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Rachid Benzine
문소영의 다른 상품
|
잠들기 전 저녁에 책을 읽는 건 어머니에게도 빼놓을 수 없는 일과가 되었습니다. 베개를 베고 옆으
로 누워서 몸을 웅크리고 눈을 감으시죠. 이미 수십 번도 더 들은 이야기에 또다시 경이로워하거나 무서워 벌벌 떨게 될 걸 아는 어린아이처럼요. 《나귀 가죽》, 이 책을 제가 읽어드린 것만도 벌써 이백 번이 넘는답니다. 어머니가 이 작품을 알게 된 건 25년 전 제가 도서관에서 빌려다 드린 오디오테이프를 통해서였죠. --- p.6 어머니의 어설프기 그지없던 프랑스어 실력은 당신 스스로를 더 미천하게 느끼게 했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것만으로도 어머니에게는 영광이었지요. 몰리에르의 언어, 어머니는 그 언어를 모욕과 굴욕의 순간을 통해서 배우셨어요. --- p.22 그런 일이 있은 바로 그날 어머니는 앞으로 다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한테도 도움을 청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어디를 가든 혼자 알아서 하는 법을 배우리라 맹세하셨답니다. 저는 어머니께 형들이나 제가 ‘아무나’는 아니라고 다정하게 말씀드렸어요. 어머니는 가슴에 손을 얹으시곤 살포시 미소만 지으셨지요. 어머니는 저희에게 정말 많은 걸 주셨지만 저희한테 절대로 부탁 같은 걸 하실 분이 아니랍니다. --- p.25 노래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던 몇 분 동안 어머니는 실라였고, 아다모였고, 조 다생이었고… 달리다였어요. 카이로의 여가수 달리다의 노래는 거의 다 알고 계셨지요…. 찬란한 과거와 첫사랑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늘 돌아가고 싶어 하는 고향에 대한 연가이자 망명생활을 그린 노래 〈헬와야 발라디〉를 부르시던 어머니의 얼굴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 --- p.31 저는 진심으로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형들과 어머니 사이에 그리고 저와 어머니 사이에서 느껴지는 학교교육이 심어놓은 문화적 단절은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계급을 이탈한 사람은 두 개의 의자 사이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는 것처럼 늘 아슬아슬하거든요. 물리적인 자세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을 배신한 사람이라는 지울 수 없는 기분이 들게 하는 무언의 고통 때문에 괴로운 겁니다. --- p.62 이따금, 맞아요, 어머니가 “그만 가게해다오. 너한테 짐만 되잖니”라는 말씀을 하신답니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죠. 하지만 제가 곁에 있을 때면 어머니가 정말 행복하고 편안해 보이세요. 제가 어머니께 위로가 되는 건 확실합니다. 하지만 말씀은 안 하셔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힘드신 건 아닐까요?… 저의 이런 집착이 따지고 보면 의학적 만큼이나 감정적 수단에 의한 생명 연장이 아닐까요? --- p.97 “보이니, 아들아. 저 눈송이들이? 천사들의 베개란다…. 날 데리러 왔나 보다”라며 어머니가 숨을 할딱이셨어요. 저는 미소를 지었지요. 어머니의 시적인 표현은 늘 놀라웠습니다. 한 번도 글이라고는 쓰실 줄 몰랐던 어머니의 입에서 가끔씩 불쑥 튀어나오는 문장들이 저의 말문을 막히게 했답니다. --- p.106 |
|
“발자크 소설 좀 읽어주겠니?”
삶과 그 부침에 지치고 패인 어머니. 그런 모친이 깰 때를 대비하여 손에 책을 쥔 채 대기하는 아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어머니와 문학 교수인 아들이 웃고 웃으며 함께 산 지 15년. 사라질까 두려운, 그 켜켜이 쌓인 건강한 추억들. “저의 어머니가 훌륭한 어머니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단지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했던 어머니였는지도 모르지요. (…)제가 아는 건 단지 그분이 저의 어머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번 생에서 제가 누린 가장 큰 호사는 어머니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93세로 생을 마감한 어머니를 15년 동안 돌봐온 아들이 자신의 어린 시절과 어머니의 삶을 이야기한다. 모로코에서 태어나 벨기에에 이민한 부모님.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다섯 아들을 키워낸 어머니. 글을 읽을 줄 모르지만, 아들이 읽어주는 발자크의 소설을 평생 가장 좋아했던 어머니. 그 어머니의 꿈과 슬픔과 기쁨을 헤아리며 쓴 이 책은 애잔하면서도 유쾌하다. 저자는 벨기에 루뱅카톨릭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15년 전에 어머니가 쇠약해지자 형제들 중 유일하게 미혼이었던 자신이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어머니 집으로 들어왔고, 그때부터 어머니와 함께한 15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아들에게 신체를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 어머니와 대학에서 강의하는 시간만 빼고 나머지는 전부 어머니에게 쏟아부은 아들. 어머니를 돌보느라 더더욱 쉰넷이 되도록 결혼 한 번 못해본 아들은 그 15년의 세월을 어머니를 오롯이 사랑할 수 있었던 호사의 시간이라고 말한다. ‘어머니’라는 단어가 지닌 기본적인 애틋함과 더불어 특히 투병 중인 어머니를 돌본 이야기는 자칫 슬픔의 감정을 자아내기 쉽지만, 저자는 어머니와의 추억을 시종 유쾌하게 들려준다. 어머니를 돌본 그 세월 동안 힘들었거나 어려웠던 점은 언급조차 없다. 장성한 아들이 혼자서 어머니를 마지막까지 15년 동안이나 모시는 동안 힘든 일들이 왜 없었을까마는, 책을 다 읽고 나면 어머니와의 소중한 추억들이 사라질까 안타까워하는 아들의 마음이 절절히 와닿는다. 저자는 위로 넷이나 되는 형들보다는 자신이 그 임무를 더 잘할 것으로 생각했고, 어느 날 예기치 않게 어머니의 몸 아랫부분까지 닦아드리게 됐을 때는 그럴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그리고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발자크의 소설을 수백 번 읽어 드렸어도 매번 새로웠다고 말한다. 부모와 자식 간에 내리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게, 아이로 태어나 아이로 돌아가는 게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병약한 어머니를 돌보는 것 또한 같은 뿌리의 사랑이라는 게 느껴진다. 이 아들에게는 사라질까 두려운 어머니와의 추억들이 차고 넘쳐 보인다. 어머니를 떠나보낸 사람이라면 그 추억들이 ‘사라질까 두려운’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리라. 추억은 사진으로도 다 붙잡아 둘 수 없고, 기억은 더욱 유한한 것이라 우리는 그것이 언제 사라졌는지도 알지 못하니 말이다. 벨기에에 정착했으나 프랑스어를 할 줄 모르는 어머니가 병원이건 관공서건 어디서든 늘 “네”라는 대답만 해서 온 가족이 낭패를 당한 이야기, 간신히 조금 익힌 프랑스어를 아무 때나 이상하게 써 대는 어머니 때문에 온 가족이 배꼽이 빠지게 웃었던 일들, 삶과 그 부침에 지치고 꺾인 일상에서도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가 TV에 나오면 신나게 따라 부르던 어머니의 모습, 어느 날 형제들이 돈을 모아 어머니의 우상인 사샤 디스텔의 콘서트 표를 사드렸고 그 공연장에서 어쩌다 무대에까지 오르게 되어 평생 간직할 추억을 만드신 일, 밤새 털로 짜주신 수영복이 바닷물에서 놀다 나올 때 무릎까지 쑥 내려가 버린 바람에 친구들의 야유를 받은 일… 등에서는 화목한 가정의 작은 즐거움이 반짝거린다. “부모에게 감사하는 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지만, 내가 부모가 됐을 때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은 아이가 절대로 부모한테 뭔가 빚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만드는 거예요. 아이들은 자유로워야 해요.” 아들은 학교라고는 다녀본 적 없는 어머니가 어디서 이렇게 고차원적인 철학을 얻으셨을까, 놀랍기만 하다. 이민자 가정에 대한 차별적 분위기 속에 일찍 과부가 된 어머니의 일상은 굴욕적인 순간들로 가득 차 있어도, 어머니는 그 누구에게도 불평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으로 아들들을 키운다. 아들들은 어머니의 문맹이 부끄럽고 어머니의 도무지 개선되지 않는 이상한 억양에서 어쩔 수 없이 무식한 이민자라는 처지가 드러나는 것이 싫지만, 어머니의 밝은 천성과 무한한 헌신은 가족을 하나로 단단히 묶는다. 한창 자라는 아이들이 어쩌다 나쁜 습관을 배운 듯하면 엄하게 꾸짖고, 결코 아무 노래나 따라 부르지 않는 어머니의 단정함에서 아들들은 어머니의 ‘낡아빠진’ 교양을 자연스레 계승한다. “우리가 어릴 때는 엄마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자식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달래기 위해 돈벌이를 하느라 건강이 쇠해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게 되지만 그렇게 가슴이 먹먹해지지는 않지요. 청소를 하거나 설거지를 하는 걸 부당하게 여겨서가 아니에요. 단지 그런 생각 자체를 아예 하지 못하는 겁니다. 무릇 어머니란 자식을 위해 희생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말이지요. 쇠꼬챙이처럼 말라비틀어지는 것을 무릅쓰고라도 말입니다.” 수줍음을 잘 타는 어머니의 밝고 정직하고 강한 성품이, 영리하고 따듯하고 맑은 아들의 글을 타고 우리 마음에 깊은 감동으로 다가오는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