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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프롤로그 1988~2007, 문화의 궤적 제1장 자본주의와 문화·상품·콘텐츠 자본이라는 이름의 자유 오이코노미아, 자본의 윤리 문화의 상품으로의 전화 다국적 콘텐츠랜드 제2장 콘텐츠 시대의 인문정신 세계화와 문화의 운명 문화+콘텐츠의 시대 인문 환경의 변환 97 윤리적 개입 제3장 문화 콘텐츠 담론과 한국의 인문학 산업 신소재로서의 문화 콘텐츠 한국 문화, 콘텐츠 산업이 되다 콘텐츠 시대의 인문교양과 인문교육 인문학의 미래, 미래의 인문학 제4장 콘텐츠 시대의 인문적 저항과 교육 콘텐츠 새로운 매체 문명과 교육 콘텐츠 문화 콘텐츠의 정화와 교육 콘텐츠 동아시아 문화의 미래와 교육 콘텐츠 전통 문화 교육과 스토리텔링 콘텐츠 제5장 동아시아 문화의 탈식민화와 혼종 동아시아 문화 속에서 아시아-되기 동아시아문화 담론과 탈식민화 미국과 중국의 사이에서: 한자문화권과 제3의 길 창조적 혼종의 길, 검고도 흰 아시아 에필로그 자본에서 인문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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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결정을 내릴 때 우리는 과연 가치중립적이기만 할 수 있을까? 생산과 분배의 과정은 초월적 원리가 논리적으로 작동하는 기하학적 과정이라기보다 인간이라는 불확실하고 모호한 존재들이 수행하는 욕망의 타협 과정이다. 따라서 기호적(symbolic) 작용이 아니라 수행적(performative) 과정이다. 결국 경제적 결정은 누군가의 이익을 더 많이 고려하거나 무시하지 않을 수 없으며, 경제 규칙은 규제적이면서도 동시에 요청적이다. 그렇다면 그 결정은 무엇을 근거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인가? 아니면 선험적인 도덕 목표인가? 경제 행위는 결국 어떤 심급에서건 윤리 판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심지어 오직 윤리적 결정을 통해서만 자기정당화를 달성할 수 있다.
다른 하나의 놀랄 만한 특징은 현대 경제학이 의식적으로 자신에게 부과하고 있는 ‘탈윤리적(non-ethical)’ 성격과, 크게 보아 윤리학의 한 분과라고 할 수 있는 현대 경제학의 역사적 진화 사이에서 나타나는 대조이다. 이른바 ‘현대 경제학의 시조’로 불리는 애덤 스미스는 글라스고 대학의 도덕철학 교수였다. 더구나 경제학의 주제는 오랫동안 윤리학의 한 분야 같은 것이라고 여겨졌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꽤 최근까지 경제학을 ‘도덕철학 우등졸업시험’의 한 분야로서 가르치고 있었다는 사실은 경제학의 본질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를 보여주는 한 예이다.(아마티아 센, 박순성?강신욱 역, ‘제1장 경제행위와 도덕감정’, 『윤리학과 경제학』, 한울아카데미, 1999, 16~17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이래로 재산을 증식하고 분배하는 문제는 그 자체 독립적인 이윤 활동이 아니라 전통적인 윤리 활동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말하자면 경제는 정의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그리고 재화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어떤 정의가 요구되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결국 인간의 본질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인성론, 그러한 본질을 공익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를 탐구하는 실천론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다. 이 모두가 윤리학의 영역에 속한다. 따라서 사적 욕망과 공공의 선을 일치시키려는 모든 노력은 윤리적 관점에서 고찰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인간학적 전제를 수반하게 된다. 경제학과 인문학은 별도로 구분될 영역일 수 없었다. ---「1장 자본주의와 문화·상품·콘텐츠」 국제적인 지적 재산권 협약은 저개발국가의 선진국에로의 문화적 예속을 조장한다. 말하자면 지적 소유권을 통한 선진국의 지식 독점은 전쟁 없는 식민 지배의 또 다른 유형이다. 아울러 소수 선진국이 중심이 된 지식의 상업화는 교육기관이나 교육산업의 수출을 통하여 저개발국가의 교육 문화 근간을 흔들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이 가능한 것은 지적 창조물을 상품처럼 표준화시킬 수 있는 물적 대상으로 간주하려는 경제 편향적 시각 때문이다. 지적 가치를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여 그것을 교역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시장 만능주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국제적 교역망에 무방비로 노출시키려는 자유무역주의, 그리고 이 모두를 통섭하며 세계화를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가 지적 특허권의 세계적 확산을 부추기고 있다. 인문주의의 입장에서 지적, 정신적 가치가 소유 가능한 재산으로 등재된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인문학 혹은 인문 지식이 공업 기술이나 식물 종자처럼 이리저리 팔려 다니는 상품으로 전화되었다는 것을 법적으로 확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문화적 보호 장벽이 취약한 중진국이나 후진국의 경우 미구에 쏟아져 들어올 선진국의 지적 산업을 방어해 낼 독자적 능력이 열약하다. 때문에 물질문화를 양보했듯 정신문화 역시 서구적으로 변형되는 것을 지켜봐야만 할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서구의 고급문화보다는 대중적인 콘텐츠로 상품화된 저급 문화의 집중 투하가 발생할 것이다. ---「2장 콘텐츠 시대의 인문정신」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제도권 인문학자들이 이상의 대학 시스템의 피해자면서 공모자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대학의 제도적 보호 장치 안에 존재함으로써 다양한 혜택을 누리면서도 스스로가 대학 세계의 책임 있는 구성원이라는 주인의식은 미흡한 경향이 있다. 따라서 자신의 개인적 학문 생활과 대학 교육제도에 대한 반성을 실존적으로 분리시키는 모순적인 이중성을 드러낸다. 즉, 대학을 비롯한 사회 전체의 반인문적 상황에 대한 비판의식을 자신의 학문적 삶으로부터 배제시킴으로써 인문학자로서의 사회적 ‘인식’은 학문적 ‘관심’과 분리되고 만다. 이러한 인식과 관심의 괴리는 인문학자의 학문을 사회 현실로부터 소외시키고 스스로의 삶을 탈역사적인 무균실 안에 고립시킨다. 인문학의 존재 근거는 이윤과 효율의 대척점에 있다. 이윤과 효율이라는 자본 논리는 인문학이 추구하는 가치를 은폐하는 대표적인 비실존이다. 따라서 자본에 의한 가치전도를 자신의 학문적 반성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한 인문학자의 실존은 인문적으로 불완전하며 그들이 자기충족적인 길을 걸을수록 그 불완전성은 존재론적 불안으로 전환될 것이다. 따라서 인문학자들이 보편적 증상으로 지닌 사회적 피해의식은 자신의 인문적 사명감을 실천으로 관철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신경증적 방어기제다. ---「3장 문화 콘텐츠 담론과 한국의 인문학」 단기간 내 회수를 목적으로 한 기업의 산업적 투자는 회전율이 빨라야 하므로 채산성은 손익 분기점을 넘는 속도에 따라 가변적이다. 이는 이 투자가 창출할 수익 구조가 애초 장기적인 사이클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문화에 대한 투자는 국가에 의한 공익적 투자여야 하는데, 그 대표적인 분야가 회전율이 가장 느린 교육 분야다. 특히 투자와 회수 사이클이 극도로 긴 인문 문화 교육은 산업 논리와 어울릴 수 없다. 따라서 인문 문화에 대한 교육 콘텐츠 개발 사업은 국가 규모의 공익 차원에서 수행되어야 하며, 적용 대상이 문명권 단위의 초국가적 범위로 이행될수록 더욱 그럴 수밖에 없게 된다. 이처럼 한자?한문 문화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문화에 대한 교육 콘텐츠 개발은 극도로 강화된 공익 논리에 의해서만 가능해지는데, 이때 공익이란 국가 이익이면서 동아시아 전체에 예고된 정치 경제적 갈등을 중재하고 완화시킨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전체의 이익이기도 하다. 예컨대 독일과 프랑스의 공동교과서 개발에 고무돼 시도된 한국과 일본의 공동 역사연구가 그러한 한 사례다. 무엇보다 한국이 한자와 한문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문화 교육 콘텐츠를 통해 적어도 중국과 일본, 그리고 일부 동남아국가들과 문화적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이런 선상에서 하랄트 뮐러(Harald Muller)는 중국을 중심으로 미구에 들이닥칠 국가주의 열풍을 감당할 가장 슬기로운 방법이 문화적 공존[다자주의]에 있음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국가주의는 아시아에서 폭력적이고 또 가장 위험한 이데올로기이다. 하지만 국가주의의 종착역은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아시아판 1914년’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치명적인 외세의 개입과 함께 파멸의 화염이 아시아 대륙을 뒤덮을 것이다. 아시아가 이 비극을 피할 수 있기를, 그리고 서구가 보여준 두 모범인 다자주의와 민주화 추진에 열중할 수 있기를 바란다.(하랄트 뮐러, 이영희 역, ‘아시아는 어디로 가나?’, 『문명의 공존』, 푸른숲, 2000, 182면) ---「4장 콘텐츠시대의 인문적 저항과 교육 콘텐츠」 문화적 혼종에는 지배/복종 관계나 식민/피식민 관계에서 유발될 폭력적 긴장이 소거되어 있다. 때문에 주체에 과도하게 집착했던 근대 주체가 문화적 대결과 경쟁에 에너지를 고갈시켰다면, 혼종의 주체로 등장할 아시아인들은 무모한 힘의 낭비를 ‘차이의 향유’로 승화시킬 것이다. 차이의 향유가 왜 하필 아시아인에게 가능한가? 지나치게 주체화된 서구인들이 탈근대로서 차이를 주장할 수는 있지만 주체화의 온실 밖으로 나오는 실천을 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즉, 서구 주체가 차이의 존재인 아시아인이 되기란 아시아인이 서구 주체가 되기보다 더욱 어렵다. 아시아는 서구 근대를 따라잡으려 노력하며 서구적 주체를 내면화해 왔다. 때문에 자기 본질이 아닌 것을 자기로 규정하는 모순은 아시아인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화 콤플렉스의 원인이다. 그리고 완벽히 서구인이 될 수 없는 아시아인은 주체인 서구에 대해 스스로를 타자로 경험하며 자신의 존재 물음을 증상화시키는데, 실은 이런 과정을 통과해야만 주체의 본질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신경증적 증상들은 존재론적 자기질문이기도 하다. 물론 서구인들도 그러한 존재 질문을 던질 수 있지만 자기 문화 전체를 허구[무·연기·공]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실천적 이해를 하기 쉽지 않다. 그들의 존재 질문은 자신의 존재론적 토대, 즉 자신의 주체성의 가능 근거로서의 의미의 세계까지 논파할 수 없다. 자신의 문화적 콤플렉스를 증상으로 만들고 이를 존재론적 질문으로 전환하며, 존재론의 최종 목적인 주체가 비자성(非自性), 비의미(非意味)의 무로 산화되는 광경을 목도할 수 있는 존재는 아시아인이다. 따라서 아시아인들은 아시아인 특유의 놀라운 차이의 감각을 통해 자신을 서구인과 구별한다. 이 독특한 문화 감각은 비극적 식민 체험, 타자로서의 오랜 존재 탐구, 그리고 주체와 의미를 타자성과 무의미로 대체시킬 수 있었던 깊은 전통 등이 결합된 결과다. 물론 서구인들도 그러한 감각을 획득함으로써 아시아인-되기가 가능하다. 하지만 차이의 이해에서 차이의 향유까지 나아가는 것은 서구가 걸어온 주체화의 여정만큼이나 지난한 대가를 요구한다. 차이의 향유란 개체 사이의 차이가 절대 평등의 세계에서 동등해져 소멸해버린다는 깨달음, 그리고 개체 스스로를 주체로서 집착하는 욕망이 가립적(假立的)이라는 자각을 수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깨달음과 자각은 욕망의 메커니즘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정신분석이나 존재를 언어에 대한 해석학적 해명으로 환원하는 현상학적 실존론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혼종과 차이를 오염이나 위협이 아니라 존재론적 향유로 받아들일 수 있는 아시아인의 독특한 위상은 그들을 근대 주체의 낙오자로 만들었던 아시아 고유의 낙후성, 혹은 정체성(停滯性)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이야말로 문화의 지독한 역설이다. 아시아는 서구 근대 주체에 의해 타자화되기 이전 이미 자신을 타자로 간주하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아시아의 정체성이 주체적 권력으로 응집되기 어렵도록 형성되어 왔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타자를 지배하는 주체화 권력 형성 과정이 더디거나 모호했던 아시아 문화 특유의 탈자성(脫自性)은 이제 불구성이 아니라 서구 문명의 한계를 파열시키고 혼종을 가능케 할 다른 가능성으로 정립되고 있다. 때문에 아시아 문화가 서구 근대 주체의 오류를 답습해 자본화와 시장화에 집착하는 것은 역사적 자기 망각으로서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다시 말해 아시아의 위대함은 아시아의 콤플렉스 속에 숨겨져 있다. ---「5장 동아시아문화의 탈식민화와 혼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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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이 문화를 통제하는 시대, 자본에서 인문으로
1. IMF 상황에서 콘텐츠 담론의 생산은 문화적으로 정당했나? 1998년 경제 위기는 대한민국 전체에 심리적 공황을 유발했는데, 회고해보면 이는 우리나라 경제가 세계화 질서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외설적 추문이었다. 금융자본주의란 현금 거래를 무한히 유예하는 신용의 상징 질서를 통해 유지되는데, 이러한 상징적 놀이에 가담하려면 패를 읽고 돌릴 줄 아는 ‘도박사의 마음’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90년대 한국 경제의 현실을 간단히 조망하면 당시(김영삼) 정부에겐 그런 도박사의 마음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 대재앙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김대중 정부의 문화에 대한 태도다. 당시 정부는 고효율의 날렵한 중소기업, 즉 신기술을 장착한 속성형 벤처 기업 육성에 집중하며 문화를 테크노크라트적 심성으로 호출해냈다. 당시 벤처 기업의 중핵을 디지털 기술 부문이 담당하고 있었는데, 디지털화될 내용물에 목말랐던 벤처 기업인들은 자신들의 사업 내용(콘텐츠)을 채워줄 재료들을 정부에 요구했고 이 신호가 즉각 문화계에 전달됐던 것이다. 게임 및 영상 연예 사업의 수익을 창출하기 위한 내용물로서 문화가 호명된 순간이었다. 심형래 감독을 신지식인 1호로 내세운 당시 정부의 문화 인문 정책의 결과는 문화의 산업화였다. 현대적 문화 개념 자체가 중세의 특권적 귀족문화가 소멸하면서 순수 예술이나 순수 인문학을 대중적으로 옮겨 담는(轉寫) 과정에서 발생했고, 따라서 현대사회의 문화란 암묵적으로 대중문화 혹은 시민문화임엔 분명하다. 그러나 대중들을 교양 있는 시민, 혹은 미적 심미안을 갖춘 주체로 구성한다는 계몽주의적 이상은 문화가 영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시장 논리와는 근원적으로 길을 달리한다. 결국 김대중 정부는 현대문화의 대중성, 혹은 대중적 본질을 상업성으로 오독한 셈이다. 문화 영역을 산업의 틀로 재구성하며 진행된 당시 정부의 문화 담론이 바로 콘텐츠 담론이다. 이후 수년간에 걸쳐 활성화된 문화콘텐츠 담론은 ‘더 이상 경제적 심급을 벗어난 고매한 인문 영역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학문적 우상파괴 작업으로 발전했다. 인문학 학과들의 폐과나 콘텐츠 관련 학과로의 변경, 경제적 비효율성의 잣대로 자행된 대학 구조조정, 선택과 집중의 논리로 인문학자에게 강요된 생산성의 패러다임 등등. 결과적으로 문화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던 인문학자들은 평범한 산업 역군으로서 굴욕을 당하거나 세상에 쓸모 있는 상품을 통해 자기 존재를 증명해야만 했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London: verso, 1992, p.25)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신자유주의자들과 많은 것을, 사실상 거의 모든 것을 공유하고 있다.-본질적인 요소만 빼면” 사회의 경제적 조직화라는 차원에서만 보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놀랍게 서로 동일하다는 의미다. 때문에 김대중 정부가 저지른 문화정책의 실패는 경제적 효용성 측면에선 결코 실패가 아니다. 실패의 본질은 중도좌파로서의 정치적 자기정체성과 문화적 정체성 사이에 초래한 깊은 단락/심연에 있다. 당시 정부의 문화 이해는 좌파적이지도 우파적이지도 않았다. 그것은 정치의 공백, 정치력의 무능한 결핍만을 의미했다. 이는 정책적 실패보다 더 근원적인 맹목을 증명한다. 2. 노무현 정부는 왜 기술지배적 문화정책을 극복하지 못했나? 21세기 벽두를 장식한 이슈는 단연코 Y2K 바이러스였다. 일종의 테크노 포비아(기술에 대한 공포)에 근거한 이 소동은 역설적으로 테크놀로지의 우월함에 대한 부정적 승인이기도 했다. 때문에 이 시기를 통과한 젊은이들은 자신들을 T-2 혹은 T-3 세대라고 불렀다. 여기서 T란 디지털 디스토피아를 다룬 영화 〈터미네이터〉의 약자다. 터미네이터의 우주가 상징하는 것은 첨단 기술에 대한 경계이면서 동시에 첨단 기술을 장악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강박적 인식이다. 이로 인해 디지털 산업은 외경의 대상이자 포획해야만 할 ‘현대성’의 중핵으로 새롭게 자리매김되었다. 당연한 결과지만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 문화 정책을 축자적으로 반복했다. 문화는 콘텐츠 산업의 원천 기술을 제공하는 공급원으로 해석됐고, 넓은 의미에서 산업화된 문화 영역에서 인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은 극도로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인문학을 기업 시각에서 조망하는 시선은 노무현 정부에서 그 물꼬를 터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문제를 돌아보면 ‘가장 진보적 정부가 가장 보수적 정책을 택한다.’는 현실정치의 역설과 만나게 된다. 예컨대 김대중 정부의 콘텐츠 기술 장려 선언들은 위기 담론으로서 절박한 자기 근거를 갖고 있었다. 노무현 정부는 경제 위기를 돌파한 이후에 등장한 진보 정권이었음에도 이전 정부가 조성한 위기 담론 밖으로 단 한 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문화콘텐츠 담론은 인문 담론을 가장하지만 철저한 산업 담론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산업 영역이 인문학 영역까지 문화라는 보자기에 싸서 경제 무대(시장)로 끌어낸 이유는 무엇일까? 글로벌 경제 체계 속에서 전파의 확장성과 지속성 그리고 파생적 효용성에 있어 새롭게 발견된 상품이 바로 문화상품이었기 때문이다. 상품이 디지털 기술과 결합하여 문화라는 형식을 띠면 이동 속도와 감염적 전파력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할 뿐만 아니라 생산지 문화가 소비지 문화를 근원적으로 지배한다는 이점까지 누릴 수 있다. 단적으로 한류로 포장된 상품들은 단지 상품으로 소비만 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지역문화 전체를 브랜드로 변환시키는 놀라운 효과를 창출하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TV 드라마 〈겨울연가〉와 〈사랑이 뭐길래〉가 불러온 그러한 효과에 눈멀어 인문의 고유한 가치를 자각하지 못했다. 3. 이 책은 1998년에서 2007년까지의 문화 정책을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항으로 비판한다. 이 책은 민주화가 명실상부하게 달성된 10년이 역설적이게도 문화적 차원에서는 서구 세계화 세력의 정신적 무기인 신자유주의에 굴복하는 과정이었음을 반성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역설이 가능했을까? 경제 부면을 따로 독립시켜 정치 문화 부면과 별도로 다룰 수 있다는 단순 소박한 실용주의, 그리고 그런 실용주의를 합리화한 국력에 대한 자만 혹은 과거에 대한 오만한 망각 등이 그 원인으로 떠오른다. 노무현 정부가 한미 FTA를 성급히 추진한 데에도 이런 실용적 급진성과 정치 문화적 미성숙의 기묘한 결합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이상의 이유로 이 책은 노무현 정부 때 마땅히 진행되었어야 할 문화와 인문 현상에 대한 사회 철학적 성찰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1장에서는 문화가 상품으로 소환되는 과정이 자본이 사회를 전유하는 기본 과정이며 산업 부면이 상부구조를 ‘비정치화된’ 상징계로, 즉 생산구조 내 서열 속 한 구역으로 할당하는 과정임을 설명했다. 이는 상품이 문화를 모방하거나 소재로 끌어들이는 것을 벗어나 상품 스스로가 문화로 등록되는 경지로 나아간다. 문화콘텐츠 담론은 바로 이 과정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장이다. 2장은 세계화 질서의 총아로 등장한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밝히고 이 경제지상적 담론이 인문정신을 훼멸한 경위를 살폈다. 특히 IMF 위기를 겪으며 태동한 다양한 산업 담론들이 문화라는 창구를 통해 인문학을 문화 산업 속에 흡수해 들이거나 어두운 수장고에 보존할 화석으로 처리한 배경에 대해 따져보았다. 이 과정에서 중심 문화와 주변 문화 사이에 빚어지는 문화 종속화의 위험성에 대해 거론했다. 3장은 한국에서 콘텐츠 담론이 창조되고 유통되어 인문학의 주류 담론으로 정착되는 과정을 살폈다. 이 과정은 1장과 2장에 의해 수립된 논리적 안목을 통해 바라볼 때 그 진상이 체계적으로 이해된다. 3장 후반부에서는 미래의 인문학이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떤 방식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해 첨언했다. 4장은 산업화된 콘텐츠 시대에 인문학이 논리적 역전을 꾀할 마지막 수단으로서 교육 담론이 지닌 가능성을 타진했다. 문화 콘텐츠의 명분으로 자행된 반인문적 흐름을 내부에서 단절시키고 콘텐츠 기술을 인문적으로 전화시킬 명분은 교양 교육 개념의 강화 이외에서 발견될 수 없다. 특히 동아시아 문화 교육 개념은 산업적 콘텐츠 담론에 정치 문화적 밀도를 더함으로써 경박한 경제주의를 분쇄하며, 담론을 확장시킴으로써 디지털 기술, 콘텐츠 산업, 아시아 정체성, 문화적 탈식민 전략 등의 논의를 한 가지 문제의식으로 회집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 5장은 문화콘텐츠 담론을 대체할 주류 담론으로서 동아시아문화 담론의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살폈다. 동아시아 전통인문학이 동아시아 문화권 형성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 이를 통해 서구 근대 주체가 초래한 폐단을 수정할 다른 길을 모색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했다. 근대 주체가 신화처럼 설정한 의미[주체]화의 강박관념을 벗어나 탈주체와 혼종의 가치를 재설계할 수 있는 존재는 근대 주체의 타자였던 아시아이며, 아시아는 스스로 망각한 인문 전통을 회복하고 재창조함으로써 탈식민될 뿐 아니라 인종과 성의 경계를 넘어서는 무의 존재론[탈근대]을 수립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 상상의 공동체는 산업 담론인 문화 콘텐츠 담론으로부터 인문학을 구출하기 위해 시작한 이 논의가 장대한 문화 투쟁과 연관되어 있음을 상징한다. 4. 인문학의 전략적 생존 : 교육 담론으로서 동아시아문화 담론의 가능성을 묻다. 이 책은 산업 담론이 문화(콘텐츠) 담론을 매개항으로 삼아 인문 담론을 잠식하는 것에 원칙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산업이 문화를 통해 인문 영역을 시장으로 소환해내는 것은 운명에 가까우며 따라서 이런 소환에 무조건 불응하고 거절하는 것은 근본적 대안이 될 수 없다. 최종적 대안은 대안 담론의 적극적 생성에 있다. 콘텐츠 담론에 맞설 담론은 저항 담론이면서 위기를 기회로 역전시키는 전략적 담론이어야 한다. 문화콘텐츠 담론은 그 기원적 속성상 교육 담론이다. 문화콘텐츠가 아무리 산업적 상품으로 전화될지라도 그 형식적 포장은 계몽적 교양 교육으로서의 탈을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상품성을 위장하기 위한 가장이라 해도 문화콘텐츠가 교육적 형식을 직설적으로 배반하지 못하는 한 인문학이 콘텐츠시대에 전략적으로 살아남을 가능성은 남는다. 그것이 바로 교육 담론의 영역이다. 콘텐츠시대에 인문학의 생존 전략은 대안 담론의 적극적 생산과 이를 통한 담론적 저항(분쟁) 공간의 창출에 달려 있다. 하지만 대안 담론으로서 인문학의 교육 담론은 교육 영역이 보유한 ‘전통적 계몽성’을 과도적 전략 지점으로만 활용해야 한다. 즉 온전히 상품으로만 해석되지 않는 문화콘텐츠 개념의 잉여로서의 교육콘텐츠 개념을 인문학의 저항선으로 활용하되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문화콘텐츠 담론을 교육적으로 재해석하면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로 상징될 서구 중심의 주인 담론에 저항하기 위한 대안 담론이 동아시아문화 담론이다. 동아시아문화 담론은 경제 담론의 형식 안에 정치 담론의 의도를 감추고 있는 문화콘텐츠 담론의 ‘정치성’을 발가벗기고 그 안에 내재한 근원적 적대, 즉 서구와 아시아, 선진국과 제3세계, 주체와 타자, 지배자(주인) 담론으로서의 식민 담론과 탈식민 담론, 자본의 무한 증산으로서의 근대와 탈자본화로서의 탈근대 사이의 적대를 명료화한다. 따라서 우리 세기에 동아시아란 어떤 존재인가, 혹은 존재여야 하는가를 묻는다는 것은 인류문화의 위기가 만든 증상일 수 있다. 만약 아시아의 정체성이 전혀 새롭게 규정된다면 서구적 문화 패러다임 역시 수정되어야 하고 이는 인류문화의 제3의 길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이를 응집된 주체화의 포기, 능동적 타자되기, 무의 공백으로 자신을 규정할 수 있는 아시아의 독특한 존재론적 가능성 등으로 제시하며 논의를 마무리하고 있다. 5. 콘텐츠를 초과하는 메타 콘텐츠의 생산 가능성 이 책의 저자는 마지막 5장을 통해 자신이 주장한 콘텐츠 담론의 논리적 최종 단계를 메타 콘텐츠의 생산으로 암시하며 마치고 있다. 이를 살펴보자. 이 책은 다음의 논리적 발전 단계를 따르고 있다. ① 문화를 상품으로 독해하는 문화콘텐츠 담론 단계(문화를 경제화시킨 정치 담론) → ② 문화콘텐츠 담론을 교육 담론으로 전화시키기(문화를 탈경제화시킨 탈정치담론) → ③ 교육 담론을 동아시아문화 담론으로 수렴하기(문화를 탈경제화시킨 정치 담론). 결국 저자는 첫 단계를 탈경제화로 지양하며 두 번째 단계를 재정치화로 지양한다. 다시 말해 문화는 정치를 통해 콘텐츠(산업/시장) 담론을 궁극적으로 이탈한다. 그러므로 모든 문화 담론은 정치 담론이며 정치적으로 왜곡된 문화 담론은 정치적으로만 교정된다. 따라서 동아시아문화 담론은 한국 인문학이?문화콘텐츠 담론으로 상징될 제1세계 중심의 제국 담론인?자본의 산업 담론을 극복할 대안 담론으로서 정치 담론인 셈이다. 동아시아문화 담론은 어떻게 일반적 콘텐츠를 능가할 메타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가? 첫째, 서구의 전형적 주체화 양식을 위배하면서다. 아시아는 서구 문화의 근본 형식인 주체 중심적 사고를 복잡하게 만들거나 오작동시킴으로써 마침내 청산할 수 있다(타자로서 다르게 생각하기). 둘째, 서구 문화 양식을 극단적으로 전유함으로써 그것을 초과해 활용한 뒤 기각한다(서구 생활 양식의 패러디적 희화화). 셋째, 식민주의의 원리인 주체-타자 공식을 역전시킨 뒤 주체의 자리를 자발적으로 내려놓는다(문화적 투쟁을 승리하면서 기권하고 자신의 보이지 않던 부분들을 새롭게 발견하되 이를 타자로 내려놓기). 이상의 과정을 수행하기 위한 전제조건들이 있다. 우선 중국이 정치 군사적 패권화를 멈춰야 하며, 일본은 아시아적 정체성으로 회귀해야 하고, 한반도는 분쟁을 평화롭게 순화시켜야 한다. 이런 창조적 해체의 매개항이 어느 세력에도 편입되지 않는 아세안 10개국의 존재, 흰 아시아인 호주와 뉴질랜드, 그리고 다시 해석되어야 할 세계문화의 증상으로서 중앙아시아 등이다. 이처럼 아시아는 상상의 공동체로 집결하여 문화 공동체를 구성하되 주체성의 관점에선 텅 빈 공백으로 남아야 한다. 즉,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되기란 정치경제적 연맹 형식을 띠며 전개되더라도 서구적 본질(EU 체제)은 거부해야 한다. 결론은 문화적 허구로 매개되는 환상[타자]적 공동체의 결성이다. 정치 경제적 심급을 경유하되 궁극엔 내러티브의 환상으로 남을 공동체의 결성 말이다. 저자는 이를 명시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아시아 소설 양식을 전제하고 있는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