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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예찬
마이클 린치 교수의 명강의 양장
진성북스 2013.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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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서문

1장 희망과 이성
회의론의 근원
이성의 공간으로서의 민주주의

2장 노예도 주인도 아니다 : 이성과 감정
놀라운 데이터
두 가지 그림
손가락 까딱하기
직관 : 척 보면 아는
이성 없다면?

3장 단지 꿈과 연기뿐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회의론
명석 판명한
회의론과 인식적 공약 불가능성

4장 이성의 종말 : 전통과 상식
이 곳에서는 원래 이렇게 한다
상식과 가정

5장 인간성의 성스러운 전통
믿음, 신념, 수용
객관성과 공통의 관점
방법 게임
질문과 대답

6장 진리와 거리의 파토스
지식의 그림
진리와 탐구
세계의 표상
진리와 인간적인 것

결론
옮긴이 해제

저자 소개 2

마이클 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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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Patrick Lynch

코네티컷 대학교 철학과 교수이자 코네티컷 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소장, 뉴잉글랜드 인문 컨소시엄 소장을 맡고 있다. 인식론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자 ‘다원주의 진리론’의 옹호자로 널리 알려진 그는 민주주의의 핵심 원칙으로서 이성과 합리성을 강조하는 저서를 꾸준히 발표하여 코네티컷 대학교에서 우수연구메달을 받았으며, 미국 국립 인문학 재단, 템플턴 재단 등에서 연구 성과를 인정받고 있다. 《사실적인: 왜 진리가 중요한가True to Life》 《맥락 속의 진리Truth in Context》 《이성 예찬In Praise of Reason》 《인간 인터넷Internet of US》 등
코네티컷 대학교 철학과 교수이자 코네티컷 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소장, 뉴잉글랜드 인문 컨소시엄 소장을 맡고 있다. 인식론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자 ‘다원주의 진리론’의 옹호자로 널리 알려진 그는 민주주의의 핵심 원칙으로서 이성과 합리성을 강조하는 저서를 꾸준히 발표하여 코네티컷 대학교에서 우수연구메달을 받았으며, 미국 국립 인문학 재단, 템플턴 재단 등에서 연구 성과를 인정받고 있다.

《사실적인: 왜 진리가 중요한가True to Life》 《맥락 속의 진리Truth in Context》 《이성 예찬In Praise of Reason》 《인간 인터넷Internet of US》 등 많은 저서가 한국을 포함해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간되었고, 인간 이성과 합리성의 실용적 가치와 철학적 의미를 재조명했다는 평을 받았다. 그중에서 《사실적인》은 <뉴욕타임스> 선데이 북 리뷰에서 “진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열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2005년 철학 분야 최고의 책, 〈뉴욕타임스〉 ‘편집자의 선택’에 선정되었다. 또한 《맥락 속의 진리》는 철학 분야의 우수 저작물에 수여하는 초이스 상을 수상했다. 최근에는 빅데이터 시대에 민주주의와 공공 담론에 필요한 진리에 대한 태도, 기술의 윤리 문제에 천착하며 활발한 저술 및 강연 활동을 펼치고 있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오랫동안 이어온 철학 속에서 지금의 삶에 필요한 지식과 생각법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있는 철학자이다. 어떤 문제든 ‘놀라워’해서 출발하고 ‘아포리아’에 빠져 보는 경험도 해보고 그 ‘경이감을 생생하게 유지’할 수 있다면 누구나 철학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형이상학, 논리학, 윤리학 등의 영역에서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고, 강원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 교양과정의 철학 교수, 자유전공학부 교수이다. 서울대학교 철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선임연구원, 세종대학교 초빙교수를 지냈고, 호주 멜버른대
고대부터 지금까지 오랫동안 이어온 철학 속에서 지금의 삶에 필요한 지식과 생각법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있는 철학자이다. 어떤 문제든 ‘놀라워’해서 출발하고 ‘아포리아’에 빠져 보는 경험도 해보고 그 ‘경이감을 생생하게 유지’할 수 있다면 누구나 철학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형이상학, 논리학, 윤리학 등의 영역에서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고, 강원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 교양과정의 철학 교수, 자유전공학부 교수이다.

서울대학교 철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선임연구원, 세종대학교 초빙교수를 지냈고, 호주 멜버른대학교, 캐나다 위니펙대학교, 미국 마이애미대학교에서 방문학자로 연구했다. 박사학위 주제였던 심리철학과 인지과학 연구를 계속하면서 그 연구 성과를 논리적 사고와 오류 연구에 접목하고 있다. 그간 이론적 배경이 부족했던 이 분야에 학문적 토대를 쌓고 있다. 그 일환으로 나온 『논리는 나의 힘』은 논리학 교과서뿐만 아니라 논리적 사고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필독서로 널리 읽히고 있다.

플라톤은 좋은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통치자가 철학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저자는 온 국민이 철학적인 사고를 하게 되면 좋은 나라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학술 연구 못지않게 대중에게 철학적 사고가 무엇인지 알리는 것을 철학 선생의 중요한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약간은 거창하지만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한 사명감을 가지고 저술로써 대중과 소통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 데카르트와 버클리』, 『매사에 공평하라: 벤담과 싱어』는 그런 작업의 결과이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오랫동안 이어온 철학 속에서 지금의 삶에 필요한 지식과 생각법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있는 철학자이다. 어떤 문제든 ‘놀라워’해서 출발하고 ‘아포리아’에 빠져 보는 경험도 해 보고 그 ‘경이감을 생생하게 유지’할 수 있다면 누구나 철학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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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05월 20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324쪽 | 412g | 130*195*30mm
ISBN13
9788997743056

책 속으로

신비한 힘을 가진 과학자가 당신에게 두 문 중 하나의 선택을 권한다고 상상해보라. 한쪽 문 뒤에는 당신의 정치적 반대자에게 당신의 견해가 얼마나 현명한지 이성에 호소해서 천천히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다른 쪽 문 뒤에는 수도관에 흘려 넣기만 하면 곧바로 ‘상대방’이 당신의 정치적 견해가 옳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액체가 있다. 어느 쪽 문을 선택하겠는가?
나 자신을 포함해서 내가 아는 사람들 대부분은 어떻든 마법 같은 액체를 선택할 유혹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중 많은 사람들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즉석에서 그런 선택을 할 것이다. 결국 정치란 중요한 문제를 다루므로, 반대편의 사람들이 없어져버리거나 아니면 우리가 보기에 올바른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 마술처럼 변모하기를 바라지 않기는 어렵다. 그런 바람이 더 큰 선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당신은 망설일 것이다. 판돈이 아무리 크고 일이 더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처리된다 해도, 사람들을 무의식적으로 당신에게 동의하도록 조정하는 것은 분명히 뭔가 잘못된 것 같다. 우리는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 가치가 있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성, 곧 이유를 제시하고 묻는 과정은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든 그 자체로 중요한 일이다.--- 「두 개의 문에 대한 선택」

텍사스 주는 매년 4,800만 권의 교과서를 구입해 공립학교에 공급한다. 이만한 양이면 미국 전역의 공립학교 교과서에서 발견되는 현상을 대표해서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교과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실제로 교과서의 내용은 미국에서 가장 뜨겁게 진행되는 문화적인 논쟁들의 한가운데에 있기 때문이다. 그 논쟁 중 하나는 창조론을 생명의 근원에 대한 합당한 과학적 이론으로서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하느냐는 것이다.
텍사스교육위원회의 일부 위원들은, 과학자들의 음모론을 근거로 창조론을 가르쳐야 한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과학자들이 진화론의 결점을 덮고 지구와 지구의 모든 서식 생물들은 그리스도교의 신이 창조했다는 증거를 숨긴다는 것이 음모론의 내용이다. 미국의 건국과 역사에 대한 논쟁도 있다. 여러 교육 위원들과 그들의 지지자들은 역사 교과서에 자신들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끊임없이 로비를 했으며 그 로비는 성공하기도 했다. 그 진실이란, 미국은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계시를 받고 건국되었으며, 그 건국은 신의 섭리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텍사스교육위원회의 사례는 이성에 대한 회의론이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 어떻게 관여하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교육 위원회의 회의실에서 회의론에 대한 현학적인 논쟁이 벌어져, 교과서에 실을 내용을 실제로 결정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결정은 말할 것도 없이 여러 다양한 변수들이 작용한 결과인데, 정치적 변수가 가장 크게 작용하고 지역적인 특수성도 상당 부분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결정을 내린 실제 동기가 무엇이든, 정치적인 것에 대해서만 논쟁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사실에 대한 것만도 아니다. 사실에 관해 가르치는 방법이 어떤 것이 최선인지에 대해서도, 다시 말해서 인식적 원리라고 불릴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하는 것이 최선인지에 대해서도 논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도덕적 원리는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합리적인지에 대해서 말해준다. 마찬가지로 인식적 원리는 무엇을 믿는 것이 합리적인지에 대해서 말해준다. 거기에는 우리가 믿음의 방법 중에서 어떤 것을 신뢰해야 하고 어떤 것이 가장 좋다고 가치를 부여해야 하느냐는 문제까지 포함된다. 텍사스에서 벌어진 논쟁은 지역에 국한된 것이지만 이 문제, 그러니까 어떤 인식적 원리를 가져야 하느냐는 문제 덕분에 미국 문화 전반에 걸친 의미를 크게 갖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우려를 낳기도 한다. 이와 같은 가치에 대해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 어떻게 해결하는가? 어떤 종류의 이성에 호소해야 문제가 해결되는가?--- 「창조론 논쟁의 빛과 그늘」

프린스턴대학교의 연구자들은 상당히 충격적인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사람들은 두 후보자의 얼굴을 몇 분의 일초만 봐도 선거에서 누가 이길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알렉산더 토도로프와 그의 동료들은 이전 연구에서 사람들이 생소한 얼굴이라도 10분의 1초 이내에 경쟁력을 판단한다는 증거를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이 연구는 사람들이 의식적인 반성을 하기에 앞서 그런 판단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토도로프와 찰스 밸류는 후속 연구에서 그런 판단들이 선거 결과와 연관성이 있는지를 계속 연구했다.
과학자들은 또 다른 실험에서 대학생들에게 2006년 주지사와 상원 의원 선거 2주일 전에 민주당과 공화당 후보들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학생들에게는 누가 더 경쟁력이 있는지에 대해서 ‘본능적인 느낌’을 물었다. 실험 참가자들의 즉각적인 판단이 전적으로 외모에 근거한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후보자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참가자의 응답만 분석했다. 선거가 끝난 후 과학자들은 조사 결과와 선거 결과의 상관성을 살펴보았는데,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참가자들이 후보들의 얼굴을 본 시간은 100분의 1초가 안 되었는데도, 상원 의원 선거에서 72.4퍼센트, 주지사 선거에서 68.6퍼센트나 당선자를 맞췄다. 더 놀라운 것은, 참가자들에게 더 숙고해서 판단해보라고 하자 선거 결과를 맞추는 능력은 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줄어들었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선거 결과를 예측한 것은 얼굴 생김새를 무의식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심사숙고해서 판단하라는 지시는 무의식적인 판단에 오히려 방해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예측의 정확성은 떨어졌다.” 달리 말해, 사람들은 정치적 판단을 할 때 겉모습만을 판단의 근거로 삼아 무반성적으로 한다. 생각은 방해만 된다.
도덕적, 정치적 결정을 어떻게 내리는지 연구하는 과학 산업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데, 위와 같은 연구 결과는 그중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 그리고 여러 학자들이 그런 실험 결과로부터 끌어내리는 주장들은 충분히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이 내리는 정치적, 윤리적 결정들이 빈약한 정보를 가지고, 감정에만 의존하며, 논리적으로 추론하지는 않은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 정도 이야기는 이미 마키아벨리부터 칼 로브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한 것이므로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결론은 이성은 정치적이든 아니든 우리의 결정과 거의 무관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궁리할 때, 심지어 우리가 믿는 것이 참인지 궁리할 때조차도, 이성은 아무 역할을 못 한다는 것이다.--- 「100분의 1초 사이의 인식」

이성은 어른이고 감정은 어린이라는 플라톤의 그림을 웨스틴은 ‘인간 마음에 대한 냉정한 견해’라고 불렀는데, 도움이 되는 말이다. 냉정한 견해는 상당히 영향을 끼쳐 왔다. 인간의 공통적인 경험을 잘 설명해준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일부 찾을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나중에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후회하게 되는 말이나 행동(또는 둘 다)을 한 적이 있다. 그런 적이 없다면, 그리스의 비극은 말할 것도 없고 컨트리 음악이나 블루스는 노래할 거리가 없어질 것이다. 열정이 우리를 이기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바로 그런 일 때문에 플라톤이 그랬듯 우리는 감정을, 제어해야 하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냉정한 견해는 인간 경험 중 다른 부분들과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특별히 두 가지 사항을 여기서 고려해보아야 한다. 첫 번째 고려 사항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냉정한 이성의 마부 혼자 인도하게 한다면 운이 안 따른다는 것이다. 평균적인 인간은 냉정한 이성의 마부로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냉정한 이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사람들은 선거에서 후보자가 당선돼도 전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공약이지만 단순히 그 공약이 자신과 감정적으로 공감할 수 있다는 이유로 그 후보자에게 투표한다(예컨대, 자기 지역 선거에서 다른 주의 동성 커플 결혼 허용 문제에 대해 후보자가 취하는 입장을 보고 투표한다). 아마존닷컴과 같은 기업들은 특정 금액 이상을 구매하면 무료 배송을 해주는 정책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사람들은 순전히 무료 배송을 받기 위해 무료 배송으로 절약한 비용보다 더 많이 구매한다. 이런 예는 많다. 행동경제학자 댄 애리얼리는 인간이 여러 상황에서 저지르는 비합리적인 행동은 실제로 예측 가능하다고 말했다.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들은 무작위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평균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그렇게 행동할 정도로 아주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할 수 있는 것만 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냉정한 이성이 없으므로, 우리 모두 냉정한 이성을 가져야 한다는 플라톤의 명령은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야 한다는 점에서 비현실적이다.

두 번째 고려 사항은 더 심각하다. 우리는 냉정한 이성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약 가지고 있다면 매우 나쁜 결과가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냉정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을 친구나 직장 상사나 연인으로 삼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냉정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생각하기는커녕 외로운 사람, 심지어는 건강하지 않은 사람으로 생각한다.--- 「이성은 어른, 감성은 어린이」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이 훌륭한 보기가 될 것이다. 소설의 한 대목에서 헉은 도망 노예인 친구 짐을 경찰에 신고해야 할지 말지를 고민한다. 헉은 노예 제도가 도덕적으로 정당하며 노예가 주인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적 규범은 그의 세계관에 깊이 배어 있어서 그의 양심의 일부가 된 것이다. 그러나 헉이 친구 짐을 좋아하는 감정이 더 크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옳다고 알고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다. 그 결과, 헉은 스스로를 아주 사악한 인간으로, 또 자신이 도덕적 의무라고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으로 인식한다. 그는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다. 헉이 깨닫지 못한 것은 (그리고 독자들은 깨달은 것은) 짐에 대한 그의 감정은 짐을 신고하지 않을 훌륭한 이유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그가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는 노예 제도가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그에게 가르친 어른들보다 더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플라톤의 이성관은 강력하긴 하지만 지나치게 간소화된 그림이다. 인간은 냉정한 이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 편이 오히려 도움이 된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우리는 이성과 감정의 관계 그림에서 다른 쪽으로 이동할 것이다. 그것은 여러 방식에서 플라톤의 견해와 정확히 반대다. 하지만 그 견해도 플라톤의 견해가 저지른 결정적인 실수를 똑같이 저지른다는 것을 앞으로 살펴볼 것이다.--- 「허클베리 핀의 딜레마」

우리가 새로운 데이터에 맞닥뜨렸을 때 우리의 믿음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이유를 콰인-뒤엠 가설이 설명해주기는 해도, 좁은 의미에서의 이성은 가치에 대한 의사 결정에서 아무 역할도 못한다는 반론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가치에 대해 이성을 이용한 추론이 사후 정당화임을 보여주는 데이터는 상당히 많다. 우리는 먼저 직관적으로 판단하고, 나중에 그것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사실이 믿음의 거미줄 안에서 의사 결정을 한다는 가설과 아주 잘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우리 믿음과 모순되는 정보가 있다고 직관적으로 판단하다가 나중에 우리의 체계를 수정하지 않을 원칙적인 이유가 있다고 (단순히 모순이 없다고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주장하는 일이 종종 있다. 유명한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의 말처럼 우리는 ‘꼬리가 개를 흔드는’ 착각에 빠져 있다. 꼬리에 불과한 이성을 가지고 도덕적 판단이라는 몸통을 흔드는 본말전도라는 것이다.
나는 본말전도 견해에 대해서 두 가지 의견을 말하겠다. 첫 번째는, 아래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이 점이 맞는다면 그것은 도덕적 판단 이외의 영역까지 더 넓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내가 이미 말했듯 콰인-뒤엠 가설이 적용되는 영역은 넓다. 일반적인 인지 모두에 적용된다. 따라서 사후 정당화하는 추론의 위협은 언제나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이 점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더 중요한 점은 본말전도 견해는 이성이 가치 판단을 할 때 사후 정당화 역할만을 또는 대체로 그런 역할만을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점은 명백해 보이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핵심 신념들을, 심지어 감정적으로나 직관적으로 꽂혀 있는 핵심 신념들마저도 실제로 바꾼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이런 변경 중 일부는 새로운 이유나 데이터를 인정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듯하다.--- 「꼬리가 개를 흔들다」

우리의 근본적인 인식적 원리에 의심을 품은 사람들에게 그 원리에 대한 인식적 이유를 제시할 수 없다고 해서 그 원리에 대해 어떤 이유도 제시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원리를 수용하는 이유를 제시할 수 있는데, 이때 원리를 수용한다는 것은 그 원리에 따라 기꺼이 행동한다는 것이고, 그 원리가 신뢰성이 있다고 추천하는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종류의 수용을 옹호하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실천적이거나 윤리적인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인식적인 수용을 옹호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과학의 기저를 이루는 원리는 공통의 관점에서 인정할 수 있는 공적인 이유를 생산하는 데 쓰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정도면 그런 원리들을 수용하는 것이 합리적임을 충분히 보여주지 않았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렇다. 하지만 공개적인 원리의 가치를 이미 기꺼이 인정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에서만 그렇다.
이것은 우리가 이유의 합리성을 옹호하는 목표를 절반만 달성했다는 뜻이다. 우리는 과학 활동의 (이상적인) 핵심에 있는 원리들을 포함해서 특정한 인식적 원리들은 객관적이고 공적인 이유를 생산할 수 있다고 보여주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런 원리들을 수용하는 실천적 합리성을 공적인 이유에 근거해서 옹호하는 논증이다. 공통의 관점을 갖게 하는 원리들은 그 자체가 공통의 관점에서 정당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나는 그런 논증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핵심 아이디어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수용해야 하는 근본 원리들은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인식적, 사회적으로 동등한 위치에서 받아들일 만한 원리들이다. 그런 위치에서 받아들여지는 원리들은 공개적이고 객관적이다. 따라서 그런 원리들을 수용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나는 이런 주장을 가상의 게임에 대한 사고 실험을 이용해서 펼치려고 한다. 이 게임의 목적은 내가 ‘평행 지구’라고 부를 가상 지구의 거주민들이 가질 근본적인 인식적 수용을 다른 참가자와 협력해서 결정하는 것이다. 근본적인 인식적 수용은 근본적인 인식적 원리를 수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 원리가 인식적인 까닭은 우리에게 어떤 믿음의 근원과 방법이 신뢰성이 있는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 원리가 근본적인 까닭은 바로 그 근원이나 방법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신뢰성이 있다고 보여줄 수 없는 근원이나 방법을 추천해주기 때문이다.--- 「방법 게임」

근본적인 인식적 원리들에 대해 본질적으로 인식적인 이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은 그런 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전혀 함축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해야겠다. 내가 이미 지적한 것처럼 회의론 논증은 근본적인 인식적 원리를 믿는 인식적 이유를 갖는 것을 막지 않는다. 회의론 논증이 보여주는 것은 그런 이유를 우리의 원리에 도전하는 사람과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근본적인 인식적 원리들에 대한 이유를 나누고 싶다면 실천적 이유를 나눌 필요가 있다.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상대방과 내가 인식적 원리들에 대해 심각하게 의견 일치가 안 되지만 진정한 토의를 하고 싶다면 서로를 진리에 도달할 능력을 똑같이 갖춘 동료 재판관으로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서로를 동료 재판관으로 존중할 때, 가능하다면 우리 모두가 이유로 인정할 수 있는 이유를 가지고 주장을 옹호해야 한다. 그리고 서로를 동료 재판관으로 존중하라는 요구를 충족하려고 한다면 우리의 인식적 수용을 정당화할 때도 이유라는 공통의 화폐에 호소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이유로 인정될 수 있는 이유를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동료 재판관’에 대한 신뢰」

출판사 리뷰

세계적인 석학으로 꼽히는 마이클 린치의 『이성 예찬』은 현대사회의 단면을 날카롭게 꿰뚫고 있다. 고금을 넘나드는 철학자들을 불러 앉히고 나서 그는 냉철한 이성으로 들여다본다. 비판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진단하는 것이다. 진단이 끝난 뒤에 그는 동등하게 주장되는 두 개의 권리로 이성을 얘기한다. 감성은 시대와 호흡하며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지만 놓칠 수 없는 맹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변덕에서 비롯한다.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감성과 달리 이성은 변덕을 부리지 않는다. 이리저리 바쁘게 오가지 않고 조용하게 관찰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성의 원천이다. 뜨거운 논쟁거리에 대해서 한껏 목청을 높이지는 않지만 낮은 목소리로 설득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과 감성이 정반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이성과 감성은 ‘등을 맞댄 동전’이 아니다. 감성은 걸음걸이가 좀 더 가볍고, 이성은 느리다. ‘빠름’과 ‘느림’의 차이일 뿐, 이성은 느려 보이지만, 보폭은 넓다. 세상이 빠르게 움직일 때, 놓치기 쉬운 것들을 이성은 챙긴다. 그래서 이성은 느리지만 침착하다. 그리고 깊다.

마이클 린치가 말하는 『이성 예찬』은, 이성에 대한 찬가가 아니다. 오히려 동전의 앞과 뒤를 차갑게 관찰하고, 앞과 뒤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동전이 만들어진 그 속내를 꿰뚫어 보는 ‘방법’에 대해서 얘기한다. 동등하게 주장되는 권리, 이율배반에 대해서, 동전은 서로 권리를 주장한 적이 없다. 앞이 중요하다거나 뒤가 중요하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마이클 린치는, 동전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기에 앞서, 그 둘이 공존하는 원리를 얘기한다. 그것이 바로, ‘인식론적 원칙’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서로 공존할 수밖에 없는 까닭을 제시해야 하고, 제시하기 이전에 이미 갖추어진 ‘자유로운 원칙’에 대해서 얘기한다. 서로 모순되어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명제가 아니라 동등하게 주장되는 두 개의 논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끌려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때로, 끌고 가려는 성향은 나타날 수 있지만 원천은 아니다. 서로 어떻게 소통하고 싶어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소통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할 뿐이다. 그 소통을 위해 다리를 이어주기 전 놓으려는 징검다리. 그것이 이성의 출발점이다. 부정과 긍정을 동시에 인정하면서, ‘징검다리’를 ‘다리’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누군가 감성이라는 징검다리를 놓았다면, 그 사이를 ‘온전하게 채우는’ 이성이라는 돌로, 다리를 완성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당연한 결과물이고, 늘 곁에서 호흡하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현대인은 자꾸 폐쇄적으로 변해 가고, ‘우리’라는 공통분모를 잊어가는 경향이 짙다. 『이성 예찬』에서 말하는 ‘공통 화폐’의 개념은 그 점부터 짚는다. 서로 동등하게 설득하거나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토대가 아니라면 이성이라는 마차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마부가 되었든 마차가 되었든 따로 떨어져 있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마차가 없는 마부는 혼자 걸어가야 하듯, 마부 없는 마차도 혼자 굴러가야 하기 때문이다. 마이클 린치는 책의 끝에서 『이성 예찬』에 담겨 있는 모든 내용을 압축해서 이야기한다.

“경고와 희망으로 끝내려고 한다. 이성에 대한 수용으로부터 너무 하락하면 사회가 자신만의 방식을 되찾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게 경고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이 필요하다…… 이성을 단순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열적으로 수용하고 그 원리를 행동으로 옮기는 사회에 살고 싶다.”

감성의 변덕을 꿰뚫는 이성의 회귀 본능

현대사회의 화두는 감성이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움직이게 하는 힘이 사회 전반을 가로지르는 흐름이다. 자연스럽게 이성이 뒤로 밀리는 시대에 이성을 얘기하는 것은 자칫 폭포를 거슬러가는 ‘무모한 연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때가 되면 산란을 위해 온갖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회귀 본능. 이성은 바로 그 연어처럼 거센 물살을 가른다.

두 개의 본능, 감성과 이성

감성은 시대와 호흡하며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지만 놓칠 수 없는 맹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변덕에서 비롯한다.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감성과 달리 이성은 변덕을 부리지 않는다. 이리저리 바쁘게 오가지 않고 조용하게 관찰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성의 원천이다. 뜨거운 논쟁거리에 대해서 한껏 목청을 높이지는 않지만 낮은 목소리로 설득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과 감성이 정반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이성과 감성은 ‘등을 맞댄 동전’이 아니다. 감성은 걸음걸이가 좀 더 가볍고, 이성은 좀 더 무거울 뿐이다. ‘빠름’과 ‘느림’의 차이일 뿐, 이성은 느려 보이지만, 보폭은 넓다. 세상이 빠르게 움직일 때, 놓치기 쉬운 것들을 이성은 챙긴다. 그래서 이성은 느리지만 침착하다. 그리고 깊다.

마이클 린치가 말하는 『이성 예찬』은, 이성에 대한 찬가가 아니다. 오히려 동전의 앞과 뒤를 냉철하게 관찰하고, 앞과 뒤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동전이 만들어진 그 속내를 꿰뚫어 보는 ‘방법’에 대해서 얘기한다.
동등하게 주장되는 권리, 이율배반에 대해서, 동전이 서로 권리를 주장한 적이 있는가. 앞이 중요하다거나 뒤가 중요하다고 주장한 적이 있는가. 마이클 린치의 얘기는, 동전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기에 앞서, 그 둘이 공존하는 원리에 대해서 얘기한다. 그것은 바로, ‘인식론적 원칙’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서로 공존할 수밖에 없는 까닭을 제시해야 하고, 제시하기 이전에 이미 갖추어진 ‘자유로운 원칙’에 대해서 얘기한다. 서로 모순되어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명제가 아니라 동등하게 주장되는 두 개의 논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토끼와 거북, 감성과 이성

토끼와 거북 이야기의 가장 큰 교훈은 ‘교만함과 성실함’이다. 속도와 승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겉으로 보이는 토끼와 거북의 속도와 승부를 들여다보면, 그것은 속도 이야기가 아니라 ‘뿌리’에 관련한 이야기이고, 그 뿌리를 통해 벋은 가지에 관한 이야기이고, 열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성이라는 뿌리가 어떻게 가지를 벋고, 어떻게 열매를 맺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끌려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때로, 끌고 가려는 성향은 나타날 수 있지만 원천은 아니다. 서로 어떻게 소통하고 싶어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소통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할 뿐이다. 그 소통을 위해 다리를 이어주기 전 놓으려는 징검다리. 그것이 이성의 출발점이다.

부정과 긍정을 동시에 인정하면서, ‘징검다리’를 ‘다리’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누군가 감성이라는 징검다리를 놓았다면, 그 사이를 ‘온전하게 채우는’ 이성이라는 돌로, 다리를 완성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당연한 결과물이고, 늘 곁에서 호흡하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현대인은 자꾸 폐쇄적으로 변해 가고, ‘우리’라는 공통분모를 잊어가는 경향이 짙다. 『이성예찬』에서 말하는 ‘공통 화폐’의 개념은 그 점부터 짚는다. 서로 동등하게 설득하거나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토대가 아니라면 이성이라는 마차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마부가 되었든 마차가 되었든 따로 떨어져 있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마차가 없는 마부는 혼자 걸어가야 하듯, 마부 없는 마차도 혼자 굴러가야 하기 때문이다.

마부와 마차와 승객

마차가 되어 끌려갈 것인가, 마부가 되어 몰고 갈 것인가. 그것은 마이클 린치가 『이성예찬』에서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가 어떻게 함께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질 뿐이다. 마차나 마부처럼 사회도, 사람도, ‘끌려가거나’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것이라는 상식에 대해서 되짚어볼 기회를 열어 주는 것이다. 소통은 상식이고, 상식은 소통이다. 이성이란, 상식에 대해서 들여다보는 열쇠구멍이라는 뜻이다. 이성은 어떻게, 어디로, 가야 한다는 고집이 아니다. 함께 가자는 청유이다. 협박이나 강요가 아니다. 그 청유에는 거절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강제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끌림과 떨림에 의해서 함께 갈 수밖에 없는 손길을 건네는 것이다. ‘빠름’이 놓친 ‘느림’의 미학에 대해서. 토끼가 놓친 거북의 미학에 대해서. 그러나 승패를 가늠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성과 감성의 ‘악수’를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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