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고 싶어 하는 이들은 대부분 외로운 사람들이었다. 누구에게나 나만의 슬픔 주머니가 있었다. 하지만 글을 씀으로써 스스로 극복하려 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었다. 쓰는 행위를 통해 어떻게든 문제를 풀어보려 한 그 절실함에 오히려 내 마음이 따뜻해지는 경이로움을 경험했다.
--- p.9~10
나는 최대한 외로워지려고 애쓴다. 외로운 음악을 틀고, 외로운 조명을 켜고, 외로운 나 혼자만의 방에 갇히려 한다. 외로움에 에워싸이다 보면 외로움의 틈을 비집고 무언가가 올라온다. 어떻게든 치고 올라온 어떤 외로움에 기대어 글을 쓰기 시작한다.
--- p.11
글의 적은 행복이다. 행복해서 미칠 지경이라면 글 따위는 쓸 필요가 없다. 반대로 지금 불행하다면, 마음이 사무치게 외롭다면 글을 써야 한다. 당장. 글쓰기라는 외로운 사냥꾼이 되어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
--- p.12
나는 전생에 목수였을까. 엄마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이미 크고 작은 못들을 콩콩콩 박았는데 뽑아내기는커녕 이번엔 특대로 쾅쾅쾅 망치질을 해댔다.
--- p.17
견딜 수 없었다. 엄마의 꿈 따위 안중에도 없던 내 무심함이 부끄러워서. 엄마도 처음부터 엄마로 태어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역할을 잘 해내서 모두가 깜빡 속았을 뿐이다. 내 꿈만 귀한 줄 알았다. 내 목표를 위해 엄마에게 희생을 강요했다. 이 글을 쓰는 나는 또 한 번 엄마에게 빚을 지고 있다. 엄마 이야기로 글을 쓰고 있으니.
--- p.21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 모두의 인생에는 희로애락이 있고 각자의 사연이 있다. 때로 찬란하고 때로 쓸쓸한 삶 자체가 한 편의 작품이다. 누구에게나 이야기는 있다. 다만 발견되지 못했을 뿐. 숨겨진 나를 찾아보자. 글쓰기의 시작은 ‘관찰’에서 출발한다.
--- p.23
작가는 그런 사람인 것 같다. ‘이야기꾼이 아닌 마음 탐구자.’ 남들이 눈여겨보지 않은, 지나쳐버린 미세한 작은 것 하나에서 따뜻한 의미를 길어 올리는 사람. 관찰하다 보면 말 없는 일상이 말을 건다. 스마트폰만 보고 걷던 내가 좀처럼 보지 않았던 하늘을 바라보게 되고, 똑같았던 구름이 어느 날은 솜사탕처럼, 어느 날은 별사탕처럼 보이는 진기함. 그 재미를 발견하고 표현하는 것이 글쓰기의 시작이다.
--- p.28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나를 만나기 위해서다. 나도 몰랐던 진짜 나, 내가 발견해주길 기다리고 있는 저 구석의 나, 내가 바라봐주지 않은 눈부신 나……. 그러니까 나는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 글을 쓴다. 어떻게 보면 나는 누구인가가 아닌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글쓰기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종국에는 무엇을 위해 사는지에 대한 답 말이다.
--- p.31
우리네 인생이 드라마라면 글쓰기는 홀로 쓰는 모노드라마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나 무궁무진한 글감이 있다. 다만 아직 발견되지 못했을 뿐. 아직 밖으로 끄집어내지 못했을 뿐. 내 안의 도처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만약 평범을 끌어올려 글을 쓰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결코 평범한 행위가 아니다. 그 자체로 특별한 의미가 된다.
--- p.33
언어의 세계에는 한계가 없다. 어떤 말이든 조합할 수 있다. 그것은 내가 마치 창조자가 되어 나만의 세계를 만드는 것과 같다. 규정 없는 미지의 세계, ‘언어’. 그러니 같은 말을 반복적으로 쓰는 것은 한량없이 다채로운 언어에게 결례를 범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라고 했다. 내가 쓰는 언어는 곧 나의 세계인 셈이다.
--- p.43
누구나 첫 문장의 중요성을 잘 알지만, 하얀 바탕에 깜빡이는 커서를 보면 막막해지기 마련이다. 대체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까. 멍 때리고 깜빡이는 커서를 보며 내 눈만 깜빡깜빡…… 손가락이 알아서 자판을 움직여주면 좋겠건만 야속하게도 내 손은 좀처럼 미동이 없다. 가끔 드라마에 나오는 작가들은 신들린 듯 자판을 두드리던데, 신도 차별을 하는지 나에게 그 신은 한 번도 온 적이 없더라. 아, 나도 작두 한 판 타보고 싶다!
--- p.52~53
그의 글을 네모반듯하게 따라 써보았다. 아니 받아 적었다는 표현이 좀 더 적확할 것이다. 완벽히 매혹당한 문장들을 훔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물우물 입에 한 움큼 넣어 먹었다. 때로는 오래 곱씹으며 핥았고, 때로는 단숨에 삼켰고, 때로는 꿀꺽꿀꺽 마셔버렸다. 까만 밤, 흑석동 고시원에서 홀로 스탠드 불빛에 의지해 문장을 먹었다.
--- p.72
단문은 시대의 흐름이기도 하다. 괴테나 셰익스피어 같은 과거 대문호의 작품들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문장 자체가 길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긴 문장이 곧 학식 있는 문장이었지만 바쁜 21세기에는 직관적인 문장이 곧 팔리는 문장이다. 한 번에 읽히지 않으면 대중에게 외면당하기 일쑤다. 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오늘날 영어 문장의 평균 길이는 18세기와 비교해 3분의 1 이하로 줄었다고 한다.
--- p.92
역사는 반복되고 인생은 과거, 현재, 미래로 하나의 방향을 향해 직선으로 흐른다. 하지만 그 시간을 살아내는 현실적인 삶은 직선일 때보다 곡선일 때가 더 많다. 어디를 향해 나아갈지 종잡을 수 없는 그 굴곡진 선들이야말로 글을 쓰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반복과 변주 사이 어딘가에서 우리네 삶은 춤을 춘다. 몸치라 왈츠는 못 춰도 글에서만큼은 시적인 왈츠를 마음껏 춰보고 싶다. 쿵짝짝 쿵짝짝 왈츠 출 줄 아세요?
--- p.103
만약 남녀가 사귀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싶다면 ‘둘은 사귀기 시작했다’가 아니라 ‘봄꽃이 그녀의 얼굴을 스쳤다’라거나 ‘참 재미있는 하루였다’가 아니라 ‘온종일 내 마음은 맑음’ 등이 예가 될 수 있다.
--- p.106
글을 쓴다는 것은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과 같다. 처음에 찍은 한 점이 쭉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한 바퀴 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동그라미는 처음과 끝이 만나는 수미상관 기법과도 맞닿아 있다. 절대 처음과 끝을 떨어트려 놓으면 안 된다. 이 둘을 만나게 해주세요, 제발.
--- p.112
책을 읽다 보면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에 충실한 글들을 만날 때가 있다. 이 순간 나는 더없이 새롭고 흥미로운 감정이 인다. 가령 클레어 키건의 소설 『맡겨진 소녀』를 읽을 때는 내내 청각에 안테나를 곤두세웠다.
--- p.130
이후에도 수많은 프로그램을 맡았다. 그렇지만 김현식 특집만큼 말 그대로 내 영혼을 갈아 넣어 쓴 대본은 없었다. 뻔한 말이지만 진심은 실패할 수 없다. 글에도 진심이 있다. 진심은 크든 작든 진가를 드러낸다. 몇 번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는지 세세히는 몰라도 얼마나 정성 들여 썼는지를 독자는 느낄 수 있다. 좋은 글은 대상을 향한 ‘애정’에서 비롯된다.
--- p.145
모든 훌륭한 글은 사랑이 낳는다. 세상은 자주 외롭고 잊힐 만하면 스산해지지만, 사랑에서 나온 글은 우리를 조금 덜 외롭고 덜 쓸쓸하게 만들어준다.
--- p.146
어떤 음식은 미각보다 후각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통밀로 구워서 구수한 빵 냄새, 과일 향이 느껴지는 맥주, 숯 냄새가 그대로 밴 훈제 소시지 같은 것들. 반면 백설기는 어떤가. 포근하고 쫀득한 질감, 즉 촉각이 미각보다 더 확실하게 다가온다. 음식의 비주얼은 시각으로, 맛은 미각으로만 표현한다면 뻔한 글이 될 수 있다. 글의 참신함은 의외성에서 나온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을 당겨 와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낼 때 그 글은 자신만의 레시피가 담긴 하나의 요리가 된다.
--- p.154~155
스티븐 킹은 수동태를 제발 쓰지 말라고 거의 애원하다시피 말한다. 수동태를 많이 쓰는 것은 “구두약으로 수염을 그린 소년들, 또는 엄마의 하이힐을 신고 뒤뚱거리는 소녀들에게나 어울린다”라고도 덧붙인다. “수동태는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할 자신이 없어서 나오는 문장으로 나약하고 괴롭기까지 한 문장이다.”
--- p.170
문학 강의 시간에 교수들이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 중 하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써라’이다. 대학 수업뿐만 아니라 글쓰기 문화센터에만 가봐도 대개 시작은 ‘나 자신부터’라고 조언한다. ‘나’야말로 내가 제일 잘 아는 이야기이자 잘 쓸 수 있는 소재이다. 특히 외로운 사람일수록 자신의 이야기를 잘 풀어낼 확률이 높다. 그래서 혹자는 작가란 결핍이 많은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 p.189~190
고립과 결핍으로 점철된 상황에서 인간에게 글쓰기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내 말간 고통과 직면하는 일이었다. 쓰다 보니 나를 똑바로 직시하게 됐고,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기에 이르렀다. 자아를 타자화해서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조금은 글다운 글들이 써졌다. 비로소 가슴 언저리 어딘가에서 나오게 된 그 글들은 유난 떨지 않은 채 조용히 나를 위로했다.
--- p.191
고독을 업고 나에게 들어온 글을 어떻게든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글은 내 삶에 똬리를 틀었다. 글을 계속해서 썼던 것은 나와 만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은밀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만큼은 스스로에게 솔직할 수 있었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던 나, 스스로도 납득되지 않았던 나, 한쪽 구석에서 숨죽여 있던 나, 이해할 수 없었던 그날의 나를 이해하는 법, 그것이 글쓰기였다.
--- p.192~193
어떻게 보면 퇴사자, 육퇴자, 은퇴자는 원의 구심력보다 원심력에 있는 사람들이다.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으로 원의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밀려난 사람들. 그들에게 글은 ‘구심력’이 되어준다. 불확실한 미래, 아니 오늘 하루마저 희뿌연 안개로 가득해 방향감을 상실했을 때, 잡념으로 가득한 머릿속을 분리수거하고 싶을 때, 무엇보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내 자리를 잃어버린 것만 같을 때, 수많은 상실감은 글쓰기를 부추긴다.
--- p.223
때로 삶이란 참 얄궂어서 도무지 감당하기 힘든 거센 파도를 동반한 고통이 밀려올 때도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길 잃은 내 영혼을, 꽁꽁 묶인 슬픔을 끄집어낸다. 나의 고통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쓴다. 나의 고통과 헤어지는 행위, 글쓰기의 다른 이름이다.
--- p.225
수강생들이 발견한 일상의 의미화가 근사했고, 그들의 생각 주머니에서 발화한 글들은 발그레한 꽃잎처럼 아름다웠으며, 무엇보다 이를 함께 나눌 수 있음에 충만했다. 주중의 우리는 각자 글을 읽고 쓴다. 토요일이 오면 서로의 글을 듣고 말한다. 읽고 쓰고 듣고 말하며 삶에서 절대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들을 말간 얼굴로 만나는 시간.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 소박하고 정겨운 토요일을 기다린다.
--- p.245~246
패터슨의 일상은 매일 똑같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도 같은 순간인 적은 없었다. 우리네 삶에 허튼 순간 같은 건 없으니까. 아주 미세하지만, 어제와 다른 오늘의 순간을 포착했을 때, 백지는 서서히 글자들로 물들기 시작한다. 일상이 기록이 되고 그 기록이 한데 모여 인생이 된다. 우리는 관찰을 통해 스스로가 발견해주길 바라는 ‘나’를 찾아내야 한다. 이 세상을 영위하는 모든 것이 그렇듯 한 번에 쉬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오랫동안 관찰하고 고민한 시간의 결과물이 ‘글’이다.
--- p.268
일상이 글로 변주된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지리멸렬한 삶일지라도 반복해서 쓰다 보면 의미 있는 무엇이 된다. 꼭 책이라는 완결 형태의 결과물이 아닐지라도 세상에 쓸모없는 글은 없다. 별것 아닌 삶도 쓰다 보면 별것 있는 삶이 된다. 기록이란 까만 밤하늘에 흩어져 있는 별들을 모으는 일이다.
--- p.269
우리의 일상이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시간이라면, 글을 쓴다는 것은 현실을 꿈으로 만드는 시간이다. 너무나 평범해서 너무나 시적인 삶을 꿈꾸며. 그렇게 삶은 시가 된다.
--- p.270
그는 여태껏 사랑하지 못한 나를 껴안아주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문장은 서툴렀지만, 단어 하나하나에 진심이 가득했다. 글쓰기가 사치라면, 그 사치를 매일 누릴 수 있는 나날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나아가 외로운 마음이 풍요로워질 수 있다면, 때로 뜨겁게 눈물 흘리고 스스로 닦아낼 수 있는 힘이 생길 수 있다면,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 p.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