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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부 가죽 작업복을 입은 사람 1장. 지옥의 문 2장. 천국의 문 3장. 새 바빌론 4장. 순찰로 5장.샛별 2부 부서진 대패 6장. 노동 군대 7장. 인류를 사랑하는 이들 8장. 모루와 망치 9장. 사원의 구멍들 3부 기독교도 헤라클레스 10장. 중단된 연회 11장. 노동 공화국 12장. 이카로스의 여행 에필로그_10월의 밤 연표 주 |
Jacques Ranci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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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제는 우선, 노동과 휴식의 정상적 연쇄에서 떨어져나온 이 밤들의 역사다. 불가능한 것이 준비되고 꿈꿔지고 이미 체험되는, 말하자면, 정상적 사태 진행이 감지되기 어렵고 공격적이지 않게 중단되는 밤.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을 사유의 특전을 누려온 이들에게 종속시키는 전래의 위계를 유예시키는 밤. 공부의 밤, 도취의 밤.
--- p.10 프롤레타리아들의 이러한 밤들의 역사는 인민적이고 평민적이며 프롤레타리아적인 순수성의 보존을 근심하고 집착하는 것에 관해 정확히 다음과 같은 심문을 불러일으키고 싶을 것이다. 왜 학문의 사유 또는 투사의 사유는 그것의 “인민적” 대상의 자기의식과 자기동일성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곤란하게 만드는 그림자와 불투명함을, 어떤 불길한 제3자?프티부르주아, 이데올로그, 또는 주인-사상가?에게 뒤집어씌우기를 언제나 필요로 하는가? --- p.13 이 역설에서 해방의 도정들의 허영을 인지했다고 너무 빨리 기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노동자가 열광해야 마땅하나 그리할 수 없는 자기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시초 질문의 반복을 여기서 더 유의미하게 재확인하게 될 것이다. 점유자들이 도주하기만을 꿈꾸는 중심을 축으로 세계를 재건하려는 기이한 시도 안에서 작동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 도정들 위에서, 프롤레타리아적 실존의 모든 속박을 가로질러 사물의 질서에 대한 근본적 비동의를 견지하려는 긴장 안에서 타자의 것이 획득되지 않는가? --- p.15 “……나는 화가가 되고 싶었어. 하지만 가난은 특전을, 심지어 살아가기 위해 이런저런 고역을 택하는 특전조차 갖지 못해.” 문제는 나태할 권리가 아니라 다른 노동의 꿈이다. 반들반들한 표면 위에서 천천히 응시하며 아주 부드럽게 손동작하는 노동이다. --- p.25 발설된 말의 수다스러움은 실격시켜버리고 들리지 않는 말의 침묵하는 설득력은 선호하는 이러한 경향의 회피는 무엇을 뜻하는가? 인민 신체의 침묵하는 진리에 대한 이러한 매혹에는, 노동자들?대중, 인민, 평민……?이 매우 행복하게 실천하면서 타인들에게는 의식의 파열과 표상의 신기루를 남겨주는 다른 문화에 대한 이러한 환기에는, 모종의 책략이 작동하지 않는가? --- p.30 노동자로서의 자기 임무를, 세상의 절반은 무위도식하기 때문에 실은 둘의 노동인 이 임무를 완수한 이가 시인으로서의 사도직을 완수할 수는 없다는 점을 빅토르 위고 씨는 잘 안다. --- p.33 사실 노동자들이 말을 한다면 이렇게 말하기 위함이다. 자신들에게는 밤이 없다고. 왜냐하면 밤이란 낮의 노동에 질서를 부과하는 자들에게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들이 말을 한다면 이는 자신들이 욕망하는 밤을 얻기 위함이다. 저들의 밤?목수 고니가 “잠만 처자게 하는” 밤이 다가온다고 했던 그것?이 아니라, 그림자와 외양의 왕국인 우리의 밤을. 잠자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있는 자들에게 남겨진 그 왕국을. --- p.36 착취로부터 계급의 발화로, 노동자 정체성으로부터 집단적 표현으로 곧장 뻗은 길이라 여겨지는 곳에서 이러한 우회를 거쳐야만 한다. 이 혼종적 무대에서 프롤레타리아들은 자신들을 만나러 떠나왔고 종종 자신들의 역할을 전유하길 욕망하는 지식인들과 공모하여 위로부터의 말과 이론으로 시도해보고, 누가 타자를 위해 말할 권리를 갖는지 정의하는 낡은 신화를 재연하고 전위한다. --- p.45 섬기다와 살아가다, 이 두 단어를 똑같이 경멸하는 투로 강조하는 재단사 베르토에게는 섬김이 죽음 앞에서의 공포와 맺는 관계를 가르쳐줄 그 어떤 철학자도 필요치 않다. --- p.61 낯선 집단적 운명에 대한 상상?착취자 없는 부르주아 문명, 영주들이 없는 기사도, 주인도 하인도 없는 주인다움?에 달려 있는 개인적 모험. 요컨대 노동자들의 해방이라는 그 상상. --- p.76 또하나의 병, 그것은 목수의 달뜬 예상이 아니라, “매분마다 신에게 구걸하는” 어떤 삶의 느린 임종 안에서, 닫히거나 비어 있고 또는 침체해 있는 작업장의 문을 두드리러 가는 흐름 안에서, 영혼의 고통과 신체의 고통의 동일한 영속적 교환이다. --- p.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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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된 발화의 역사, 대중 애호가들이 부단히 덮으려 했던 이중성과 모방의 역사
: 말하는 존재들의 지성적 평등을 위한 아포리아 프롤레타리아의 진짜 고단함을 부르주아의 허망한 우울함과 맞바꾸려 한다는 것은 확실히 미친 허세다. 하지만 이 고된 일들의 가장 고생스러운 부분이 이런 일들이 프롤레타리아에게 우울할 시간을 남겨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면, 최고의 진짜 슬픔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가짜를 갖고 놀 수 없다는 것이었다면? 지옥의 문에서 진짜와 가짜의 분할, 쾌락과 고통의 계산은 단순한 영혼이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것보다는 아마도 조금 더 미묘할 것이다. _본문 37쪽 책은 전체 3부로 연대기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1830년 7월 혁명에 참여한 노동자들로부터 탄생한 생시몽주의 노동자 저널들과 거기에서 펼쳐진 생각과 사상들에 대한 독해에서 시작해(1부), 1830년대와 1840년대에 지속적으로 발전해간 생시몽주의 실천들과 논쟁들을 다루고(2부), 마지막으로 이집트와 미국에서 시도된 이카리아 공동체 건설의 실패와 그에 따른 환멸을 다루면서(3부) 끝난다. 이는 프랑스 사회주의운동 초기의 다양한 목소리들을 통한 노동자들의 집단적 담론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기획이 아니다. 랑시에르는 시인이자 목수인 고니, 양재사 데지레 베레, 내의 제조공 잔 드루앵, 계량 용기 제조업자 피에르 뱅사르 같은 인물들이 내는 수다스럽고 이질적인 목소리들을 주목하며 지배담론의 질서 안에서 ‘자리를 벗어난 말하기’라는 파열의 형상을 드러내고자 한다. 시를 짓고 노래하는 고게트에서의 밤의 사회화, 보편적 인류와 형이상학을 논하며 느리게 산책하는 ‘시대착오적’ 프롤레타리아들, 전산업적인 도시 군중과 후진적인 수공업 노동자와 프티부르주아들의 모순과 역설과 뒤엉킴. 요컨대 이 책은 사유하는 자와 생산하는 자의 플라톤적인 분할을 가로지르는 지성적 평등에 대한 논증이자 지배적인 ‘질서의 철학’에 대한 ‘논리적 반역’이다. 타자들의 언어를 전유한 밤의 노동자들과 침묵하는 인민에 대한 근대적 매혹, 그 사이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실존과 투쟁의 의미를 정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타자의 비밀이다. “상품의 비밀”이 아니고. 상품에 낮처럼 밝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런데 관건은 낮이 아니라 밤이요, 타자들의 소유가 아니라 그들의 “비애”요, 모든 현실적 슬픔을 포함하는 창안된 슬픔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자신들을 집어삼키려드는 것”에 맞서 일어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착취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자신들이 착취와는 다른 것을 향하도록 운명 지어져 있음을 드러내주는 자아 인식이다. 이러한 자아 드러냄은 타자들, 지식인들, 이 지식인들이 나중에 좋은 부르주아든 나쁜 부르주아든 구별 않고 여하튼 아무 관련도 없길 원한다고 말하게 될?우리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반복하고 있는바?부르주아들의 비밀로의 우회를 거친다. _본문 41~42쪽 랑시에르는 『프롤레타리아의 밤』으로부터 노동자 말하기를 일정한 존재 양식이나 어떤 문화(생활사)로 귀착시키는 방식으로는 문제가 되는 현실을 해명할 수 없다는 것, 이 노동자의 말하기를 일종의 노동자적 집단 형체 안에 가두면서 사실상 거기서 문제가 되었던 유형의 진리를 없애버렸다는 것에 주목했을 뿐만 아니라 리얼리즘적이고 자연화하는 기능을 갖는 서사를 채택할 수 없다는 결정적인 문제의식을 획득한다. 말하자면 어떤 자리에서 어떤 형체를 끌어내고, 이 형체에서 어떤 목소리를 끌어내는 서사를 채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리얼리즘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서사 양식은 말하기를 행하는 이들을 ‘그들 자신의’ 세계 안에 머물도록 배치하며, 그들의 위상을 ‘인가’한다. 그러나 담론의 질서 안에서 노동자의 존재 양식에 합당하다고 간주되어 할당된 말을 거부하고 이런 말하기의 자리에서 벗어나면서 저 질서를 전복했던 ‘밤의 노동자들’이 타자들(부르주아, 학자, 시인)의 언어를 전유했듯, 정작 문제는 이른바 부당한 담론들이 짜인 망의 구성을 해명하는 것이었다. 일정한 정체성을, 형체와 말 사이의 일정한 동일성의 관계를 깨뜨리는 담론들. 결국, 이런 말하기의 세계에서 인가받지 못한 것이자 흠이 있는 것이라는 그 특성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경험들의 모호함과 비결정성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랑시에르에게 다른 식의 서술이 필요했다. 그가 이후 『역사의 이름들』을 통해 ‘지식의 시학’으로 명명하는 언술로써 주목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이단적 역사의 비동시대성이자, 그 단절의 복합성이다. 요컨대 철학과 역사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밤의 말들’을 노동자 집단의 사회경제적 문화적 동일성의 표현으로 파악하기를 거부하고, 반역적 노동자들의 집단적 상징화가 일상적인 노동의 현실과 여기서 비롯하는 노동자적 동일성과의 단절을 통해 형성되는 것임을 논증하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