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때 처음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읽었다. 처음부터 운명적이란 생각이 들 만도 한 것이, 이 작품은 내가 태어난 해에 영국서 첫 출간되었다. 냉전의 최전방인 한반도에, 게다가 (소설의 주 무대인 동독처럼) 전체주의/공포정치 국가였던 남한에 사는 한 소년의 정신에 『추운 나라』처럼 큰 충격을 준 소설은 없었다. 그 후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의 후속작인 『스파이의 유산』을 손에 쥐고 있다. 제목부터 이미 매끈하게 두 편을 연결시킨다. 이것은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의 유산]을 다룬 이야기다. 『유산』은 『추운 나라』의 프리퀄이자 시퀄, 백 스토리이자 표준 해설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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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르카레는 내가 가려운 부분이 어딘지 안다는 것이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계에 살지만 적어도 한 사람 정도는 믿고 싶은 마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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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비밀 정보부의 어떤 면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그중 하나가 바로 공개적인 서신에 사용하는 문구류에 대한 강박증이다. 지나치게 공식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문구류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은밀함을 유지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봉투의 속이 들여다보이면 안 되기 때문에, 줄이 쳐진 것을 쓸 때가 많다. 새하얀 색은 너무 눈에 띄니까 살짝 색이 들어간 편이 좋다. 요염한 색만 아니면 된다. 흐릿한 파란색이나 연한 회색 정도면 괜찮다. 내게 온 편지는 연한 회색이었다.
그다음 문제는 주소를 자판으로 입력할 것인지, 아니면 손으로 쓸 것인지 여부다. 언제나 고려해야 할 것은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점이다. 전직 요원인 나 피터 길럼은 자연과 함께하는 생활에 감사하고 있으며, 프랑스 시골에서 오래 살았다. 전직 요원들 모임에는 얼굴을 비친 적이 없으며, 주변에 다른 중요한 인물은 없다. 연금 전액을 받고 있으므로 괴롭히는 것이 가능하다. 결론: 외국인이 드문 브르타뉴의 외진 마을에서 어느 정도 공식적으로 보이는 회색 봉투에 주소를 자판으로 입력하고 영국 우표를 붙여 편지를 보낸다면 동네 사람들의 의심을 살 우려가 있으므로 주소는 손으로 쓴다.
--- pp.29-30
옛 서커스의 스파이 영토에 차츰 정이 들었던 사람이라면, 다음 날 오후 4시에 내가 택시비를 치르고 충격적일 정도로 눈에 띄는 새 정보부 본부의 콘크리트 통로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느낀 반감을 이해할 것이다. 내가 한창 스파이로 활동하면서 제국(주로 소련 제국이거나, 그 제국에 속한 나라)의 쓸쓸한 전진 기지에서 몹시 지친 모습으로 돌아오던 시절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시절 나는 런던 공항에서 곧장 버스를 타고 오다가 중간에 케임브리지 서커스까지 가는 지하철로 갈아타곤 했다. 본부에서는 생산 팀이 면담을 위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빅토리아 양식의 볼품없는 건물로 통하는 꾀죄죄한 계단 다섯 개를 올라갔다. 우리는 그 건물을 본부, 사무실, 서커스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다. 어쨌든 그곳이 우리의 본거지였다.
(……) 그런데 이 괴물 같은 새 건물은 뭐란 말인가. 템스강 옆에서 [스파이랜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외치는 것 같은 이 건물은.
--- pp.34-35
「소송을 제기한 두 사람이 지금은 하나로 힘을 합쳤습니다. 그리고 정보부가, 특히 당신과 조지 스마일리가 직접 빚어낸 최고급 실패작 때문에 자신들의 부모가 목숨을 잃었다고 확신하고 있죠. 아주 근거 없는 믿음도 아닙니다. 두 사람은 모든 정보의 공개, 징벌적 손해 배상, 책임자의 이름을 포함한 공개 사과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당신 이름도 있어요. 앨릭 리머스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네. 그런데 스마일리는 어디 있습니까? 그는 어디 가고 왜 내가 여기에 불려 온 겁니까?」
--- pp.72-73
내 언성이 높아지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어쩔 수가 없었다.
「앨릭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내가 어떻게 압니까? 앨릭은 현장 요원이었어요. 현장 요원은 어중간한 생각은 안 합니다. 냉전이 벌어지고 있고, 임무가 떨어졌다면, 그냥 임무를 수행할 뿐입니다!」
이건 앨릭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니면 내 이야기?
--- p.397
「모두 제정신이 아냐. 당신들 스파이는 전부 그래. 당신들은 아무것도 아니야. 멍청한 게임을 하는 멍청이들. 자기가 존나 우주에서 제일 현명한 거물인 줄 알고. 당신들은 아무것도 아냐, 알아? 당신들이 어둠 속에서 사는 건, 망할 햇빛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야.」
--- p.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