정했던 그의 일면을 보여주는 예이다. ---전문가의 시대 중 "황희 정승 … 명재상의 진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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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의 시대는 조용하게 흐르는 커다란 강이었다. 무엇 하나 특별하게 드러내거나 시끄럽게 날뛰지 않았다. 그저 하나씩 하나씩, 작은 벽돌을 쌓아 만드는 것처럼 많은 준비와 단계를 거치고 먼 길을 돌아가되 그보다도 단단하게 쌓아올린 것이다. 하루하루 지내다보면 아무 변함없어 보이지만, 어느 순간에 돌아보니 커다란 건물이 완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세종의 시대의 본질이었다. 그리하여 태종의 섭정으로 시작된 치세는 어느 틈엔가 세종의 시대로 완전히 바뀌었다. …
… 뛰어난 왕자들, 빼어난 인재들, 그리고 수십 년 단위의 프로젝트들이 맹렬하게 돌아가던 세종의 시대, 이 모든 것이 존재하고 굴러갈 수 있었던 것은 위대한 왕 세종이 있었기 때문이다. 왕자들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강한 끈으로, 신하들에게는 유능하고 열성적인 상사로, 이 시대 사람들의 강렬한 개성은 세종의 조용한 카리스마와 힘을 통해 하나로 묶였다. … 조선왕조의 절대군주 세종 왕자의 난을 일으킨 태종의 셋째아들로 태어나, 세자 양녕대군을 제치고 왕이 된 세종. 처음 왕이 아니었던 자가 왕이 되었지만, 세종이 다스리며 키워낸 조선은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상 다시없을 정도로 평화로운 태평성대였다. 이는 세종의 냉철한 성격과 카리스마적인 리더십, 꾸준한 학문에의 정진, 반상을 아우르는 인재의 등용에 기인한다. 선량한 독재자가 가고 난 후 그러나 세종의 승하 후, 이러한 업적은 후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세종이 발굴하고, 열심히 가르친 학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세종대왕의 태평성대 이후 바로 조선조 최고의 비극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세종이 살아 있을 당시는 보이지 않았던 문제점이 왕의 사후 서서히 표출되었다. 세종의 말년부터 미처 알려지지 않은, 혹은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들을 살펴본다. 그 궁금증을 파헤쳐보는 동시에, 인자한 왕이라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교활하고 독선적으로 신하들을 휘두른 또 다른 면모도 함께 살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