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세례명은 아나톨리, 후에 영국식으로 개명해 너새니얼, 줄여서 내트가 되었다. 키는 180센티미터, 얼굴은 늘 깨끗이 면도되어 있다. 숱 많은 머리는 조금씩 희끗해지기 시작한 참이다. 아내의 이름은 프루던스, 유서 깊은 법률 회사에서 런던 사무 변호사들의 파트너로 일한다. 주로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는 법률문제들을 다루는데, 보통 무료 사건 위주다. 체격은 호리호리한 편이다. 프루가 워낙 강단 있는 체형을 좋아한다. 스포츠라면 뭐든 좋아한다. 배드민턴에 더해 조깅과 달리기를 즐기며, 일주일에 한 번은 일반인에게 개방하지 않는 체육관에 나가 운동을 한다. 성격은 모나지 않은 편이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터라 이해심도 어지간하다. 전형적인 영국인의 외모와 태도를 지녔으며, 언제든 유창하고 설득력 있는 토론이 가능하다. 환경에 잘 적응하고 아름다운 여자에게 약한 편이다. 사무직같이 정적인 삶은 천성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게 어디 사나이가 할 일인가. 규율을 싫어하고 고집이 센 편인데, 이는 결점이자 장점이리라. 이상은 지난 25년간의 고용주들이 쓴 비밀 보고서들에서 발췌하여 정리한 내용이다.
--- p.17-18
스테파니는 이탈리아 녀석들이랑 나갔다가 언제 돌아왔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빠와 단둘이 나가는 게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의뭉스러운 과거를 시시콜콜 밝힐 생각은 없다. 그저 내가 진짜 외교관이 아니라 위장 신분으로 일하고 있으며, 베이징에 갔을 때도 기사나 대사 자격이 아니었다는 정도? 어쩌면 스테파니도 더 이상 묻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미 집에 돌아와 있는 데다 그 정도면 크게 거슬리는 문제도 아니지 않은가. 열네 살 생일 때 전화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얘기해 주고 싶다. 아직도 아이가 그 일로 꽁해 있는 것 같으니까. 당시 난 러시아 국경 너머 에스토니아 쪽에 앉아 있었다. 공작원이 통나무 더미 밑에 두텁게 쌓인 눈을 뚫고 무사히 국경을 건너기를 신께 기도하면서.
--- p.49
에드는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하게 시합을 치렀고, 또 패했다. 인 아웃 판정에 반박하지도, 재경기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아틸레티쿠스에서든 어디에서든 항의와 반발이 있기 마련이건만. 게다가 시합이 끝나자 활짝 미소를 짓기까지 했는데, 내게 접근한 이후 그런 미소는 처음이었다. 정말로 시합을 즐겼다는 얘기다. 별 기대가 없어서였을까? 덕분에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정말, 정말 좋은 시합이었습니다, 내트. 최고였어요.”
--- p.75
이 순간을 위해 밤낮을 쉬지 않고 일하느라 거의 제정신이 아닌 데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터라, 우리는 곧장 지하철을 타는 대신 선술집에 들어가 후미진 곳에 자리를 잡고 생선 파이와 레드 와인 한 병을 주문한다. 부르고뉴는 스테파니도 좋아하는 술이다. 생선 요리도 마찬가지고. 우리는 설렁설렁 행사를 복기해 본다. 실제 회의는 기록된 내용보다 훨씬 길고 전문적이었다. 퍼시 프라이스와 밤도둑 에릭의 역할은 중요하다. 예컨대 감시 목표 선정과 모니터링, 목표물의 구두나 의상에 도청 장치를 이식하는 작업, 헬리콥터나 드론의 활용 여부가 그렇다. 잠행 팀의 작업 중에 오슨 일당이 느닷없이 복귀하면 어떻게 대처하지? 해결책. 정복 경관이 등장해 침입자가 있다는 신고를 받았다고 알린 다음, 신사 숙녀 여러분을 경찰차로 모셔 따뜻한 차를 대접한다. 그리고 그사이에 작전을 마무리하자!
--- p.103
나는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다. 전 세계 요원들의 하소연, 무덤까지 가져갈 사연에 일일이 응답하고 있지 않은가. 곡도, 멜로디도 다르지만 결국 같은 노래들. 나 자신이 역겨워 죽겠어요, 피터. 스트레스 때문에 죽고 싶어요, 피터. 조국을 배신했어요, 피터, 그 죄를 어찌 다 감당하겠습니까? 정부가 달아났어요. 아내가 나를 속여요. 당신 같은 조정관이라도 없었으면 손목을 그어버리고 말았을 겁니다.
왜 우리 에이전트 러너들은 매번 이렇게 달려가야 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빚이 있으니까.
--- p.119
브라이턴의 배드민턴 클럽 간사라는 가상의 권한을 활용해 아름다운 해변 도시로 그의 혼합 팀을 초대한다고 운을 뗀 뒤 경기 날짜와 시간을 제안하고 무료 숙식도 약속한다. 공개 음어는 성서보다 오래된 암호로, 발신자와 수신자의 상호 이해를 전제로 한다. 아르카디와 나의 상호 이해는 지상의 암호집을 초월한다. 내용은 모두 반대의 뜻을 지향한다. 따라서 내가 아니라 그가 초대할 수 있는지의 가능성을 타진한 것이다.
--- p.155
“당신의 작전 보고서에 따르면, 과거 배드민턴을 모집 수단으로 활용한 일이 있더군요. 최소 러시아 요원 한 명을 포섭해 라켓을 교환하는 식으로 정보를 교환했어요. 그 일로 포상도 받았고. 맞나요?”
“맞습니다.”
“그럼 이렇게 말해도 ‘비합리적 억측’이 아닐 수 있겠군요. 동일한 수단으로 소속 기관의 비밀 정보를 섀넌에게 제공하기에 최적의 요건을 갖추었다.”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다. 퍼시 프라이스는 언제나처럼 온화한 표정이다. 브래멀도. 라벤더와 매리언의 애견 두 마리도 마찬가지지만 글로리아는 도저히 못 듣겠다는 듯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린 모습이다. 보조의 둘은 긴장한 표정으로 똑바로 앉아 있다. 두 손은 무슨 생물학적 상호작용이라도 이루어진 듯 단단히 맞잡힌 채 무릎 위에 놓여 있다. 기타는 마치 꾸중을 듣는 착한 딸처럼 허리를 똑바로 세운다. 모이라는 창밖을 내다보지만 이곳에 창문이 있을 리 없다.
“다들 이 황당한 얘기에 동의하는 겁니까?” 내가 묻는다.
씁쓸한 분노가 척추를 훑고 올라온다.
--- p.273
“그보다, 자네 친구 섀넌이 했다는 도널드 얘기가 재미있더군. 민주주의의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는데 다 날려버렸다는 얘기 말이야. 그 말이 사실인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사실 트럼프의 핵심은 이거야. 그 인간 조폭 두목이야. 뼛속 깊이. 시민사회를 까부수기 위해 태어났지. 시민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섀넌이란 친구는 그 점을 간과했어. 내 말이 부당하게 들리나?”
누구에게 부당하다는 거지? 트럼프? 아니면 에드?
“블라디미르 푸틴이야 민주주의 훈련을 손톱만큼도 받지 않은 놈이고. 그 점 하나만큼은 인정해야겠지. 그 양반은 스파이로 태어났고, 지금도 스파이야. 거기에 스탈린의 과대망상증까지 장착했고. 매일 아침 서방이 선제공격으로 자신을 날려버리지 않은 것을 신기해한다더군.” 브린은 거침없이 말을 이어가다가 캐슈너트를 우적거리고는 스카치 한 잔으로 넘긴다.
--- p.289
내가 아는 한 에드는 자기 감정을 손톱만큼도 감추지 않는 사람이다. 아무래도 반역에 대한 최초의
도취감이 아직은 남아 있는 듯하다. 조국을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 내에서 영국의 명분을 찾아주기 위한 일이라고 믿는 한 당연한 노릇이다.
우리는 1번 코트로 나간다. 에드가 앞에서 라켓을 흔들며 전의를 불태운다. 서브용 셔틀콕이 에드 쪽으로 떨어진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언젠가 창조주가 설명해야 할 것이다. 에드가 승전 가도를 달리기 시작한 그 검은 금요일 이후, 저놈의 셔틀콕은 매번 에드 몫이 되니 말이다. 기죽지 말자. 물론 오늘 내 컨디션이 최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아침 조깅을 빼먹은 데다 체육관에도 못 갔으니까. 하지만 복잡하게 얽힌 모종의 이유로, 오늘만큼은 기어이 에드를 이겨야 한다.
--- p.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