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성이 없다는 것은 환상문학의 가장 큰 비밀의 하나다. 왜 상업성이 없을까? 앞에서 ‘문학사적으로 소멸한 장르’라는 말을 썼는데, 그 실질적인 의미는 ‘무섭지 않다’이다. 그것은 독자들의 독후감에서 쉽게 확인된다. 왜 무섭지 않을까? 100년, 200년 전 독자에게 통하던 기법이 지금 효력을 발휘할 리가 없지 않은가. 거기에서 사용된 클리셰들, 예를 들어 ‘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는 지금 책을 읽지 않는 사람도 영화 등을 통해서 훤히 알고 있을 정도이다. 환상문학이 고전 총서류에 포함되면 단행본으로 냈을 때보다 더 팔리는 수수께끼는 복잡한 것이 아니다. 19세기 유령 이야기가 상업적 자립성이 없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환상문학 기획자 앞에 놓인 판매라는 과제는 이중적이다. 출간된 책의 판매를 궁리하기에 앞서서 출간 자체가 가능해야 한다. 회사가 자신의 기획을 사 줘야 하는 것이다.
--- 김영준, 「환상을 팝니다」
저마다 다르게 그려지는 미래 예측 속에서 신종 바이러스, 생태 위기, 신자유주의, 세계화, 비대면 기술은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조연이 되기도 한다. 포스트 코로나라는 상상은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한갓 환영에 불과할 수도, 변화를 꾀하는 동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다만 나는 우리들이 ‘인류가, 국가가, 내가 무언가를 해야 할 때’를 강조하는 거대 담론에 사로잡히거나 무리하여 응하지 않기를 소망한다. 1차 대유행을 겪은 현장 의료진들은 현 방역 체계가 겨우 아슬아슬한 선을 지키고 있다고 입 모아 말한다. 확진자 수가 병상 수를 넘어서는 순간, 그 뒤로 펼쳐질 현실에서는 K-방역의 손길도, 비대면 기술의 혜택도 쉽게 발휘되기 어려울 것이다. --- 맹미선, 「포스트 코로나라는 상상」
‘안정적 삶의 보장’이라는 기본소득론의(그러나 기본소득론만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이념은 언제나 큰 울림을 냈다. 하지만 역사가 기본소득이 실현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먼저 매번 산업 혁명 이후 대중의 삶의 안정성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생산관계와 사회관계 속에서 재구축되었다. 임노동이 보편화되었고, 노동자들이 단결해 임금 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했다. 여기에도 문제는 많았다. 직종이나 고용 형태 간에 격차가 벌어졌고, 실업 문제도 새롭게 대두했다. 하지만 이런 빈틈을 메워 준 건 기본소득이 아니라 국가였다. --- 김공회, 「기본소득, 공상 혹은 이상」
「조커」라는 작품을 둘러싼 논쟁이 가라앉은 만큼, 지금이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쓰기 적당한 때인 것 같다.
먼저 확실히 해 두고 싶은 점이 있다. 나는 「조커」에 대한 여성주의적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조커」는 분명하게 소수자에 대한 문화적 착취를 벌이고 있다. 이는 이를테면 흑인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혹은 여성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여성주의적 분석 틀에 기반해 영화를 진단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여성주의적 문제 제기가 도리어 「조커」라는 영화에 헛된 깊이를 부여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한몫했다. 나는 「조커」에 대한 앞선 논의들에 기반해, 어떻게 이 영화가 ‘깊이 없는 표면’을 드러내고 있는지에 대해 탐구해 보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낡은 질문이 검토될 것이다. 영화는 죽은 것인가, 살아 있는 것인가? --- 이병현, 「「조커」, 억지웃음의 이미지」
환상 세계인 나르니아에도 악이 존재하고 선악이 대결하지만, 이는 더 완전한 선과 궁극의 조화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다. 다른 판타지 어린이문학 작품에서 소인들이 인간 사회를 비판하고, 어린 초인들이 나쁜 어른에 맞서고, 모험과 회귀를 오가는 건 모두 나르니아와 같은 이상 세계를 추구하는 희망의 도정으로 볼 수 있다. 안전, 신뢰, 평등, 존중 등 너무나 당연하고 소중하지만 실은 얼마간 잊거나 포기하고 살아가는 삶의 가치와 방향성을 끊임없이 상기하는 일. 아마도 어른의 문학과 달리 어린이문학이 가장 구분되게 강조하는 지점일 것이다. --- 김유진, 「판타지와 함께 살아남기」
잔혹한 낙관주의는 “실현이 불가능하여 순전히 환상에 불과하거나, 혹은 너무나 가능하여 중독성이 있는” 대상을 향해 작동한다. 로또 당첨의 꿈은 전자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로또는 일상의 위기와 곤란을 단번에 해결해 줄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현현을 약속한다. 천문학적인 당첨 확률은 로또를 더 중독적인 것으로 만드는데, 이는 불가능하기에 오히려 초월적으로 평등하기 때문이다. 개인은 불가능한 환상에 값을 지불함으로써 일상에서는 생소하기 그지없는 ‘온전한 기회의 평등’을 일시적으로 경험한다. 반면 후자는 철저히 실현 가능성에 기대는 환상으로, 교육의 꿈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교육은 기본적으로 낙관에 근거하고 있으며, 교육이 약속하는 미래는 우리 사회가 제공하는 환상 가운데 가장 현실적이다. 그러나 실현 가능하다는 느낌 때문에 교육은 오히려 더 치명적인 결과를 낳곤 한다.
--- 박지원, 「잔혹한 낙관에서 깨어나기」
환상은 ‘실현 불가능한 것을 상상하는 행위’에 국한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현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우리는 환상이라는 개념을 내부에서 경험을 확장하는 일종의 사유로 접근할 수 있다. 경험이란 직접 겪은 사건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나는 환상문학이나 판타지 장르에 등장하는 비현실적인 배경과 일어날 수 없는 사건들이 아니라, 가장 현실적이어서 혹독하고 그래서 비극적인 사건들을 마주함으로써 환상과 현실의 관계를 좀 더 실제적인 층위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현실적 환상’이다.
--- 임보라, 「어두운 사건들을 통과하기」
비판되어야 할 것은 환상이나 가상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다. 혹은 진리의 관점에서 정립된 환상에 대한 환상,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데올로기다. 진리는 절대적으로 그 자체로 존립하고 정당화되며, 오류-환상-허구와 절연된 상태를 의미한다는 믿음이 탈신비화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계몽은 가상과 오류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로부터의 해방이다.
이데올로기의 기만, 시청자와 구독자와 관객을 조종하는 매체와 광고의 기만, 온갖 가짜 뉴스들의 기만을 탄식할 때, 가장 깊은 문제는 세계의 거짓된 재현이 아니라 세계의 진실 혹은 진실로서의 세계 자체라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덜 주목된다. 우리가 현재 진실의 기준에서 거짓과 기만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그것의 생산에 적합한, 그것을 가능케 하는 세계의 진실에 기반한다. --- 윤영광, 「가상과 거짓의 철학」
북한 출신 대학생들은 그들에게 떠안겨진 정체성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탈북민 정체성을 표현하기도 한다. 북한 출신 대학생들은 하나원(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과 정부 기관으로부터 ‘한민족’, ‘먼저 온 통일’로 인식되고, 시민 단체 교육프로그램에서는 ‘남북한 사회 통합의 리더’라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모두 스스로 요구한 적 없는 수식어다. 남한 방송에서 ‘엄친아’로 명명되었던 한 학생은 “본의 아니게 북한이나 탈북자나 북한 주민을 대표”하게 된 자신이 탈북민이라는 소수 집단에 악영향을 미칠까 봐 계속 행동을 검열했고, 그런 일이 부담스러워 방송을 그만뒀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 출신 대학생들이 꼭 “공부를 잘할 필요도, 누군가에게 잘 보일 필요도, 남한이라는 사회에 자신을 맞춰 적응할 필요도 없”이, 여느 남한 출신 청년처럼 각자 자신의 다른 모습 그대로 남한 사회에 존재하는 것이 오히려 “가장 정확한 (먼저 온) 통일”이라고 주장했다.
--- 계은진, 「북한 출신인 게 뭐 어때서?」
단신 기사도 쓸 줄 몰라 쩔쩔맸던 내가 그사이 편집장이 되었고, 《비마이너》에 가장 오래 남음으로서 무언가를 책임지는 사람이 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축적된 역량은 《비마이너》가 지금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것들을 꾸준히 만들어 냈는데, 그것들을 해낼수록 나는 고갈됐다. 한정된 자원으로 무한히 멋진 성과를 내는 것은 불가능했으나, 어떻게든 해내고 싶었고, 그것은 ‘개인을 갈아 넣음으로써’ 가능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쉽지 않은 길을 갈 것입니다. 하지만 가치로 남는다는 것은 인생을 걸어 볼 만한 일입니다.”
야학 홈페이지 고장쌤 인사말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나오는 문장이다. 종종 홈페이지에 들어가 이 부분만 들여다본다. “가치로 남는다는 것은 인생을 걸어 볼 만한 일입니다.” 이 말에 마음이 기울어서, 막막하고 무기력해질 때면 그 말을 지팡이 삼아 버틴다.
--- 강혜민, 「희망의 물리적 토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