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추천의 말
프롤로그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주도하다 I. 알트마르크 융커의 젊은 시절(1815~1847) II. 영주에서 정치가로(1847~1851) III. 프랑크푸르트,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리의 외교관(1851~1862) IV. 위대한 프로이센과 제국 창설자(1862~1871) V. 제국의 안정화와 평화 수호(1871~1890) VI. 권좌에서 물러난 후(1890~1898) 에필로그 논쟁의 대상 비스마르크 옮긴이의 말 연표 원전 목록 주 찾아보기 |
Eberhard Kolb
김희상의 다른 상품
|
1847년은 비스마르크 인생의 결정적인 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우선 요하나 폰 푸트카머와 맺은 약혼은 7월 결혼식으로 이어져 두 사람이 부부가 됨으로써 인생의 안정적인 기반이 확보됐다. 다른 한편으로 비스마르크는 1847년 소집된 ‘통합신분제의회(Vereinigter Landtag)’에 진출하면서 정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비스마르크가 자신에게 걸맞은 행동반경을 확보함으로써 불투명한 전망에 시달리며 짝을 찾아 헤매던 불안정한 시기는 끝을 맺었다.
---p.49 의회에 입성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5월 17일, 32세의 최연소 의원은 첫 데뷔무대에서 일대 소동을 일으켰다. 자유주의 정당 소속 의원 한 명이 프로이센을 위한 성문헌법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1831년 나폴레옹의 강제 점령에 저항해 일어난 민중봉기의 동기가 무엇보다 헌법을 갖고자 하는 열망이었다고 강조했다. 1815년생 신참 의원 비스마르크는 나폴레옹에 저항해 일어난 이 투쟁의 동기, 앞서 언급한 연설이 주장한 동기를 ‘바로잡아야만’ 한다고 여겼다. 몇 번이고 반복해 ‘혀를 찬 뒤’에 비스마르크는 포문을 열었다. “프로이센이 외국의 권력자에게 당한 박해와 굴욕만으로 피가 들끓지 않는다면, 침입자를 겨눈 증오가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하지 못한다면”, 민족의 명예에 스스로 먹칠하는 어리석음이라고 비스마르크는 일갈했다(의회는 벌집을 쑤신 듯 소란스러워졌다). 해방전쟁의 의미를 그처럼 편파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몇몇 의원들이 항변했다. 그러자 비스마르크는 강한 반어법으로, 당시 저항운동을 두고 헌법을 가지고 싶은 열망의 반영이라는 선배 의원들의 가르침 덕에 봉기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유감이 씻은 듯 사라졌다고 쏘아붙였다. “저는 항상 당시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려 뜨거운 투쟁을 벌이게 만든 원인을 외세가 제공한 줄 알았는데, 지금 가르침대로라면 오히려 국내 세력이 이런 노예 상태를 자원한 셈이로군요. 이런 가르침에 제가 매우 감사하다는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초선 의원의 발언, 아니 우리가 아는 비스마르크의 참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낸 연설이다! 대담한 배짱으로 정적에게 돌진해 칼로 베는 것만 같은 날카로운 연설로 상대를 도발하는 솜씨는 물론, 냉철한 반어법과 물어뜯는 것과 다름없는 조롱은 상대의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다. ---pp.51,52 ‘왜 오늘날 대국들은 전쟁을 할까?’ 비스마르크는 이런 물음을 던지고 스스로 핵심을 잘 간추려 답한다. “대국을 떠받들면서 소국과 본질적인 차이를 빚어내는 유일한 기초는 국가 이기주의이지 낭만주의가 아니다. 대국이 이해관계와 상관없는 문제를 두고 다투는 일은 대국의 품위와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러분, 전쟁의 합당한 목표가 무엇인지 내게 보여주기 바란다….” ---pp.69,70 비스마르크는 자신이 보는 외교정책의 방향을 유려한 문체로 정확하고도 폭넓게 담아 레오폴트 폰 게를라흐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의 일부는 그의 자서전에 소개되어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기록은 전적으로 국익에 초점을 맞춘 ‘현실정치(Realpolitik, 이 개념은 당시에 첫선을 보였다)’를 강조하는 비스마르크 사상의 정수로 간주된다. ‘현실정치’는 ‘혁명과의 싸움’에만 몰두한 나머지 고루한 원칙에만 매달리며 ‘보나파르트는 적이다’, ‘보나파르트는 사라져야 마땅한 존재다’ 하는 늘 같은 후렴만 되풀이하는 정치관에 단호히 반대한다. 이때 오간 편지들을 좀 더 자세히 읽어보면, 로타르갈이 확인해주듯, “정치 원칙과 신념을 둘러싼 다툼이 아니라, 상황의 평가와 그 해결 방법을 보는 의견 차이가 문제일 뿐이다.” 오토 플란체Otto Pflanze(1918~207)는 논의의 핵심을 이렇게 정리한다. “절대적이 아닌, 상대적 우선순위를 정하는 논란이었다. 혁명과의 투쟁과 국익은 두 남자 모두 중시했다. 비스마르크는 국익을 최우선으로 여긴 반면 게를라흐에게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혁명을 누를 싸움이었다.” ---pp.92,93 “독일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프로이센의 힘을 주목합니다.…프로이센은 힘을 모아 이미 몇 차례 놓친 유리한 순간에 대비해야만 합니다. 빈조약에 따른 프로이센 국경은 건강한 국가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시대의 중요한 문제는 말과 표 대결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말과 표 대결은 1848년과 1849년의 위중한 실수였습니다. 우리의 결단은 철과 피로써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pp.115,116 프로이센 정치를 책임지는 자리를 맡았을 때, 비스마르크는 독일과 유럽에서 프로이센의 권력 위상을 어떻게 구축할지 ‘종합 계획’을 가졌을까? 이 계획이라는 것이 ‘어떤 단계를 밟아야 하겠다는 정밀한 구상, 전쟁을 불사해서라도 프로이센의 권력을 키워야 하겠다’는 뜻이라면, 이 물음의 대답은 ‘아니다’이다. 오히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국가와 왕정의 권력을 키우고자 하는 최상의 목표를 기준으로 그때그때 주어지는 기회를 적극 활용했다는 점에서 기회 포착 능력이 뛰어났다. 그는 늘 전략적 목표를 염두에 두고 대단히 유연하면서, 다양한 조건을 열어놓는 방법을 구사했다. 전략적 목표의 명확함과 방법의 유연함이라는 특징은 1862년에서 1866년까지 치열했던 ‘독일의 주도권 다툼’에서 그가 보여준 일관된 자세이다. ---pp.119,120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 홀에서 1871년 1월 18일 거행된 카이저 대관식은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에게도 독일제국의 창설을 상징하는 순간이다. 독일제국의 법적 근거를 형성한 것은 3월에 선출된 초대 제국 의회가 1871년 4월 14일에 비준한 제국 헌법이다. 제국 수상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후손에게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제후라는 귀족 작위를 받음으로써 56세의 비스마르크는 정치가로서 그 경력의 정점에 올랐다. 이제 독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유럽의 탁월한 정치 지도자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pp.169,170 독일제국이 충분한 군사력을 갖추는 것은 비스마르크가 보기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므로 제국이 충분히 강한 힘을 갖추고서 예방전쟁을 거부하는 자세야말로 비스마르크의 평화 정책이 자랑하는 최고의 원칙이다. ---p.182 새로운 방향 정립의 출발점은 비스마르크가 교역과 관세정책에서 시도한 노선 변화이다. 주식 폭락과 경제 위기 발발 이후 제국이 실행했던 자유주의 기조의 자유무역정책은 십자포화에 시달렸다. 그때까지 별 영향력을 가지지 못했던 보호관세 추종자들이 이제 강력한 목소리를 냈으며, 여론의 분위기도 보호주의 쪽으로 기울었다. 비스마르크의 재산을 관리해주던 은행가 블라이히뢰더Gerson von Bleichroder(1822~1891)는 1875년 11월에 수상에게 “독일의 산업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교역 정책을 바꿔야만 한다고 강변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 경제를 직접 챙겨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그는 그때까지 루돌프 폰 델브뤼크에게 맡겨두었던 교역과 관세정책의 조종간을손수 잡기로 했다. 비스마르크는 보호관세의 도입으로 경제가 상당히 좋아질 것으로 굳게 확신했다. 기업가뿐만 아니라 노동자를 위해서도, 대지주뿐만 아니라 중소 규모 농부들에게도 고루 혜택을 줄 수 있는 특허 처방은 관세였다. 게다가 관세 수입과 더불어 간접세 인상으로 비스마르크는 그동안 추구해온 국내 정치의 주목표인 재무 개혁에 근접할 수 있다고 보았다. 재무 개혁이란 제국 정부가 재정적으로 독립하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연방 회원국들의 분담액에 의존하지 않고 중앙정부가 독자적인 힘으로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는 것이 비스마르크가 추구해온 목표이다. 이런 목표는 복잡하기는 하지만 대단히 실용적이며, 권력관계의 계산만으로는 나올 수 없는 발상이다. 경제와 재무 정책에서 새로운 노선을 추구한 결정적 배경은 독일제국의 안정적 운영 때문이다. ---pp.207,208 |
|
독일통일의 새 시대를 열다!
평화 외교, 강한 국가, 국민 복지 이념을 넘어 ‘국가 리더’의 표준이 된 비스마르크 《지금, 비스마르크》는 19세기 독일 통일을 이룩하고 복지국가의 기틀을 다진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일대기다. 이 책은 방황하는 청년기를 거쳐 영주에서 정치가, 탁월한 외교가이자 통일 제국의 창설자로 비스마르크가 변모해가는 과정을 다룬다. 분열된 독일을 프로이센 중심으로 통합한 비스마르크가 없었다면 오늘날 독일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독일 역사의 중요한 정치가 중 한 명인 비스마르크가 독일에 남긴 정치적 유산을 살펴보며 우리는 성공한 지도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눈부신 외교력으로 독일을 통일하고 유럽의 균형과 평화를 추구하다 19세기 유럽은 역동적인 변화의 시절이었다. 정치를 비롯한 경제와 기술 발달이 숨가쁜 시기였다. 당시 독일은 두 개의 강대국(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제후국으로 분열돼 있었다. 이러한 변화와 혼란의 시기 한가운데,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귀족 가문의 넷째로 1815년 4월 1일 태어났다. 방황하는 젊은 시기를 거친 비스마르크는, 36세의 나이로 외교관이 되자 마침내 그 정치적 재능을 꽃피운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리 등 유럽의 주요 도시를 거치며 국제정세를 읽는 안목을 길렀다. 프랑크푸르트와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리에서 프로이센의 사절로 보낸 11년은 비스마르크가 외교관으로서 인맥을 넓히고 정치 분야 전반에 걸쳐 많은 경험을 쌓은 수련 시절이다. 이때 그는 무엇보다 강대국과 중소 국가의 이해관계를 정확히 읽어내는 안목을 키웠고, 독일과 국제정치 무대에서 중요한 정치가들을 만나며 그들의 성품과 정치적 목표, 야망을 두루 꿰뚫었다. 그래서 비스마르크가 1862년 9월 프로이센 정부의 수반으로 부름을 받았을 때, 그는 독일과 유럽을 가장 잘 아는 정치가였다. - [3장 프랑크푸르트,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리의 외교관] 중에서 비스마르크는 흔히 외교의 거장이라 불린다. 47세의 나이로 프로이센의 수상이 된 시기, 프로이센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강대국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이러한 강대국의 틈바구니속에서 프로이센의 외교관으로서 끊임없이 국익을 추구했고 현상의 변화를 끌어냈다.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목표는 ‘하나된 독일’이었다. 그러나 주변의 강대국들은 독일의 통일을 바라지 않았다. 이러한 녹록지 않은 상황 속에서, 그는 ‘통일독일’이라는 전략적 목표를 설정하고 방법의 유연성을 추구하며 혼란에 빠진 국내외 정치 현실을 극복해냈다. 무엇보다 방법의 유연성에 주목할 만하다. 그는 오스트리아까지 포함한 대大독일 통일을 추구하지 않았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이는 실현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대신 그는 북부 독일만이라도 하나로 통합하는 최소한의 목표, 즉 소小독일 통일을 지향했다. ‘철혈재상’이라는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비스마르크는 전쟁이라는 수단을 최선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무엇보다 대결 노선을 지양했다. 그가 추구한 독일 정책에서 오스트리아와의 무력 대결을 통해 소독일 민족국가를 세우는 일은 어디까지나 차선책에 불과했다. 오히려 비스마르크는 평화로운 방법으로 독일 내 권력을 오스트리아와 나누어 가지고, 상호 균형을 추구하는 것을 최선으로 여겼다. 여러 제후국으로 분열돼 있던 독일을 하나로 통합한 비스마르크는, 이후 평화주의자로서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전쟁보다는 외교적 방법을 선호했고, 세력균형을 추구하며 전쟁을 억제하는 ‘평화의 중재자’로서 면모도 보여준다.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 후에도 최소 20년 동안 유럽의 평화를 지켰다. 이러한 유럽의 외교 구도를 ‘비스마르크 체제’라고까지 부른다는 점에서, 그가 유럽의 평화에 기여한 바는 적지 않다. 무엇보다 그는 ‘예방전쟁’이라는 수단을 마지막까지 지양하는 원칙을 준수했다. 1871년 이후 평화 수호는 비스마르크 외교정책의 최고 목표였다. 그래서 그는 ‘예방전쟁’, 곧 적의 공격이 예상된다고 해서 가하는 선제공격을 1870년 이전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거부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 견해를 피력했으며, 특히 1887년 1월 11일의 제국의회 연설에서 힘주어 강조했다. “나중에 불가피해지지 않을까 해서 치르는 전쟁, 나중에 불리한 상황에서 싸워야 하는 것은 아닐까 염려해서 치르는 전쟁은 나와는 거리가 먼 생각이다. 그런 생각을 언제나 철저히 거부해왔다.…나는 ‘전쟁을 치러야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전쟁을 하자는 충고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 [5장 제국의 안정화와 평화수호] 중에서 다만 냉철한 현실주의자였던 비스마르크는 평화가 손쉽게 올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다. 평화 정책의 전제 조건은, 바로 부국강병이었다. 독일제국이 충분히 강한 힘을 갖추고서 국제사회에서 행동할 때 비로소 평화가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전쟁이 쉬워 보일 때 커지며, 전쟁이 어려워 보인다면 사라진다. 우리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만큼 더 전쟁은 일어나기 어렵다.”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생각을 이런 표현에도 담아냈다. “언제라도 전쟁할 각오를 보일 때 우리는 평화를 지킨다. 칼을 뽑을 수 있게 칼집을 풀어둔 사람에게 공격은 쉽지 않다. 벽에 확실하게 걸어둔 연습용 칼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없다.” - [5장 제국의 안정화와 평화 수호] 중에서 제국창설자 비스마르크, 독일제국의 초석을 놓다 비스마르크가 독일제국에 남긴 유산은 외교 분야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는 통일된 제국을 안정화하는 데에도 힘썼다. 구체적 계획을 통해 독일제국의 근대화를 추구했으며, 연방 정부 차원의 행정국가를 수립했다. 이 중 오늘날까지도 회자되는 비스마르크의 주요 업적은 무엇보다 독일이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데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저자는 비스마르크가 설계하고 도입한 사회복지 법안이 국내 정치에서 이룩한 가장 중요한 성과였다고 평가한다. 비스마르크는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사회복지 정치를 추진했다. 그는 산업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폐해의 심각성을 간파하고, 노동자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위치를 정부 대책으로 개선해줄 필요성을 인식했다. 보편적 국익에 부합하는 한에서 노동자 계층에 희망을 주고자 한 것이다. 비스마르크 정부가 1880년대에 국내 정치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던 것은 입법 과정이다. 특히 사회복지 법안은 오래 걸렸으며, 숱한 난제를 극복해야만 했다. 질병, 사고, 상해, 노년 등에 따른 생활고를 덜어주고자 전국 차원에서 도입하기로 한 첫 번째 사회보장제도는 독일제국을 “전 세계에서 사회보장의 최신 체계를 발전시킨 선구 국가”로 만들어주었다고 게르하르트 리터Gerhard Ritter(1929~2015)는 평가한다. - [5장 제국의 안정화와 평화 수호] 중에서 다만 비스마르크가 국내 정치에 남긴 유산은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그가 시도한 모든 것이 성과를 낸 것은 아니며, 비판적으로 검토해볼 때 그의 선택이 독일에 남긴 부정적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자신의 정치적 적대자인 사회민주주의자와 가톨릭 세력을 때로는 단호하고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비스마르크의 국내 정치가 남긴 유산을 어떻게 볼 것인지 하는 문제는 더 어렵다. 제국의 수상은 민주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민주주의자라고 주장한 적도 없다. 독일 민주주의는 비스마르크를 그 조상이나 후원자로 섬길 수 없다. 그가 보여준 국내 정치 행보는 문화투쟁, 보호관세 관철, 사회민주주의의 무자비한 탄압 등 거칠기만 한 저주로 점철됐다. 비록 그때마다 의회의 지지를 끌어냈다 할지라도 이런 일을 주도한 결정적 책임은 분명 그의 몫이다. - [에필로그. 논쟁의 대상 비스마르크] 중에서 저자는 ‘철혈재상’이라 불린 비스마르크의 인간적인 면모에도 주목한다. 그는 수상으로 재임하면서 잦은 질병과 고독에 시달렸고, 권력에 지나치게 집착해 20년 가까이 몸담은 수상직에서 깔끔하게 물러나지도 못했다. 그는 인생의 말년에 새로운 카이저인 빌헬름 2세와의 관계 설정에 실패했고, 국내 정치의 세력 구도를 판단하는 능력까지 상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카이저와의 불화로 퇴임한 후에도 언론을 통해 지속해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고, 심지어 의원직에까지 출마해 후배 정치인들을 당황케하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21세기의 한국사회, 비스마르크를 소환하다. 《지금, 비스마르크》는 전환의 시대를 살며 유럽의 체제는 물론 독일 사회 전반의 깊숙한 뿌리까지 영향을 미친 인물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재조명한다. 무엇보다 이 책을 오늘날 소환한 이유는 당시의 유럽 정세가 오늘날 한국의 정세와 유사한 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은 중·러·일이라는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는 물론, 분단국가라는 특성 탓에 국제적으로 쉽게 풀기 어려운 고차방정식과 마주하는 일이 잦다. 따라서 한국의 지도자는 시시각각 변하는 냉엄한 국제 질서 속 국가이익을 추구할 탁월한 외교 역량과, 이를 힘있게 추동할 통합된 국가 여론을 끌어낼 리더십이 요구된다. 비스마르크는 두 개의 축(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으로 분열돼 있던 독일을 하나로 통합해 근대국가의 초석을 마련한 국가지도자다. 그 과정에서 주변 정세를 냉철하게 판단하고, 탁월한 외교 리더십을 발휘해 끊임없이 국익을 추구했다. 냉엄한 국제 질서 속 실력을 키우는 나라만이 국익을 얻는다는 비스마르크의 철칙은, 무엇보다 평화를 절실하게 추구해야 할 한국의 정치 리더에게 필수불가결한 지침을 제공해줄 것이다. |
|
21세기 한반도의 운명 앞에서 비스마르크가 다시 조명받고 있다. 우리가 비스마르크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다극외교’를 통해 주변국을 설득하고, 연대하고, 배제했던 능수능란한 외교정책이다. 무엇보다 그가 대단한 것은 수상으로 재임하는 동안 유럽의 평화를 지켜냈다는 점이다. 비스마르크의 두 번째 공적은 바로 복지정책이다. 그는 보수적인 사람이었지만, 모든 불평등은 사회를 분열시키고 파괴한다는 점을 자각해 독일 복지국가의 기원을 열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이 책을 통해 비스마르크를 소환한 이유다. - 이광재 (제21대 국회의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