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맛집은 다 먹고 나서 찰나의 여운이 남아 문득 생각나는 음식점보다, 먹고 있으면서 동시에 ‘여기 또 와야겠다, 다른 메뉴도 먹어 보고 싶다.’ 하는 맛집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지금 함께 있으면서도 또 만나고 싶은 맛있는 사람, 맛있는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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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은 최소한의 믿음이 자아낸 결과다. 믿었던 나를 원망할 필요도 없고, 믿은 그것(상대)을 탓할 것도 없다. 내가 가진 정보나 감정이 앞서간 건 인간적인 바라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관계가 남았는데, 겨우 이걸 가지고 실망하려 하는가. 나를 갉아먹을 시간에 내 관점을 달리하는 수밖에. 기대를 비우고 호구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베풀면 그만이다. 그럼 떨어질 사람은 알아서 떠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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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고 싶어 한다. 좋은 사람인 것과는 결이 좀 다르다. 좋은 사람으로 남는 건 이미지이지만, 필요한 사람으로 남는 건 존재감이다. 이미지로 남는 건 살아있음을 느끼는 정도보다 레벨이 낮다. 살아있음을 느끼는 건 살아있음에 다행함을 만끽하는 일이다. 누군가 나에 대해 존재감을 느낀다는 말은 내 생이 쓸모 있다, 영향력 있다, 계속 살아도 좋다는 인정을 받은 것과 같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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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단순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 사랑의 대상이 바깥에 있든 안에 있든 상처를 무릅쓰고 사랑하는 것이다. 상처가 있는 나를 포용하고, 상처를 주어도 좋을 이를 허락하는 것, 사랑은 인생의 유일한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고통을 겪고 고독을 지나온 이는 자연히 인생의 깊이를 내뿜는다. 어떤 사람에게서 빛이 나는 건 깊은 어둠을 지나온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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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은 대개 미뤄 두다가 늦게 시작하기 일쑤이다. 그런 일 중에서 생산성을 품은 일은 지금, 당장, 늦어도 오늘부터 실천해야 완전히 다른 인생을 만끽할 수 있다. 비생산적이고 부정적 결정이라면 내일로 미룰수록 좋다. 이것만이 지금처럼 살고 싶지 않은 이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가는 방법이다. 비범한 사람은 바로 시작하고, 평범한 사람은 생각만 또 반복한다. 평범한 삶을 추구하는 건 좋지만, 그저 그런 무채색의 사람으로 사는 건 재미를 잃어버린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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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심리학자들은 조언한다. 우울하거나 불안한 감정이 올라올 때는 성찰하지 않는 편이 더 좋다고. 어느 정도 감정에서 좀 멀어졌을 때가 나를 돌아볼 좋은 타이밍이다. 가끔 ‘내가 다 그렇지 뭐’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떨쳐 버려야 한다. 그 생각을 버리지 못하면 나 자신을 버리게 되는 지경에 이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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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은 어디서부터 시작될까? 반복되는 주변의 무시와 미치지 못하는 인정 기대치, 그 결핍으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까. 나의 문제임에도 세상이 다 재미없게만 느껴진다. 내가 곧 나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무기력이 찾아 왔을 땐 휴식이고 마음 챙김이고 뭐고, 결과가 그대로라면 때려치울 것을 과감히 때려치워야 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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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하고 굴곡진 생이라면, 나 같은 운전자가 길 위에 많거나 커브 많은 구불길 혹은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중인 거지, 운이 나쁘거나 신이 나에게만 시련을 준다거나 내가 마냥 바보 같아서 그런 건 꼭 아니다. 인생은 본디 고통이다. 애쓰고 버티고 견디는 걸 특별히 대단한 일이라 여기며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태어난 동시에 장착한 기본 옵션이니까. 선택사항이 아니란 소리다. 관점만 바꾸면 되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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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행의 신화나 티핑 포인트가 눈에 띄는 사람들의 스토리를 보면 거의 다 포기했을 즈음에 한 번 더 최선을 다해서 반전을 겪은 에피소드가 많다. 재능이 없는 열정의 비극은 빨리 깨우쳐야 하겠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도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면? 희극으로 끌고 갈 수 있다고 끝까지 믿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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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느낀 철든 사람의 공통점이다. 변화에 민감하기에 인간 사이에서도 지혜로운 공감능력을 발휘한다. 자기 이야기만 내세우기보다 상대의 이야기에 더 시간을 내어 귀 기울인다. 소통할 땐 답변을 목적에 두지 않고 이해를 목적에 둔다. 상대의 가면 속에 감춰진 고통이 오롯이 느껴지면 말없이 듣고 토닥여 준다. 민낯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그대로의 모습이 부끄럽지 않게, 자신의 기운을 기꺼이 나눠 준다. 곁에서 자기 존재의 온도로 지켜 준다.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여유가 있다. 자신은 고통이 전혀 없어서 생긴 여유가 아니다. 그 고통을 겪는 개별의 사연을 타자를 중심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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