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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의 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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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10월 07일
쪽수, 무게, 크기 122쪽 | 142g | 125*200*7mm
ISBN13 9791191262643
ISBN10 1191262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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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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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든 여편이든 편 없이 저물다 보니

난 그저 힘없는 詩편이나 들고 싶데

실없이 맥이 빠질 때 기대어 좀 울어 보게

한편 같던 시마을도 편이 넘치는 이즘은

바람 뒤나 따르다 혼자 우는 풍경처럼

폐사지 적시러 다니는 그늘편에 들었네만

편이 딱히 없는 것도 고금孤衾의 인동이라

벌건 밤 바쳐 봐야 내쳐지기 일쑤지만

아직은 더 사무치려네 애면글면 詩편에나
--- 「詩편」 중에서


바닥을 핥고 굴러 간신히 잡은 구석지란

떨림을 흡반 삼은 먼지들의 싸한 보루

숨조차 숨어서 쉬어야 안 헐리는 쪽방처럼

볕들 날이 멀수록 안 빨리는 먼지 뭉치

오늘의 수행인 양 밤을 펄썩 일어 본다

얼마나 오오래 떨어야 별 이름을 얻을까만
--- 「한소식」 중에서


어린순은 어쩌면 다
나무들의 혼이겠지만

홑을 아는 잎이라면
혼도 아는 잎이려니

홑과 혼
반 끗 사이가

섬도 같고
별도 같고
--- 「홑 혼」 중에서


청이 딱히 없어도 맨발로 내닫는 건

바람과 손잡은 파도의 오랜 비밀

푸르른 등을 미는데 흰 속곳 춤이라니!

더러는 하품이고 거품뿐인 일과라도

바위야 부서져라 껴안고 굴러 보듯

필생의 운필을 찾아 눈썹이 세었다고

파도의 투신으로 해안선이 완성되듯

모래를 짓씹으며 달리리니 라라라

지면서 매양 칠하는 노을의 화법처럼
--- 「파도의 일과」 중에서


머흔 시절 먹피 같은 슬픔아 게 섰거라

꽃이 아니면 바람을 어찌 견뎠으랴

봄마다
새 눈물 지어

지피나니
혼의 혼을
--- 「위미 동백」 중에서


외계로 외출하듯 코와 입을 가리고도
빈틈없이 눌러 담은 얼굴을 점검 받는
지상의 모노드라마들이
수시 재생 중이다

멍때리다 멍멍 깨는 섬망의 와중에도
말수를 줄여 가며 거리를 늘이지만
마지막 막을 내리듯 만년빙 녹는 소리

안으로만 굽던 팔로 너무 마구 버려 왔나
순간순간 안전 안내 얼음땡 문자 속에
지구는 리셋 중이다
우리 또한 리콜 중
--- 「지구는 리셋 중」 중에서


서봉瑞峰
내 본적지는

소슬한
그늘의 권속

호을로
피리 불던

불치의
천식 같은

광교산
응달 따라지

서리 묻은
달빛 같은
--- 「그늘의 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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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자 시인의 시는 색깔로 말한다면 냇가에 바래 넌 옥양목처럼 희고 깨끗한 느낌을 준다.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말처럼 바탕이 순하고 담백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사물에 대한 섣부른 단정을 유보하는 편편이 품은 짙은 여운은, 그것이 끝난 곳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걸림이 없다. 이는 정통 시조의 격을 존중하면서도 자유자재한 운율로 자신만의 시 세계를 이루어 낸 결과일 것이다.
그가 사용하는 시어의 풍성한 볼륨과 유연함은 독자를 즐겁게 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되살려 쓰는 고체의 예스러움과 정답고 살가운 의태어 등은 그의 시가 내장한 생동감이자 멋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무엇보다 음악성을 중요시한다. 그리고 능란한 행과 연의 변주는 마치 자유시를 방불케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운율과 절제는 결코 시조의 격에서 멀리 가는 일이 없다. 말하자면 예스러운 시조의 품격 속에 자유시의 리얼리티와 생동감을 담아내는 비상한 경지를 보여 준다고 하겠다.
한편 그것이 삶에 대한 성찰이든 사물에 대한 관조이든 시적 대상에 대하여 시인은 여유와 온정의 포용적 세계를 보여 주고 있는데 이는 시인의 세계에 대한 이해이자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시적 우회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고도의 세련된 시적 기교를 가졌음에도 그 흔적이 드러나지 않는 자연스러움이야말로 그의 시를 확장하는 힘이자 성취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상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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