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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막에서 걷기
2. 빛 가운데 걷기 3. 색채 속을 걷기 4. 간격 속을 걷기 5. 경계 속을 걷기 6. 하늘의 응시 아래에서 걷기 7. 장소의 우화 속으로 떨어지기 [해제]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제임스 터렐, 형상, 부재 |
Georges Didi-Huber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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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화는 우리의 주인공 텅 빈 장소(lieu deserte)와 함께 시작된다. (그러나 이 장소를 인물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장소는 “몸들이 제각각 저 자신을 사라지게 할 자를 찾아 나서는 처소”다. “찾는 일이 헛된 일로 끝날 만큼 충분히 넓은” “도주하는 일이 매번 헛될 만큼 충분히 넓은” 여러 등장인물 가운데서 독특하다고 할 장소의 측량사, 걷고 있는 자가 조역을 맡게 될 것이다. 이 사람은 끝없이 걷는다―이 일은 사십여 년간 계속될 것이라 한다.
--- p.9, 「1. 사막에서 걷기」 광채는 오브제의 안정적인 성질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관람자의 발걸음, 관람자가 만나는, 언제나 유일하며 언제나 예기치 못한 빛의 방향성에 의존한다. 오브제는 저기에 있는 것이 틀림없지만 광채는 와서 나와 만난다. 광채는 내 시선과 신체의 사건, 내 움직임 중 가장 미세한―또한 가장 내밀한―것의 결과다. --- p.24, 「2. 빛 가운데 걷기」 그렇다면 이 색채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이 색채의 초밀도의 물리학 원리는 어떤 것인가? 이 색채 뭉치의 무게는 얼마인가? 어떤 안료가 이 결을 만드는가? (이는 처음부터 강박적으로 제기되는 또 하나의 질문이다.) 그리고 안료가 존재하지 않는다면(누구도 이와 같은 강도의 안료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색채를 가능하게 하고 발생시키는 실체란 도대체 무엇인가? 걷고 있는 사람은 정면의 불투명한 적색이 거의 광물적 장애물로 자기 앞에 주어지는 까닭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앞의 여러 질문에 얼마 동안 꼼짝 않고 붙들려 있게 될 것이다. --- p.44~45, 「3. 색채 속을 걷기」 화가, 조각가, 건축가는 사물을 지워버릴 정도로 사물에 시각적 공간의 작업을 행하며 아마도 그러한 질문을 만들어내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안개 속에서 보이는 사물에 관해, 그리고 사물의 지지대로서의 안개 그 자체에 관해 질문하는 것을 즐겼다. 그는 가시적 세계의 각 단편에서 멀리 물러서는 무한을 보았다. 그는 대기의 색채 자체에 관해 답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래서 그는 원근법 그 자체를 지움의 법칙(loi d’effacement)에 종속시켰다. --- p.67, 「4. 간격 속을 걷기」 터렐의 작품은 극단적 단순성이 일반적으로 추측할 수 있는 지점들을 제시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즉각적이지 않다. 이는 우선 작품이 시간을 소요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친근한 가시적 공간의 여지가 기화되고 말 시간, 고요한 밀도와 시각적 장소의 권능이 자신을 내려놓을 시간 말이다. 이어서 이는 작품의 단순성이 적어도 두 사물, 서로 상충되고 상호 침투하는 두 사물 사이의 관계와 한결같이 유희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작품은 기슭에 자리를 튼다. 그늘과 빛, 직접 조명과 간접 조명, 내부 공간과 외부 공간, 시각적 성질과 촉각적 성질의 기슭에 자리를 튼다. --- p.76~79, 「5. 경계 속을 걷기」 터렐이 하늘에서 전시하는 것을 꿈꾸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1970년에 터렐은 이미 샘 프랜시스(Sam Francis)와 공동 작업으로 자신들의 비행기에서 빠져나오던 연기의 긴 흔적을 이용하여 '하늘 쓰기 작품'(Skywriting Piece)을 실현했다. 분명 그에게 하늘은 멘도타 호텔의 폐쇄된 공간의 엄밀한 (그리고 대칭적) 상응물로 주어진다. 하늘은 어마어마한 칸[piece, 스튜디오(studio)]이자 어마어마한 작품[piece, 작품(work)]이다. --- p.101~102, 「6. 하늘의 응시 아래에서 걷기」 예전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눈을 세계의 수용기로 여겼다. 그는 최소한의 눈의 운동이 색채, 지평선, 먼 곳의 감각 등 모든 것을 변하게 한다고 말했다. 터렐이 만든 사막은 세계가 항구적으로 자신을 수정하는 것을 보기 위해, 세계와 함께 자신을 수정하기 위해 세계를 향해 열린 그러한 눈의 기념비적이고 건축학적인 버전이다. --- p.112, 「7. 장소의 우화 속으로 떨어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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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철학자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이
동시대 예술을 통해 펼치는 이미지에 대한 사유 사막, 빛, 색채, 간격, 경계, 하늘, 장소라는 일곱 개의 키워드를 통해 장소와 빛에 관한 제임스 터렐의 탐구를 재구성하다! 『색채 속을 걷는 사람』은 발터 벤야민 이후 가장 탁월한 이미지 역사가이자 철학자로 조명받고 있는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독창적인 이미지 사유 체계를 음미해볼 수 있는 저작이다. 디디-위베르만이 이 책 전체에 걸쳐 다루고 있는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은 한솔문화재단이 원주에 건립한 뮤지엄 산의 제임스 터렐관을 통해 국내 독자에게도 꽤나 익숙한 작가로서, 그의 작품은 색채나 빛의 효과가 두드러져 흔히 그 특성을 색채로 꼽기도 한다. 이와 달리 색채나 빛 자체보다는 빛이 만들어내는 틀과 테두리의 효과에 주목하는 『색채 속을 걷는 사람』은 이미지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디디-위베르만의 비평 작업의 구체적 예시로서, 동시대를 대표하는 이미지 철학자다운 해석을 제시한다. 전체 7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소책자 형식의 이 저작은 각 장마다 사막, 빛, 색채, 간격, 경계, 하늘 장소라는 일곱 개의 키워드를 사용하여 제임스 터렐의 작업 세계를 재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일곱 개의 키워드를 가로지르는 핵심 키워드는 ‘부재’다. 물론 디디-위베르만이 세계 속 신의 부재를 주장한다거나 이미지 속 절대자의 부재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디디-위베르만은 부재를 현시하게 하는 이미지의 이중적 역량, 이미지의 놀이와 리듬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여왔다. 디디-위베르만에 따르면, 제임스 터렐의 작업에서 틀의 효과는 사막을 걷는 이들이 부재하는 자를 만나기 위해 만들었던 최소한의 건축적 구조를 상기하게 한다. 디디-위베르만은 이미지를 사유하는 그의 독창적인 방법론인 ‘시대착오’의 전략에 따라 이 만남을 주선하고 동시대 미술을 해석하고자 한다. 연대기의 질서를 따르지 않고 작동하는 틀이라는 이미지 체계는 시각적 출현과 사라짐의 구조 안에서 유대인의 신이건 기독교도의 신이건, 작열하는 빛을 내는 사물이건 지금 이곳에 존재하지 않으나 이곳을 걷고 있는 이들에게 응시를 강요한다. 디디-위베르만이 보기에 터렐의 작업이 만들어내는 틀은 액자도 아니고 고체의 모서리도 아니다. 터렐은 공간의 일부를 비우기는 하지만 주로 빛을 사용해서 공간의 가장자리라는 지각을 만들어낸다. 즉 그것은 부재하는 절대자와 만나는 장소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는 일이 일어나는 장소”, “보기에 사로잡히는 장소”다. 아무것도 없는 장소를 만드는 틀은 그래서 제한된 영역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되지 않는 영역, 즉 ‘무한’의 영역을 생산한다. 틀과 무한 사이의 역설이 여기에서 발생한다. 빛이 만들어낸 틀은 실제로는 관람객의 접근을 멈추게 함으로써 분리와 거리를 만들어내는 날카로운 틀이다. 디디-위베르만은 부재하는 자 자체를 문제 삼지 않고 부재하는 자에 대한 여기 있는 자들의 욕망을 문제 삼는다.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걷는 사람’이란 바로 공백 속에서 찾는 사람, 욕망하는 사람일 것이다. 우리는 이미지에 포획된 시대에 살고 있다. 차고 넘치는 이미지 시대에 이미지 철학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이미지 역사가이자 이미지 철학자로서 그동안 50여 권의 저작을 출간해왔지만, 국내에 소개된 저서는 두세 권에 불과하다. 비록 소책자 형식을 띠고 있지만 『색채 속을 걷는 사람』은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이 펼치는 이미지에 대한 사유를 음미해볼 수 있는 안내서로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특히 책의 말미에 붙은 옮긴이의 상세한 해제는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사유 체계를 전체적으로 소개해주고 있어 디디-위베르만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좋은 길잡이를 해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