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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
높고도 슬픈 여성성의 상징, 하이힐 - 수전 팔루디의 『다크룸』 평평하면서 나를 찌르는, 사진 -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 내 마음의 정처, 섬 -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 모든 일이 시작되었던 그때, 쿠션 - 미켈라 무르지아의 『아카바도라』 존재와 무의 세계를 열어가는, 열쇠 -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혼돈에서 생성된 하느님, 치즈와 구더기 - 카를로 진즈부르크의 『치즈와 구더기』 말씀이 있기 전에 은유가 있었다, 휘파람 - 엔리코 이안니엘로의 『원더풀 이시도로, 원더풀 라이프』 혼자서 행복하면 불행한 인간이 된다는 것, 페스트 -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시선 형상이 없으나 이름으로 존재하는, 붓다buddha - 김아타의 〈Nirvana〉 시리즈 기억과 반역의 꿈, 파이프 - 마그리트의 파이프 불안이라는 실존의 형태, 유리 - 곽인식의 유리 물성을 이용한 회화 평범하면서도 다채롭지 않은, 둥근 어깨 - 박수근의 둥근 선으로 된 그림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예수 - 김병종의 〈바보 예수〉 연작 깨어나지 못할 묵서명을 새기며, 백자항아리 - 김환기의 〈백자항아리〉 그림 공간 가능성이 사라진 침묵, 흰옷 - 영화 〈아쉬람〉 사랑과 화해의 공간, 벽 - 연극 〈벽 속의 요정〉 운명을 예언하는, 하모니카 - 영화 〈마농의 샘〉 이 풍진 세상에 아름다움 하나 있으니, 매화 - 영화 〈리큐에게 물어라〉 허기지고 시끄러우면서도 본질적인, 냄비 - 영화 〈가버나움〉 은닉된 것 속의 일어남, 이름 -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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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그 무엇도 자신의 사랑에 등을 돌릴 만큼 가치 있는 건 없어요. 한데 저 역시 그렇게 했지요. 영문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의사 리유는 페스트로 격리된 도시에서 탈출해 애인에게 돌아가기 위해 불법적인 모험을 감행하려다 다시 도시에 남아 환자들을 돌보기로 한 신문기자 랑베르에게 이렇게 말했다. 랑베르는 그 도시가 원래 자신이 살던 도시도 아니었고, 애인은 딴 곳에 있었으므로 갑자기 시행된 봉쇄조치 때문에 탈출할 방법만 찾고 있었다. 리유는 환자들을 돌보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자는데, 그를 따라다니며 자원봉사를 하던 사람들을 호텔에서 구경만 하던 랑베르는 어느 날 문득 깨닫는다. 혼자서만 행복하면 불행하다는 것을, 그러나 자원봉사자 타루는 만약 랑베르가 남들과 함께 불행을 나눌 생각이라면 행복을 위한 시간은 앞으로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도시에는 불행만 남은 것이다. 코로나19가 대구를 강타했을 때 누구도 이 도시를 버리고 떠나지 않았다. 떠나기는커녕 많은 사람이 도시로 들어와 환자들을 치료하고 건강한 사람들은 환자들을 위한 자원봉사를 했고, 행정업무를 도왔다. 이 도시에 사는 한 행복도 불행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p.89~90 「은유, ‘혼자서 행복하면 불행한 인간이 된다는 것, 페스트-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중에서 김병종은 개인전이 끝나고 난 후 소품 한 점을 지인에게 선물로 드렸는데 그 그림을 볼 때마다 지인의 어머니는“이 무슨 걸레 같은 것을 걸어놓았느냐”고 하셨단다. 예수의 모습이 본래 그러하다. 가난했던 사람의 아들은 들에서 밤을 보내고 남루한 옷을 입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러나 얼굴은 가장 평화롭다. 걸레 같다는 그 그림을 보면 평화가 달리 없다. 나는 그 그림을 보면 이 말이 떠오른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 p.160 「시선,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예수-김병종의 〈바보 예수〉 연작」 중에서 냄비라는 사물은 우리를 얼마나 가난하게 하던가. 보글거리며 끓어넘치는 라면이 담긴 노란색의 양은 냄비나 혼자서 쓸쓸하게 석유곤로에 끓여서 먹던 된장찌개가 담긴 작은 냄비부터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 사골을 끓이던 곰솥이라 불리는 커다란 냄비까지 모든 냄비에는 허기가 담겨 있다. 시골에서 냄비는 자주 담을 넘어 이웃집 부엌으로 전해지기도 했으나 무엇보다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혼자서 이 도시에 닿아 저녁이면 연탄불 위에 얹어놓던 작은 냄비의 새카맣게 탄 바닥이다. 나는 바닥이 탄 냄비로 무려 몇 년을 보내면서 허기를 달래고 객지 생활의 외로움을 달랬다. 자인이 요나스를 태우고 다니던 커다란 냄비부터, 집 바깥으로 몽땅 던져져 있던 세간살이에서 도드라져 보이던 작은 냄비까지 그것에는 인간의 삶을 조금도 속일 수 없이 정직하게 드러내 보이는 삶의 허기가 담겨 있다. 그것은 어둠의 시간이기는 했으나 자인에게처럼 유다의 시간은 아니었다.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어요.”레바논 빈민가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처럼 보여주는 이 영화는 보는 내내 인간의 가치에 대한 물음을 묻게 한다. 자인의 부모, 이웃들은 지금 우리의 가치관으로 보자면 쓰레기보다 못한 존재들이지만 그들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할 것이다. 서류가 없어서 병원 문턱에서 죽은 딸을 봐야 했던 자인의 엄마는 자신도 죽을힘을 다해 살아가는데 왜 비난만 하느냐고 변호사에게 소리친다. 자신처럼 살았으면 변호사는 아마도 자살했을 것이라며. --- p.233~234 「공간, ‘허기지고 시끄러우면서도 본질적인, 냄비-영화 〈가버나움〉」 중에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한 치히로는 결국 온천장에 취직을 하게 되는데 그 세계에서는 살아남으려면 누구나 일을 해야 한다. 온종일 석탄을 나르다가 먹이로 주는 별사탕을 받고 즐거워하는 검댕이들이나, 밥 먹을 시간도 없이 6개나 되는 손으로 쉴새 없이 일하는 가마 할아버지는 쉬지 않고 노동에 시달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의 모습과 같다. 일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고,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냉혹한 자본주의 사회의 법칙은 유령들의 세계에서도 예외가 없다. 그러면서 치히로는 유바바와 계약서를 쓰면서 치히로라는 이름 대신에 센이라는 이름을 쓴다. 우리가 한 사회의 구성원이 되고 직위로 불리게 되면서‘나’라는 본래의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직장에서 김 대리, 손 부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동안 김 대리와 손 부장의 개인적인 자아는 없다. 철저한 직장의 구성원으로서의 김 대리와 손 부장만 있을 뿐이다. 그들이 자신의 본래 이름을 잊어버리고 김 대리와 손 부장으로 사는 동안 그들은 컨베이어 벨트의 부속품처럼 소모품으로 전락하지만 거기서 벗어나는 방법은 자신의 이름을 찾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이름을 잊어버리면 거기서 나갈 수 없다는 하쿠의 말은 자본주의 세계에서 노동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뼈아픈 말이다. --- p.240~241 「공간, ‘은닉된 것 속의 일어남, 이름-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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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을 통해 예술작품을 이해하다
예술작품은 다양한 시각을 통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특히 사물과 언어는 예술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포인트이다. 그중에서 사물은 물질세계의 한 구체적인 형상을 이르지만 더 나아가 보면 사건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영화나 사진, 그림, 문학 등 예술에는 사물의 무늬가 씨줄과 날줄로 엉켜서 아름다운 교직을 이룬다. 천영애 작가의 산문집 『사물의 무늬』는 이 사물을 통해 대중들이 예술작품을 좀 더 쉽게 이해하여 예술작품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책이다. 사물을 통해 예술작품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 책에서는 은유와 시선,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은유’에서는 문학작품을 다루는데 『다크룸』과 『밝은 방』, 『남쪽으로 튀어』, 『아카바도라』,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치즈와 구더기』, 『원더풀 이시도로, 원더풀 라이프』, 『페스트』 에서는 페스트 등을 하이힐과 사진, 섬, 쿠션, 열쇠, 치즈와 구더기, 휘파람, 페스트 등의 사물을 통해서 좀 더 다른 시각으로 편하게 해석하면서 이 작품들이 드러내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사유하고자 했다. ‘시선’에서는 그림을 다루는데 〈김아타의 니르바나 시리즈〉는 붓다를 통해서, 〈마그리트의 파이프〉는 파이프를 통해서, 〈곽인식의 유리물성을 이용한 회화〉에서는 유리, 〈박수근의 둥근 선으로 된 그림들〉에서는 둥근 어깨, 〈김병종의 바보예수 연작〉에서는 예수, 〈김환기의 백자항아리 그림〉에서는 항아리 등을 통해서 그림들을 좀 더 깊이 있고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해 보았다. ‘공간’에서는 영화와 연극을 다루는데 영화 〈아쉬람〉에서는 흰 옷을 통해서, 〈마농의 샘〉에서는 하모니카, 〈리큐에게 물어라〉에서는 매화, 〈가버나움〉에서는 냄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는 이름을 통해서 작품을 해석한다. 또한 연극 〈벽 속의 요정〉에서는 벽이라는 사물이 예술작품에서 어떻게 변주되어 왔는지를 살펴보고 일회성 예술인 연극이 우리의 인식 속에서 긴 시간동안 자리 잡기를 시도했다. 문자로 된 문학작품은 즉각적으로 세계를 보여주지만 언어가 가진 한계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사물들의 은유를 통해서 더 밝게 작품의 진리를 드러낼 수 있다. 또한 눈으로 봐야만 하는 그림은 우리의 시선에 깊이 침투해 들어오는 사물들을 통해 명료하게 작품을 볼 수 있는데 그 사물들이 단순한 사물 너머의 세계를 지향함으로써 예술작품이 되는 것을 보여 주고자 했다. 영화야말로 너무나 다양하고 쉽게 사람들에게 다가오지만 그럼으로써 영화라는 예술작품의 본질을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영상의 매력에 더해 작품 전체를 떠도는 사물을 포착하여 해석을 시도함으로써 영화의 본질에 다가가고자 했다. 작가는 대구경북을 배경으로 쓴 문학 작품의 공간을 찾아서 기록한 책 『시간의 황야를 찾아서』를 비롯해 삶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문제를 다룬 시집 『무간을 건너다』, 삶에서 표현되는 다양한 언어의 표현방식을 실험한 『나무는 기다린다』, 그때그때마다의 삶을 바라보는 사유를 표현한 첫 시집 『나는 너무 늦게야 왔다』등 다양한 분야로 작품 활동의 폭을 넓히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