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 해 질 무렵이면 이 동네로 산책을 나섰다. 퇴근해서 장을 보거나 바삐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삼삼오오 모여 맥주를 마시며 왁자지껄하게 이야기꽃을 피우는 그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은 꽤나 흥미진진했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낯선 곳을 돌아다니는 것만큼 여행에서 큰 즐거움이 또 있을까. 어쩌면 여행을 하는 가장 큰 이유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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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는 내려진 셔터를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도시다. 똑같은 셔터가 하나도 없다는 게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저마다의 개성과 스토리가 담겨 있다. 셔터 안에 어떤 스토리가 있을지 그림을 보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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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다는 것과 병원은 절대 어울릴 수 없는 조합이 분명한데, 산파우 병원을 보는 순간 ‘이런 생각도 편견이었구나’ 하고 웃었다.
병원은 아름다운 꽃 등의 자연을 모티브로 한 갖가지 화려한 타일과 조각으로 내부를 꾸몄는데, 곳곳에 있는 창을 통해 자연을 실내로 불러들여 조화를 이룬 것을 볼 수 있다. 지금의 바르셀로나를 있게 한 유명 건축가의 건물을 맘껏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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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골목을, 어떤 거리를 걸어도 바르셀로나는 높고 푸른 나무와 따스한 햇살로 가득하다.
우리가 이곳을 사랑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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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브루멜을 체크아웃하던 날, 호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때문인지 떠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마지막으로 받은 관광 페이퍼와 어제 관람했던 미스 반데어 로헤의 작품집을 들춰보며 커피와 빵 오 쇼콜라를 먹었다. 택시를 기다리면서 ‘아쉬움은 또 다른 시작이야’ 하는 생각을 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한 달에 한 번씩 호텔 브루멜에서 선정한 뮤직 리스트 ‘브루멜 뮤직 Brumell
Music’을 메일로 받고 있다. 오늘도 그 음악을 찾아 들으며 나의 마음은 브루멜 언저리를 배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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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가 지나니 이제는 뜨거운 햇살을 마주할 용기가 났다. 처음 도착해서는 온몸에 선크림을 덕지덕지 발랐다. 해변에서도 파라솔 안에 몸을 숨기기 급급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내려놓기 시작했다. 이내 온몸은 까맣게 탔고, 서로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런데 이렇게 까맣게 태닝한 몸이 멋져 보이기도 했다. 물론 주근깨가 올라오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고 지중해의 뜨거운 햇살을 즐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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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사전에 얼마나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꼼꼼하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보고 느끼는 결과물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때로는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고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보는 것도 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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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는 다른 도시에 비해 참 편안하다. 그 이유가 뭘까 하고 생각해봤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식물원처럼 눈이 머물고 발길이 닿는 곳마다 초록으로 가득하다. 그래서일까? 꽃집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온갖 잡지에서 핫하다고 하는 수형의 식물이 이곳에서는 베란다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걸으면서 주변을 둘러보기만 해도 사진으로 남기고 싶고, 두 눈에 담고 싶은 것들로 가득했다. 이곳에서의 산책이 늘 즐거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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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했던가? 이 말은 해 질 녘을 의미하는 프랑스의 ‘L'heure entre chien etloup’에서 유래했다. 세상이 붉게 물들고, 언덕 너머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는 개인지, 나를 해치러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다는 의미로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한다.
나는 하루 중에서 이 시각을 제일 좋아한다. 붉은 건지, 푸른 건지 분명하지 않은 그 사이로 비치는 하늘을 보고 있자니, 이곳에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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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에서 시에스타가 필요한 그즈음 우리는 바르셀로나로 떠났다.
시에스타가 뜨거운 여름을 견뎌낼 수 있도록 쉬어 가는 낮잠이라면, 바르셀로나에서 보낸 한 달은
1년을 숨 가쁘게 뛰어온 우리에게 주는 달콤한 낮잠 같은 시간이었다.
바르셀로나의 뜨거운 여름은 우리를 기꺼이 맞아주었고, 사람들의 미소와 거리에 넘쳐났던 활기는 우리를 환영하는 듯했다. 모든 음식은 맛있었고, 어떤 거리를 걸어도 우리의 감각은 잠시도 가만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친절했고, 바르셀로나는 구석구석 걷고 또 걸어도 언제나 새로움으로 가득했다.
바르셀로나는 정말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뽐내기보다 소박한 일상에서 그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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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에 도착하자마자 무거운 옷을 벗어 던지고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주변을 의식하고 싶지 않았고, 의식할 필요도 없었다. 화장도 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입고 온몸이 새카맣게 탈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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