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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백무동의 공간과 이미지 백무동의 공간 / 백무동의 명칭 / 백무동 마천의 경관과 풍속 / 무속인이 들끓던 백무동 / 사찰이 즐비하였던 백무동 / 천왕봉의 신에 대한 설 백무동 가는 길의 오도재 백무동 가는 길 / 오도재의 유래 / 오도재 아래 등구사 지리산을 조망하는 금대암 금대암(金臺庵) / 안국사(安國寺) 신묘한 용이 사는 용유담 엄천(嚴川), 엄천사(嚴川寺) / 용유담의 지형과 경관 / 용유담의 장소적 의미 / 용유담의 각자(刻字) / 용유담의 전설 / 용유담에서의 일화 백무동 입구의 군자사 군자사의 연혁 / 조선시대 군자사의 풍경 / 군자사에서의 일화 / 시를 통해 본 군자사의 풍경 백무동 안쪽의 사찰 삼정산 능선의 사찰 / 벽송능선의 사찰 / 승려와 군수가 만난 이야기(1803년) 유학자의 발자취 정복현의 은거지 운학정(雲鶴亭) / 강익의 양진재(養眞齋) 성모를 만나러 가는 길 하동바위 / 제석당(帝釋堂) / 향적사(香積寺) / 호귀당(護鬼堂) / 천왕당(天王堂) 천왕이 사는 천왕봉 지리산 천왕봉의 의미 / 천왕봉 일월대(日月臺) 오래된 미래의 백무동 부록 백무동 사람들 /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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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의 군자사(君子寺)를 지나 20리쯤 가니 백무당(白武堂)이 있었다. 그 사이에는 마천동(馬川洞)이 있는데, 골짜기 입구에는 강청촌(江淸村)이 있다. 골짜기의 형세는 매우 깊었고, 촌락은 산 아래 모여 있었다. 사방의 들이 황금색 구름 같았고, 집집마다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들리니 어딘지 모르게 무릉도원(武陵桃源)의 기상이 있었다.
--- p.31 백무당은 길가 숲속에 있는 사당인데, 산림 속에 있는 정령들이 모셔져 있고, 저 무속이 성행하는 중국 남 월(越)나라 · 오(吳)나라 무당들처럼 무속인들이 모이는 곳이다. 밤낮 없이 장구를 치고, 사시사철 부채를 들고 춤을 춘다. 사당 안에는 초상이 걸려 있었는데, 이루 말할 수 없이 희한하고 괴이하였다. 이곳은 얼른 떠나야지 오래 머무를 수 없는 곳이다. 밥을 재촉해 먹고 얼른 신을 신고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화개동은 자연경관이 빼어날 뿐만 아니라, 역사와 문화가 풍부하게 깃들어 있다. 지리산 권역의 다른 어느 동천보다 풍부한 문화와 전설을 간직한 골짜기다. 따라서 이 화개동에 투영되어 있는 예전 사람들의 정서와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 보는 것은 이 공간을 문화적으로 이해하는 데 의미 있는 일이다. 또한 이러한 일은 화개동이 내포하고 있는 이미지를 발굴하고 문화원형을 만들어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 p.49 산줄기는 덕유산(德裕山)에서 구불구불 1백여 리를 뻗어 내리다 마뢰(馬瀨) · 임작(壬作) · 가채(加采)에서 그쳤는데, 산세는 노승이 불탑 앞에서 절을 하는 형상이다. 반야봉으로부터 천왕봉에 이르기까지의 산봉우리가 화려한 병풍이나 비단 장막처럼 펼쳐져 있다. 정면으로 바라보면 골짝 골짝의 구름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는 것, 가는 것, 멈추어 선 것, 가로로 비껴 있는 것이 여기저기 보이는데 드문드문한 것은 주름진 비단 같고, 펼쳐진 것은 비단 폭 같으며, 넓게 퍼진 것은 바다와 같다. 문득 보이다 바로 없어지는 온갖 가지 변화하는 형상이 가장 기이한 경관이다. --- p.114 지금 성모사가 있던 자리에는 표지판조차 없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반석 위에 올라앉기도 하고, 그곳에서 점심식사를 하기도 한다. 그곳은 오랫동안 우리 조상들이 기도하던 곳으로 신성시하던 장소였다. 성모가 누구이든 상당수 우리 조상들은 산신령이라고 생각하였으니, 이 땅을 진압하고 있는 지리산의 산신령에게 경건한 마음을 갖는 것은 나쁠 것이 없다. 특히 마음 내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현대인들에게 경건히 대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조금은 마음을 다잡게 할 것이다. 나는 천왕봉에 올라 성모사 터를 볼 때마다, 사람들이 그 역사적 장소를 모르고 신을 모셨던 자리에 모여 앉아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한숨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이처럼 역사를 깡그리 잊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자기 나라 역사를 모르면서 희망찬 미래를 어떻게 꿈꿀 수 있을까. --- p.337 ‘천왕봉’이라는 명칭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신상(神像)이 모셔져 있는 곳이어서 그렇게 부른다고 생각한다. 내 나름대로 생각해 보건대, 이 산은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려 마천령 · 마운령 · 철령등이 되었고, 다시 뻗어내려 동 으로는 오령(五嶺) · 팔령(八嶺)이 되고 남 으로는 죽령 · 조령이 되었으며, 구불구불 이어져 호남과 영남의 경계가 되었으며, 남 으로 방장산에 이르러 그쳤다. 이 산을 ‘두류산’이라 한 것이 이런 연유 때문에 더욱 극명해진다. 하늘에 닿을 듯 높고 웅장하여 온 산을 굽어보고 있는 것이 마치 천자가 온 세상을 다스리는 형상과 같으니, 천왕봉이라 일컬어진 것이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 p.3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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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의 금방울 소리가 울려퍼진 골짜기
백무동이란 이름에 대하여 많은 설들이 있다. 예전의 기록에는 백무동 골짜기에 신을 모셔 놓고 받드는 당집이 많았는데, 그 신이 천왕봉 정상에 모셔져 있던 성모였다. 이 성모는 백모라고도 불렀고, 이 백모를 모신 당집을 백모당이라고 불렀다. 백무동은 백모를 모신 당집이 많은 동네라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이다. 그렇다면 왜 백무동에는 당집이 많았을까? 저자는 여러 전설을 통해 그 이유를 추측해 본다. 첫번째는 함양에 전해지는 마적도사 전설 이야기이다. 전설 속에서 마적도사가 천왕봉에 있는 마고할멈과 혼인하여 아흔 아홉명의 딸을 낳았고 마고할멈인 어머니까지 합쳐 총 100명의 무당이 되어 조선 팔도에 흩어져 팔도 무당의 씨가 되었다고 한다. 두번째로 이능화 선생의 『조선무속고』에 따르면 엄천사의 승려 법우화상과 천왕봉에 살고 있던 성모가 혼인하여 딸 여덟을 낳았으며 자손이 번식하여 모두 무술을 가르쳤는데 금방울과 부채를 쥐고 춤을 추고 아미타불을 창하고 법우화상을 부르고 방방곡곡을 다니며 무업을 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세속에서는 큰 무당은 반드시 지리산에 가서 성모천왕에게 기도해서 접신한다고 한다. 이러나 저러나 백무동은 우리나라의 무속신앙이 발원한 곳이며 많은 당집과 무당들이 몰려있던 무속신앙의 산실이라는 것이다. 금박으로 집을 칠한 제일금대(第一金帶)의 암자 백무동은 신라시대부터 사찰이 즐비하여 승려들이 수도하던 곳이며 일찍부터 불교문화가 들어와 꽃피운 곳이다. 19세기 초 정석귀는 지리산의 여러 사찰을 논하면서 맑고 깨끗하기로는 금대암과 벽송암이 제일이고, 기이하고 빼어나기로는 칠불암, 불일암, 무주암이 제일이라고 하였다. 이 가운데 금대암, 벽송암, 무주암이 백무동에 있으니, 지리산권 사찰 중에서 맑고 깨끗하고 기이하고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암자가 백무동에 가장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금대암은 금박으로 집을 칠했기 때문에 금대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경관이 뛰어난 사찰이다. 1489년 금대암을 유람한 김일손에 따르면 당시 금대암 승려들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매진하여 부처가 되는 공덕을 쌓았는데, 만약 조금이라도 게을리하는 자가 있으면, 그 무리 가운데 민첩한 한 사람이 긴 막대기로 내리쳐 잡념과 졸음을 없애게 했다고 한다. 승려 응윤은 「금대암기」 말미에 “신라·고려시대로부터 우리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이름나고 덕망 있는 고승이 모두 이 암자에 거주하였는데 고찰할 만한 사적은 없다.”라고 하여, 금대암이 신라 고찰로 고승대덕의 수도처였다는 점을 알려준다. 용유담의 바위가 깎이고 냇물이 세차기 흐르니, 용이 노하고 신이 놀란 듯 하다. 예전 사람들은 계곡의 깊은 못에는 용이 산다고 믿었다. 그래서 깊은 못의 이름은 모두 용(龍)자를 넣었다. 용유담은 그런 못 가운데서도 매우 크고 깊으니, 예전 사람들은 모두 신물인 용이 산다고 믿었다. 1586년 양대박은 승려가 길을 안내하고, 노래하고 피리 부는 기생을 대동하여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그러다 경관이 좋은 곳에 이르면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술을 마셨으며, 감흥이 일어나면 시를 지었다. 이들은 나귀를 타고 느릿느릿 선경을 거니는 신선처럼 용유담에 이르렀다. 양대박은 용유담 가에 이르러 첫눈에 들어온 용유담의 경관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고 기록했다. 또 1724년 지리산을 유람한 조귀명은 용유담의 형세를 용이 머리를 숙인 듯 꼬리를 치켜든 듯 하다고 하여 용유담의 바위 형상을 용의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용유담을 찾은 이들 중에는 글씨를 써서 용유담 돌에 새겨 흔적을 남기기도 했는데, 지금도 용유담 가의 바위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중 ‘심진대’는 ‘진경(眞景)을 찾는 대’라는 뜻으로, 예전에는 속세의 티끌이 묻지 않은 깨끗한 곳을 심진동이라 했다. 즉 용유담을 심진동으로 본 것이고, 그곳에 있는 바위를 ‘심진대’라고 한 것이다. 바위에는 홍상준 등 16명의 이름이 그 밑에 새겨져 있는것으로 보아 구한말 이곳에서 시회를 하고 새겨 넣은 듯 하다. 우리 민족의 땅을 열어준 지리산 지리산은 백두산과 연결된 우리 민족의 영산이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지리산의 여러 이름 중 두류산(頭流山)이라는 이름을 제일 선호하였다. 두류산은 백두산에서 흘러내려 온 산이란 뜻으로 현실세계 속의 백두산인 것이다. 지리산은 현실세계와 동떨어지지 않아 우리 선조들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속에는 불교문화, 유교문화, 민속신앙 등 온갖 문화가 다양하게 깃들어 있으며, 골짜기 마다 역사 속 수많은 사건들이 깃들어 있다. 또한 도덕과 학문이 높은 학자들이 은거한 산으로서, 도를 깨치고자 하는 수행자들이 숨어 수도한 산으로서, 살기 어려운 백성들이 먹을거리를 찾아 오르내린 산으로서 온갖 사람들의 애환이 서려 있다. 백무동이 있는 천왕봉은 백두산 남쪽 제일의 봉우리이다. 우리 조상들은 천왕봉을 천왕이 살고 있는 봉우리라고 생각하였다. 아래로는 대지를 진압하고, 위로는 푸른 하늘에 닿는 빼어난 산이며 그래서 천왕봉은 이 땅을 다스리는 성스러운 천왕으로 여겨졌다. 이런 지리산은 그 자체로서 우리 민족의 영원한 정신적 지주가 된다. 지주란 하늘이 무너지지 않게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니, 백두산과 지리산이 있음으로써 우리 민족이 살 공간, 즉 이땅이 열린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