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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이라는 가능성

: 나의 세상을 확장하는 낯선 만남들에 대하여

리뷰 총점9.7 리뷰 21건 | 판매지수 1,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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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출간일 2022년 03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352쪽 | 482g | 147*215*30mm
ISBN13 9791167740373
ISBN10 1167740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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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 뉴스로 보는 책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단절된 세상에서 우리는 다시 연결될 수 있을까?’
고립의 시대, 여행하는 철학자가 들려주는 환대의 힘


고립과 두려움을 넘어 연대와 신뢰감을 되살릴 수 없을까? 다름 앞에서 삶을 열어젖힐 때의 즐거움과 가능성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타인이라는 가능성』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문학과 철학, 인류학과 역사학을 가로지른 지적 탐사의 기록이다. 고대의 대서사시 『오디세이아』에 그려진 낯선 만남들을 살펴보고, 몽골 유목민의 이방인 맞이 예법이 복잡해진 이유를 해석하며, 풍성한 만찬과 선물에 담긴 인류학적 의미를 포착하고, 다문화 도시에서 인종과 국적이 다른 이들과 이웃하게 될 때 실제로 벌어지는 일들을 기록한다. 박학한 철학자이자 능숙한 여행자인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가 오늘날 잊어버린 환대의 의미를 생생히 체감하게 될 것이다.

삶을 지키기 위해 불확실성과 거리를 두는 것은 합리적 행위이며, 낯섦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곤궁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이 책은 우리를 서로 분리하는 장벽 중 일부를 무너뜨려야 하는 이유와 그 방법을 섬세하고 우아하게 펼쳐 보인다.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여는 말

1부 낯선 세상을 맞이하다

01 우리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키케로의 집 | 집의 발명과 공동체의 탄생 | 나만의 요새 | 안전의 역설적 조건

02 문간의 낯선 사람
이방인, 귀빈 혹은 불청객 | 경계심의 딜레마 | ‘무슬림 가족과 식사해요!’

03 문턱 넘기의 의례
의심을 가라앉히는 기술 | 모호함을 포용하는 힘 | 선물의 의미

04 손님의 의무, 주인의 권리
환대의 이중성 | 혹독한 예법 | 명예와 치욕의 경계

05 만찬의 법칙
검소한 만찬은 없다 | 철학자와 수도자의 식사 수칙 | 칸트가 디너파티를 여는 방법

06 작별은 왜 늘 어려운가
떠날 수 있는 자유 | 작별의 기술 | 손님에서 영원한 친구로

07 이승과 저승의 경계
유령과 함께하는 삶 | 이방인으로서 유령 | 죽은 자의 의미

2부 미지의 세상에 들어서다

08 새로운 삶을 찾아서
목표 없는 방랑, 페레그리나티오 | 이동의 기회와 위협 | ‘외부인을 통제하라’ | 이동의 민주화

09 국경 넘기
발명된 국경 | 통과 불가 여권 | 불확실한 문턱의 삶

10 대도시에서 우정이 싹트는 방식
도시의 오래된 외부인 | 군중 속의 기쁨 | 우정이 자라는 도시

11 이방인과 이웃하기
‘이웃을 사랑하라’? | 어떤 세계시민주의 | 다문화 도시의 빛과 어둠

12 환대로 연결되는 세상
선택하지 않은 외로움 | 환대의 공동체

에필로그 : 문을 열어놓기
작가 후기 : 불가리아에서
인용 출처
미주

저자 소개 (2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상실은 세상에 구멍을 낸다. 우리를 발가벗기고, 찢긴 곳과 틈을 드러낸다. 혼란을 일으키며 우리 삶의 나침반을 망가뜨린다. 상실은 미래를 없애는데, 오로지 과거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실은 전면적이지 않다. 때로는 그 틈과 찢긴 곳 사이로 새로움이라는 바람이 불어올 수 있다. 우리가 망가졌음을 인정할 때, 취약함 속으로 낯선 이가 다가와 우리를 안아줄 수 있으며, 이 포옹 안에 새로움으로 향하는 다리가 놓여 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낯선 이와의 관계가 곧 미래와의 관계라고 말했다.
---「여는 말」중에서

망가라이족의 집에서 진정한 보안의 원천은 대나무로 만든 허술한 벽이 아니라 공동체의 활기찬 온기에 있다. 이들은 함께 식사하고, 사람들을 초대해 대화를 나누고 커피를 마시며, 큰 규모로 어울리고, 남을 놀리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농담을 한다. 망가라이족은 삶의 고난과 위험에서 몸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성을 짓는 게 아니라 공동체를 만드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01 우리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중에서

진정성과 의례 사이의 이 긴장감은 수많은 가족 시트콤의 소재가 된다. 그러나 의례는 진정성만 중요한 것이 아닐 때도 있음을 일깨워준다. 때로는 의례가 “삶의 모호함을 진정성보다 훨씬 잘 포용한다”. 의례는 모든 사람 앞에서 내면세계의 혼란을 드러내는 대신 그 혼란을 보이지 않게 담아둔다. 의례는 ‘마치’ 상황이 평탄하고 조화로운 것처럼, ‘마치’ 모든 것이 공정하고 평화로운 것처럼 행동하는 세상을 옹호한다.… 이러한 의례의 실천에는 놀라울 만큼 강력한 힘이 있다. 모두가 이도 저도 아닌 의례의 공간에서 마치 그런 척 상황을 가정한다면, 새로운 현실과 새로운 음악, 새로운 연대감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마치’의 세상을 현실로 불러낼 수 있다.
---「03 문턱 넘기의 의례」중에서

어쩌면 우리를 떠난 손님은 다시 낯선 세계로 사라질 수 있다. 다시는 그들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르고, 심지어는 그 사실이 기쁠 수도 있다. 만나는 모든 사람과 친구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방인이 친구가 되지 않을 때도 환대는 더 깊고 미묘한 변화를 일으킨다. 환대가 가장 크게 탈바꿈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가장 큰 두려움이 실현되지 않은 모든 만남과 모든 출발에서 세계와 그 안의 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확장된다. 외부와 내부의 경계를 더 쉽게 넘을 수 있게 된다. 이방인에 대한 두려움이 약해진다. 제노포비아가 가라앉고 필로제니아가 더욱 강렬해진다. 수적으로 열세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은 더 열리고 관대한 마음으로 바뀐다.
---「06 작별은 왜 늘 어려운가」중에서

과거의 자신과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도시로 이주할 때에도 우리는 사람들과 다시 연결되고 새로운 공동체에 포함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도시의 무질서한 군중 사이에서 사람들과 다시 연결될 때, 우리는 낯선 이들과 맺은 새로운 관계, 그 관계 속에서 함께 발견한 것에 영향을 받으며 자기 자신을 찾는 새로운 방법, 자신을 발명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게 된다.
---「10 대도시에서 우정이 싹트는 방식」중에서

사회적 동물인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의존과 독립 사이의 선택이 아니다. 심지어 세계시민주의와 지역주의 사이의 선택도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바로 상호 의존이 펼쳐지는 여러 다양한 방식 사이의 선택이다.
---「11 이방인과 이웃하기」중에서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단절된 세상에서 우리는 다시 연결될 수 있을까?’
고립의 시대, 여행하는 철학자가 들려주는 환대의 힘

네안데르탈인의 화덕에서 철학자의 식탁을 지나
몽골의 대초원과 유럽의 국경선 그리고 다문화 도시까지
삶을 풍요롭게 하는 낯선 만남의 시공간을 탐사하다


‘낯선 사람’이 곧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모두가 안다. 그럼에도 낯선 이를 마주하면 몸을 움츠린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타인을 환영하기보다 의심하고, 안전을 위해 단절을 마다하지 않는다. 낯선 사람과 마주하는 능력, 새로운 관계를 맺고 공동의 미래를 열어젖히는 힘을 서서히 잃고 있다.

고립과 두려움을 넘어 연대와 신뢰감을 되살릴 수 없을까? 다름 앞에서 삶을 열어젖힐 때의 즐거움과 가능성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타인이라는 가능성』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문학과 철학, 인류학과 역사학을 가로지른 지적 탐사의 기록이다. 박학한 철학자이자 능숙한 여행자인 저자 윌 버킹엄은 이 책에서 타인을 맞이하고 받아들일 때의 위험과 가능성을 전방위로 탐구한다. 고대의 대서사시 『오디세이아』에 그려진 낯선 만남들을 살펴보고, 몽골 유목민의 이방인 맞이 예법이 복잡해진 이유를 해석하며, 풍성한 만찬과 선물에 담긴 인류학적 의미를 포착하고, 다문화 도시에서 인종과 국적이 다른 이들과 이웃하게 될 때 실제로 벌어지는 일들을 기록한다. 폭넓은 인문 소양과 수년간의 여행 경험이 교차하는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가 오늘날 잊어버린 환대의 의미를 생생히 체감하게 된다.

삶을 지키기 위해 불확실성과 거리를 두는 것은 합리적 행위이며, 낯섦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곤궁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이 책은 우리를 서로 분리하는 장벽 중 일부를 무너뜨려야 하는 이유와 그 방법을 섬세하고 우아하게 펼쳐 보인다.

타인을 경계하라는 경고음만이 울려 퍼지는 시대
나머지 절반의 진실을 찾아 나서다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은 비이성적 감정일까. 저자는 그렇지는 않다고 말한다. 눈앞의 낯선 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행동을 취할지 단번에 파악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는 우리의 이해력 너머, 통제력 너머에 있다. 우리의 불안은 그러므로 합당하다. 저자가 책에서 밝히듯, 오히려 낯선 사람에 대한 공포를 의미하는 제노포비아(xenophobia)는 『오디세이아』나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요 테마 중 하나였을 정도로 이미 오래전부터 인간 삶에 깊숙이 뿌리내려 이어져왔다.

그러나 우리가 낯선 이에게 늘 문을 걸어 잠그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한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네안데르탈인들의 화덕 터에는 공동체 외부의 낯선 사람들과 만찬을 즐기며 새로운 관계를 맺은 흔적이 남아 있다. 낯선 사람은 경계심과 불안 못지않게 호기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뜻밖의 가능성과 상상 못한 미래를 열어주리라는 기대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낯선 사람과 연결되려는 이 욕망, 즉 필로제니아(philoxenia)의 역사는 제노포비아만큼이나 유구하다. 낯선 사람을 향한 우리의 이중적 태도는 환대(hospitality)의 어원인 hosti-pet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첫 번째 부분인 hosti는 ‘이방인’이라는 뜻이며, 두 번째 부분인 pet은 ‘가능성’ 또는 ‘힘’이라는 뜻이다. 낯선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불확실성을 안긴다. 천사일까, 악마일까? 가능성일까, 위협일까? 이 질문들에는 힘이 있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상황을 변화시킬 가능성이 있다.”(19쪽)

이 책 『타인이라는 가능성』은 낯섦이 불러일으키는 합당한 불안을 살피는 한편, 미지의 타자를 환대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온 우리의 다종다양한 실천들을 탐구한다. 이를 통해 낯선 이가 가져다주는 가능성에 더욱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방법, 지금의 고립을 넘어 다시금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문턱 넘기 의례와 식사의 규칙, 선물의 의미와 작별의 기술까지
환대를 둘러싼 복잡다단한 풍경을 탐사하다


낯선 사람을 맞이하는 방법과 관련해 나라마다 다양한 문화가 존재한다. 몽골에서 주인과 손님의 관계를 규정하는 ‘요스(yos)’라는 구전 격언도 그중 하나다. 이에 따르면 손님은 집주인의 게르(몽골의 텐트)에 들어갈 때 오른발부터 디뎌야 하며, 문턱은 밟으면 안 된다. 외투의 소매는 손목까지 내리고 모자는 쓰고 있어야 한다. 고기를 대접받았을 때는 첫입에 적은 양을 입에 넣은 뒤 양이 많고 넉넉한 것처럼 과장하며 씹는 것이 관례다. 저자는 일견 허례허식 같은 이 의례화된 몸짓과 행동이 주인과 손님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준거로 기능한다고 말한다. 정해진 예법을 행하고 그 이행을 지켜보는 동안, 낯선 만남에서 비롯하는 불확실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요컨대 여기서 예법은 모호한 상황을 최소화해 경계심과 불안을 가라앉히는 방편인 셈이다.

물론 모든 낯선 만남이 늘 별 탈 없이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환대는 갈등으로 이어지고, 심지어 폭력으로 비화하기도 한다. 저자가 여행 중 머문 적 있는 불가리아의 한 마을에서는 주인의 대접을 사양하는 손님을 곤봉으로 때려 쫓아내는 관습이 전해 내려온다. 주인의 명예를 실추시킨다는 이유에서다. 이스마일 카다레의 소설 『부서진 사월』를 통해 우리에게도 익숙한 알바니아 북부의 예법 ‘카눈(Kanun)’에 따르면, 지위나 명예가 손상되면 반드시 피로 복수해야 한다. 이들 예법은 낯선 만남에 친절과 적대감, 환영과 폭력이 동시에 잠재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삶의 문턱에서 낯선 사람을 만날 때는 위험도 보상도 크다.… 그곳의 관습에 대한 지식과 교환할 선물이 있다면 상황은 아마 좋게 흘러갈 것이다.… 그러나 꼭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신호를 잘못 해석하면, 농담에 실패하면, 숙고 없이 허접한 선물을 하면 상황은 언제나 틀어질 수 있다.”(95~96쪽)

하지만 저자는 낯선 만남에 도사린 위험보다 그로부터 얻게 되는 보상에 더 초점을 맞춘다. 이방인과의 만남이 늘 친한 관계로 이어지거나 결집력을 강화하지는 않을지라도, 환대의 경험이 쌓일수록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넘는 일에 대한 두려움은 줄어들 수 있다. 낯선 이에 대한 불안감이 좀 더 열리고 관대한 마음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외에도 저자는 관계에 즐거움과 신뢰를 더해 공동의 미래를 여는 데 이바지하는 선물의 힘, 낯선 사람과 어울릴 때의 지침이 되어준 『논어』 속 예법들, 성 베네딕토와 이마누엘 칸트가 생각한 적절한 만찬의 규칙, 오늘날 남아 있는 작별과 배웅의 관습을 차례차례 탐구해나간다. 낯선 만남이 가져올 가능성은 극대화하고 불확실성은 최소화하려는 실천들을 두루 조망함으로써, 저자는 우리가 서로 연결되는 창의적인 방식을 재발명할 수 있는 단초를 하나둘 펼쳐 보인다.

고독과 불신이 번성하는 도시, 적대만이 팽배한 세계
지금 우리가 환대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까닭


저자는 무수한 사람들이 현재 앓고 있는 외로움의 고통을 해소하는 것이 책의 집필 동기 중 하나라고 말한다. 오늘날 우리의 외로움과 고독은 점점 심화하고 있으며, 전 세계적 전염병의 확산으로 상황은 더욱더 악화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외로움과 고독이 고립을 더욱 강화한다는 점에 있다.

“외로움, 즉 주변부에 위치할 때의 느낌은 위협에 대한 반응을 강화한다. 우리는 외로울 때 타인을 가장 불신하는 경향을 보이며, 타인을 불신할 때 가장 큰 외로움에 휩싸인다. 관계를 맺을 가능성은 낮아지고, 위험을 회피할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297~298쪽)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해결의 실마리는 연결을 향한 용기 있는 첫걸음은 내딛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있을 것이다. 이 책이 두려움을 넘어 신뢰의 톱니바퀴를 다시 돌리는 데 참조가 될 사례들을 탐사한 이유가 여기 있다.

점점 심화하는 사회적 배제, 전 세계적 난민 사태도 이 책이 살피는 문제들 중 하나다.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이슬람교도를 향한 혐오 범죄가 늘어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파키스탄인 소녀가 벌인 자발적 캠페인 사례, 필자 자신이 그리스와 불가리아의 국경을 넘으며 목격한 난민들의 위태로운 삶의 이야기 등은 환대가 개인과 개인의 만남뿐 아니라 더 넓은 사회적 차원에 적용되어야 하는 실천임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저자는 세상의 단절이 지금보다 더욱 심화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게 될 상황, 즉 우리에게 아무런 변화의 가능성이 남지 않게 될 상황을 우려한다. 저자가 인용하는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말처럼 “낯선 이와의 관계는 곧 미래와의 관계”(12쪽)다. 환대는 고독과 불신, 적대를 해소하는 방법일 뿐 아니라 새로운 미래를 열어젖히는 단초이기도 하다.

추천평 추천평 보이기/감추기

낯선 이와 연결된다는 것의 의미에 관한 우아하고 감동적인 탐사
- [가디언]

인생의 동반자와 사별한 후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땅을 여행하고 그곳에서 대화하면서 위안을 찾은 감동적인 회고록
- [이코노미스트]

낯선 사람들이 서로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 보물창고
- 매들린 번팅(Madeleine Bunting) (『사랑의 노동: 돌봄의 위기』 저자)

회원리뷰 (21건) 리뷰 총점9.7

혜택 및 유의사항?
『타인이라는 가능성』 - 그리고, "타인은 지옥이다"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YES마니아 : 로얄 최*민 | 2022.10.04 | 추천0 | 댓글0 리뷰제목
【들어가기 전】   리뷰에 앞서, 한 번 생각해보자.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은 무수한 것들과 관련을 맺는다. 일상적으로 타고다니는 버스부터, 하다못해 내가 쥔 연필까지. 한 삶은 하나의 삶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나 한 발짝 더 나가보자. 우리의 삶이 관계 맺는 것들 중 가장 이질적인 것은 무엇일까? 단연, “타인”이 아닐까? 그렇다면 타;
리뷰제목

【들어가기 전】

 

리뷰에 앞서, 한 번 생각해보자.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은 무수한 것들과 관련을 맺는다. 일상적으로 타고다니는 버스부터, 하다못해 내가 쥔 연필까지. 한 삶은 하나의 삶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나 한 발짝 더 나가보자. 우리의 삶이 관계 맺는 것들 중 가장 이질적인 것은 무엇일까? 단연, “타인”이 아닐까? 그렇다면 타인은 왜 이질적인 대상인가? 이는 타인과 타인이 아닌 것들을 대하는 방식에서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아는 것이 힘이다?"

우리는 어떤 대상이든 그 대상이 관계하는 “세계”를 넌지시 알고 있다. 이를테면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간다고 했을 때, 나는 이 버스가 어디를 향하고 있고, 향할 것인가를 안다. 또한 이 버스는 어떤 재질로 이루어져 있고, 어디 회사에서 만들었는지를 안다. 심지어 이 버스는 왜 존재하는 것인지, 대중들의 편의와 유동성 해결 등등. “버스”라는 대상이 몸담는 그 영역, 그 세계를 알고 있다. 사실, 우리는 대부분의 것들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철학적이든, 사회적이든, 경제적이든, 과학적이든. 어떤 이유로든, 어떤 방법과 경로를 통해서든, 그 대상들은 설명될 수 있고, 해명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은 흔히 “도구성”을 갖는다고 한다. 그 대상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것인지를, 우리는 결정할 수 있다. 어떤 대상의 원인을 분석하고,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면? 어떤 대상의 속성과 성질을 구분해낼 수 있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대상을 "결정함으로써"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듣곤했던, "아는 것이 곧 힘이다"라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말은 이러한 관념으로부터 기원한다.

"for if we will excite and awake our observation,

we shall see in familiar instances what a predominant faculty the subtlety of spirit hath over the variety of matter or form"

 

"좀더 면밀하게 관찰하면,

우리의 정신은 다양한 내용과 형식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예지의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Francis Bacon, 『Advanced of Learning』, Ⅹ, 10. 233

즉 베이컨에 따르면 우리의 정신은 어떤 대상으로부터 "수동적으로" "인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의 능력은 자연을 비롯한 외부 대상의 세계를 더이상 미지의 것, 내지는 신비의 것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베이컨의 말처럼, 우리는 몇개의 색을 가지고도 모든 것들을 모방할 수 있지 않는가? 외부 세계가 감춰진 것이라면, 인간 정신의 무한한 상상력과 예리한 눈은 그 자체로 아무런 쓸모없는 것인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는 것", 곧 "자연을 비롯한 외부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힘", 곧 "미지의 안개를 걷어내고 쓸모있게끔, 유용하게끔 만들어내는 것"이며, "그것이 곧 인간 정신의 힘"인 것이다.

"a painter, with a few shells of colours, and the benefit of his eye, and habit of his imagination,

can imitate them all that ever have been, are, or may be, if they were brought before him."

"영민한 눈과 상상력을 갖춘 화가는 그의 몇가지 물감으로도 존재했던 것, 존재하는 것, 앞으로도 존재할 것들을 모방할 수 있다 "

-Francis Bacon, 『Advanced of Learning』, Ⅹ, 13. 251

 

이렇듯 인간은 외부 세계를 "앎"으로써, "도구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인간의 출현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저 돌덩어리를, 대리석이든 화강암이든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복도나 건축물의 자재로써 "존재할 것"으로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 베이컨이 말한 외부 세계를 지배하는 힘. 인간 정신의 놀라운 발현인 것이다.

 

"타인의 등장, 이질적 존재와의 전쟁"

베이컨이 말했듯, 완벽한 도구성을 갖는 세계, 99%가 완벽한 이 세계에, 1%의 이질적인 것이 있다. 바로 “당신”이다. “네가 문제야!”라는 말을 많이 들어봤는가? 드라마에서나 현실에서나 딱지가 붙도록 듣는 저 말이 바로 정답이다. 당신이 문제다. 바로 “타인”이 등장하는 순간 말이다. 단적으로 말해, “외계에서 운석이 떨어졌다”는 것과 “외계인이 지구에 도착했다”는 말 중, 어느 것의 비중이 더 크게 와닿는가? 버스처럼, 연필처럼, “타인”의 등장은 쉽사리 이해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 어떤 목적성도, 어떤 방향성도, 그래서 어떠한 도구성도 발견할 수 없다. 이러한 이질적인 타인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써보지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이러한 "타인"의 속성은 어쩌면 인간 존재를 이해함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일지도 모른다. 그 타인은, 분명 기타 다른 외부 세계의 존재와는 다르면서도, 나와는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와 같으면서도 내 자신과는 다르다.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그렇게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는 여러 갈래로, 인류의 역사 속에 숨어들어 왔다. 철학적으로는 타인과 나 사이의 상대성을 파훼하고자, 사회적으로는 타인과 나 사이의 동질성을 밝혀내고자, 정치적으로는 타인과 나 사이의 판단을 공유하고자. 어떤 방법이던간에, “동질성” “절대성” “보편성”을 발견하고자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철학은 모든 영역을 통틀어 가장 선구적으로, 가장 적극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나섰다. 이른바 "이질적 존재와의 전쟁", 쉽게 말해 "보편성을 향한 질주"를 시작한 것이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 등장하는 플라톤이 손가락을 하늘을 향해 치켜세운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왜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가? 저 손가락의 비밀을 파악하기 위해선 그가 옆구리에 끼고 있는 책을 살펴보아야 한다. 『Timaeus』, 플라톤은 그 자신의 여러 대화편 중 하나인 티마이오스를 들고 있다. 왜 플라톤은 그의 걸출한 저작인 『국가 politeriia』, 그밖의 수많은 저작 중 티마이오스를 들고 있을까. 사실 이는 라파엘로의 철학적 이해가 얼마나 깊고 두드러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티마이오스는 플라톤의 말년 저작으로 그의 철학이 가장 완성도 높게 제시되고 있다. 티마이오스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동일성", 곧 우주와 인간, 영혼과 신체를 아우르는 질서에 관한 논의이다. 본래 무질서하고 혼돈스런 세계를 기하학적 비례의 균형과 질서를 통해 "선한(good)" 세계로 탈바꿈 시키는 데미우르고스. 티마이오스 속 세계는 완전하고 아름다운 선의 이데아로 향하는 목적론적 세계관의 궁극점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플라톤은 그 자신이 가리키고 있는 것, 곧 모든 존재자를 꿰뚫는 하나의 "동질성"을 가리키고 있다. 우주와 모든 존재자들이 살아 숨쉬고, 존재하는 원리. 생성하고 소멸하는 운동의 원리. 그 무엇인가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지옥, 그것은 타인들이다"

이러한 플라톤의 시도가 성공이었든, 실패였든간에. 어쨌든 플라톤이 가리킨 하늘을 해부하려는 노력은 이후 철학사 2000년의 시간을 지배했다. 서로 다른 존재자의 특성을 하나로 묶는 작업, 그것의 이름은 "신"의 이름으로, "이성" 때로는 "감성"으로.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수많은 전쟁과 그 과정 속 인간성을 말살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그간 “타인과 나”를 하나로 묶던 끈들을 끊어내기 시작한다. 타자의 존재는 나를 해치거나, 나의 안위를 위협할 가능성으로 변해간다. 즉 "타인의 미지성"이 "타인과의 동질성"으로 변해가고, 오늘날엔 "타인이라는 지옥"이 만들어진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정점을 찍은 "동질성의 철학"이 "개별성의 철학"으로 파편화되는 순간이다.

 

카프카의 책, 『변 Die Verwandlung』을 읽어본 적 있는가? 변신 속 주인공은 외부의 모든 존재로부터 가혹하게 격리당한다. 주인공을 쓸모없게끔, 무가치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그 무엇도 아닌, "타자"이다. 주인공을 붙들고 잡아주었던 가족이라는 존재가, 어느 순간부터 주인공을 죽이고, 고통스럽게끔 하는 "타자"가 되는 순간. 내게 친절하고 다정했던 아름다운 세계가, 나를 말려가고 등떠미는 지옥이 된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인간은 오직 "나 자신", "개인"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타인이라는 지옥,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마주해야만 하는 모순. 이 모순 속에서 타자는 존재한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타자를 두고, 그의 희곡 『닫힌 방 Huis Clos』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옥, 그것은 타인들이다 L'enfer, c'est les autres"

 

타인은 사르트르에 의해 "지옥"으로 재정의되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의 지옥인가? 단순한 지옥? 불가결한 지옥? 본격적인 리뷰에 앞서 본 의문을 마음에 새겨보도록 하자.

 

 

"타인과의 재회?"

철학은 개인 안으로 숨어들었고, 타인은 오직 주관의 현상으로만 남게된 시대. 바로 그 시대의 연장선이 오늘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리뷰하게 될 『타인이라는 가능성』은 그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어쩌면 사르트르의 "타인이라는 지옥"이 더 와닿는 시대에 도전장을 내미는 것 같다. 왜 작가는 "타인"의 위치를 "가능성"의 영역으로 옮겨놓았을까. 그는 왜 타인과의 재회를 말하는 것일까. 본격적으로 리뷰를 시작해보자.

 


[Point 1]

 

"나의 세상을 확장하는" / "낯선 만남들에 대하여"

 

우선, 작가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인스턴트 철학으로 떡칠된 출판 경향 속에서 본인의 진솔한 경험과 깊이 있는 철학을 섞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번역가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책의 원제인 "Hello, Stranger"를 "타인이라는 가능성"으로 번역한 것은 실로 대단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초월 번역”이라 함은 이런 것을 뜻하는게 아닐까? 작가의 철학을 원제보다도 더 탁월하게 담아낸 제목이다. 그렇다면 번역가는 왜 “Hello, Stranger”, 직독 직해하자면, “안녕, 이방인”을 “타인이라는 가능성”으로 번역한 것일까?

 

책의 부제는 "나의 세상을 확장하는 낯선 만남들에 대하여"이다. 작가는 본인의 소신에 따라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사람이다. 그는 정처없이 어디론가 떠나서, 어디에선가 어떤 식으로든 머물고, 어떤 이유로든 간에 떠나는 사람이다. 작가가 이러한 여행을 고집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낯선 세상”에 제 홀몸을 던져서 그 낯섦의 깊이를 확장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는 여행을 통해 스스로가 “Stranger”, “이방인”이 되기도 하고, 다른 “Stranger”, “이방인”을 만나기도 한다. 그는 본인의 삶을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외부에 노출시킴으로써 편안하고 안락한 내부의 삶을 거부한다. 그러나 계속해서 “낯섦”과 부딪칠수록, 작가는 “타인”이라는 “공포”가 아닌 “가능성”을 발견한다. 오히려 나를 낯설게 하는 타인과의 만남은 나의 지평을 넓혀갈 수 있는 가능성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타인의 성질은 정적이고 적막한 현재형에서, 동적이고 수다스런 미래형으로 자리한다. 즉 타인은 “누군지 모르는 불확실한 어떤 사람”이라는 제노포비아(xenophobia)적 공포에서 “나 이외의 미지의 존재와 통하고자 하는” 필로제니아(philoxenia)적 욕망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타인을 향한 제노포비아적 공포에서 필로제니아적 욕망으로의 확장을 오디세우스에서 시작해 몽골 지역에서 발견되는 “환대 문화”를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이 환대는 “불확실한 낯선 타인”이라는 의심과 “내가 모르는 미지의 세계를 안고 오는 자”라는 기대, 이 두 영역 사이를 오가는 과정을 통해 발전된 것이다. 그렇기에 환대의 예절에는 “내가 제공해야 할 의무”도 있지만, “이방인인 당신이 지켜야만 하는 의무”도 있다. 어떤 문화권에도 “일방적인 환대”가 없는 이유는 이러한 “거부할 수 없는 제안”, 곧 인간 근원의 끈질긴 의지, 낯선 타인과의 소통을 위한 욕망이 더욱 강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의 주제는 “나의 세상을 확장하고자”하는 욕망을 “낮선 만남들에 대한 문화”로, 궁극적으로는 “타인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가능성이라는” 열린 공간으로 이끌고자 한다.

 

[Point 2]

"사르트르의 동전"

 

그러나, 어떻게 "타인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가능성이라는" 열린 공간으로 이끌 수 있을까? 우리가 흔히 들어온 바로, "타인"은 "지옥"에 더 가깝지 않은가? 이러한 오해를 해소하려면 사르트르가 "타인"을 대하는 모순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If there is an Other, whatever or whoever he may be, whatever may be his relations with me, and without his acting upon me

in any way except by the pure upsurge of his being ? then I have an outside, I have an essence"

"타자가 있다면, 나에게 누구고 어떤 존재이던지, 그와의 관계가 어떻든지,

그 존재의 순수한 등장 이외에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나는 외부 세계와 본질을 가지고 있다"

-Sartre, 『Being and Nothningness』, p. 321

 

내가 아닌 타인을 생각해보자. "그는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라 묻는다면, "좋은 친구다" 내지는 "나쁜 사람이다" 등등의 평가가 떠오른다. 여기서 문제는, "그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당신이 어떻게 아는가?"라고 묻는 순간이다. 이 경우, "아 나는 평소 그의 행실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이 순간 우리는 귀납법의 오류에 빠질 것이다. "과연 당신이 모든 행실을 다 지켜보았는가?". 아닐 것이다. 당신이 그 타인을 "어떠한 사람"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 사람은 당신의 인상 속에서 당신에 의해 고정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왜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 바로 "1인칭 주관적 시점"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1인칭 주관적 시점을 가지고 산다. "나는 너의 마음을 모두 이해해"라는 말도 모두 거짓말이다. 그것은 인과성을 가지지 않는 유비로 추출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만일, 인과성을 가진다면, 그것은 원인과 결과로 분명히 고정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이 본 타인의 행동이 타인이 그러하다는 결과로 확실하게 고정될 수 있겠는가? 어떤 방식으로든 1인칭 주관적 시점자는 본인의 경험과 본인의 시점을 통해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어젯밤 같이 즐겁게 놀았던 친구, 그가 진정 즐거워했는지 아니면 즐거운 척을 했을지. 우리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바로 이 경우를 뒤집어 보는 순간, "나"의 견고한 절대적 지위는 흔들린다. "나" 역시 타인에 의해서 "유추"되고 있을 뿐 아닌가?

1인칭 주관적 시점 하의 나는, 절대적 주체성을 지닌 존재로 오직 나의 관점과 시선을 통해 홀로 서 있다. 그러나 나와 같이 똑같은 1인칭 주관적 시점을 가지고, 절대적 주체성을 가진 "타인"이 등장하는 순간, 나는 그 타인에 의해 종속적이고 타율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므로 타인의 등장으로 인해 내가 가진 "본질"과 "세계"는 제멋대로 유추되고 해석되며, 각기 다른 방식으로 쪼개지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타자에 의해 종속될 수도 있는 위험을 가지면서도, 타자를 종속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나"의 세계를 황폐화하는 이러한 팽팽한 긴장감. 이 속에서 "나"는 "내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타자"를 변화시키고, "객체"로 만들고자 한다. 타자를 "객체"로 만들려고 할수록 타자는 또다시 자신의 절대성을 잃고 추락하고 만다. 결국 타자의 등장으로 인해서 서로가 서로를 엮어서 들어가는 "연옥" 같은 곳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이러한 "타인"이 동시에 "나에게 실존적 권리를 부여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즉 타인은 나에게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지옥이지만, 동시에 나의 존재 근거를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자칫 이해할 수 없는 이 모순은, 다시금 1인칭 주관적 시점으로 돌아감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 앞서 말했듯, "나"는 1인칭 주관적 시점을 갖는 절대적 주체이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필연적으로 타인의 존재와 마주해야만 한다. 여기서, 타인은 나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임과 동시에 내가 보지 못하는 나의 "은밀한 것"을 알려줄 수 있는 존재다. 앞서 말한 "그 사람은 착해" 혹은 "그 사람은 나빠"라는 평가는, 달리 말하면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무언가를 담아낸 표현이다. 즉 타자의 시선에서만 도출할 수 있는 "은밀한 것"이다. 나는 말을 하는 1인칭 주관적 시점자로서의 "I" 라는 지분도 갖지만, 동시에 타자는 말을 듣고, 하는 2인칭 시점자로서의 "You"라는 지분도 갖는 것이다. 이러한 인칭의 결합은 "he", 곧 "그 사람"을 만드는 힘이 된다. (이러한 점에서 사르트르의 아이러니함이 눈에 띈다. 3인칭의 해체로부터 1인칭으로의 추락을 이끌었던 사르트르는 동시에 1인칭으로부터의 상승과 3인칭에로의 완성을 이끈다. 아마도 그의 현상학적 관점 때문이 아닐까)

이러한 모순적인 위치의 타자는 결국 나의 의미를 해체하는 동시에, 나의 의미를 완성하는 존재다. 그래서 타자는 "동전"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타자에 의해 규정 '당하지만', 그 역설은 나를 자율적이면서도 타율적으로 만드는 모순 속에 숨어있기에, "타인은 나의 지옥이지만", "필수불가결한 지옥"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사르트르의 "타인"은 결코 어느 한 측면만을 부각함으로써 완성될 수 없는 모자이크 같은 존재다.

 

 

[Point 3]

 

"타인이라는 가능성"

 

이러한 관점에서 본 책은, "타인의 필수불가결함"을 강조한다. 어떻게보면, "타인이라는 지옥"만이 강조되어온 이 시점에 가장 적절한 반란인듯 싶다. 작가는 “누군지 모르는 불확실한 어떤 사람이라는 제노포비아(xenophobia)적 공포"에서 “나 이외의 미지의 존재와 통하고자 하는 필로제니아(philoxenia)적 욕망"으로의 이행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물론 작가의 방점은 (사르트르와 달리) "타인으로의" 일방향적인 힘이지만, "타인이 가진 힘"을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다는 주장은 참신하다.

특히 작가는 여행 중 본인이 직접 느껴야 했던 "다양한 경우의 낯섦", 그리고 그 낯섦의 의미에 대한 문화인류학적인 고찰을 엮어서 소개하는데, 이러한 서술은 낯선 문화, 낯선 타인에 대한 흥미와 이해를 더욱 넓혀준다.

 

 

"식탁에서의 즐거움은 허기나 식욕과 무관한 사회적 기쁨이다 … 낯선 사람과 식사할 대는 사회적 촉진 효과가 훨씬 덜 나타난다

낯선 사람과 함께 있을 대 우리는 더 경계하고 신중해진다. … 카자흐스탄에는 '손님은 짧게 앉았다 가지만 많은 것을 알아챈다'는 말이 있다

집주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음식을 많이 먹고 싶어 하지만 욕심 많은 사람처럼 보이기를 바라진 않는다.

이 사이에서 중심을 잡기란 어렵다"

 

-윌 버킹엄, 김하현 옮김, 『타인이라는 가능성 』, pp. 124~125.

 

따라서 본 책을 읽다보면 일종의 "문화적 간접체험"을 한다는 느낌은 물론, 식사와 대화, 선물과 같은 다양한 사회적 활동이 다양한 타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알 수 있다. 즉 작가는 낯선 타인과의 장벽을 지속적으로 허물고자 한다. 그는 인간에 대한 철학적인 통로가 아닌 문화적인 통로로, 형이상학적인 차원이 아닌, 보다 인간적인 차원으로 타인의 미지성을 걷어낸다. 그렇기에 본 책을 읽다보면 조금은 상대적이고 억지스러운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이런 이런 문화를 이해해야 하는구나"라는 방법을 알게된다.

그러나 문화를 이해하는 과정 중에는 불가피한 어려움을 마주하기도 한다. 내가 자라온 문화가 있는데 이러한 문화를 완전히 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러한 현실적인 어려움보다, "가능성"을 고집한다.

 

"외부인에서 내부인으로, 낯선 사이에서 친한 사이로 변하는 과정에는 미래의 가능성이 있다. … 타님바르제도에서 내가 공동체의 일원이 되지 못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내가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집주인 이부 린이 고른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

만일 그러면 나도 진정한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윌 버킹엄, 김하현 옮김, 『타인이라는 가능성 』, p. 164.

 

작가가 지속적으로 고집하는 "가능성"은 크게 두 가지의 측면, 하나는 "내가 모르는 나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모두의 공동체가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루는 것"이다. 작게는 개인에서 크게는 국가로까지. 낯섦을 제거하는 과정은 이 두 가지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는 이러한 "가능성"을 만드는 일이 크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강조한다. "낯섦을 인정하고", "그들의 낯섦을 껴안는 것"이면 된다. 물론 이러한 접근이 만사형통식으로 "모두 사랑하고 포용합시다"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타인은 여전한 지옥으로 남겨져 있지만, 그 지옥 속에서 "나를 발견하는 의미"를 찾아보자는 것이다. 작가는 보다 문화인류학적인, 좁게는 인간적인 측면으로 이러한 문제에 접근했지만, 이는 타자의 어느 한 면만을 고집할 수 없다는 교훈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타인이라는 지옥 속에서, 타인이라는 가능성을 찾아야 하는. 어쩌면 평생토록 이룰 수 없는 가능성이지만, 그 가능성을 믿고 살아야만 하는. 인간의 모순적인 지위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인간의 모순적인 지위야말로, 우리가 앎을 확장하고, 낯섦을 껴안는 과정이기도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작가의 말처럼 조금 색다른, 타인을 위한 시선을 갖출 필요가 있겠다. 타인이라는 지옥보단, 타인이라는 가능성을 조망하는 일 말이다. 아무리 이 세상이 허무하다한들, 아무리 이 세상 속 나의 존재가 고독하다한들, 변하지 않는 유일한 사실. 바로 "나" 뿐만 아닌 "당신"의 존재. 어쩌면 가장 기초적인 무언가를 망각했기 때문에, 우리는 간단한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위대한 피론주의자들도, 결국 방을 나설 땐 그 문을 열고 나올 것 아닌가. 제 아무리 스스로를 고독한 1인칭 주관자 시점에 놓는다한들 결국 그 시점의 상대편엔 또다른 존재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작가처럼 "타인이라는 가능성"을 염두할 필요가 있다. "나"의 존재는 나의 생각만으로 이루어진 단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 스스로는 다양한 시선에서 조명될 수 있는 장편과도 같은 존재다. 나는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아들이지만. 누군가에겐 부족한 친구일 수 있고. 또다른 누군가에겐 술먹기 좋은 사람일 수도 있다. 나는 내가 지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지만, 누군가에겐 멋있는 전문직 직장인으로, 누군가에겐 훌륭한 작가로써 남을 수도 있다. "나"라는 단일적인 존재가, 결코 단편적이지 않은 "다양성을 지닌 존재"로 인식될 수 있는 발판은 바로 타인의 시선인 것이다. 그렇기에 타인이라는 필수불가결함은, 마치 사르트르의 타인처럼 복합적이고. 모자이크적인. 벗어날 수 없는 운명과도 같다. 이러한 의미에서 "타인이라는 가능성"은 우리 인식의 지평선과 같이 넓고 끝없이 펼쳐진 가능성의 세계이기도 한 것이다.

 

 

【나오는 말】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 존재인가. 모든 것의 의미가 실오라기 하나 없이 걷혀진 지금. 이제 인간의 의미도 파훼되었다. 그 누구도 "존재"에 관해 묻지 않고, 더더욱 "타인"에 대해 묻지 않는다. 단적으로 말해, "내가 먹고 살기도 힘든데, 타인은 무슨 의미랴"는 식이다. 사실이다. 사실인데, 아주 초라한 사실일 뿐이다. 그것은 녹록치 않는 변명이다. 인간 존재에 관한 철학적 고민이 결여된 상태로, 인간 존재를 규정하려는 수많은 시도들은 얼마나 초라한 것인가? 결국 그렇다면, 우리는 단백질 세포 덩어리로 엉그러진 물질. 그 외에 어떤 의미가 남겠는가?

 

우리는 우리 스스로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것들과 엉켜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것들은 우리가 의미를 부여한 무언가다. 내가 사랑하는 만년필, 내가 애정하는 이불, 내가 처음으로 산 차. 이 존재들은 내가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완성된 "나의 것"이다. 우리의 이러한 욕구는 비단 사물 뿐만이 아닌 타인에게로도 향한다. 내가 사랑하는 친구, 내가 미워하는 친구, 내가 애증하는 부모님. 여러 갖가지 의미가 타인에게로 향한다. 그러나 쉽사리, 타인은 정의되지 않는다. 그것은 내 만년필을 쥐듯, 쟁취할 수 없는 무언가다. 나는 그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또다른 얘기를 들어보면 그렇지도 않다. 여전한 미지성. 밝혀지지 않는 의미. 알 수 없는 오묘함. 타인은 다른 것들과 달리 은밀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이러한 미지성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능성"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타인이라는 가능성』은 바로 이러한 타인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타인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두려움 없이 마주할 것을 재촉한다. 오늘날 개인 내면으로 숨어든 초췌한 회의주의의 물결을 잠시 무르고. 내 옆, 또 다른 나라, 그 나라의 문화를 경험할 것을 권유한다. 문화란 것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이기에. 그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그 개인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작가의 은밀한 속삭임도 녹아있다. 아마도 이러한 속삭임에 물든 누군가는 배낭을 메고 정처없는 여행을 떠날 수도 있다. 나 역시 그러했고, 또한 그럴 것이기에.

 

여러 나라를 경험했고, 또 경험하고픈 누군가라면. "타인"이라는 의미를 조금 더 가볍고, 친절하게 이해하고 싶다면. 더욱이 사르트르의 철학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자칫 오해할만한 "타인이라는 지옥"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재고하고 싶다면. 그보다 가벼운 철학 이야기라도 관심 있다면. 한 번 읽어보길 권유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독일 친구 "한스" 생각이 많이 났다. 그는 2017년 여름 프랑크 푸르트 암 마인 공항에서 만났던 사람이다. 길을 헤매고 있는데, 내게 다가와 친절하게 이것저것을 알려주었다. 처음보는 낮선 외국인이 친절하게 알려주다니. 사뭇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는데, 한스는 나의 기류를 감지하고 호탕하게 웃으며 한 마디 했다.

 

"Verlass dich drauf!"

 

한국어로, "당연히 믿어도 돼!" "확실해!"라는 뜻이다.

 

그 진심어린 호소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고.

그 이후, 그는 여전히 나의 멋진 친구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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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 낯선 만남은 연일 축소되어 가는 세상에서도 여일한데... 타인이라는 가능성 내용 평점4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YES마니아 : 플래티넘 k******i | 2022.07.14 | 추천1 | 댓글0 리뷰제목
  세 달 전인 사월 초에 두 분 부모님이 코로나를 앓았다. 이후 어머니는 기침 가레라는 단순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이후 많은 것을 잃은 상태이다. 뚜렷한 인지저하와 신장 기능이 투석 직전으로 떨어졌다. 두 분 부모님이 코로나를 앓는 동안 나는 부식을 실어 날랐는데, 현관을 지나 거실에 봉투를 내려놓는 동안 살핀 아버지는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았는데;
리뷰제목

  세 달 전인 사월 초에 두 분 부모님이 코로나를 앓았다. 이후 어머니는 기침 가레라는 단순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이후 많은 것을 잃은 상태이다. 뚜렷한 인지저하와 신장 기능이 투석 직전으로 떨어졌다. 두 분 부모님이 코로나를 앓는 동안 나는 부식을 실어 날랐는데, 현관을 지나 거실에 봉투를 내려놓는 동안 살핀 아버지는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았는데...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의 삶은 어떤 면에서 우리의 고립과 외로움을 악화시킨다. 우리는 다닥다닥 붙어 살고 고층 건물과 지하철로 밀려들며 붐비는 보도 위의 좁은 공간을 두고 다투는 사회적 포유동물이다. 그러면서도 연결되는 것을 어려워한다. 도시화는 외로움을 부채질하고 도심에서는 1인 가구가 갈수록 증가한다. 지난 2세기 동안 전 세계에서 생활방식이 바뀌었다. 한때 우리 대부분은 농경사회에서 살았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여러 세대가 한집에 살았고 계층 이동의 기획가 적었으며 장거리 여행이 드물었다. 그때는 자기 부족과 소속 집단을 알아보기가 어렵지 않았다. 이제 우리의 삶은 더욱 원자화되었다. 이동이 더 쉬워졌고 많은 사람이 혼자 살며 관계가 일시적이고 덧없어졌다. 그 결과 외로움이라는 고통이 퍼졌다... 도시 생활의 역설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우리에게 함께라는 느낌이 없다는 것, 우리가 그 느낌을 갈망한다는 것이다...” (pp.19~20)

 

  두 분이 코로나에 걸려 있을 때 아내는 마라톤 완주를 앞두고 있었다. 아내는 육체와 정신의 초점을 온전히 달리기에 맞추고 있었으므로 부모님의 코로나에 대해서는 지나가는 투로 한 두 번 내게 물은 것이 전부였다. 아내가 마라톤 완주를 하는 날은 마침 부모님의 격리가 끝나는 날이었다. 나는 마라톤 완주를 끝낸 아내를 집으로 데려온 후, 이틀이 지난 다음 결국 참지 못하고 아내를 불러 세웠다.

 

  『... 로마의 정치인이자 철학자였던 세네카는 친구 루킬리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두를 신뢰하는 것은 아무도 신뢰하지 않는 것만큼 문제다(전자는 더 가치 있는 행동이고 후자는 더 안전한 행동이겠지만)”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세네카는 틀렸다. 모두를 불신하는 것만큼 내 취약함을 드러내고 나를 고립시키며 위험에 빠트리는 행동은 없다.“ (p.62)

 

  그리고 꼭 필요한 말이었나 짚어보게 되는, 그러니까 우리가 잠시나마 운동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활동을 한 것은 타인을 향한 배려와 애정의 마음 때문 아니었느냐, 그리고 우리들의 부모는 가장 가깝게 위치한 타인 그것도 허약한 타인일 터인데, 그에 대한 배려조차 원활하지 않다면 우리가 저 기득권화된 정치권의 엘리트 운동권 출신 위선자들과 무엇이 다르냐, 라고 몰아쳤다.

 

  “우리는 낯선 사람 수백만 명이 바글바글 살아가는 세계에 익숙하지 않다. 우리는 대략 150명 정도만 예의주시할 수 있는 뇌를 가진 생명체다. 그러나 우리는 메가시티와 고층건물로 떼 지어 몰려가고, 지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쭉 모르는 사이일 수만 명에게 둘러싸여 살아간다. 그러나 이렇게 거대한 도시에서 사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데도 우리는 놀라울 만큼 잘 버틴다.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가 무성하지만, 우리는 꽤나 평화를 사랑하는 종족이다. 나중에 인류애를 상실하게 된다면 사람들로 붐비는 도시의 거리에 나가보라.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게 마실 음료를 준비하라. 거의 모든 곳에서 인간이 타인에게 공간을 내어주는 데 놀라울 만큼 뛰어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pp.247~248)

 

  내 부모를 향한 아내의 무덤덤함에 서운함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무언가에 몰입하면 그것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일에 소홀하고, 그 소홀함을 인지하지 못하는 아내가 걱정스럽기도 하여 나는 말했고, 아내는 내 말에 수긍해주었다. 덧붙여서 나는 아내에게, 우리는 이제 과거의 우리가 아니고 타인과의 적절한 관계를 통하여 도움을 주고받지 않으면 제대로 살아갈 수 없는, 현저한 늙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도 말했다.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나요? ... 정확히 말하기는 힘듭니다... 사람에 따라 달라요. 하지만 아마 2년이나 3년 정도일 겁니다... 우리는 둘 다 울기 시작했다. 2년안 말도 안 되게 짧은 시간 같았다... 그러나 2년은 계속해서 삶을 살아나가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헬렌 덴모어는 말년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나는 내가 죽어가고 있음을 안다. 그러나 잘린 줄기에서 최선을 다해 꽃을 피워내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비록 잘린 줄기지만 계속해서 꽃을 피워내려고 노력했다. 병원에 다녀오고 몇 주 뒤 엘리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책으로 집필할 시간을 마련하려고 일을 그만두었다. 엘리는 유산을 남기고 싶어 했고, 떠나기 전에 이 세상에 무언가를 주고 싶어 했다. 우리는 여행 계획을 세웠다. 여름에 코펜하겐으로 휴가를 가기로 했다. 엘리가 늘 덴마크에 가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집에 손님을 초대했고, 언제나처럼 내가 요리를 했다. 이제 그 어느 때보다도 세상과의 문턱을 낯줄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도시 외곽에 넓게 펼쳐진 초지를 거닐며 물총새와 잠자리, 갈대 사이를 지나는 여우를 발견했다. 저녁이면 함께 텔레비전을 보거나 책을 읽었다.』 (pp.309~310)

 

  책에는 ‘나의 세상을 확장하는 낯선 만남들에 대하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아버지의 코로나 이후 세 달, 나는 과거와 같은 사람이면서 완전히 낯선 사람이 되어버린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을 다녔고 주중의 점심 식사를 챙겼다. 아내는 매주 토요일 혹은 일요일, 나와 함께 부모님을 찾아 저녁을 했다. 그사이 엄마는 엉덩방아를 찧었고 압박 골절로 병원에 시술을 받아야 했다. 사실 낯선 만남은 연일 축소되어 가는 세상에서도 여일하다. 

 


윌 버킹엄 Will Buckingham / 김하현 역 / 타인이라는 가능성 (Hello, Stranger) / 어크로스 / 351쪽 / 202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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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이라는 가능성, 리스크를 안고 뛰어들어야 할 세계.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2점 s*****h | 2022.04.16 | 추천0 | 댓글0 리뷰제목
혐오와 배척, 갈라치기, 개인주의의 시대다. 시대의 문제와 상관없이 낯선 이들과 연결되는 것이 반드시 설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내 옆집에 어떤 안전한 이웃이 사는지 알고 있는가? 경계와 안전의 문제가 대두된다. 저자 윌 버킹엄은 인류학자로서, 타인과의 관계, 즉, 사회/공동체의 관계망에서 발생하는 분명한 현실적인 문제들과 그간 쓰여진 고전들에서;
리뷰제목
혐오와 배척, 갈라치기, 개인주의의 시대다. 시대의 문제와 상관없이 낯선 이들과 연결되는 것이 반드시 설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내 옆집에 어떤 안전한 이웃이 사는지 알고 있는가? 경계와 안전의 문제가 대두된다.

저자 윌 버킹엄은 인류학자로서, 타인과의 관계, 즉, 사회/공동체의 관계망에서 발생하는 분명한 현실적인 문제들과 그간 쓰여진 고전들에서 그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관점을 드러내고 캐낸다.

예를 들면 몽골에서는 손님이 호스트에서 예우를 갖추지 않으면 쫓겨나게 된다. 또, 여행지에서 낯선 이를 곧바로 믿지 못하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풀기도 하고, 여러 국가를 오갔던 공자의 ‘예’ 사상에 대한 배경을 풀어놓는다. 또, ‘선물 교환’의 미묘한 긴장과 왜곡에 대한 문제를 짚어낸다. 가장 적절한 것을 주고, 또 선물을 그 상대방에게 다시 답례해야하는 것이다. 가장 안전한 공간으로서의 집의 모습, 그리고 그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인간의 공통적인 감정, 타인과의 관계의 산물로 생겨나는 명예와 평판이라는 것.

타인과 하하호호 사이좋게 지내고 싶은 것은 이상이고, 복잡다단한 이해관계, 성향, 가치관의 문제, 안전에 대한 문제, 문화차이 등을 넘어서는 지점은 어디에서 가능한가?

저자는 그래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란 계명이 그렇게 지키기 어려운 것이라며 언급한다.

“사회적 동물인 우리는 선물을 주고받으며 사회적 관계를 맺는다. 관대함이 사회연결망에 퍼져나가며 우리를 하나로 묶는다. 그러나 이 끝없는 선물의 순환 고리 속으로 들어가려면 최소한 무언가를 줄 기회가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타인에게 무언가를 내주는데서 오는 인간의 존엄성이 필요하다. 줄 방법이 없으면 사회의 지도 바깥으로 떨어지고, 그 결과로 외로워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타인이라는 가능성의 세계는 우리의 외로움을 털어내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무언가를 내어주면서 존엄성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도서제공: 어크로스북스(북클럽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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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람 인, 사이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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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마니아 : 로얄 펜**기 | 2022.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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