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물결’ 페미니즘 연구자들은 20여 년 전 첫발을 내디딘 이래로 기나긴 여행을 해 왔는데, 이 여정에는 주목할 만한 두 번의 전환이 있었다. 첫 번째는 전통적 학문에서 여성을 지우거나 터무니없게 묘사하던 것들을 기록하고 보여 주는 데서 그 삭제와 묘사를 바로잡는 기반 공사 작업으로 이동한 것이다. 페미니즘 연구자들은 이미 승인된 역사 가운데서 여성 혐오와 근거 없는 믿음을 공들여 찾아내는 한편 우리 자신의 역사와 문헌을 복원해 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여성’은 여성들이 되었다. 다시 말해 ‘영구 불멸의 여성성’이라는 상상이 아니라, 그 상상에다가 근대·백인·중간계급 등과 같은 속성을 결합시켜 변주한 형태가 아니라, 저마다 특정 인종·계급·시대·문화에 걸맞게 구성된 복수의 창조물이 된 것이다. 두 번째는 우리 자신을 복원하는 것에서 그 회복된 관점으로 세계를 비판적으로 따져 보는 것으로의 전환, 즉 기존 담론·규율·제도·실천의 젠더화된 특질에 대한 비평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주변부 여성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는 것에서 그 경험을 만들어 낸 세계에 대한 분석으로 나아가는,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파고들어 가는 이동이었다. 이 덕분에 페미니즘 연구는 이익집단을 변호한다는 오명에서 벗어나, 가장 심오하고 충만한 시민을 상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우리는 영장류 동물학에서 관료제에 이르기까지, 생물학에서 재현에 이르기까지, 성과학에서 도덕론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문의 틈새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론과 인식론에 대해 이야기할 무언가를 조금씩 만들어 가고 있다. 물론 많은 이들이 우리를 다시 게토로 보내 버리고 싶어 하지만 말이다.
---pp.8~10
역사적으로 볼 때, 정치는 인간의 그 어떤 활동보다 특히 남성적 정체성에 기반해 있다. 인간의 노력이 미치는 그 어떤 곳보다 배타적인 남성만의 영역이었고, 다른 사회적 관행보다 훨씬 강렬하게 남성적 자의식을 품고 있었다. 양상은 다양하지만, 정치의 이론과 실천은 모두 끊임없이 이어지는 남성됨이라는 관념 및 그 실천과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이러한 점은 ‘전사단’에서 비롯한 정치의 기원, 정치적 삶을 통한 남성됨의 실현을 이야기한 고대의 믿음, 정치 영웅과 지도자 들의 ‘남자다움’에 대한 근대의 선언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다. 남성됨의 형성과 정치의 형성이 역사적으로 맺는 관계는 정치 기반, 정치 질서, 시민권, 행동, 합리성, 자유, 정의 같은 개념의 형성을 거치면서 등장했으며, 이를 통해 그 기원을 추적할 수 있다. 정치로 상정되는 것, 정치에서 배제되는 것, 정치에 치명적이거나 위협적이거나 부적합하다고 여겨지는 것 들도 이 관계의 영향을 받았다. 이 책이 발가벗겨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최종적으로는 형태의 변화까지 밀어붙이고 싶은 것은 고전 정치 이론에 새겨져 있는 남성됨과 정치의 바로 이런 관계다.
---p.45
나는 이 책에서 과거의 정치 이론가 및 이론을 닮은 무언가를 시도하고 있다. 내 관심은 아리스토텔레스, 마키아벨리, 베버를 단순히 해석하기보다는 남성됨과 정치의 관계와 관련해 우리가 어디에 존재해 왔으며 지금은 어디에 존재하는지에 대한 이론을 구성하는 데 있다. 사실 그 관계가 지금 균열하기 시작했기에, 이 탐사 작업에 예민하게 개입할 수 있었다. 남성됨과 그것의 전통적인 정식화가 주술처럼 만들어 낸 모든 것이 지난 20년 동안 화염에 휩싸였다. 그 헤게모니가 파괴되진 않았지만, 부분적으로 껍질이 벗겨지는 중이다. 그 결과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가 남성됨과 정치의 역사적 정체성 또는 동반 관계를 탐색하기에 알맞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균열 지점에 서서, 지금껏 총체였으며 존재를 가능케 했던 현상의 내부를 조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p.70
아리스토파네스의 말처럼 태초에 네 발과 네 팔이 달린 생명체, 즉 남녀가 한 몸에 있는 진정한 자웅동체가 있었다. 이 생명체는 강하고 활기 넘치고 행복했다. 완전히 자족적이었으며 지구와 다투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들의 다소 지나친 열정이 오만이 되어, 어느 날 하늘의 무게를 재려 하고 신들을 습격했다. 결국 제우스는 많은 미덕에도 불구하고 딱 하나의 악덕을 가진 이들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약화할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래서 이들을 반으로 갈라 상처에 붕대를 감고는 지구에 다시 풀어 주었다. 이 새로운 생명체, 즉 여자와 남자라는 생명체는 처음에는 비참해하며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뛰어다니다가 상대의 목덜미에 자기 팔을 두르고 제발 다시 하나로 합쳐지길 빌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제우스는 이들을 달래기 위해, 이들이 때때로 짧게나마 하나라고 느낄 수 있도록 이들의 육체를 달리 바꿔 주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전체성과 이들이 한때 알던 힘을 돌려주지는 않았다.
수천 년 동안 이 반쪽 생명체는 자신의 조건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전하는 아리스토파네스마저 인간의 위대한 미덕과 남성들의 유대가 사랑의 최고 형상이라면서, 여성의 미덕을 넘어서는 남성의 미덕을 극찬한다. 다른 남성들과 ‘전체성’을 찾는 남성은 ‘대담성, 불굴의 정신, 남성성’을 보여 준다. 이들은 “우리 국가 청년들의 가장 희망적인 모습이다. 이들의 육체가 가장 남성미 넘치는 육체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파네스는 남성미 넘치는 체질이 어떤 비율로 성장하는지, 남성적 연대가 어떻게 완벽하며 제도화되는지 생전에 보지 못했다. 오늘날 이렇게 연대한 남성들이 다시금 하늘의 무게를 재고 신들을 급습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들이 품은 권력에 대한 열망은 한계를 모르고, 이 경기의 판돈은 이제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이 그러할지라도 우리는 제우스에게 이미 반쪽으로 나뉜 생명체를 또다시 나눠 달라고 청할 수 없다. 아리스토파네스처럼 제우스도 오래전에 사멸했다. 그렇다고 전체성이나 자웅동체나 양성구유의 신화를 전망으로 되살릴 수도 없다. 이것들도 당연히 신들의 방식처럼 사라졌다. 인간은 복잡하고 긴장이 가득하며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생명체고, 젠더는 결코 단순하거나 사소한 생물학적 ‘사실’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리라고 바랄 이유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복잡성을 끌어안고 한층 더 정의와 공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삶과 공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무엇보다 인간의 풍부한 가능성과 공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젠더와 정치를 모두 확립할 수 있을 것이다.
---pp.388~3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