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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나의 경험을 말하는 것에 대해서
Part 1. 나는 트로피를 획득한다 ① 공을 던지는 최초의 기억으로부터 ② 계집애 던지기 ③ 여성의 농구에는 이유가 필요한가 ④ 여성의 기록은 아직 한계에 다다르지 않았다 ⑤ #농구하는여자 ⑥ 익숙한 차별을 각오하지 않고서야 Part 2. 온전히 나로서 승리하고 패배하기 ① 가슴의 무/쓸모 ② 땡볕의 주체성을 획득하기 ③ ‘죽인 자’들만 활보하는 거리에서 ④ 코트의 가장자리에는 누가 있는가 ⑤ 선수의 자격, 코트의 규칙 ⑥ 승리 없이도 ‘즐농’할 수 있을까 Part 3. 농구를 하면서 알게 된 것들 ① 공정과 배제 사이 ② 여성-퀴어-스포츠 ③ 트랜스젠더의 신체로부터의 가능성들 Ⅰ ④ 트랜스젠더의 신체로부터의 가능성들 Ⅱ ⑤ 불확실성의 윤리 너머 나가며. 실패한 여자아이는 자라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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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스포츠 공간에서 여성들은 침입자로 여겨진다. 코트의 ‘주인’들은 침입자인 나에게 “왜 농구를 시작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만, 나는 침입자로서 대답하기보다 코트의 주인으로서 대답하곤 했다. “여기는 내 홈코트인데?” “너 몇 기냐?” 따위의 대답으로 질문을 조롱하는 것은 피곤한 감이 있어도 대체로 재밌기 때문이다. “왜?”라는 질문이 순진무구한 것은, 질문자가 평소 행실 바른 착한 청년이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이 스포츠에서 배제되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기 때문이다. 평온했던 일상의 리듬을 깬 침입자에게 향하는 질문은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저 무감각의 언어이다. 우리는 이런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좋은 대답이 가능하긴 할까?”
--- p.39~40 “농구를 하며 새삼 알게 되는 것은 농구 하는 여자는 어디에나 있다는 것이다. 당연한 말을 굳이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모두가 알지만 그럼에도 종종, 자연스럽게 없는 취급을 하기 때문이다. ‘농구 하는 여자’가 새삼스러운 것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들 ‘농구 하는 여자’들은 ‘농구 하는 남자’를 기준으로 정체성을 증명해야 하는 압박에 시달린다. 물론 각자가 겪는 압박의 강도에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누구와 함께 있는가, 어떤 공간에 속해 있는가, 어떠한 경험을 자신의 타임라인 안에 주요하게 배치하고 기억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므로 나처럼 끊임없이 저항을 느끼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압박에 익숙해지고 그것을 스스로 내면화하기도 한다.” --- p.50 “아마추어 여자 농구판에는 나처럼 특별한 이유 없이 농구를 하는 사람부터 엘리트 농구를 계속해왔던 사람까지 다양한 사람이 있다. 직업도 다 다르다. 언뜻 보기에 이곳은 각자 다른 배경과 경험, 조건들을 가진 사람들이 단지 농구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모여 공놀이를 하는 평화롭고 평범한 곳이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들을 느꼈다. 그리고 그 불편함은 여성이 스스로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는 스포츠계의 구조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다. 나이에 따라서 정해지는 호칭과 권력 구조, 할 말이 없지만 집에 가지 않고 술을 많이 마시는 것, 고기를 많이 먹는 것, 팔씨름을 아무 데서나 하는 것(힘자랑을 자주 함), 힘이 약하면 (여자들끼리 모여 있는데도) 여자 “같다고” 놀리는 것, 머리가 짧으면 남자라고 놀리는 것, 여자가 어쩌고 남자가 저쩌고를 자주 말하며 역할을 강요하는 것 등. 어떤 불편함을 느낄 때마다 킬조이kill-joy로서 스스로를 증명해내는 것에 한계를 느끼면서도 동시에 나는 계속 문제의식을 던지는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뒤풀이에 가서 술을 궤로 마시지 않으면 너랑 이제 놀지 않겠다고 애정 넘치는 으름장을 놓는 사람에게 “언니 너무 한남 같아요”라고 웃으면서 말하는 것 말고도, 재미 없는 말에 웃지 않거나 굳이 정색하거나 화낸다. 나 같은 애가 팀에 들어왔으니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체대 꼰대가 얼마나 촌스러운 것인지 알아간다. 무심한 행동과 말들에 사실 너와 내가 모두 상처를 주고받고 있었던 것을 눈치채고, 눈치 보게 한다. 솔직히 잘 안 되지만, 그래도 우리는 어떤 것이 공동체를 살아남게 하는지, 건강하게 지속시키는지 함께 방법을 찾아나가는 중이다.“ --- p.65~66 ”여성들만의 운동 영역으로 스스로를 분리하는 움직임은 불안을 일시적으로 해소하고 운동을 시작하는 여성들에게 진입 장벽을 낮춰주기 위한 것이겠지만 일상 그리고 공공장소에서 여성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소리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여성들에게 운동을 권유하는 흐름, 운동을 위한 여성들만의 공간 수요의 증가가 강남역 살인사건의 맥락과 떨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한국의 동시대 페미니스트들은 수많은 사건들에 반응하고 가치 있는 움직임을 추동해왔다. 하나의 사건 또는 의제 안에서 뒤엉키는 사회적 맥락과, 여러 차별 요소들과 마주하면서 일어나는 정동들은 신체의 반응을 불러왔다.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신체 능력을 위한 운동에 대한 요구는 교양 쌓기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몸짓이자, 안전한 공간에 대한 요청이다.“ --- p.84 ”언제나 그렇듯이 스포츠가 무릎을 탁 치게 하는 훈훈하고 뻔한 깨달음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면 “패배와 실패의 경험은 우리 팀에게 스포츠의 불확실성을 가르쳐주었고, 어떤 상대를 만나도 절대 방심하지 않는 긍정적인 역량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은 나를 포함한 우리 팀이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오히려 불어난 불안감, 낮게 흐르는 긴장감이었다. 연습과 훈련으로 그 정도를 가라앉힐 수 있을 뿐 결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했다. 더 나은 플레이와 순간들을 위해 언제 어디에서나 튀어나오고 마주칠 수 있는 사건을 견디는 것, 그것을 힘으로 전환하고 공유하는 방법을 예측하고 반복하는 것. 우리 팀이 얻은 것은 농구 코트는 불확실성의 생생한 현장이라는 감각이었다.“ --- p.166~167 ”소녀 되기에 실패한 아이는, 소년 되기에도 실패한다. 객관화되어 있는 것들은 쉽게 미끄러지고 규칙에 적극적으로 적응하는 방식은 낯설지만, 미끄러짐은 축축하고 끈적끈적한 여름의 불쾌함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유쾌한 놀이들로 이어진다. 어릴 때는 불안정한 삶들이 부러웠다. 이사를 많이 다니는 것, 집에 늦게 들어가도 되는 것, 손가락이나 목에서 우두두둑 소리가 나는 것, 소풍 갈 때 김밥 대신 유부초밥 싸오는 것, 패스트푸드에 익숙한 것, 안경을 쓰는 것. 부러운 것들을 가지고 싶다고 가족들에게 토로하면 그건 나쁜 것이라고 했다. 여유가 없거나 외롭거나 건강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긍정적인 삶의 지표이건 아니건, 당시 내가 불안정한 것들에 진심으로 매료되고 그러한 삶의 방식을 동경했던 것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은 아니다. 삶의 질서를 지키거나 어기는 방법을 몰라도 오히려 나는 아이들이 어른보다 가치 있는 것들에 이끌리는 힘이 뛰어나다고 믿는다. 불안정한 것들은 늘 새로운 것들을 발생시킨다. 실패한 여자아이는 자라서, 실패를 거듭할 것이다. 나는 내가,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가 가진 실패하는 힘과 지속되는 관계들 속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규칙들을 믿는다. 그래서 지금-여기 실패한 여자아이는 자라는 중이다.“ --- p.177~1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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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래도 우리 팀 선수들의 농구 실력에 나는 늘 감탄한다. 남성을 기준으로 둔 판단도, 남성과 분리된 여성만의 유토피아에 갇힌 상상도 아니다. 내가 아는 농구 하는 여자들은 스포츠의 세계에서 성차는 성차일 뿐, 실력 차이가 아님을 몸으로 말한다. 나는 농구를 잘하는 여자들, 언제나 농구를 잘해온 여자들을 ‘남자만큼’, ‘남자보다’가 아닌 더 다양한 언어로 소개하고 싶다. 아, 여자한테 진짜 좋은데 설명을 못 하면, 답답하고 억울하니까.” (_「#농구하는여자」 중에서)
무엇이 여성의 농구를 가로막는가 최근 여성의 몸과 운동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이와 관련한 콘텐츠들도 많아졌다. 『여자는 체력』, 『운동하는 여자』, 『오늘은 운동하러 가야 하는데』, 『살 빼려고 운동하는 거 아닌데요』 등의 책들은 (다이어트가 아닌) 자기 돌봄과 체력 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생활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근육으로 무장한 여성 코치들의 운동 유튜브 채널이 홈트레이닝 열풍과 맞물려 인기를 끄는 중이다. 이들 콘텐츠의 대부분은 여성을 운동 입문자로 상정하고 운동장의 경계석을 넘어 들어가는 법, 에서 시작한다. 혹은 여성들만의 안전한 운동장에서의 운동을 권한다. 하지만 현실 속 운동장은 결코 평화롭거나, 뜻대로 되는 공간이 아니다. 더 많은 여성들이 더 자유롭게 더 일상적으로 운동장의 땡볕으로 나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이는 농구 에세이 『계집애 던지기: 납작한 농구 코트에 유효타를 날리는 순간』의 저자 허주영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적극적으로 던지는 질문이다. 코트의 가장자리에서 쓴 실패와 애정의 고백 허주영 작가가 #농구하는여자 꼬리표를 불편해 하는 것은 그 꼬리표 자체에 ‘농구’와 ‘여성’의 조합을 유별난 것으로 여기는 시선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농구를 하다 보면 농구 하는 여자들이 실은 어디에나 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없는 취급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이들이 ‘농구 하는 남자’를 기준으로 정체성을 증명해야 하는 압박에 시달린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된다. 즉 농구 하는 여자들에 대한 평가에는 대체로 남자와 비교하는 수식어가 따라붙으며, 여기에는 여성의 신체 능력과 운동 신경이 절대적으로 떨어진다는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아니, 왜? 저자의 경험상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가 아는 농구 하는 여자들은 “스포츠의 세계에서 성차는 성차일 뿐 실력 차이가 아님을 몸으로 말한다.” 저자는 “농구를 잘하는 여자들, 언제나 농구를 잘해온 여자들”의 실력에 늘 감탄하며 이들을 “‘남자만큼’, ‘남자보다’가 아닌 더 다양한 언어로 소개”하고 싶어한다. 좌충우돌, 집념의 ‘즐농’ 사수담 “나는 큰 고민 없이 일명 ‘즐농(즐거운 농구)’를 추구한다는 팀에 들어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즐농’이 매우 모순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왜냐하면 나에게 농구는 이겨야만 즐거운 것이었다. 이기면 즐겁지만, 지면 슬펐다.(...) 우리는 왜 이렇게까지 우승을 하려고 했던 걸까. 아마추어 대회에서 우승을 해도 누가 군면제를 받거나 연금을 받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게다가 상금을 받아도 겨우 회식 한 번 하고, 트로피를 받으면 거기에 술을 콸콸 따라 마시며 동네를 시끄럽게 할 뿐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못해서인지 그 누구도 패배를 기꺼워하지 않았다. 즐겁다며… 즐겁게 해준다며…? 우리 팀에 들어간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약간의 배신감이 들었다.” (_「승리 없이 ‘즐농’할 수 있을까」 중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렇게 많은 태클이 작동하고 있는 운동장에서 여성 농구인은 과연 끝끝내 즐겁게 농구할 수 있을 것인가? 헷갈리고, 뒷걸음질 치고, 좌충우돌하고, 이것도 문제 저것도 문제, 투덜거리면서도 동료 농구인들과 함께 이룬 아마추어 농구 ‘공동체’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즐농(즐거운 농구)’ 사수담이 이 에세이의 진정한 묘미다. 헬스장에서 광배근이 어떠니 승모근이 어떠니 묻지도 않은 훈수를 두며 운동을 방해하는 남자를 한마디로 보내버린 에피소드, 여자끼리 있는데도 서로 남자 같다거나 여자 같다고 놀리는 농구 동호회 뒤풀이 에피소드 등 곳곳에서 저자 특유의 재치 있는 입담이 웃음을 준다. “온전히 나로서 승리하고 패배하고 싶은” 농구인인 저자는 매년 수 차례의 서울시, 전국 대회에서 뛰며 승부욕을 불태우지만, 어느 순간 승리에 대한 자신의 집념 역시 학습된 것은 아닌지 성찰해본다. 남녀 구분 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퀴어여성게임즈에서 서로 환대하는 다정하고 낯선 분위기를 경험한 저자는 스포츠에 대한 상상력이 더욱 넓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여성, 몸과 스포츠, 장소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은 스포츠가 승패를 떠나 모두에게 일상적이고 모두에게 즐거운 경험이 되도록 그 목적과 문화를 다시 써보는 일로부터 가능하다고 말이다. 실패한 여자아이는 자라서 ‘계집애 던지기’! 페미니스트 철학자 아이리스 메리언 영은 『계집애처럼 던지기 Throwing Like a Girl』에서, 여성의 여성스러움feminine을 어릴 때부터 발현되는 본질적 특성이라고 본 독일계 현상학자/신경의학자 어윈 슈트라우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영에 따르면 여자아이들의 몸짓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미숙하게 움직이도록 배워온 결과다. 그렇게 사회문화적으로 학습되어온 ‘계집애’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선언이 곧 이 책의 제목이 되었다. “나의 경험을 말하는 것이 동시대 다른 여성들에게 어떤 힘을 줄 수 있을까?” 저자는 증언한다. 여성들의 ‘실패’한 경험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버티고 지속해온 힘, 운동장 한가운데의 더 뜨거운 땡볕이 더 많은 여성들의 몫이 될 수 있도록 ‘공동체’를 이루고 ‘규칙’을 바꾸어내고자 하는 긍정성을. 이것이야말로 본격 여자가 농구 하는 이야기이며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이후 독자들이 기다려왔던 이야기다. “불안정한 것들은 언제나 새로운 것들을 발생시킨다. 실패한 여자아이는 자라서, 실패를 거듭할 것이다. 나는 내가,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가 가진 실패한 힘과 지속되는 관계들 속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규칙을 믿는다.” (_「실패한 여자아이는 자라서」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