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가 ‘좋아서 하는 카페’라서, 손님들은 내가 커피가 좋아서 카페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남들이 보았을 때는 참 팔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이름을 정할 때 고려한 것은 프러포즈였다. 앞에 아내의 이름이 숨겨져 있다. 괄호 열고 정애 괄호 닫고 좋아서 하는 카페가 정식 명칭이다. 당시의 여자 친구였던 아내가 연거푸 시험에 떨어지기만 하던 나를 믿어줘서 빚을 냈다. 그 돈으로 짧은 시간 동안 커피 공부를 하고, 카페를 오픈할 수 있었다. 열두 평 작은 집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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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내 마음을 추스르지만, 직원들의 마음은 또 어떻게 추슬러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한 시간의 쉬는 시간을 주더라도 그 마음이 나와 같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변변치 않은 월급을 받고 일하는 그들은 나보다 더 큰 불안 속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는 그런 걱정을 지우기가 어렵다. 매장이 바빠지면, 피곤하게 만드는 것 같아 내가 미안하더니, 바쁘지 않으면 그들이 안절부절못한다. 그런 마음을 알게 모르게 주고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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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노의 맛을 결정하는 것은 각 원두가 가진 특징적인 맛도 있지만, 뽑는 사람이 결정하는 지점이 있다는 점이 전문가 의식을 가지게 만든다. 원두가 가진 풍미를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뽑아야 한다. 과하면 텁텁하고, 부족하면 밋밋하다. 적당한 지점을 찾아야 마시는 사람이 생두의 여정을 상상할 수 있고, 식어도 맛있는 커피가 완성되는 것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손님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결정된다는 점이다. 한잔의 커피를 만들고 다음 커피를 만드는 사이에, 그것이 정해진다. 원두 가루가 담길 곳과 뜨거운 물이 나오는 곳은 완벽하게 깨끗해야만 한다. 이 부분은 커피를 내리는 사람만이 확인할 수 있다. 원두를 가는 그라인더의 날도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서 조금씩 조절을 해야 한다. 바리스타의 자존감도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결정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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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 45분부터는 둘이서 일한다. 그때부터 염두에 두는 것은 손님보다, 함께 일하는 사람에 대한 이타심이다. 나이를 떠나서 서로 최대치의 높임말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귀 기울여 들을 것, 함께 일을 하고 같이 앉을 것. 이런 것들이 내부에서 강조되는 배려의 원칙이다. 최종 감독은 자신의 몫이지만 행하면 인간성이 회복되는 것 같다. 그런 룰을 바닥에 깔고, 십 년째 카페가 움직이고 있다. 떳떳하게 일한 날은 카페에서 얻은 피로감이 훈장 같다. 피곤함이 걷히고 맑은 얼굴로 카페를 나서는 손님들의 얼굴을 보면서, 작은 동네에 약간의 기여를 하고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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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과 카페와 산책로를 오가는 나를 보면서 어떤 손님은 선비 같다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직원들과 회식도 하지 않고, 카페에 출근하는 날은 담배도 술도 마시지 않는다. 결심이 누적되고 행동이 쌓인 결과다.
어떤 날은 유혹이 있기도 했다. 누군가 다른 삶을 제안하고 더 큰 수입을 제시하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사람의 눈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딸의 눈빛이 경고등처럼 마음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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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잠들기 전에 내일 아침의 알람을 확인하듯, 글을 쓴다. 어떻게 당도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나를 믿고 있는 사람들의 사랑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 틈이 나면 새로운 단어와 문장을 떠올린다. 형식을 갖춘 글로 쓸 수 없는 다짐이라면 그것은 미약한 것이고 이내 시간에 침식되리라는 것을 예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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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에는 인사만 주고받던 손님들이 오래 만날수록 날씨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바깥 풍경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읽고 있는 책에 대해서, 건강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털어놓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뭐랄까. 마음에 페이지가 쌓이는 느낌이 들었다. 따뜻한 부채감에 난생처음 느끼는 직업적 충만함을 느끼곤 했다. 아이가 생기고서 부성을 배운 것처럼, 카페를 오픈하고 나서 바리스타의 자부심을 조금씩 배워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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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웠던 것은 카페에 들어서면 늘 바리스타의 시선 속에 내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해서 하나의 카페에 단골이 되는 것은 어려웠고, 나는 유랑하는 사람처럼 이 카페 저 카페를 전전하곤 했다. 때문에 창업을 결정하고 공간을 디자인할 때, 완전히 은폐된 장소를 만들어야지 하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곳이 ‘안방’이다. 이른바 그 시절의 나에게 헌정하는 자리라고 볼 수 있다. 그 시절의 나처럼 마음껏 머물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도 같아서, 사람의 위로가 그리운 사람이 있을 것도 같아서, 그런 공간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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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고맙다. 나도 나름 하루를 최대치로 쓰려고 노력한다. 나이를 떠나서 마음과 체력을 최대한 쓰는 것이 밤잠을 달콤하게 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익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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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두 딸이 태어나고, 나는 매출에 조금 더 신경을 썼다. 밤마다 나를 기다리는 가족들이 생기고 그들에게 여유로운 삶을 선물해주고 싶은 욕망이 강해질수록 그랬다.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서글프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아마도 내가 주체성을 잃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 나의 감정만 다스리고 손님의 마음을 우선하는 것이 어떤 날은 고강도의 육체노동보다 몸을 노곤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역설적으로 가게가 낡아갈수록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왜냐하면 손님들은 불특정 다수에서 특정한 사람들로 한정되어 갔기 때문이다. 단순한 호기심에 들른 손님들은 멀어져갔고, 우리의 애씀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테이블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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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는 조금 더 자유로운 공간이 되는 느낌이다. 나는 강박적으로 숨기지 않고도 커피를 팔 수 있고, 의도치 않게 드러난 상처는 손님들이 오히려 다독여준다. 주기적으로 꽃다발을 선물해주거나, 간식을 챙겨주는 손님들도 생겼다. 결국 우리도 많이 남기는 것보다는 덜 남기는 것이 도리어 마음이 편한 지점에 다다랐다.
코로나19로 인하여 한동안 카페가 한산해지자 손님들이 위로를 건네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매장에서는 커피를 마시기 그러니 원두를 사 간다는 손님이 제법 있었고, 오랜만에 와서 미안해하는 단골손님도 있었다.
--- p.98
반복되는 짧은 출근길, 두 딸을 태워서 가는 퇴근길도 즐겁다. 집에는 육포도 있고, 맥주도 몇 캔씩 늘 있으므로 일탈은 충분하다.
해서, 나는 골프를 배우거나, 해외여행을 가거나, 타인과 술을 마시거나, 불안을 공유하거나,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는 것이 크게 필요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오히려 이 작은 일상을 지키고 책임지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는 일이 좋다. 아내를 보는 것, 딸과 놀아주는 것, 카페에서 노동을 나누는 것이 무엇보다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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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부부가 성장하는 과정은 걱정을 서로 덮어주는 일의 연속인 것 같다. 아내는 나의 불안을 무심한 듯 잘 덮어준다. 토닥이면서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날 아내가 여린 마음을 드러내면 나도 불쑥 용기가 생겨서 이불을 덮어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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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딸과 함께 있으면 그렇게 된다. 별것 아닌 것을 최고라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퇴근길에 사 간 껌 한 통에, 클릭 몇 번으로 사들인 작은 장난감에, 두 딸은 함박웃음으로 보답한다. 어설프게 만든 파스타를 다 먹고 더 달라고 말할 때, 맛소금으로 간을 한 계란프라이를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볼 때, 기분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이렇게 온전하게 인정받기가 쉬웠던가 싶기도 하고, 또 이렇게 여겨지는 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기적 같기도 하다.
--- p.185
후배는 나를 보면서 결혼할 마음이 싹 사라진다고 말하곤 했다. 너무 잡혀 산다는 의미였고, 유흥 없는 단조로운 삶이 재미없어 보인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자기 확신으로 가득 찼던, 자존감으로 가득했던 시절보다 지금이 훨씬 풍부한 맛이 있다고 느낀다. 지금껏 세상에서 못 느껴보았던 변수와 감각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원하는 맛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가족들과 함께 만들어낸 시간은 나를 놀라게 하고, 슬프게 하고, 기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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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옆 동에 처가댁과 처형댁이 있지만, 저녁은 꼭 아내와 서우와 온이 이렇게 네 식구가 먹으려고 애를 쓴다. 하루를 온전히 듣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별것 아닌 것에도 맞장구를 쳐주고 싶기 때문이다. 대단한 것이 아니지만 대단하다고 내가 말을 해주면 두 딸은 믿는다. 그것을 보면서 오히려 내가 위로를 받는다. 토막 난 돈을 가져다주면서 나는 시무룩한 표정을 숨기기가 어려운데, 아내는 괜찮다고, 고생했다고 말해준다. 그러면 또 그 말을 나는 믿는 척하고, 그런 눈빛이 쌓이면 진심으로 믿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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