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란 건 없고 예술가만 있을 뿐이라는 곰브리치의 통찰은 우리 현실에서 뒤집힌다. 철학자는 없고 철학만 있을 뿐이다. 철학은 위기에 처했던 적이 없다. ‘인문학의 위기’가 철 지난 구호가 된 요즘도, 철학은 사람을 끌어모은다. 독립적인 인생을 살려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려면, 심지어 성공적인 기업 경영, 업무 관리에도 철학이 필수라고 한다. 목적은 달라도 철학은 언제나 머나먼 이국에서 온다. 당연히 ‘위대한’ 철학자도 그곳에 있다. 그래서 철학자가 곁에 없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걸까? … 나는 철학자가 누구인지 찾아나섰다. 낡은 사진 한 장 들고 지워진 기억으로 걸어 들어가는 소설 속 탐정처럼. 바로크 그림 속 철학자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그림으로 철학자를 알 수 있을까? 먼 나라의 오래된 그림이 진실의 단서가 될 수 있을까?
--- 「프롤로그」 중에서
누더기 철학자는 진리에 헌신하는 자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헌신이다. 지금 우리는 순전한 헌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허위 취급한다. 결과를 보상받지 못하는 노력은 무의미하다. 걸인 행색의 철학자는 인간 삶을 이끄는 다른 차원의 동인을 암시한다. 철학자의 누더기는 궁색한 생의 징표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때 아름다움의 척도도 달라질 수 있다. 아름다움은 눈으로 보이는 예술 양식에 국한되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인간 삶을 의미 지우는 가치다. 거지 철학자의 누더기는 언제 봐도 예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성실한 믿음으로 고통과 시련을 인내하는 인간의 아름다움은 부정될 수 없다. 헤겔 말대로,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은 정신에서 태어나고 다시 태어난다.”
--- 「Ⅰ. 누더기 철학자」 중에서
작품 속 철학자는 조롱의 대상이다. 시장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디오게네스를 비웃고 있다. 철학자를 조롱하는 군중은 마치 거대한 육신의 물결 같다. 인간 밑바닥의 쾌락과 향락이 드러난다. 철학자를 둘러싼 인간은 동물과 구분되지 않는다. 버섯에 정신이 팔린 돼지와 술병을 소중하게 꼭 쥔 남자는 별반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넘쳐나는 살을 부대끼며 괴성을 지르고 기분 좋은 소리를 낸다. 그들은 왜 디오게네스를 조롱하고 비웃을까? 매출과 상관없다면, 반응이 과하지 않은가? 디오게네스는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 않았고, 자신을 뽐내지도 않았다. 고작 질문을 하나 했을 뿐이다. ‘정직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 「Ⅱ. 경멸을 삼킨 바다」 중에서
지혜는 경험에서 나온다. 그러나 축적된 경험이 지혜는 아니다. 경험을 반성해야 지혜로워진다. 살아온 시간이 지혜의 척도라면 모든 노인이 지혜로울 것이다. 지혜로운 노년은 모두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세네카는 그저 오래 사는 것과 제대로 사는 것을 구분했다. 이 구분은 언제나 유효하다. 풍랑에 휩쓸린 배가 오랫동안 제자리만 빙빙 돌고 있다. 이 배가 항해를 했다고할 수 있을까? 지혜는 거센 바람을 뚫고 나아가는 항해의 결과다. 칸트 말대로 계몽은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이행이지만, 자연현상처럼 저절로 진행되지 않는다. 노화가 곧 욕망의 쇠락을 뜻하지 않듯, 정신의 성숙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 「Ⅲ. 죽음의 속삭임」 중에서
많은 이에게 행복은 욕망을 마음껏 채울 수 있는 상태다. 욕망을 원료로 굴러가는 인생열차는 끝을 모르고 달린다. 울고 웃는 철학자의 이미지는 망각된 죽음을 불러일으키려 한다. 인생의 덧없음을 잊지 말라고 촉구한다. 죽음의 상기는 행복하고 싶은 마음을 버리라는 뜻일까? 철학자는 일상인의 행복을 부정하는 사람일까? 행복은 실체 없는 환상일 뿐일까? 행복의 바람조차 덧없는 걸까? 죽음, 인생무상을 강조하는 17세기 문화에서 행복은 어떤 의미였을까?
--- 「Ⅳ. 손에 쥔 비눗방울」 중에서
철학사에서 여성 철학자를 찾기는 쉽지 않다. 철학자라 하면 남성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철학은 남성의 학문이라는 생각이 일종의 고정관념처럼 굳어져 있다. 이런 편견에서 보면 철학자를 여성으로 그리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실제로 철학자 초상화는 남성이 독차지하고 있다. 17세기 회화도 다르지 않다. 화가들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기록, 플루타르코스, 호라티우스의 역사서 등을 참고해 그림을 그렸다. 이들 문헌에서 여성 철학자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당연히 여성 철학자 그림도 그려지지 않았다. 여전히 의문이 든다. 화가들은 왜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았을까? 천국, 지옥도 그려내는 화가가 왜 여성 철학자는 그리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릴 수 없었던 걸까? 회화사의 아이러니다. 여성 철학자 이미지는 없어도, 지혜는 여성으로 의인화된다.
--- 「Ⅴ. 마녀의 술잔」 중에서
벗겨진 이마, 검고 긴 수염으로 덮인 얼굴은 영락없는 남자다. 하지만 수염 아래로 여성의 젖가슴이 드러나 있다. 반인반마, 켄타우로스를 보는 듯하다. 화가의 상상으로 그려낸 것이 아니다. 막달레나 벤투라(Magdalena Ventura)라는 실존 인물의 초상이다. … 화가는 여성성과 남성성 모두를 가진 존재로 그녀를 묘사한다. … 막달레나 벤투라는 가장처럼 당당하다. 또렷한 눈빛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반면 실제 가장인 남편은 유약하고 존재감이 없다. 리베라는 당시 성 역할에 대한 규범에 비추어 그녀를 묘사했다. 다만 남성과 여성, 어느 한쪽의 관점으로 그녀를 규정할 수 없을 뿐이다. 그녀는 남성과 여성의 경계에 서 있는 존재가 아니다. 남성의 일과 여성의 일을 모두 할 수 있는 인간이다. 작품 속 막달레나 벤투라는 젠더가 사회문화의 구성물일 뿐이라는 현대의 과감한 주장을 환기시킨다.
--- 「Ⅴ. 마녀의 술잔」 중에서
이 작품은 살바토르 로사의 자화상이다. 여느 화가의 자화상과는 사뭇 다르다. 화면 속 남자에서 화가를 떠올리기 쉽지 않다. 한 손에는 팔레트, 다른 손에는 붓을 든 모습이 화가 자화상의 전형이다. 로사의 자화상은 철학자 이미지에 더 가깝다. 화면에는 철학, 특히 고대 그리스 철학의 상징으로 가득하다. 로사만 자기를 철학자로 그린 것은 아니다. 루카 조르다노, 루벤스, 렘브란트 등 많은 화가가 철학자같은 자화상을 그렸다. 철학자를 주제로 작품 활동을 한 화가들이다. 왜 이들은 철학자를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을 철학자로 그린 걸까?
--- 「Ⅵ. 가면 쓴 침묵」 중에서
거울은 내면을 비추는 눈의 은유다. … 거울에 비친 ‘나’는 외면일 뿐이다. 진정한 자기 자신은 내면에 있는 누군가이다. 어떻게 내면의 자기 자신을 볼 수 있을까? 자기 자신은 반성하는 이의 깊은 곳에 있다. 내면의 깊이는 체험된 시간과 관련된다. 내면의 자기는 겉모습으로 알 수 없고, 특정 속성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반성하는 동안에만 나타나고, 생각하는 자신만 볼 수 있다. 바로크의 철학자 그림은 ‘나’를 그리고 있지만, 어떤 ‘나’인지 보여주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이 독창적인 방식으로 표현된다. 작품 속 철학자는 우리가 망각한 인간성을 집약해놓은 형상이다. 자기 자신은 완결될 수 없다. 항상 발현되지 않은 가능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가능성은 체험된 과거와 기대하는 미래를 연결 지을 때만 확신할 수 있다.
---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