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그 감정을 제가 라디오 PD가 될 수 없다고 직감했을 때, 그러니까 딱 얼마 전에 느꼈어요. 이제 정말 내 스스로 가꾸는 연극은 끝났다 싶었어요. 매일 좌절했고, 자주 우울했고, 허망했어요.
그런데 그 생각은 틀렸어요. 연극이 끝나고 무대가 정리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새 연극을 위한 준비가 시작돼요. 다시 무대 장치가 세워지고 음향 장비가 세팅되죠. 조명이 켜지고 배우는 뒤편에서 목을 풀어요. 관객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객석을 채우고요. 그렇게 또 다른 연극이 무대 위에 올라요.
--- p.56,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중에서
자신과 반대되는 일을 선택한 사람은 어떻게 느낄까? 만약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제가 좋은 본보기가 될 수도 있겠어요. 물론 “얻는 것들도 많다”라고 꼭 한 마디 덧붙여주고 싶긴 해요. 사실이니까요. 저는 좋아하거든요. 이 어려운 일을 택한 선배들과 이야기하는 자리, 하루가 끝난 뒤에 오는 후련함, 힘든 일을 기꺼이 해냈다는 것에 대한 은근한 자부심.
--- p.146, 「나를 버려야 지키는 나를, 나를 지키려 못 버린 나를」 중에서
얼마 전에는 처음으로 서핑을 다녀왔어요. 효진 씨도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엄청난 몸치예요. 특히 균형 감각을 잡는 신체 기능이 열등해요. 반신반의했지만 역시나 서핑보드에서 일어서기는커녕 물만 잔뜩 먹고 돌아왔어요.
그래도 뭍에 도착해서 물기를 탈탈 털고 다시 보드를 들고 바다 안쪽으로 걸어갔어요. 보드는 생각보다 무거웠고 조정하기 쉽지 않았어요.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갈 땐 보드로 파도를 꾹 누른 채 걸어가야 해요. 그런데 어차피 또 못 일어서고 보드한테 두드려 맞을 걸 알면서도 걸어가는 그 기분이 너무 좋은 거예요. 어쨌든 저는 바다 안쪽으로 걸어가고 있었거든요.
--- p.216, 「파도같이 내게로 그냥 그렇게 와요」 중에서
뜻돌 님은 ‘포기’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내가 했던 포기를 돌아보면 항상 잘한 일이었다고 느껴요. 내게 좋은 길을 가는 거예요. 내가 했던 선택들은 내게 도움이 되었던 것들이고.”
라디오 PD라는 꿈을 포기했을 때, 제가 여태 쌓아온 것들이나 라디오에 대한 마음이 다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힘들어 울었던 건 당연하고요. 그런데 이제 와 돌아보니 그때 시험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새로이 촉을 세울 수 있었고, 제가 원하는 것을 다시금 살펴볼 수 있었어요.
--- p.221, 「우리가 평생을 눈물 흘릴 것도 아니잖아」 중에서
효진 씨와 저와의 차이를 많이 이야기했지만 결국엔 같은 것으로 귀결되는 것 아닐까 생각해요. 모든 것은 나라는 사람을 또렷하게 발견하기 위한 과정이고, 제가 쥐고 있는 것들을 더 명확하게 만들기 위한 과정이라고요. 정답은 많은 문장이 아니라 또렷하고 정확한 한 문장으로 완성될 것이라고 믿어요.
--- p.245, 「그러니 자유롭게 네가 되고 싶던 모습이면 돼 천천히」 중에서
면접 합격 여부에 상관없이 저는 더 이상 저 자신을 의심하지 않기로 했어요. 이제 겨울이잖아요. 곧 새해가 올 거고요. 서른을 앞두고 저의 20대를 돌아보니 제가 걸어온 모든 길들이 한 지점을 향해 있었다는 확신이 들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되고 싶은 모습.
앞으로는 제가 좋아하는 음악에 맞춰 멜로디를 따라 춤을 추듯 살고 싶어요. 제가 팔을 뻗고 싶을 때 뻗고, 다리를 유연하게 그리듯 움직이면서요. 들리는 곡이 이왕이면 칠(Chill)한 느낌이면 좋겠네요. 30대에는 보다 여유로운 방식으로 춤출 수 있도록요.
--- p.251, 「우린 긴 춤을 추고 있어」 중에서
과거의 나처럼 성실함과 치열함을 부정하며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가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노래하는 대로 살진 못했지만, 순간의 편린들이 모여 나의 꿋꿋한 세계를 만들었다.
나는 비로소 내가 쌓아온 것들을 믿는다. 나의 믿음이 당신의 분투에 조금이나마 힘이 되길 바란다.
--- p.258, 「에필로그」 중에서
꿈을 직업으로 해석하지 않기로 결정한 우리들은 한층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손에 쥐게 됐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고민을 시작하면 된다. 이제 모르지 않고, 알고 있는 것들을 손에 쥔 우리들은 어디로 나아갈 수 있을까. 나는 이 질문에 쏟아져 나올 대답들이 궁금하다.
--- p.260,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