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검색을 사용해 보세요
검색창 이전화면 이전화면
최근 검색어
인기 검색어

소득공제
시의 황혼
1940년, 누가 시를 보았는가?
조영복
한국문화사 2020.04.20.
가격
38,000
38,000
YES포인트?
0원
5만원 이상 구매 시 2천원 추가 적립
결제혜택
카드/간편결제 혜택을 확인하세요
배송안내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은행로 11(여의도동, 일신빌딩) 변경
배송비?
무료

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해외배송 가능?
  •  문화비소득공제 가능

이 분야의 이벤트

이 상품의 태그

책소개

목차

PROLOGUE
소극적 반동에서 능동적 의지로
― ‘하지 않으면 안 된다’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로

1부 총론
시와 불, 시인과 장미

2부
황혼과 양식


1. ‘최후의 양식(Lateness)’으로서의 상징
(1) 황혼기에 시는 어떻게 오는가
(2) 황혼의 역사철학적 해석-황혼과 비극적 세계관

2. 황혼과 상징
(1) 황혼, 꿈과 외롬 ‘사이’에 있는 것
(2) 상징과 계시, 상징주의 재론
(3) ‘밤’의 언어 ― ‘상징’의 소셜미디어(Social Media)적 가치
(4) 예언의 말, 침묵의 노래- ‘-노라’와 묵시체
(5) 황혼과 세대론-신세대 시인과 상징 코드

3. ‘황혼’의 시적 논리와 해석학적 관점
(1) 시적 언어와 산문적 언어
(2) ‘황혼’의 이론적 · 해석학적 접근
(3) 文章‘保國’: ‘文章’保國-산문과 담론의 논리를 넘어서
(4) 현실: 언어-상실된 것: 영원한 것

4. ‘황혼’의 이념과 그 표상들
(1) 황혼과 숭고
(2) 황혼과 고전
(3) 황혼과 울음
(4) 황혼과 무덤
(5) 황혼과 고원
(6) 황혼과 가을
(7) 황혼과 중간인들

3부
황혼기의 시인들


김광균; ‘황혼’을 움직이는 반가(反歌)의 산책자
이용악; ‘황혼’에 나는 등곱새와 미래의 꽃씨
오장환; 어둠 속 푸른 불을 품은 거북
서정주; 마왕 ‘루시퍼’(Luciper)의 교의(敎義)로부터 ‘브륀힐데’(Brynhildr)의 구원으로
윤곤강; ‘황혼’의 풍경화와 ‘별떼’의 축제
백석; ‘슬픔’의 질문에서 ‘침묵’의 성스러움까지
김기림; ‘어둠’을 빨아들이는 청동 그릇의 향훈(香薰)

EPIOGUE
‘황혼의 시학’과 시의 주권(主權)

참고문헌
찾아보기

저자 소개 1

曺永福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학부 및 대학원을 졸업했다.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광운대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북 예술가, 오래 잊혀진 그들』(2002), 『1920년대 초기 시의 이념과 미학』(2004), 『문인기자 김기림과 1930년대 ‘활자-도서관’의 꿈』(2007), 『원형 도상의 언어적 기원과 현대시의 심연』(2012), 『넘다 보다 듣다 읽다-1930년대 문학의 ‘경계넘기’와 ‘개방성’의 시학』(2013), 『이것은 글쓰기가 아니다』(2016), 『시의 황혼-1940년, 누가 시를 보았는가?』(2020), 『시인의 말법-전설의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학부 및 대학원을 졸업했다.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광운대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북 예술가, 오래 잊혀진 그들』(2002), 『1920년대 초기 시의 이념과 미학』(2004), 『문인기자 김기림과 1930년대 ‘활자-도서관’의 꿈』(2007), 『원형 도상의 언어적 기원과 현대시의 심연』(2012), 『넘다 보다 듣다 읽다-1930년대 문학의 ‘경계넘기’와 ‘개방성’의 시학』(2013), 『이것은 글쓰기가 아니다』(2016), 『시의 황혼-1940년, 누가 시를 보았는가?』(2020), 『시인의 말법-전설의 사랑시에서 건져낸 울림과 리듬』(2020), 『깨어진 거울의 눈-문학이란 무엇인가』(2000, 공저), 『니체, 철학의 주사위』(1993, 공역), 『날개』(2011, 편저) 외에도 다수의 저서가 있다.

조영복의 다른 상품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4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608쪽 | 884g | 153*225*29mm
ISBN13
9788968178665

책 속으로

‘시인의 나라’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은 근대시사에서 ‘시의 시대’는 언제인가라는 질문과 교통한다. 이 저서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일단 ‘일제말기’로 저장해둔다. ‘일제 암흑기’라는 시?공간적인 것을 포용하는 용어가 있지만 이 저서의 출발과 끝점은 ‘암흑기’라는 말의 관습적인 맥락에 끊임없이 저항하는데, 그래서 그 익숙한 용어는 일단 잊기로 한다. 말(조선어)로 말을 할 수 없는 시대, 말을 할 판(容器)이 부재했던 시대, 현실이 빛을 몰아내고 더욱 깊은 어둠으로 삶을 몰아갔던 시대, 어둠이 시인의 불칼이 되었던 시대, 이 시대는 정녕 시인의 시대이리라. 「문장」, 「인문평론」, 「조광」, 「여성」 등 당시 간행된 잡지의 지면들에는 ‘무슨 기대를 가지는지는 몰라도 시마다 모두 좋은 좌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시가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니! 역설적이다. 그 ‘기대’란 무엇이었을까.
김광섭은 시 ?시인의 윤리?(문장, 1940.2)에서 ‘시인의 입술에 가시가 나면 혓바닥에 장미가 피리라’ 라고 읊었다. ‘가시로 뒤덮힌 시인의 입으로 피워올린 장미 한 송이’는 참혹하면서도 아름답다. 역설적이고 반어적이다. 아름다움은 가장 참혹한 것으로부터 기원한다. 김광섭은 그것을 ‘시인의 윤리’라 강변하는데, 시인의 어깨에 매달린 실존의 추의 무게가 새삼 느껴진다. 그런데 그것이 아름다움과 연대한다. 시는 형극 가운데 꽃을 피운다. 시인은 어둠 속에서 장미를 피워올리는 자이자 침묵함으로써 가장 가혹하고 열렬하게 말할 수 있는 자이다. 시인은 어둠 속의 씨앗을 보는 자(이용악)이며, 어둠 아래 흐르는 강물에 뛰노는 ‘꽃잎’(오장환)을 보는 자이며, 그러니까 ‘환영’을 보는 자이다. “아아, 20世紀에 불이나 붙어라”(김광섭, 「13行人生」)라는 비명 가운데 현실과 시가, 역사와 문장(文章)이 모순되게 서로를 반조하고 있다. 철(鐵)과 혈(血)과 장미와 불꽃이 하나임이 암묵적으로 공유되었고 그것들은 ‘어둠’을 말하는 상징부호였을 것이다. 김동환은 ‘鐵과 血은 우리에게 榮光을 約束하는 符號다’라고 비장하게 썼다. ‘日光못보는 희생생활’을 위해 연애?식사?수학 등에 쓰는 시간의 배(培)를 써야한다는 투로 썼을 때, 그가 온갖 고투를 감행하면서 간행한 「삼천리」가 일종의 그런 희생생활의 하나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어느 시대나 시에 대한 질곡이 강하면 강할수록 시정신은 보다 더 강렬하게 타오른다. 시는 망각된 말과 장소에 대한 기억이자 기록이다. ‘시 동인지 하나 나오지 않고 시의 발표기관이 유례없이 제한된 ‘오늘’ 바로 이 시기’는 시의 시대이며, 불과 칼을 가슴에 품은 시대의 시인들은 황혼의 거울 앞에서 자신의 ‘시인됨’의 운명을 비춘다. 실증주의와 환영주의의 모순 속에서 ‘황혼기의 시사’는 그렇게 시작된다.
일제말기 시인들이 본 ‘환영’은 저 ‘황혼’의 장막 속에 가려져 사라져버린 것일까. 그들의 글(말, 문학)은 불과 공간의 상실에 대한 기억이자 가슴 속에 불을 품은 자들이 전해온 ‘山의 전언’이며 혹은 바닷물에 실려온 ‘만세소리’는 아니었던가? 칼 끝에 적시어 오는 장미의 언어, 시퍼런 단도의 언어, 불의 언어란 ‘肉聲으로 부르는’ 시인들의 노래가 아니었던가. 이 저서는 고증학이자 실증학이며 문헌해석학이자 텍스트 해석학을 지향하는데, 이들을 통틀어 한편으로는 시적 언어의 상징에 대한 해석학이라고도 할 것이다. 역사와 텍스트의 ‘미로’로 침투해 들어가 그 미로 속에서 헤매면서, 또 그 미로 속에서 신비한 ‘불의 목소리’, 즉 시적 상징이 전하는 신비한 목소리를 발견할 것이다. 현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더욱 깊이 침투함으로써, 그러니까 정밀한 문헌학적 해석과 시의 해설만이 시적 언어가 전하는 역사의 전언에 깊이 도달할 수 있다.
‘상징’은 ‘황혼의 양식’이자 ‘최후의 양식(Lateness)’이다.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시의적절한 것은 시간의 자연적인 질서에 따라 말없이 순응하면서 흘러가는 것일 터인데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오직 생명의 유한성과 필멸의 운명을 지닌 인간과 또 인간의 역사에 국한된다. 예술은 역사의 종언과 동시에 사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미적양식으로서 현실과 역사의 시간과 법칙에 끊임없이 저항한다. 해방 이후 시 한편 제대로 쓰지 못하던 정지용은 윤동주의 시집에 부쳐 이렇게 말했다.

才操도 탕진하고 용기도 상실하고 8.15이후에 나는 부당하게도 늙어간다. 누가 있어서 “너는 一片의 정성까지도 잃었느냐?” 질타한다면 少許抗論이 없이 앉음을 고쳐 무릎꿇으리라. -중략-내가 시인 윤동주를 몰랐기로서니 윤동주의 시가 바로 ‘시’고 보면, 그만 아니냐?

‘나 이제 늙어버렸다’는 이 피로와 쇄잔의 절멸감은 육신의 그것이 아니라 양식의 그것, 시의 그것에서 왔다. 김동석은 ‘정지용’이기보다는 정지용 ‘시’의 양식적 힘이 ‘침묵’이나 ‘완고’보다 더 강력한 것이었음을 회고하면서 시의 ‘순수정신’을 말하는데, 정지용이 윤동주의 시집에서 ‘시’를 본 것과 다르지 않은 논법이다.

--- 「‘얼음’과 ‘불’의 시인, ‘장미’와 ‘가시’의 시」 중에서

출판사 리뷰

머리말

‘황혼(黃昏)의 시학(詩學)’을 위하여

어둠 속의 별이 불꽃처럼 일어나고 입 속에 장미가시가 돋고 저 무덤이 일어나 먼 곳의 강물을 굽어보고 등곱새가 샘물을 찾아 물 한모금 마시고 거리로 내려오는, 그런 시대의 시를 읽었다. 일제말기, 그러니까 1940년 전후의 시들 · 시론들 · 시인들의 글을 읽었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로부터 ‘무엇을 할 것인가’의 술어의 전환이 필요했던 시대는, 신비롭게도, 그 어느 시기보다 능동적이고 역동적이며 유연하고도 유장하게 넘실거리는 그런 생명의 힘들이 있다. 저 어둠의 거리를 휘몰려 다니는 군중들의 얼굴에서 언뜻언뜻 빛이 어른거리는 시대는 ‘시의 시대’가 아닐 수 없다.

일제시대 신문 · 잡지를 읽는 것은 이미 ‘고전적인’ 문헌연구에 속한다. 어쩌면 가장 아카데믹하고 고답적인 문헌연구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학위취득용 연구의 주요대상들조차 1980년대의 문학으로 옮겨온 지 꽤 오래되었다. 근대문학 100년의 문학사적 토대에서 일제시대 문학은 지루하기도 하고 또 동어반복적인 가치를 재생산하는 영역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본인 스스로 ‘근(현)대문학전공자’라기 보다는 ‘고전문학연구자’, 아니면 ‘근대문헌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다지고 있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에게는 중요한 정치적 사건들이 집약돼 있는 일제시대의 문학적 담론을 다루는 연구 자체가 타인들에게는 공소하기 그지없는 동어반복의 행위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에게는 문학의 윤리적 태도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시기의 문학적 주제들인데, 타인의 눈에는 그 연구가 오히려 비문학적이거나 또 비문학적이어서 비윤리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무용하고 공허한 동어반복이 연구자로서의 자존을 얼마나 떨어뜨리는지 본인 역시 모를 리 없다. 하지만 문학과 윤리, 시와 산문(담론)이 ‘안’과 ‘밖’의 문제로 서로 어긋나고 겹치면서 또 서로가 서로를 지우면서 각자 자신의 길을 달려나가는 시대의 힘이 이 시기의 문학에 있다. 이것만큼 인내의 시간을 붙들어 매는 것도 없다.

‘일제말기’라는 범칭적인 용어를 되풀이한 것은 1940년 전후의 사회 · 정치적 환경이 고려된 때문인데, 이 연구는 우리말로 문학을 발표할 수 있는 매체의 소멸 시점, 그러니까 1940년 전후, 민간신문인 「동아일보」 · 「조선일보」 폐간 전후와, 「문장」 · 「인문평론」 등의 잡지의 폐간 전후에 나온 시들 및 문학적 담론들을 주 대상으로 했다.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 모국어(조선어)로 시를 쓸 수 있는가, 시를 발표할 수 있는 매체가 존재하는가 등의 문제가 시인들에게 어떤 ‘윤리’를 강요하고 있었다면, 이 ‘윤리’란 정치적 · 산문적 윤리와는 다른 차원에 속하는 문제다. 이같은 상황에서 ‘시인들은 어떻게 말하는가’가 이 저서의 기본 출발점이다. ‘상징’을 새삼 끌고 온 것은 이 때문이다. 프랑스 상징주의 시의 유입 같은 문예사조사의 문제가 아니다. 불요불급하나 불가항력적인 말의 힘이 ‘상징’에 있고 그것이 일제말기의 시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그러다보니 시는 어느 때 보다 아름답고 숭고하고 빛나는 우리말의 성채를 담금질하고 있다. 장미의 가시를 입에 문 채 시인들은 언어의 칼을 달구면서 홀로 어둠 속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역사의 맨얼굴을 본다. “이윽고 밤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 잠겨든 침묵의 문자를 읽는 것은 ‘상징’을 읽는 것이고, 시대의 ‘황혼녘’에서 우리시의 빛나는 목소리를 찾아내는 것이기도 했다. 임화의 일제말기 평론들이 주는 가치를 읽게 되었고, 1930년대 중후반기에 등단한 신진시인들의 언어적 · 문학적 관점이 갖는 힘들이 느껴졌다. ‘시단’만 이동한 것이 아니라 ‘말(언어)’이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 언급된 시인들은 임화, 김광균, 이용악, 오장환, 서정주, 윤곤강, 백석, 김기림 등이다. 윤동주, 이육사, 정지용, 임학수, 이찬, 조벽암, 김종한 등의 시와 논점이 여기에 한몫하고 있다. 기존의 문학사조적 관점이나 ‘모더니즘/리얼리즘 관점’으로는 포회되지 않는 조합인데, 그들은 한결같이 어둠 속에서 별무리처럼 얽혀있는 언어의 불꽃들을 친구 삼아 시를 썼다. 그것이 공부하는 내내 힘이 되었고 어쩌면 숭고했을 그들의 책무 앞에서 나 스스로 겸허해졌다. 한 철학자는 이 같은 시대의 심정을 ‘십자옥 앞에서 누구나 고민하는 정신’이라 썼는데, 철저하게 무신론적이고 비루하고도 속악한 것들에 집착하는 본인마저 무엇인가 종교적이고 경건한 ‘십자옥’ 앞에 내던져진 감흥들을 어쩔 수 없었다. 따라서 이 저서에 다소 종교적인 용어나 개념들이 사용되었지만 기독교적인 맥락이나 종교적인 문맥으로 이해할 바는 아니다.

‘고전문헌’이나 다름없는 텍스트들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낸 5년 가량의 시간은 시 공부하는 자로서의 재미를 붙이는 일이기도 했다. ‘윤리’나 ‘의무’ 같은 그런 무거운 의식은 사실 애초에 없었는데도, 일제말기를 산 시인들의 ‘심정’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은 좀 어렵잖이 가질 수 있었다. 윤곤강이 말했듯, 어둠의 깊은 장막 속에서나 가슴에 불을 품고 별떼의 축제를 즐길 수 있는 법인데, 지금 본인은 너무 많은 말과 그 말에 비해 그다지 갖출 것 없는 요설을 풀어놓고 있다. 말이 이렇게 무성한 시대에 말을 줄이고 말을 절약하고, 말을 가슴의 불로, 장미로 키우는 훈련이 필요할 듯하다. 근대시사의 ‘판’을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새삼 한다. ‘어둠’과 ‘밤’을 ‘역사주의적인’ 문맥으로 가르치는 시교육의 문제도 새삼 고민하게 된다. 양식론적인 관점에서 ‘시’와 ‘산문(담론)’과의 차이를 분명하게 이해시키고, 비유(상징)라는 시적 언어의 말법으로 시를 가르치는 것을 시교육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개인의 목소리가 집단의 음성으로 터져나오는 그런 ‘꽃씨가 터져나오는 밤’의 숭고한 목소리를 읽고 그것을 각자 자신의 것으로 이해해야 시가 재미있다. 일제시대의 시라면 말할 것도 없다.

1부는 총론격의 서술이며, 2부는 일제말기 시를 읽기 위한 전체적인 ‘구도’와 각각의 ‘개념’을 서술했다. 마지막 3부는 개별 시인론인데, 일정 정도 1부 · 2부의 글들과 겹치는 부분도 있다. 이 저서에 인용된 텍스트는 1940년 전후에 발간된 신문 · 잡지에서 온 것이지만, 부분적으로 사후 출간된 전집들에서 추출된 부분도 있다. 표지화의 작은 모티브들은 일제말기에 간행된 잡지의 컷 · 삽화에서 차용했다. 상품성도 상업성도 없는 연구서를 출간한다는 것은 출간을 의뢰하는 입장에서도 송구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출간해 주신 한국문화사와 편집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2019년 12월 마지막 날을 보내며,
저자 조 영 복

리뷰/한줄평0

리뷰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한줄평

첫번째 한줄평을 남겨주세요.

38,000
1 38,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